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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글/좋은글/참고글 스크랩 업이 달리 익을 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
milkyway 추천 0 조회 43 16.02.06 23: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업이 달리 익을 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

 

 

 

 

복이 있는 사람

 

세상을 수월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하는 일 마다 술술 잘 풀려 나가는 타입이다. 어떤 일을 하면 누군가 도와 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누군가 결정적 도움을 준다. 주변의 지인이 도와 주거나 생각지도 않은 귀인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준다.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하여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 취업 때가 되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도 한다. 사업을 하면 주변에 사람이 몰려 들고 물적 심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원활하게 흘러 갈 때 한평생 수월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제복 타고 났다.”든가 제복 찾아 먹는다.”라든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세상을 힘겹게 살아 가는 사람이 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열등하거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 이 세상의 삶은 고단하다. 이럴 경우 흔히 하는 말이 박복하다.” “복쪼가리도 없다.”라는 등의 말을 한다.

 

왜 차별이 생기는가?

 

같은 세상이라 하지만 어떤 사람은 천상과 같은 삶을 살고, 또 어떤 사람은 고통스럽게 지옥처럼 한평생 살아 간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부처님이 제따숲 아나타삔디까승원에 계실 때 어떤 바라문 청년이 물었다.

 

바라문청년은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왜 사람마다 차별이 생기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목숨이 짧기도 하고 목숨이 길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질병이 많기도 하고 질병이 없기도 하냐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권세, 빈궁, 부자, 비천, 우둔함, 현명함 등의 차이가 어떻게 발생되었느지 묻는 것이다. 심지어 용모가 추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차이가 어떻게 연유 되었는지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답하신다.

 

 

Kammasakk? m??ava, satt? kammad?y?d?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nappa??tat?y?ti.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C??akammavibha?ga sutta-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세상의 차별에 대하여 업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라 하였을 때 이는 인간만을 예로 든 것이다. 업의 차별에 따르면 인간 뿐만 아니라 축생이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인간만을 대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귀하고 천한 차별이 생긴 것에 대하여 업(kamma)으로 보았다.

 

왜 비천하게 태어났는가?

 

빠알리어 깜마는 행위(action)를 뜻한다. 한자어로 업()이라 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이다. 그런 행위는 짓고 나면 사라진다.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위가 무르익으면 행위의 과보, 즉 업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귀하거나 천한 차별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지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열등한 자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남의 도움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 가기 힘든 존재들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업이 차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차별하다라는 빠알리어가 ‘vibhajati’이다. 영어로 ‘divides; dissects; classifies’의 뜻이다. 이전 행위에 따라 현재 차별 받고 있는 것이다. 고귀하게 태어난 자나 비천하게 태어난 자나 모두 이전 행위에 대한 과보로 차별이 생겨났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냉혹한 사실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비천하게 태어난자는 이전에 어떤 행위를 하였을까?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없습니다.

 

2)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화를 잘 내고 우울해서, 사소한 말에도 화내고 성내고 노하여 저항하고, 분노, 미움, 불만을 나타냅니다.

 

3)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질투가 심하여 다른 사람이 이득을 얻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공경 받고, 예경 받고 공양 받는 것에 질시하고 악의를 품고 질투합니다.

 

4)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수행자나 성직자에게 음식, , 수레, 꽃다발, 향료, 크림, 깔개, , 등불을 보시하지 않습니다.

 

5)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수행자나 성직자를 찾아서 ‘존자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악은 어떠한 것입니까? 죄악이 아닌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섬겨야 할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섬겨서는 안 될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내가 행하여 오랫동안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내가 행하여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이와 같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C??akammavibha?ga sutta-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에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말하였다. 여기서 핵심단어는 살생, 분노, 질투, 인색, 사견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오계를 어기고 탐, , 치로 사는 자는 비천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커녕 악처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매우 낮은 지위가 될 것이라 하였다.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따르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 등불을 얻지 못한다.” (M129) 라 하였다. 청정도론에서는 아비담마와 관련하여  유익한 과보로 나타난 원인을 갖지 않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41)를 통해 인간세상에서 선천적으로 눈먼 자, 선천적으로 귀먹은 자, 선천적으로 미친 자, 중성 등에 재생연결이 있다.” (Vism17. 133) 라고 설명되어 있다.

