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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주석
갈릴리인 학살(누가복음 13:1-5)
Ⅰ. 최근에 일어났던 갈릴리인 몇 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그리스도 귀에 들렸다. "빌라도는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1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이것은 참으로 슬픈 소식이었다. 이 사실은 이곳에 짤막하게 언급되었을 뿐 당시의 어떤 역사 기록에도 이 사실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을 빌라도가 살해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는 하다. 사마리아인들은 당파를 만든 어느 지도자의 지휘를 따라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이 있는 게르심산으로 떠들썩하게 올라갔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갈릴리인들의 학살과 같은 범주의 이야기로 볼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갈릴리인들을 "갈릴리의 유다"라고도 불리웠던(행 5:37) 유다 골로니다(Jadas Gaulonita)의 당에 속한 자들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는 시이저가 집권할 때 파직당해서 시이저에게 세금내는 것을 거부하였던 인물이다. 혹은 단지 갈릴리인이었다는 이유로 해서 빌라도는 그 당에 속한 자들로 보고 무자비하게 죽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반란자와 관계 있는 자들을 그의 힘으로는 색출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구역이었으므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23장 12절에 볼 수 있는 빌라도와 헤롯 사이의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살해된 갈릴리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기록이 없고 다만 "어떤"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빌라도는 특히 몇몇 갈릴리인들에게 증오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그래서 요세푸스가 이 사실을 간과해 버린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보고된 내용을 보면 빌라도는 신전 마당에서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것이 된다. 그들은 빌라도의 학살을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그것이 두려워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율법은 각자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이 각자 가지고 온 제물을 죽일 때(이것은 제사장의 직무로 허락된 일이었다. 제사는 피를 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들이 전혀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빌라도의 관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제물의 피와 제사지낼 자들의 피를 한 데 섞은 것으로 본다. 성전이나 제사의 성스런 작업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간을 존중하지도 않는" 불의한 재판관의 흉악한 범죄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성례가 베풀어지고 안식처가 되었던 제단이 이제 분노와 죄악이 깃든 위험과 살육 의 처소로 변하였다.
2. 하필이면 왜 "이 시각에" 그 얘기가 우리 주 예수님께 보고 되었을까.
(1)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전에 이와 같은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며 그들이 애통해 하는 사건이었으므로 그 역시 이 얘기를 듣고 애통해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갈릴리는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슬픈 섭리 사건도 우리는 신중히 여겨야 하며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줌으로써 그들이 우리와 함께 느낀 바 되어 그로 인하여 좀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또는 그리스도께서 앞서 하신 말씀, 즉 우리가 관속에서 넘겨져 (즉 사형당하여) 감옥에 던지움을 당하여 후회해도 늦을 그 시각이 닥치기 전에 미리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의 증거로써 이 사건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주님 정말 그렇습니다. 관속에서 넘겨져 전혀 예기치 못한 죽임을 당한 산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두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뿐아니라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목격함으로 우리 자신이 힘을 얻게 됨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3) 혹은 그 자신이 갈릴인이고 예언자이며 또한 고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임을 아는 고로 그를 충동시켜 이 갈릴리인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헤롯에게 할 것을 목적하였을지도 모른다. 행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것은 전혀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 "빌라도의 손에 넘겨져서" 그의 피를 흘려 그 피가 저희의 제물에 섞이게 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저희의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4) 혹은 이 얘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시는 길을 막아 보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빌라도가 그를 보고 앞서 어떤 갈릴리인들에게 했던 식으로 그에게도 화를 내어 종교란 미명하에 반역을 꾸미는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라고 낙인을 찍어 그를 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약간 누구러진 빌라도가 다시 진노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가는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그리스도의 대답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 사실을 그리스도에게 보고할 때에 마음속엔 못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같다. 즉 그들을 죽인 빌라도도 불의한 자이지만 그들도 남모르는 죄를 지은 자들임엔 틀림없다고 보았다.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빌라도가 그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이도록 버려 두셨겠는가. 이것은 대단히 불쾌한 말이었다. 그들이 제물로 죽임을 당했고 그들이 섬기는 것으로 인해 살해를 당했는데도 그들을 순교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행악자라고 낙인찍어 버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은 당이나 학파에 속하지 않았고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일 것이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광스런 본을 본인 그들의 운명을 "그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당연한 심판"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들에게 내릴 것을 모르고 있다.
Ⅱ. 보고를 들으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
1. 그는 이와 비슷한 다른 사건을 인용하셨다. 그 사건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예기치 못한 참사를 당한 것이었다. "실로암 망대"가 넘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 사고로 열 여덟 명의 사람이 그 밑에 깔려 죽고 말았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 망대는 벳새다 샘 근처에 있는 "실로암 샘"과 붙어 있는 것으로 망대의 "입구"는 "샘" 옆에 있었으며 그곳엔 "병약한 무리"들이 앉아서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5:3) 그때 깔려 죽은 자들이 이들이었거나 혹은 성전 예배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씻을 샘물을 푸러 온 자들이었다. 성전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깔려 죽은 자들이 누구였든 간에 이 사건 역시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안타까운 얘기는 종종 듣게 된다. 왜냐하면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임하면 거기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전 9:12).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때로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된다.
