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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에 관한 거..
작성자칼있으마|작성시간01.07.29|조회수49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헐..어디서 퍼온 건데요.. 누가 레포트로 쓴 건가바요..밑에있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글들에 참고가 될거 같애서 올립니당~ ^.^;
1998년 1학기 '한국의 역사와 문화'(담당교수 사문경)의 과제로 제출/발표했던 보고서임
[원균 명예회복]
1. 문제제기 : 왜 하필 원균이냐 ?
난 "과제의 소재 선정에 있어서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라고 하는 엄살로 문을 연다. 지난 3월초 친구의 잡지, 자칭 진보적 시사 월간지 「말」(1998. 3.)을 우연한 기회에 보았는데 그 내용들 중 "진보사학자 이이화씨는「인물 한국사」의 이순신전을 다시 쓰라"라는 제목의 글은 그간 가지고 있던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생각을 깡그리 깨부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평소 보수성향이었던 나의 마음을 움직였나.「말」지에 실린 내용은 인물 한국사의 저자인 이이화라는 사학자에게 집필 부분 중 이순신에 대한 왜곡된 내용의 글을 바로 잡으라는 일종의 최고장(催告狀)이었다. 어떤 왜곡이었기에 성낙주씨는 이이화씨에 대해 그리 면박에 무안을 주었단 말인가 ?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원균을 이순신의 라이벌로 부각시키는 과정, 아니 역사를 바로 알자는 과정에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의 왜곡된 집필로 인해 성인시 되었던 그분의 인격에 흠집을 내었다는 점이다.
나는「말」지를 읽고 난 후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 그간 존경해오던 이순신 장군님의 명예를 내가 회복시켜 드리자"라고. 난 최근 드물게 많은 글을 읽었다.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의 홍수 속에서 악장 원균에 대한 자료는 딱 두 권밖에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두 권의 책으로 내 마음은 바뀌었다. 이순신은 정말로 훌륭한 장수, 충성을 다하는 신하 그리고 효도하는 아들이란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허나 그 이름만으로도 분을 삭일 수 없게 했던 원균이 그리도 나쁜 놈이었던가에 이르러선 "그건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고 그럴 수도 있다.
난 참고서적의 관련부분을 모두 읽었을 때 이순신의 명예훼손보다 원균의 그것이 더 심하였던 바 원균의 명예회복을 위한 작업(역사가 그에게 얼마나 공정치 못했는가를 밝힘)을 결심했다. 난 객관적 사료로 그 문제에 접근하되 주관을 빼앗기지 않으며 글을 전개하려는 욕심으로 시작한다.
2. 원균 Profile
이재범씨가 집필해 1983년 세상에 나온 원균정론(元均正論)과 원씨 종친회에서 펴낸 원균장군 실기 략사(元均將軍實記略史)의 자료에 의하면 원균은 중종 35년(1540)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이었던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원주 원씨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순신보다는 다섯살 연상인 셈이다.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조산(造山) 만호(萬戶)로 봉직하다가 여진족을 무찌르는데 커다란 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특진되었고 후에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의 휘하에서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그후 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많은 승전을 기록했으나 이순신과의 불화로 159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임되었으며 얼마 후 전라 병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순신이 서울로 호송되자 1597년 3월 경상우도수사 겸 경상도 통제사가 되어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해 7월 58세의 나이로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적이 물러간 후 시신을 거두어 진위 여좌동에 장사 지내었고 1604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원릉군(元陵君)에 추봉되었다.
"小臣이 남방에 가서 들어보니 元均에게는 장병들이 잘 따르고 있어 그는 가장 쓸만한
장수였습니다."
(小臣往南方之聞之 元均 士卒歸附 最是可用之將) <선조신록 27. 11. 12자>
3. 원균은 비겁한 도망자 (?)
원균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왜 그를 모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 ? 그 원인은 과연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 이 답에 대해서 원균정론에 너무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중 임진왜란 초기 원균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왜병이 바다를 건너 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거느린 전선(戰船)과 전구(戰具)를 모두 바다에 가라 앉히고, 그의 휘하에 있는 수군 만 여명을 해산시킨 다음 홀로 옥포 만호 이운용(李雲龍),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積) 등과 더불어 남해현(南海縣) 바다 앞에서 지새운 다음 뭍으로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그때 이운용이 이를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통제사께서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그 대의(大義)로 보아 이곳 임지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이곳은 호남(湖南)으로 가는 길목이니, 만약 이곳을 잃어 버리면 호남이 위험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수병(水兵)들이 비록 흩어졌다고는 하나 오히려 가히 다시 모을 수도 있으며, 또한 호남의 수병에게 지병을 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니 원균이 그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율포(栗浦) 만호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어 원병을 청했다.