 

쭐라(C??a)와 마하(Mah?)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에 대한 차별을 인정하였다. 과거의 지은 행위가 익어서 과보를 받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간적 올바른 견해라 한다. 세간에서는 냉혹한 업의 법칙에 대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업의 법칙에 대하여 부정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업의 법칙에 따른 운명론 또는 숙명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업에 대하여 두 개로 나누어 설하였다.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C??akammavibha?ga sutta, M135)’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Mah?kammavibha?ga sutta, M136)’이 그것이다.

 

쭐라깜마위방가숫따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업 분석의 짧은 경이라 이름 하였다. 또 마하깜마위방가숫따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이라 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업 분석의 긴 경이라 하였다. 차이는 작음과 짧음, 그리고 큼과 김이다.

 

왜 이렇게 차이 나게 이름 붙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해제를 보면 경의 길이에 따라 붙였다고 하였다. 또한 쭐라와 마하에 대하여 작은 또는 큰 이라고 번역하면 자칫하면 덜 중요한 것과 아주 중요한 것으로 오해할 염려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에서는 업 분석의 짧은 경업 분석의 긴 경이라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서 경의 제목에 쭐라와 마하에 대하여 짧고 긴 것으로 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쭐라와 마하라는 말은 경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보면 자칫 운명론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과거 지은 행위에 따라 귀하거나 천한 차별이 생겨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함에도 과거에 지은 행위로 인하여 현재 차별 받는다면 수긍하기 힘들다. 만일 힘든 일이 발생하거나 불가항력적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모두 업의 탓으로 돌려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마치 유일신교에서 신의 뜻으로 돌려 버리는 것과 같다. 열등하거나 장애로 태어난 자에 대하여 신의 뜻 또는 신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것과 같다.

 

마하깜마위방가숫따(Mah?kammavibha?ga sutt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이라 하였다. 여기서 왜 위대한의 의미를 가진 마하(mah?)라 하였을까? 이는 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이 운명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의 초반부에서는 3년차 수행승과 외도와의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 이제 3년차 밖에 되지 않는 수행승이 외도의 질문에 잘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는 업의 법칙을 잘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유행자 뽀딸리뿟따의 질문에 대하여 분석한 뒤에 대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싸밋디가 일방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M136) 라며 질책 하였다.

 

사밋디는 외도에게  “벗이여 뽀딸리뿟따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적인 행위를 하고 나면 괴로움을 느낍니다. (M136)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는 찬성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작 3년차 수행승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부처님이 들었다. 이에 부처님은 외도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세존]

처음부터 유행자 뽀딸리뿟따는 세 가지 느낌에 관하여 물었다. 아난다여, 어리석은 자인 싸밋디는 유행자 뽀딸리뿟따가 질문한 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대답했어야 했다.

 

‘벗이여 뽀딸리뿟따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결과가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의도적인 행위를 하면, 그는 즐거움을 느낀다. 벗이여 뽀딸리뿟따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결과가 괴로움으로 느껴지는 의도적인 행위를 하면, 그는 괴로움을 느낀다. 벗이여 뽀딸리뿟따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결과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 의도적인 행위를 하면,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느낀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대답하면 어리석은 자인 싸밋디는 유행자 뽀딸리뿟따가 질문한 것에 대하여 올바로 대답했을 것이다.

 

아난다여, 어리석고 생각 없는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떻게 여래가 업에 대한 큰분석을 하는 것에 관하여 알 수 있을 것인가?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가 업에 대한 큰 분석을 설할 때에 잘 들어야 한다.