2. 그리스도는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악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또한 이것을 기화로 고통받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 큰죄를 지었다고 하여 질책하지 말 것을 주의하셨다. "너희는 제사 지내는 중에 죽임을 당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2, 3절)." 아마 그리스도에게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며 이처럼 갈릴리 사람들을 모욕할 자료만 있다면 즐겨하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의도를 묵살할 만한 얘기, 즉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한 얘기로 응수 하신지도 모르는 것이다. 얼마만한 정도로 우리가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 너희 생각엔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이 망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죽임을 당했다고 유독 그들만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었다고 여겨지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으로 그 사람의 죄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 법익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든 무익한 것이든 그 법칙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에 단련되는 금과 같이 시련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 없어지는 찌꺼기나 쓰레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이 욥을 꾸짖듯 남보다 특히 고통받는 자들을 책망하여 슬픔을 더하게 만드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자의 세대"를 저주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시 73:14).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입장이라면 우리 역시 심판 받을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또한 "미래의 것에 대해선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알지 못하니"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모두에게 같은 것으로 오기 때문이다(전 9:1, 2). 그리고 "박해받는 자들," 제단에 거하는 레위인들이나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위로 받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 무엇보다 갈릴리인들은 "악하디 악한 죄인들"이고 반면에 "박해하는 자들,"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 무엇보다 빌라도 같은 인물들을 선하디 선한 성인(聖人)으로 간주하기 쉽다. 남을 책망할 때엔 그대로 자신이 책망을 받는다는 입장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3. 이 이야기를 계기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5절)."
(1) 이 말씀은 우리도 우리의 죄의 대가대로 벌을 받았더라면 그들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거룩한 사업을 이루지 못한 죄로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에 의해 우리의 피가 제물에 섞여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도 "죄인"일뿐 아니라 그들보다 나을 것 없는 큰 죄인으로서 그들이 고난받은 것 못지 않게 회개해야 할 큰 죄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됨으로써 남을 책망하는 것을 삼가게 된다.
(2) 따라서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하며 그 동안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더 이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큰소리로 우리를 회개하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막중한 책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가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회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3) 이 회개야말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며 가장 확실한 길이다. "너희가 이젠 처참한 지경에 이르지 않으리니 아무도 너를 심판치 못하리라."
(4) 우리가 회개치 않으면 전에 죽은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망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떤 주석가는 "이와 같이"란 말을 중시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유대 백성, 특히 예루살렘에 임할 멸망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유월절에 침입한 로마인들에게 멸망당했으며 갈릴리 사람들처럼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과 섞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처럼 예루살렘 혹은 다른 도시에 있던 유대인들은 무너져 내리는 성벽과 건물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너무 과장된 것이다. 어쨌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망한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요구하신다. 이처럼 그는 우리 앞에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을 제시하시며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하신다.
(5) 남을 심판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무자비했던 자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받게 될 멸망의 벌은 어떤 것보다 준엄할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누가복음 13:6-9)
이 비유는 앞서 하신 말씀,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듯 너희도 거듭나지 못하면 멸망 받으리라"는 말씀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들려졌다.
Ⅰ. 이 비유는 우선 유대 민족과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의 곁에 있게 하셨으며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사랑하셔서 그를 알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들로부터 이에 합당한 의무와 복종으로 보답을 기다리셨다. 이것이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열매"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들은 자기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의 선택됨에 충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선 당연히 그들을 포기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끊고 그들의 특권을 압수하시며 그들을 돌보며 축복하시는 일을 거두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런 찰나 그리스도께서 중재로 나서, 옛날 모세가 한 것처럼 그들에게 더 큰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시어 은혜를 베푸셨다. 그들 가운데 그의 사도들을 보내어 회개하도록 권고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려고 다시 얼마 동안 두고 보시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회개"하고 열매를 맺게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참으로 다행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유대 민족은 계속 회개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지속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만이 남았을 뿐이다.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예고한 대로(마 3:10) 그들은 약 40년 후 멸망하여 불 속에 던지어지고 말았다. 이 비유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보충하는 것이다.
Ⅱ.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하여 보다 중요한 교훈을 하시려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은혜의 덕을 누리며 눈에 보이는 교회의 특권을 소유한 자들을 깨우쳐 저들로 평온한 마음과 성실한 생활로 그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이끌기 위하신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요구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이 무화과 나무가 얻은 유익. 그 무화과 나무는 포도원, 보다 비옥한 땅에 심겨졌다. 그리고 길가에서 자라는 다른 무화과나무(마 21:19)와는 달리 포도원(포도 나무를 위한 땅)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는 옮겨 심고 가구는데 보다 큰 주의가 깃들여졌을 것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한 사람"의 소유로써 그는 그 나무를 가꾸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의 교회도 보통 다른 것과 비교되는 "그의 포도밭"임을 유의하자(사 5:1, 2).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인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안에서 자리와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특권이며 행복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그는 "다른 민족도 이처럼 사랑하시지" 않았다.
2. 주인의 기대.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다." 당연히 구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남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왔다. 그가 얼마나 열매를 얻기 원하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으로 오셨다. 열매를 구하고 "자기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오셨다. 하늘의 하나님께선 그의 포도원에 심겨진 자들로부터 "열매"를 요구하시며 기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복음을 "즐기는" 자들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며 그들이 그 복음에 따라 "사는가" 지켜보고 계신다. 그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은혜를 과연 즐길 자격이 있는가 지켜보고 계신다. "주여, 주여"라고 울부짖는 "잎"들만으로는 안 된다. 시작이 잘되고 장래성이 보이는 "꽃"으로도 안 된다.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이 복음, 빛과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3. 주인의 실망. 그는 "얻지 못한지라." 전혀 한 개도 얻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나 그 받은 특권에 합당한 목적을 이루며 살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겐 실망이며 그 은혜의 영에겐 슬픔일 수밖에 없다.
(1) 주인은 여기서 포도원지기에게 열매 없음을 불평하고 있다. "열매를 구하러 내가 왔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하나도 얻지 못했노라. 포도를 구했으나 들포도 밖에 얻을 것이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세대를 보시고 슬퍼하신다.
(2) 주인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더욱 화를 낸다.
[1]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도 그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많은 열매를 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열매맺기를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그처럼 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삼년을" 매년 "급히"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유대민족에게 적용시킨다면 하나님께선 포로시대 이전에 한 번, 그리고 포로시대 이후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의 복음 전파에 한번 찾아 오셨다는 것이 된다. 혹은 이 삼년이 현재 끝을 맺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공생애(共生涯) 3년에 비교된다. 어쨌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복음을 누리면서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에게 그 화를 참고 계시는가 일러주고 있다. 하나님께선 지금까지 삼년씩 몇 차례나 "열매를 구하러" 우리에게 찾아 오셨다가 나도 얻지 못했고"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열매를 얻지 못하셨던 적이 있었는가!