<선조수정신록 25. 5자>
이 대목이 오늘날의 원균을 만들어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원균은 '겁쟁이고 무능한 장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육지로 피신 후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한 이운용이 원균을 진작 잡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특히 후에 말하겠지만 이운용은 이식도 칭찬하는 맹장, 용장이었다. 이 기록은 심한 모순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또 수정실록 27. 12자 부분에 보면 원균이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내용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을 충청절도사(忠淸節度士/兵使)로 전임시켰다. 원균이 이순신의 차장이 된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그의 지휘를 받지 않으니 순신은 여러 번에 걸쳐 장계를 올려서 사면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 번 도원수를 시켜서 원균의 공과 죄를 조사하도록 하니 원균은 더욱 분하게 여겨 추악한 말을 많이 했다. 순신 또한 원균의 공이 없음을 장계하였는데, 그중 한가지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었다. 그 때 조정에서는 원균의 편이 많아서, 드디어 둘이 모두 탄핵이 되었다. 임금이 다시 비변사에 영을 내려 바로 잡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다만 원균은 육장(陸將/兵使)으로 전임만 시키고 순신에게는 그 책임을 물어, 앞으로 전공을 세워서 그 죄를 갚도록 하였다. 원균은 서울 가까운 곳(충청병사)에 부임하여 조정의 권력자들과 사귀면서 날마다 순신을 헐뜯으니, 순신은 외로운 처지가 되어 위태롭게 되었다. 조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신을 미워하고 원균을 추켜세우니 名과 實이 뒤바뀌어졌다. <선조수정실록 27. 12자>
수정실록엔 칠천량(漆川梁) 패전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다.
적은 우리 수군을 습격해서 깨트렸다. 통제사 원균은 패사(敗死)하고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催湖)등이 전사했다. 처음에 원균이 한산 통제영에 이르러 순신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모두 바꾸어 버렸고 그 형벌이 법도가 없어 모든 장병들이 그로부터 마음이 떠나 버렸다.
권율(權慄)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싸움에 나아가지 않는다 하여 그를 불러서 매를 쳤다. 원균은 독한 마음을 품고 돌아와서 드디어 주사(舟師)를 이끌고 나아가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제군을 독촉하여 선전했다. (중략) 원균이 배에서 내렸으나 적에게 살해되었다.
<수정실록 30. 7 자>
이 기록의 내용은 대장으로서 부하장병들을 통솔하지 못하는 원균, 적을 겁내는 겁장(怯將)으로, 전략이나 전법도 몰라 패전한 원균 등으로 부각 시켜놓았다.
몇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3가지 사례만으로도 역사가 얼마나 그에게 공정치 않게 전해졌나 다음 장들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元均은 水將으로서 재주가 두드러진 장수이며, 또한 그 천성이 충성스럽고 순박하다."
(元均於舟師事 才有偏長 天性忠實) <伸救? 中>
4. 조선 왕조 신록에 대한 신뢰성 (과연 믿고 따를 수 있나?)
우린 임란 사료의 보고(寶庫)인 조선왕조신록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여기에서 잠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실록제도(實錄制度)를 보기로 하자. 조선왕조는 그 초기부터 엄격한 사관(史官) 제도를 시행했다. 춘추관(春秋館)과 예문관(例文館)의 수찬관(修撰官)이나 검열(檢閱)들로 하여금, 조정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언동사(言動事)는 물론이거니와, 나라 안 밖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시정을 기록케 하여 그것을 비밀히 보관하여 두게 하였다. 그러한 기록이 사초(史草)이며 이 사초는 당대의 임금이 승하한 다음에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하여 날짜 순으로 이를 편찬하는 것이다. 그렇게 편찬한 것이 왕조실록이며 편찬된 실록은 강화(江華)의 마니산(摩尼山),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 봉화(奉化)의 태백산(太白山) 및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에 설치되어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게 한다.