 

(Mah?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신구의 삼행을 하면 의도에 따라 세 가지 느낌, 즉 즐겁거나 괴롭거나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런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알어차리지 못하면 업이 된다.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하여 업으로서 존재가 발생된다고 하였다. 이는 행위에 따른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적 행위를 하면 반드시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과보가 즉각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시차를 두고 일어나기도 한다.

 

시차를 두고 업이 익는 것을 업이숙(業異熟 : vip?ka)’이라 한다. 업이 달리 익어 과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가 업에 대하여 큰 분석을 설할 때에 잘 들어야 한다. (Sace tumhe ?nanda, su?eyy?tha tath?gatassa mah?kammavibha?ga? vibhajantass?ti.)” (M136) 라 하였다.

 

여기서 업에 대한 큰 분석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mah?kammavibha?ga?이다. 이를 다른 말로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 대림스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가 업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분석할 때 잘 들어라.”라고 번역하였다. 대림 스님 역시 ‘mah?kammavibha?ga?에 대하여 업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분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경의 제목 ‘Mah?kammavibha?ga Sutta’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이는 마하를 또는 위대한의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마하에 대하여 단지 긴 길이이라는 뜻으로 업 분석의 긴 경이라 하였다.

 

빅쿠보디와 빅쿠냐나몰리의 MDB에서는 ‘The Greater Exposition of Action’이라고 경의 제목을 달았다. 마하에 대하여 위대한의 의미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위대한 업의 분석(Mah?kammavibha?ga)’이라는 말을 하였을까?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업에 대한 큰 분석을 설할 것이라 하며 잘 새겨 들을 것을 말씀 하셨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과 관련하여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세존]

“아난다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네 종류란 어떠한 것인가?

 

1) 아난다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2) 아난다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3) 아난다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스러운 것을 삼가고, 분노하는 것을 삼가고,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4) 아난다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스러운 것을 삼가고, 분노하는 것을 삼가고,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지옥에 태어난다.

 

(Mah?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6, 전재성님역)

 

 

네 종류의 사람을 보면 첫 번째가 악인악과이고, 세 번째가 선인선과로서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를 보면 악인선과이고, 네 번째가 선인악과로서 혼란을 주고 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잘못 번역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을 보니 부처님이 왜 ‘mah?kammavibha?ga?라 한 것인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업이숙(業異熟 : vip?ka)’에 대한 것이다.

 

업이숙이란 무엇일까?

 

업이숙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시차를 두고 과보로 나타났을 때 네 가지로 설명한다.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효력을 상실한 업,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1) 금생에 받는 업(di??hadhammavedan?ya kamma)

 

 ‘금생에 받는 업’이라는 말은 ‘di??hadhammavedan?ya kamma’의 번역어이다. 여기서 di??hadhamma는 ‘di??ha+dhamma’로 설명된다. 빠알리어 ‘di??ha’는 과거분사형으로 ‘보여진’의 뜻이고, dhamma’는 ‘현상’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di??hadhamma는 ‘보여진 현상’이라 번역된다. 한자어로는 ‘현법(現法)’이라 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로 설명된다. 우리말로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di??hadhammavedan?ya kamma’에 대하여 ‘금생에 받는 업’이라 하였다. 여기서 금생이라 한 것은 ‘di??hadhamma’에 대한 번역이다.  이는 ‘지금 여기’라는 말 보다 범위를 더 넓게 잡은 것이다. 이렇게 금생이라 한 것은 다음 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금생이라 한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면 ‘di??hadhammavedan?ya’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나타나는 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보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일생에서 언젠가 한번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면 ‘금생에 받는 업’이라 할 수 있다.

 

2)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ya kamma)

 

선한행위이든 악한행위이든 사는 동안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가 나중에 꼬리를 잡혀 처벌 받게 되었을 때 현생에서 과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현생에서 받지 않고 넘어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ya kamma)’라 한다.

 

누군가 살인을 하여 완전범죄를 저질렀다. 발각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을 지라도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그럴 경우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임종 순간에 범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끔찍한 표상이 떠 올랐을 때, 그 표상에 대한 재생연결식으로 악처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럴 경우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ya kamma)’이 될 것이다.