[2]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못 맺을 뿐 아니라 나무 때문에 손해도 생겼다. 그 나무는 "땅만 버렸다."는 그 나무는 과실을 맺는 나무들이 들어설 자리를 차지해서 그 주위에 있는 나무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었다.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나쁜 행실을 남에게 보임으로 남에게 "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까지 슬프게 하고 용기를 저하시킨다. 행실이 못된 자들에겐 도움이 되고 더욱 용기를 북돋워 준다. 그러므로 그 나무가 높고 길고 덩치가 큰 나무일수록, 그 나무 수명이 길면 길수록 그 땅이 받는 해는 더욱 클 것이다.
4. 그 나무에 내릴 심판. "찍어 버리라." 그는 이 말씀을 "포도원지기"인 그리스도께 분부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심판권을 위임받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목회자들에게도 그 심판권은 위임되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그 바랄 것이 "찍어 버리움"밖에 없음을 명심하자. 열매를 내지 못하는 포도밭은 울타리를 헐고 아무나 들어오도록 버려 두는 것처럼(사 5:5, 6) 포도원에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도 포도원 밖으로 뽑혀 버리울 것이다(요 15:6).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내렸던 심판처럼(사 6:9-10)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특히 영적인 심판이다. 죽음으로 찍히며 지옥의 불 속에 던져진다. 그러는 것이 마땅하니 "왜 땅까지 못쓰게 할 것인가?" 아무 목적도, 없는 것이 포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5. 과원지기의 중재. 그리스도는 크신 중보자이다. 그는 항상 살아 계셔서 중재하신다. 목회자들도 중보자들이다. 포도원을 "돌보는" 그들은 그 포도원을 위하여 "중재"해야만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가 기도한 내용. 그것은 집행 유예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의 기도는 "주인이여, 찍어 버려서는 안됩니다"가 아니라 "주인이여, 지금 찍어버리지 마소서. 주인이여 과원지기를 쫓아내지 마소서, 이슬을 거두지 마소서,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리지 마소서"이다.
[1]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얼마쯤 두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해하기까지 120년이 걸린 것처럼 아직 "회개의 은총"은 입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회개할 여유"를 두는 것이 자비이다.
[2]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즉시 찍혀 버리두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께 달려있는 것이다. 그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찍어 버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주여, 그대로 두소서"하고 간구 하신다. 만물을 지탱시키시는 분은 바로 이 분이시다.
[3] 열매 맺지 못한 나무의 집행을 유예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주인이여, 그들을 그대로 두소서. 얼마 동안 심판을 유예하소서. 잠시 동안만 더 그들에게 여유를 주시고 은혜를 입기까지 기다리소서." 이리하여 우리에게 진노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4] 그러나 자비의 유예 기간도 잠시 동안뿐이다. "주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1년이란 기간은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시험해 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참으셨다. 조금 더 참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해보지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5] 우리를 위하여 남이 기도함으로 이 "유예"는 가능할지 모르나 "용서"만은 남의 기도로 안 된다. 우리 자신의 믿음, 회개와 기도로써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용서란 있을 수 없다.
(2) 만약 그의 말대로 유예해 주신다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약속은 이러하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보편적으로 기도할 때엔 늘 우리의 수고할 바를 첨부하여야 한다. 과원지기의 의도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주인이여, 아무래도 제가 맡은 일에 충실치 못한 듯 하옵니다. 그러나 금년에도 그대로 두어 주신다면 열매가 풍성히 맺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기도할 때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 임무를 행하겠다는 겸허한 약속과 아울러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여 하나님을 능욕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
[2] 특히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해서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때엔 그 은총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그 기도대로 살아야 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는 "자기의" 할 일에 충성을 다 하였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땅 주위를 "파고" 그곳에 "거름을 주었다." 열매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위에 있는 땅을 갈아엎는"식으로 율법의 엄중함을 깨달아 "각성시키고" 나무에 거름을 주듯 싸매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복음의 약속된 바를 들려 줌으로 힘을 복 돋워 주워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시도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준비이며 서로 부족함을 보충해 준다.
(3) 유예의 조건.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지요. 일 년만 더 해보도록 하지요.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9절) 열매맺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니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 열매를 맺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대 속에 주인은 또다시 참게 되고 과원지기는 또다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며 다행히도 기대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주인이나 과원지기나 모두 그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어니와"란 단어는 원본엔 없다. 그러나 그 표현은 지극히 충격적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이 말은 만약 그대로 된다면 얼마나 주인과 과원지기가 기뻐할 것인지 그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실과가 열린다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을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어니와"란 표현[영어로는 "잘 되었다"( well)란 단어]만큼 그 기쁨을 잘 나타내는 것도 없다. 열매맺지 못하던 종교 신앙인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회개하고 치유를 받아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야말로 "만사가 잘 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니 그에게 "영광이 돌려졌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손엔 더 힘이 생기고 그와 같이 회개하는 자들이 생김으로 그들은 기쁨을 얻고 짧으나마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해 하늘에서도 기쁨이 있을 것이며 땅은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더욱 옥토가 되어 포도원은 더 아름다워지고 더 풍성한 과수들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나무 자신으로 봐서도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이제는 찍혀 버리우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까지 받게 될 것이다(히 6:7). 이젠 그 몸이 "청결해져"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신랑이기 때문이다(요 15:2). 그리하여 끝 날에 가서는 이 땅 위의 포도원에서 하늘의 낙원으로 옮겨 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는 또 다른 조건도 첨부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신앙인에 대해서 그렇게 무한정으로 참고 계실 분은 아니다. 그의 참는 것도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니 그의 인내를 악용한 자에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진노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열매맺지 못한 나무들은 마침내 "찍혀" "불 속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시면 기다리실 수록" 그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클 것이며 그들이 당할 멸망도 클 것이다. 그 나무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에 대한 대가를 청구하시며, "찍어 버릴" 때 그 당하는 고난은 실로 슬프고 저주스러운 것이리라.