실록의 전제가 되는 사초에 대하여 당대의 군신(君臣)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이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한 사관 제도는 곧 주요 국정통제수단이 되는 것이다. 권력과 관련이 없는 학술기관으로, 그것도 고위직이 아닌 수찬이나 검열등의 순수한 하위직으로 하여금 시정(時政)을 사실대로 낱낱이 기록케하여 그것을 완전 비밀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당대의 임금이 승하한 다음에 이를 수집·편찬하게 함으로써 당대 군신들의 언동을 간접적으로 견제하고 통제하게 하는 제도였다. 태조(太祖)가 그것을 보고자 하였을 때 사관들의 만류로 보지 못하였으며 태종(太宗) 또한 그의 아버지인 태조의 편찬된 실록도 보지 못하였다. 연산군(燕山君)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도 사관의 사초 일부가 누설되어 생긴 사건이고 명종(明宗) 3년 사관 안명세(安名世)가 을기정난사초(乙己正難史草)를 사실대로 썼다가 권신 이기로부터 참형(斬刑)을 당할 때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얼굴빛조차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사관들이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편찬한 것이 역대 실록이라면, 선조실록(宣祖實錄) 또한 그 예외일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수정실록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종식된지 45년이 지난 仁祖 21년(1643)에 대제학으로 있던 이식은 상소를 올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수정실록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한다.
역사는 1대의 전장(典章)이며, 만세의 거울입니다. …나라에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며, 역사가 공정하지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무릇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을지라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는 것이 고금의 지론(至論)인데도 지금에 이르러 나라는 망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역사가 먼저 망하였습니다. 거짓으로 기록한 글이 더러움을 오히려 아름답게 하고 있는바, 오랜 뒤에 이르면 영원히 씻을 수 없게 되오니 어찌 이 나라 신하된자, 몰세무애(沒世無涯)의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위의 글이 바로 이식의 상소이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사건이라도 선조신록과 수정실록에서 보는 시각은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된다면 바로 도서관에 가서 선조실록과 수정신록을 들춰내 비교해 보시라.
5. 李植은 누구시기에 그리도 …
인조반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서인세력이 자신들의 정적(政敵)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던 원균을 깎아 내리고 이순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선조신록을 수정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여튼 이식은 그 주장을 관철시켜 왕의 윤허로 예문관, 검열, 심세정(沈世鼎)을 대동하고, 지리산 적상사고(赤裳 史庫)로 가서 수정 대상을 초출(抄出)해서 돌아와 직접 수정실록 편찬에 착수했다. 이식은 비문, 행장록, 야전잡기 등을 수집, 사상 처음으로 사초에 의하지 아니하고 역사 수정을 감행한다. 이것이 특정부분에서 당시의 제도적 역사인 선조실록을 누르고 오늘의 성전(聖典)이 된 것이다. 집필자 이식의 성이 李씨임을 보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수정실록이 실질적인 편자인 이식의 문벌에 관한 기록이 많다는 점이다. 이이(李珥)와 이순신(李舜臣) 그리고 이완(李莞)에 대한 기록들이 그것이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는 이순신과 심한 쟁공상대였던 원균에 대하여 그를 겁장(怯將)과 악장(惡將)으로 기록하여 역사의 음지에 매장해 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의혹이다.
꼭 그가 이순신과 같은 문벌이라 해서 또한 수정된 기록 중 자신의 문벌에 속하는 기록을 많이 편찬했다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선조실록의 기록을 번복할 만한 거짓된 역사에 대한 객관성이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6. 이식에 대한 반론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아래에 증명하겠다. 앞에 인용한 원균의 도망장면에서 이미 말한 스스로의 모순 내포 이외에도 해산된 수군의 수가 1만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보다는 소설 수준의 허위임을 알게 되었다. 선조실록에 의한 당시 수군의 병력 수는 수군은 戰船이 134척이고 격군(格軍)이 1만 3천 2백이라는 기록되어 있는데 수군은 경상우도(慶尙右道)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 강원, 충청, 전라 좌, 우, 경상 좌, 우, 함경, 평안, 황해의 10 水營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경상우수영에 1만이라는 수군의 수는 설득력이 없다. 경상우수영의 수군 수를 1만이라 가정해도 같은 경우가 된다. 만약 수정실록의 주장이 옳다면 이이(李珥)의 10만 양병설에도 문제가 있다는 또 다른 문제를 생산하게 된다.
