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부공씨(曲阜孔氏)
곡부공씨의 공소(孔紹)는 중국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공씨의 선조는 문선공 공자이다. 중국에서는 공자를 시조로 한다.
공소는 원나라 때 공민왕비 노국공주를 배종(陪從), 8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본관 곡부는 중국의 지명이다.
시조의 아들 공여는 고려 때 평장사 등을 지냈다. 그는 공부(호…어촌.漁村). 공은(호…고산.孤山)의 두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어촌공파와 고산공파로 갈라진다.
큰아들 공부는 우왕 2년 문과에 급제, 이태조의 사은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16년(1416년)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천추사(千秋使)로 다시 갔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최초의 순직 외교 사절이 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정몽주. 이색 등과 깊이 사귀었으며 시문에 뛰어나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
둘째인 공은은 우왕 6년 문과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형과는 달리 이성계의 쿠데타를 불의로 규정하고 새 왕조 참여를 뿌리쳤다. 전남 여천군 삼일읍 낙포리(落浦里)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는다. 그가 운명할 때 기러기 두 마리가 그의 죽음을 애통하듯 3일간 슬피울며 주위를 날아다니다 바닷가에 떨어져 죽는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낙포리다.
중종 때의 강직한 문신이었던 공서린도 곡부공씨 인물이다. 그는 중종 2년 문과에 장원급제, 승지가 된다. 일찍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때 조광조와 가까이 지냈던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함께 투옥된다. 그 후 누차 조정의 권신들을 공격하는 소(疏)를 올리고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하다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2000년 현재 73,093명이다. 주요파는 ▲어촌공파 ▲고산공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