[3] 찍어 버리는 행위 자체도 역시 하실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일인 것이다. 이것은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한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다. "땅을 버리니 네가 그것을 찍어 버리라." 그러나 과원지기의 대답은 "아닙니다. 그 일은 마지막 날에 당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제 손으로 하게 하지 마소서."
[4] 지금은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를 위해 중재를 서고 고생을 하는 자들도 끝까지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해 결국 찍어 버려 두게 될 때엔 그 찍힘을 보며 만족하고 그 나무를 위해 다시는 간구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엔 가장 친한 친구들도 마지못해 정의의 심판 결과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심판을 찬양하며 환영하게 될 것이다(계 15:3, 4).
병든 여인을 고치심(누가복음 13:10-17)
이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게 된다.
Ⅰ. 오랫동안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한 여인을 치료하신 기적, 우리 주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내고 계셨다(10절). 우리도 기회가 있는 한 이와 같이 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집에서 성경을 읽고 있어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교 집회란 것은 비록 둘 셋이 될지라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거룩한 조직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 계시면서 그는 hn dida,skwn -즉 거기서 가르치셨다. 이 말은 그의 계속인 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계속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계셨다." 가르치시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바를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그 말씀이 믿을 만하며 받아들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기적, 자비의 이적을 행하셨다.
1. 이 자비의 대상은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회당 안에 앉아 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앓고 있었는데 이것은 하늘의 허락을 받아 악한 영이 그녀에게 덮어씌운 것으로 이미 오래 전에 그녀는 강한 경련을 일으켜 "꼬부라져" 있었으며 "조금도 펴지 못하는 병신"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참으로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지내왔기 때문에 그 병은 불치의 것이 되었다. 다른 짐승보다 인간이 뛰어나게 보이도록 가슴을 펴고 똑바로 서는 것을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있었기에 그 모습이 "볼품없고" 또 초라하게 보였을 뿐 아니라 상상하는 대로 그 기거동작이 심히 불편하였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안식일마다 성전"에 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육체적인 질병에 걸렸다하여도 그것이 지극히 위태로운 상태만 아니라면 안식일에 공중 예배를 빠지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치료를 요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이처럼 치료해 주심은 미리 화를 막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를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20절) 그녀가 먼저 그에게 어떤 호소를 하였거나 그로부터 어떤 기대를 했던 흔적은 없다. 다만 "그녀가 호소하기 전에 그가 대답하셨다." 그녀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녀의 영혼에 안식을 얻기 위해 그에게 갔다. 그때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육체적인 편안함을 허락하셨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우선 심각하게 신경 쓰고 있는 자들에겐 육체에 대해서도 그 바로 보살핌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도 이에 더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영적인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자들을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시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불렀다면" 그는 우리가 그에게 갈 때 분명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3. 그 즉시 나타난 현상은 그의 전능하신 권세를 말해 준다. 그는 자기의 손을 그녀 위에 올려놓은 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네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 병으로 고생하였으나 이제 마침내 너는 그 병에서 놓임을 얻었다" 하셨다. 오랫동안 병에 시달린 자라 할지라도 그 병으로 절망해선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지연될지라도 그를 기다려야 한다. 그녀를 장악하고 있던 것이 "사단의 영, 악한 영"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선 사탄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니신 분으로 "사탄보다 강하신 분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론 "조금도 펴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선 그를 일으켜 세우시면 그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었다.
"꼬부라져" 있던 여인이 "즉시 펴지게 되었고" 성경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시 146:8).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이 치료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사역을 나타내고 있다.
(1) 죄인의 "회개." 거룩함을 입지 못한 마음은 이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들은 왜곡되고 영혼의 기능은 전혀 그 질서를 무시하게 된다. 그들은 땅 아래 있는 것들을 보려고 "꼬부라진다." O curvoe in terram animce! -즉 땅의 것을 향해 굽혀진 불쌍한 영혼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나 하늘을 향해 "펼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 영혼이 꼬부라짐은 자연적인 상태에서도 전혀 엉뚱한 모순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꼬부라진 영혼은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선 그들을 부르셔서 오게 하시고 그를 위해 권세와 은혜의 손을 펴시어 치유의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으로 그들은 "병에서 놓임을 얻고" 그들의 영혼은 제위치를 찾게 되며 다시 질서를 얻게 되고 세상의 어떤 값진 것보다도 값진 것으로 높여 주시고 하늘로 그 방향과 목적을 돌리도록 이끄신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인간이 바로 할 수 없으나"(시 7:13) 인간의 죄로 굽혀졌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곧게 할 수 있다.
(2) 선한 백성에게 내리시는 "위안." 하나님의 자녀들 중 많은 수는 오랫동안 "질병의 영," 노예의 영 밑에 사로잡혀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공포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고 그 안에서 "소용돌이" 치게 되며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고 있다"(시 38:6). 그러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양자 되신 영의 권세로 이와 같은 질병에서 그들은 풀어놓으시고 그들을 똑바로 세우실 것이다.