 

3)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apar?pariyavedan?ya kamma)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apar?pariya-vedan?ya kamma)이 있다. 세 번째 생부터 받는 업이라 설명할 수 있다. 금생과 다음 생을 용케 비켜 갔지만 세 번째 생부터 조건을 만나면 성숙되어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업은 윤회가 계속 되는 한 결코 그 효력이 상실되지 않는다.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업의 과보로부터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 없다.

 

4)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마지막으로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이 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 따르면 “업이 있었지만 그 과보를 가져올 기간을 넘겨버린 업”이라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지은 업에 대한 효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왜 그럴까? 행위를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는 ‘업의 법칙(Kamma-niyama)’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효력을 상실한 업은 누구에게 해당될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아라한의 경우에 마지막 임종시에 과거에서 지은 모든 업은 이 효력이 없는 업이 되어 버린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효력을 상실한 업은 아라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악행을 하면서도 선처에 가는 사람

 

업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을 소개 하고 있다. 그 중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업이숙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점이 업의 불가사의한 점이다. 악인이 천상에 나기도 하고 선인이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악인이 잘 살고 선인이 못사는 경우도 해당된다. 먼저 두 번째 항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아난다여,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더라도,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전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나중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죽을 때에 올바른 견해를 갖거나 이룬 결과일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더라도,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Mah?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6, 전재성님역)

 

 

오계를 어기고 악하고 불건전 한 행위를 한자가 천상에 날 수도 있는 케이스이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 예로 들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나중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죽을 때에 올바른 견해를 갖거나 이룬 결과일 것이라 하였다. 이런 이유로 천상에 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이 세상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가 현세 또는 다음생, 혹은 후세에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선행이든 악행이든 공통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라 하였다.

 

선행을 하지만 악처에 가는 사람

 

업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을을 보면 선행을 하였음에도 악처로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존]

아난다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스러운 것을 삼가고, 분노하는 것을 삼가고, 올바른 견해를 갖더라도,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전의 악한 행위로 인해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나중의 악한 행위로 인해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죽을 때에 잘못된 견해를 갖거나 이룬 결과일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스러운 것을 삼가고, 분노하는 것을 삼가고, 올바른 견해를 갖더라도,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Mah?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6, 전재성님역)

 

 

한평생 선하게 산자가 있다. 당연히 선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업이 달리 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라 하였다.

 

불가사의한 업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은 숙명론이 아니다. 주어진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말씀 하신 것이다. 지금 여기, 현세에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함에 따라 달려 있다.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 업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Iti kho ?nanda, atthi kamma? abhabba? abhabb?bh?sa?, atthi kamma? abhabba? bhabb?bh?sa?. Atthi kamma? bhabba?ceva bhabb?bh?sa?ca, atthi kamma? bhabba? abhabb?bh?santi.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 불가능한 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불가능한 업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가능한 업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능한 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Mah?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업에 대한 법칙을 보면 불가사의하다. 이는 불가능한 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등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살생을 해서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 대하여 그의 행위는 불건전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지옥에 태어나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가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하였다. 또 살생을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난 사람에 대하여 그의 행위도 불건전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가 불가능하지만 하늘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교도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것을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나는 것의 원인으로 여긴다.” (Pps.V.20)라고 설명하였다.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Mah?kammavibha?ga)

 

부처님이 말씀 하신 네 종류의 사람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왜 그런 현상이 발생되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는 행위가 서로 다르게 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통적으로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tassa di??heva dhamme vip?ka? pa?isa?vedeti, upapajje v?, apare v?, pariy?ye.)”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먼 미래에 과보를 반드시 가져 올 것이라는 말이다. 업에 대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과보는 이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받게 될 과보 역시 는 지금 여기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의 결과에 따를 것이다. 비록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익어서 과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항상 착하고 건전하게 살아야 함을 말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업을 피할 수는 없지만 지금 부터라도 선업을 짓는다면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Mah?kammavibha?ga)’이라 하였을 것이다.

 

 

 

2016-02-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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