게다가 그 구절은 원주 원씨 종친회 발간의 원균장군 실기략사와 원균정론을 토대로 보았을 때 사정과 상황을 무시한 채 집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개천 초 원균의 관할구역인 각 관포(官脯)가 적의 기습으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고 도망간 첨사(僉使)나 만호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원균이 패전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동갑씨가 지은 한국 역사상의 라이벌을 보면 그 장면을 『임란 초 왜적의 기습작전으로 조선군은 미처 대항도 못하고 흩어지는 상황이었고 경상좌수영의 군들도 수사 박홍(朴泓)이하 전 장병이 도주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였다. 이 같은 상황은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휘하에는 몇 안돼는 장병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는 한편 이순신 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가 불리하여 경상우수영이 함락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여튼 그 장면은 이식에 의해 꾸며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다음 원균이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장면에선 성웅 이순신도 인간다운 냄새를 물씬 풍기게 하는 구절을 읽어 볼 수 있었다. 맑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포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스럽다고 할만하다. 자기가 거느린 스물 다섯 척의 배는 모두 다 내어 보내고 다만 일 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내니 그 마음 쓰고 행사하는 것이 다 이 따위다. <亂中日記 1593년 8월 30일>
분명 이순신은 원균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보다. 하여튼 원균은 때때로 이순신에 대해 전면 폭언을 한 것도 사실인 듯 하다. 원균의 그러한 폭언이 오늘날 역사 알려진 바와 같이 단순히 통제사가 된 이순신 밑에서 차장 노릇이나 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하였다면 그는 역사의 버림을 받아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아래와 같은 사정이 있었다.
① 정탁(鄭琢)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 올린 신권구(伸權救)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전란 초 이순신이 군공장계에서 하나 하나 사실에 따르지 아니하고 남(원균 및 그 휘하 장령들)의 공을 탐하여 스스로의 공으로 보고」하여, 원균은 「臨亂不避의 용맹으로 대공을 세웠는데도 그러한 공이 某(舜臣)에게 돌아가고, 원균은 오히려 큰 손상만 입었던」 그것이고
② 선조가 말한바와 같이 「원균이 빼았은 적장의 큰배는 오히려 순신이 가로채어 순신의 공이 되었다」는 그러한 사실.
③ 원균은 그의 獨子인 18세나는 元士雄(전사)을 앞세워 전공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순신은 그 원균의 아들에 대하여 「12세 어린 아이를 전공에 붙혀 조정을 속였다.」라고 모함을 당한 일들.
④ 그는 또한 순신에게 밀려 육장인 병사로 이배(移排)가 된 처지 등을 생각할 때, 그의 폭언은 이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권신들과 손이 닿았을 때 자신의 처지에 대한 사실해명적 헐뜯음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원균의 성격상 문제는 없었는가 ? 元均 行狀記에 公은 "충성스럽고 순박하고 질박하고 곧은 자질이 있었다" 기록되었으나 이원익(李元翼) 등은 "원균은 그 성질이 매우 억세다"<선조신록 29.10.21>와 윤근수(尹根壽)의 "원균은 가장 고지식하다"<선조신록29.11.9> 또한 유성룡은 宣祖 앞에선 "원균은 나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하다"라고 하고 뒷날 원균의 성품은 험상 궂고 간악하다 징비록(懲毖錄)에 적었다. 이로 미루어 본 원균의 인물평은 천성이 순박하고 충성스러운 반면 괄괄하고 억세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엔 지나친 것 같다.
다음 비변사 조사 결과 두 장군 모두 탄핵하였음에 원균은 육장으로 전임시키는데 그치고 유독 이순신에게만 책임을 물어 공으로써 죄를 갚으라 하였던가. 그때 두 수장의 죄명 중 원균의 경우는 상관인 통제사(이순신)의 절제를 받지 않아 군률을 범했다는 죄목이고 이순신은 장계에서 원균의 공을 가로채어 허위 장계를 했다는 것이다. 선조신록에서「上께서 답하여 가로되 "나의 생각으로는 순신의 죄가 원균보다 더 심하다."」라 되어있다. 또 선조신록 27.12.1자「원균같은 자는 얻기 어려운 수장의 材木」(如元均者 不可易得 水將之材)인데도 이순신과 심히 다투어 부득이 전임시켰다 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이순신에게만 불리한 문책을 하였다는 수정실록의 이 대목 역시 모순을 안고 있다. 또 조정에 원균 편이 많았다는 것 역시 구린 구석이 있다. 당시 이순신을 감싸주던 편으로서 영의정 겸 비변사 당상인 유성룡, 전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정탁 등이 있었으므로 원균 편이 많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만약 조정에 원균의 편이 더 많았더라면 그를 통제사에 앉히고 이순신을 다른 직책으로 전보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순 없었나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아마도 그에 관련된 기록은 원균의 일방적인 모함보다는 같은 무장 같은 수장끼리의 쟁공(爭功)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칠천량해전의 패배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김갑동씨의 저서 한국 역사상의 라이벌중 7장 '이순신과 원균'과 원균정론을 보면 원균의 작전 계획(육지에 있는 적을 먼저 쳐서 우리 수군의 행동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하고 또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후고의 여지를 없이한 다음 수군이 진격해야 승산이 있다는 水陸竝進에 관한 계획)을 장계로 올렸으나 도원수 권율로부터 매까지 맞으며 묵살, 수군을 끌고 칠천량 해전에 나가게 된 것이다. 참고로 그 해전에 일본은 600여척 대선단이었고 우리 수군은 134척 뿐이었다. 그로 인해 역부족이었던 원균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7. 몰랐던 사실
이순신이 죽으며 남긴 그래서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얼마 전까지도 나의 가슴을 그리도 찡하게 하지 않았던가.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러나 그것이 fiction일지도 모른다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이순신 전사시 옆에서 싸움을 이끌었던 이완(李莞)에 기록 역시 허구라는 것이다. 아래에다가 그 내용들에 대한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내용을 싣도록 하겠다. 이식이 얼마나 멋있게 고쳐 놓았는지 감상하시라.