4. 치료의 효과는 육체 위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에도 나타났다.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고쳐 주시고 모든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꼬부라진 영혼이 곧게 펴지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그 기적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Ⅱ. 이와 같은 치유의 기적에 대해 "회당장"은 공격하고 나섰다. 마치 주 예수께서 이 가련한 여인을 고친 것이 흉악한 죄나 범한 것처럼 비난하였다. 그는 이것을 보고 "분내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14절). 누구든 생각하길 이 기적을 보고 그도 마음이 돌아서 믿게 되었고 아무리 그날이 안식일이었다 할지라도 그이유 때문에 그가 확신을 꺾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도대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적대하는 고집의 영들이 인간의 눈을 가릴 수 없게 만들려면 얼마나 더 확실하고 분명한 빛이 비추어야 할 것인가? 그가 회당장으로 있는 동안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 자기 회당에 영광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것에 대해 분내고 있다. 그는 사실 그리스도와 다툴 의도는 없었다. 다만 "무리"에게 말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에는 말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기적을 얼마나 경시하고 있는가 알 수 있다. 그 일을 마치 "일상적인 것," 평일에도 할 수 있는 돌팔이 의사의 짓거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 "엿새 중 어느 날이라도 오면 치료받을 수 있다."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치료가 값싸고 보통 보는 일 정도로 보였다. 또한 그가 율법의 뜻을 그 본래의 뜻에서 얼마나 왜곡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가 알 수 있다. 손으로 안수하거나 말씀을 통하여 병을 고치거나 고침을 받는 일은 율법으로 "금지된 사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료는 분명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 일을 하셔서 우리를 풀어 주셨는데 다시 자신을 묶을 수 있겠는가? 히브리어에서는 "신성한(godly)"이란 뜻과 "자비로운(merciful)"이란 뜻을 chesed이란 한 단어로 표현한다. 이는 "자비"와 "자선" 행위를 "경건"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임을 암시하는 말이며(딤전 5:4), 따라서 안식일에도 그와 같은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지시하는 말이다.
Ⅲ.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 변명(15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리스도께서 그의 흠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너희 위선자들아!"고 대답하신 그 태도로 대답하셨다.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는 위선자란 명칭이 붙여지기에 합당한 자들을 그렇게 부르셨다. 우리는 관대하게 심판해야만 하며 밖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그 회당장이 그와 그의 복음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적대심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열심히 위장하고 있으며, 다른 "엿새" 동안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고친다고 하더라도 그는 능히 이를 허락하지 않을 인물임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속마음을 폭로하실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와 논쟁을 벌이기로 하셨다.
1.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인정받지 않았지만 늘 상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 먹이는 일이다. 우리 안에 갇혀있던 가축들은 안식일에 우리 밖으로 몰아내 물 먹이러 멀리까지 나가곤 하였다.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참으로 잔인한 짓이다. 인정 많은 사람이라면 가축에 대해서, 특히 자기의 일을 해 주는 "가축의 생명을 귀중히 여길"것이기 때문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할 때에 그 가축들도 "먹거나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였던 것처럼 안식일이라고 가축을 굶기는 식으로(욘 3:7) 율법에 따라 가축들을 "쉬도록" 묶어두는 것은 차라리 일을 시키는 것보다 못할 짓일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런 예를 지금의 상황에 연관시키고 있다(16절). "소나 나귀 같은 짐승도 안식일엔 자비를 베풀어 그것도 매 안식일마다 수고하며 많은 시간을 들여 우리에서 풀어내어 상당히 멀지도 모르는 길을 가 물을 먹이고 돌아오면서 하물며 한 번 손을 대고 한 마디 말로써 이 여인을 고통 속에서, 가축을 물 없이 우리 안에 가두어 받게 하는 그 고통보다 몇 갑절 더 큰 고통에서 구해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로서 스스로 자랑하는 너희의 친족이다. 그녀는 너희의 누이라. 안식일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그런 딸에게 소나 나귀에게도 베푸는 자비를 베풀 수 없단 말인가?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축복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내린 빵을 얻을 자격이 있도다."
(2) "이 여인은 사탄에 매였던 자였다. 사탄은 고통으로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니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를 추방시키는 것이 이 가련한 여인에게 자비의 행위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경건한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3) "이 여인은 이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무려 십 팔년 이나 매여 있었다. 이제 그녀를 풀어 줄 기회가 왔는데도 너희가 주장하는 대로 다시 하루라도 그 일을 연기시킬 수 있겠는가? 십 팔년이란 긴 세월이 지날 때 그녀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 지는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Ⅳ.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무리 가운데는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이처럼 회당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 여인을 고쳐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준 것은 율법에도 합당한 일일 뿐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본분임을 충분히 깨닫게 해 주셨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를 박해하던 자들 사이에 일어난 혼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17절) 그들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장이 난처해졌고 저희들끼리 한 마디도 주고받지 못하였다. 회개하려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불명예로 인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 그의 기적을 헐뜯던 모든 자들은 얼마 안 있으면 모두 "부끄러워하게" 될 것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모든 이들이 얻은 신앙의 확신. 통치자들보다 오히려 사물을 잘 분별하고 보다 공정하게 판결을 내릴 줄 알았던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 하니라." 적들의 부끄러움은 그를 따르던 자들의 기쁨이었다. 그에게 유익한 일이 일어나면 날수록 적대자들은 초조하게 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승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가 하신 모든 일이 그러하였으며 지금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지만 다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인들 에겐 위로가 된다.
나인성 과부(누가복음 13:18-22)
이 구절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Ⅰ. 두 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앞서 말씀하신 복음을 보충 설명하심. 이 비유에 대해선 마태복음 13장 31절-33절에서 이미 읽어보았다. "메시야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놓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오산하게 되었다. 이제 그 나를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 그 나라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엔 그 나라와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을 너희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가 누구를 닮았는지 말해 주겠다." 그리하여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18절)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꼬?(20절) 그 나라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되고 이룩될 것이다.
