1~3절을 보겠습니다.
1 사람들이 세워 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 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시고, 또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은,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인사말에서부터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반대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비난에 대해, 자신의 사도권은 어떤 권위 있는 지도자를 통해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이 본문에서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한 교회를 지칭하지 않고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갈라디아는 고린도나 에베소처럼 특정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호남지역이나 영남지역처럼 여러 도시를 품은 넓은 지역의 이름입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통해 개척했던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 전체를 대상으로 편지를 쓴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여기서 대속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바울의 서신에서는 유일하게 갈라디아서의 이 본문에서만 딱 한 번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2장 6절에도 대속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디모데서는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 바울위서, 그러니까 바울의 제자인 바울학파 사람이 쓴 글이라는데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도 대속이라는 단어는 5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한 번, 마가복음에 한 번, 그리고 갈라디아서와 디모데전서, 베드로전서에 한 번씩 나오는 게 전부입니다.
그 중요한 기독교의 정통교리인 대속이라는 단어가 신약성서에 이렇게 적게 등장한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저자 가운데 대속사상에 동의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마가복음 10장 45절과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나오는데, 두 문장이 완전히 똑같습니다. 마태가 마가의 원본을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겠습니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니까 그대로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된 본문 중에서 정말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절반 이상은 수십 년 동안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었거나, 복음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대속사상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고대인의 인식이 성서에 반영된 것일 뿐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이 갈라디아서 본문도 사본에 따라서 이 대속이라는 단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같은 본문,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대속이라는 단어가 이 공동번역의 본문에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본문을 개역개정본으로 보겠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개역개정본에는 ‘대속하기’라는 글자가 들어있지만 작은 글씨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없는 사본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같은 본문을 개역개정본으로 개정하기 이전에 개신교회가 사용했던 개역한글본으로 보겠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개역한글본에도 대속이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속사상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고대인의 인식이 성서에 반영된 것일 뿐 결코 기독교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권에서 대속사상을 아직도 진리라고 믿는 곳은 보수정통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계열의 교회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개신교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후진국인 미국에는 아직도 40~50% 정도 남아있고, 한국에는 미국 근본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른바 ‘보수정통’이라는 교회들이 아직도 전체 교회의 70~80% 이상을 차지하기에 대속사상이 마치 보편적인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6~8절을 보겠습니다.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너무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이 금지하는 음식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바울 자신이 사도가 된 내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건 그로부터 삼 년 뒤에나 이루어졌는데, 그때도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도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사도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해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