1. "너희는 그 나라가 굉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갑자기 모든 것이 완성에 이를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너희 생각은 틀렸다. 그것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아주 작은 것이며 좁은 공간만을 차지하고 보잘 것 없는 외형에다 기대할 만한 것도 별로 없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그 씨가 옥토에 뿌려져 싹을 내면 큰 나무로 자라리라"(19절). 많은 사람들은 복음과 어긋난 기대를 가지고 그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꺼려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작은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과연 이 자가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고 반문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의 복음에 대해선 "이것이 만사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한다. 이제 그리스도는 비록 "그 시작은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나 끝에 가서는 엄청나게 큰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이와 같은 선입견을 없애려 하신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날개를 얻어 "구름같이 날라" 그 나무에 자리를 잡고 느부갓네살의 나뭇가지(단 4:21)보다 더 안전하고 풍족한 곳에 터를 잡도록 하려 하셨다.
2. "너희는 그 나라가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군대를 쳐부수는 등, 외형적인 방법에 의해 임할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조용하게 눈치도 못채게 폭력이나 군대를 쓰지 않고서 이루어질 것이다(21절). 누룩 조금이 전체 가루를 부풀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기하게도 그 영향은 전 인류에 퍼질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벌어질 것인데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모르는 사이에 퍼져서 그 나라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고후 2:14). 그러나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이 있어야 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그 복음이 사람의 영혼을 놀라게 하며 그 길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점점 가루 전체에 누룩이 퍼질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누룩이 담긴 밀가루 주머니처럼 그 향기를 받을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행적이 기록되고 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22절). 우리는 여기서 순회자, 순회 설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그는 "겨울에" 있을 자신의 희생제를 치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그 여행이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일을 하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들릴 수 있는 곳이면 성읍 이든 촌 마을 이든 들려 한두 번씩 꼭 설교하셨다. 성읍에서 뿐만 아니라 산골에서도 하셨다.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는 어느 곳을 가게 되든 그곳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호기심을 풀어 주심(누가복음 13:23-30)
이 구절에서 다음 사실들을 읽게 된다.
Ⅰ. 우리 주 예수께 던져진 질문. 이 질문을 한 자가 그리스도의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그것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에게든 질문의 자유를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질문하는 자의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보시고 대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eiv o;li,goi oi` swzo,menoi-즉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23절)이었다. "구원 얻은 자가 적으니이까? 주여, 주께서 그처럼 말씀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1. 아마 이 질문은 "꼬리를 잡기 위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한 것은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목적에서 한 것이다. 만약 구원 얻은 자가 많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너무 무르고 구원을 너무 값싸게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며, 적다고 대답한다면 그를 엄격하고 딱딱한 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한결같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장차 올 세계에 않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왔는데 그가 감히 이것을 부인할 것인가? 그릇된 생각에 빠진 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기준을 세워놓으려고 애를 쓴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판결만큼 자신의 무지와 선입견, 편당성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2. 혹은 "심각한 질문일 수도 있다." 최근 이 문제로 동료들과 논쟁을 벌려 결국 그리스도께 질문해보자고 결론을 내린 신중한 질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할지 그것엔 관심이 없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을 못받았다는 하는 문제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누구누구가 구원을 받았을까?" 늘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른 채 구원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
3. 이 질문은 "칭찬 받을" 질문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얼마나 엄한지 알게 되었고 이에 비교할 때 세상은 얼마나 악한지 깨닫게 되어 자연히 "구원받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고 외치게 되었다. 구원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많으나 그 말씀을 진정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심히 적음을 보고 놀랄 이유는 충분하다.
4. 아니면 "알고 싶어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 "구원받은 자가 적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제게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일까요?" 구원받은 자가 적다는 이 진리를 파보면 볼수록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진리는 심오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Ⅱ.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그 답변은 이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이용해야 할 것인지 일러주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이와 같은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을 인도하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구원 받겠읍니까?"하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가 많든 적든 "저도 그들 중에 들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할 것이다. "누구누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할 것이 아니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어떻게 되겠읍니까?"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답을 살펴보자.
1. 깨우치는 교훈과 지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 쓰라." 이 말씀은 그 질문을 한 그 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복수 대명사로 쓰고 있다. Striveye-즉 너희는 힘 쓰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 못지 않게 인간 전체가 변해야 한다. 그리고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하늘을 소유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큰 위험과 열심, 많은 고생과 관심이 없으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야곱처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하며 죄와 사탄을 이기기까지 힘써야 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의 모든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도록 힘써야 한다. avgwni,zesqe-즉 온 정성을 다해 힘써야 한다. "열심을 다하라. 상을 바라고 뛰는 자들처럼 힘 쓰라. 최선을 다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단련시켜야 한다."
2. 이상의 훈계를 보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이 예를 통해 우리 모두가 깨어 정신차릴 수만 있다면! 이 설명은 "구원받을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 충분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다가 결국 "충분할 정도까지" 힘쓰지 못하여 멸망하고 말았는가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자연히 "구원 얻을 자가 적을 것이다"고 고백할 것이며 우리가 "힘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들이 "구하나" "힘쓰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영광을 입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애써 수고하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을 "게으름을 피우며 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을 얻을 마음"이 있으며, "성결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하여 어느 정도 "좋은 진전"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약하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믿는 바에 대해 신중한 결심을 가지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욕망은 식어지고 그들의 노력은 약해지며 그들을 강하게 붙들어 줄 힘이나 끈기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이르지 못하고" 상을 놓치고 만다. 이유는 그들은 앞으로 추진해나가는 열심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단언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2) 다가오고 있는 "판별"의 날과 그 날에 있을 "재판"을 생각하라. 그러면 자연 너희는 "구원받을 자가 적으나이다"고 말할 것이며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을 깨닫게 되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 것이다"(25절). 그리스도는 "집주인"으로서 그의 집안에 있던 자들이나 그의 집과 친했던 모든 사람들을 알아 볼 것이며 지나가는 모든 통행자들을 판별하실 것이다. 지금은 아주 여유를 주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 문을 닫을" 그 날이 오고 있다. 어떤 문인가?
[1] "판별"의 문이다. 지금도 같은 교회의 성전 안에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가짜" 신앙인과 "내심으로" 예배드리는 "영적인" 신앙인이 함께 있으며 그들 사이에 문이 열려 있어 서로 같은 외형적인 예배 형식을 통해 "차별 없이" 만나고 있으나 "그 집주인이 일어나" 그들 사이에 있던 문을 닫게 되면 "겉으로만" 예배하던 자들은 밖으로 내쫓겨 "이방인의 발 밑에 밟히게 될 것이다"(계 11:2). "부정한 자들"에게도 그 문은 닫혀져 그들은 "영원히 부정한 것에 머물게 될 것이다." 안에 있던 자들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며 "거룩한 자들은 항상 거룩한 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 문은 "진실한 자와" "악한 자를" "갈라놓기" 위해 닫혀져 더 이상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하기 위함이다. 그때엔 너희가 돌아와 그들 사이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2] "거절"과 추방의 문이다. "자비와 은혜'의 문은 "오랫동안 열린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을 통해 들어오려 하지 않았으며," 그 문의 "사랑"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다른 길로 올라가기"를 바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집주인이 일어났을 땐 당연히 "그 문이 닫혀질 것이다." 그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도로 자기들 생각대로 해보라고 버려 두신다. 이처럼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는 안전하였지만 하나님께선 각자 자기 식대로 다가온 홍수를 피하려고 궁리하던 자들을 향해서는 "문을 닫아" 버리셨다.
(3)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구원을 받는다고 자신하였다가 정작 심판 날에 이르러 배척을 받고 자신했던 모든 것이 어긋났음을 생각해 보라. 당연히 "구원받을 자가 적으나이다"하고 고백하며 우리가 "힘써야" 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허락"받으리라 기대한 "확신"은 참으로 컸다. 그들은 "천국 문" 앞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서 문을 두드렸다." 마치 자기 집에 온 양, 당연한 권리가 있는 양,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 우리 생각으로 우리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우리로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릇 심어진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없이 당연히 자신은 좋은 위치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 그들은 마치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이나 된 것처럼 "주여"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주여, 주여"하고 반복해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형식적으로만 가볍게 여겼던 문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경멸했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끼기를 바라고 있다.
[2] 이와 같은 "자신"을 가지게 된 "근거." 그들이 제기하는 이유를 살펴보자(26절).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손님"이었다. 그와 함께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의 사랑을 함께 받았었다. "우리도 당신 식탁에서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유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떡을 먹었으며 그와 함께 접시의 음식을 마셨다. 위선자들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마치 하나님의 자녀들인양 주의 만찬에 동참하며 자녀들의 떡을 함께 떼어먹는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었다. 그에게서 교훈을 들었으며 그의 가르침과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것이야말로 즐긴 사람이 심히 적은 당신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신의 구별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구하시지 않으실 수가 있습니까?"
[3] 그들의 자신한 것은 무너지고 그들이 내린 조건은 효력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실 것이다(25절).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27절) 할 것이다. 그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떡을 먹고 나자마자 그를 핍박하는 자들로 돌변하였다. 그는 "그들의 길거리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멸시하였으며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당연하다.
첫째, 그는 그들을 "부인하였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너희는 내 식구가 아니다." "주님은 자기의 식구를 아신다." 그러나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너희는 나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온 자들도 아니다. 너희는 내 집의 가족도 아니며 내 포도나무가지도 아니다."
둘째, 그는 그들을 "추방" 시켰다. "나를 떠나가라." 그리스도를 떠나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으며 그곳은 저주받은 자들이 받을 형벌로 가득 찬 곳이다. "나의 문에서 떠나가라. 이곳에는 네가 볼일이 전혀 없다. 물 한 방울도 네게 줄 것이 없다."
셋째, 그는 그들에게 이와 같은 불행을 얻기에 합당한 명칭을 붙이셨다. "행악 하는 모든 자들아." 이것이 그들의 죄악이었다. 그들은 경건의 탈을 쓰고 은밀히 죄의 행각을 일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탄의 충복 노릇을 해왔다.
[4] 그들이 받을 무서운 형벌(28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최고의 슬픔과 불명예이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그들이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 "구약의 성자"들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죽은 자들도 메시야의 덕을 입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도 비록 먼 옛날이었지만 "메시야의 날"을 예견하고 그것으로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약 시대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이것은 그들이 그 안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으며 자신하고 있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대우받고 "밖으로 내쫓길" 것이다.
셋째, 성자들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됨으로 죄인들의 고난은 더 심해지게 된다. 그들은 이처럼 멀리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인데 그 나라 안에는 그들이 멸시하고 미워하던 "예언자"들이 들어가 있고 확신하였던 자신들은 밖으로 "내쫓겨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이를 갈게 하는" 원인이다(시 112:10).
(4) 이제 구원받을 자들에 대해 생각하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것이라"(29, 30절).
[1]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하며 가장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자들 중엔 "구원받을 자가 적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복음이 헛되이 전파되었다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는 "영광"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의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와 이 땅 위에 있는 은혜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며 하늘에 있는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되어 우리가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땐 전혀 그곳에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여겼던 많은 사람들은 만나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 있는 "그들은 그곳까지 오느라고 많은 수고를 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곳으로부터 즉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갖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갖은 고초와 절망을 딛고 일어선 자들이다. 이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모름지기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땅 저 끝으로부터" 온 것처럼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여행"을 시작한 자들은 머잖은 날에 "하나님의 나라 안에 앉아" 쉬게 될 것이다.
[3] 하늘나라에 대해 매력을 느끼며 자신하고 서 있던 자들은 끝까지 이르지 못했으나 뒤에 쳐져서 길 밖으로 쫓겨났던 자들이 오히려 그 상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방인들의 열정과 전진을 가지고 거룩한 싸움을 싸워나가자(롬 11:14). 나보다 어린 자들에게 빼앗길 것인가? 먼저 출발해 누구보다 하늘나라에 가깝게 있던 내가, 나보다 못한 듯한 자들은 모두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나만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노력해서 될 것이라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헤롯을 향한 그리스도의 말씀(누가복음 13:31-35)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에게 헤롯이 해하려 한다는 귀뜸이 들렸다. 그리스도는 현재 헤롯의 관할 구역인 갈릴리 내에 있었다(31절). "어떤 바리새인들이"(바리새인들은 나라 안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리스도께 "나아와서" 친한 척하며, 그의 안전을 염려하는 듯 꾸며 말하길 "이 이방에서 떠나소서, 여기를 떠나소서, 안 그러면 헤롯이 요한을 잡아죽인 것처럼 당신도 죽이려할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바리새인들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헤롯은 그와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없는데 다만 그렇게 거짓말을 꾸며 그를 갈릴리에서 쫓아낼 심산이었다.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인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었으므로 시기하여 그를 유대땅으로 몰아내고자 하였다. 유대땅엔 진짜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이 헤롯에게 대한 것이었음을 볼 때 바리새인들이 한 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헤롯은 그리스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기회를 봐서 해할려고 계획 중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란 작자가 세례 요한이 전한 회개의 교훈을 찬양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헤롯은 그리스도를 자기 영역 밖으로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를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협박 소식을 전함으로써 그를 "멀리 쫓아 버릴" 심산이었다.
Ⅱ.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광란에 대한 그리스도의 저항. 그는 헤롯도 바리새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32절), 헤롯을 "여우"라고 불러 그의 본성을 폭로하셨다. 그의 교묘한 술수, 사기 근성, 음탕함, 자기의 우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짐승을 약탈하는 성질로 보아 그는 여우처럼 교활하였다. 비록 이 말이 듣기에 좋지 않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말을 그에게 하신 것이 온당치 못한 일이라거나 "너희 백성의 지배자를 헐뜯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언제나 제왕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책망할 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예언자보다 더 높으신 분이다. 그는 왕이다. 왕 중의 왕으로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제왕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자만스런 왕을 그 합당한 이름으로 부른 것은 전혀 하자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런 식으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가라,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 뿐만 아니라 이 여우(원본에 th/|avlw,peki tau,th|라고 기록되어 있다)에게도 전하라. 너희 바리새인들아 아무리 너희가 내 귀에 속삭여도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행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삼일째 되는 날을 기다리며 속으로 계산하고 있다. 얼마 안 남았다. 내 때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죽음과 친해지고 죽음을 기다리며 늘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과 대화를 나누며 늘 가까이 있음을 보는 것이 오히려 죽음의 공포와 죽음의 권세를 지닌 자들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헤롯이 날 죽이려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2. "죽음이 내게는 역겨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달게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라. 나는 죽음으로 완전해질 것이다. 죽으면 비로소 가장 힘든 나의 과업을 끝마치게 된다. 내 의무가 모두 끝나게 될 것이다." teleiou/mai-즉 나는 봉헌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서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셨다.
3. "나는 그 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내가 내 일을 다 마치기 전에는 나를 죽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라, 가서 말하길 나는 그의 실속 없는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라.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리라." 이 말은 다시 말해 "그가 아무리 겁을 주더라도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 나는 걸어야 한다. 나는 내가 의도했던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의 힘으로 나를 방해할 수 없다. 나는 지금 하는 것처럼 말씀을 전하며 병을 고치며 오늘과 내일과 그 다음 날도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야 이 삼일 정도로 얼마 안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날그날 할 일을 부지런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적대자들의 행악과 권세를 눈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서 무언가 우리에게 시키실 일이 남아 있는 이상엔 그들도 우리를 어쩔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증인은 "그의 증거가 다 끝나기" 전엔 "베임을 당하지" 않는다.
4. "헤롯이 나를 해할 수 없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아니라 내가 죽을 곳으로 지정된 장소는 예루살렘으로서 그곳은 그의 관할 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즉 "예루살렘에서만 죽기로 되어 있다." "진실된 선지자"가 죽임을 당할 땐 "거짓 선지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당시는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던 대 공의회(Sanhedrim)외에는 예언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급 심판기구로서는 다룰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만 "죽임을 당하게 된다."
Ⅰ. 예루살렘을 향한 그리스도의 애도와 그 도시에 내릴 무서운 저주의 예언(34, 35절). 마태복음 23장 37-39절에서도 이와 같은 구절을 읽어보았다. 이 말씀은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 다만 복음서 기자가 여기서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언급하시자 이곳에 삽입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느껴 이곳에 기록한 듯하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신앙 생활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기에 편리한 곳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악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히 주 예수를 슬프게 만들었다. 거룩한 도성의 죄와 파괴를 말씀하시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 보다 많은 은혜의 기회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그 기회를 적절히 잡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심판거리가 된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지 않은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을 던졌다." 인간의 삐뚤어진 마음이 펴지지 않는 한 언제나 도발하기 마련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찾아오는 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영접하여 그들을 그의 보호 아래 두고자 애를 썼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와 같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4. 병아리가 암탉의 보호를 받듯 죄인들이 주 예수께 보호를 받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마다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너희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적극성은 오히려 죄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들의 죽음의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되었다.
5. 그리스도가 떠난 집은 "황폐하여"질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되고 아무리 빈번하게 드나드는 성전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떠나시면 황폐해지고 만다. 그리스도는 그 집을 "그들에게" 버려 두신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스스로 섬기며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게 되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 집에 대해 관심을 두시지 않게 된다. 그들은 그의 부름을 듣고 "모이려" 하지 않으며 따라서 바로가 모세에게 다시는 얼굴을 내보이지 말라고 명령했을 때 모세가 그에게 대답한 것처럼(출 10:28, 29) 그리스도도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나의 음성을 듣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의 심판이 임하면 지금 믿지 못하던 자들은 그제야 믿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하리라." 즉 "너희가 이처럼 말하는 자들 속에서 함께 기뻐하며 내가 메시야였음을 보게 될 때엔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