사신이 말했다. 순신이 친히 스스로 왜적을 쏘아 죽이던 중에 적탄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자 그 아들이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니 군심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李(孫의 잘못)文或이 곁에 있다가 급히 순신의 아들의 울음을 그치게하고 옷으로 죽은 시신을 가리운 뒤에, 그대로 북을 울리면서 전진을 하였으므로 다른 장수들이 모두 순신이 죽지 않았다고 기운을
돋구어 적을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대패하고 말았다.
<선조신록 31.11.27>
순신이 친히 矢石을 무릅쓰고 역전을 하던 중에 적의 탄환이 그의 가슴에 맞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장막 안으로 부입(扶入)하였다. 그때 순신이 가로되, "지금 싸움이 한 창이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하더니 곧 절명했다. 순신의 형의 아들 莞은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命으로 싸움을 더욱 재촉하니 軍中에서는 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수정신록 31.11>
위 선조실록의 기록은 권율(權慄)의 장계에서도 "문혹(文或)이 친히 板위에 올라가서 적세를 살피면서 지휘 독전을 했습니다." <선조실록 31.12.18> 라고 기록되어있다. 명백한 손문혹의 공이 이완의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陸·海軍을 총지휘하였던 도원수가 그 공을 장계하였고, 그것이 대신회의에서 논의를 거친 다음에 다시 군공청에서 왕에게 보고된 이 일련의 기록은 너무나도 뚜렷한 역사적인 사실이었음에도 그것이 수정실록이란 몇 줄의 변경된 문자에 의하여 손문혹의 그 빛나는 전공이 묻혀버리고, 이완의 전공이 되어 역사에 흐르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이 정녕 역사의 本流라고 받아들어야 할 것인가?』라고 원균정론의 저자 이재범씨는 문제를 던진다.
8. 무엇이 문제였나 ?
원균정론에서 두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선조수정실록에 관련 기록이고 둘째 편견적 사류(史流)가 그것이다. 수정실록에 대한 反論은충분하진 않지만 「6.이식에 대한 반론」으로 스스로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 그렇다면 편견적 사류는 무엇이란 말인가 ? 이 글을 열면서 이순신에 대한 자료는 홍수를 이루었음에 반해 원균의 자료는 전무하다 시피했다고 말한 적 있다. 특히 규모를 자랑한다는 충남대학교의 도서관에서조차. 이순신 자료의 홍수 발원지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이미 설득력을 잃어버린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대부분이라 한다. 이에 반해 이순신의 그것에는 좀 뒤지더라도 원균의 승리장계를 포함한 각종 장계나 이선(李選)이 저술하였다는 원균전(元均傳) 등 원균에 대한 기록도 만만치 않을텐데 오늘날까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후에 정권을 잡은 수정 실록의 실질적 편집장 노릇을 한 덕수 이씨의 후손인 이식 등과 같은 후손이 번창한 이순신에 반해 외아들인 원사웅(元士雄)마저 전사한 터라 대가 끊긴 원균의 가엾은 처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을 포함한 임진해전에 관한 연구는 어떤 특정기록만을 金科玉條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연구의 시각을 다각화하여 역사 서술에 진실을 구해야 함이 순서인 듯 싶다. 분명 원균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 일방성에 치우치고 있다. 중용이란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겠지만 지나친 극우나 극좌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인지라 보다 공정한 평가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9. 원균의 명예회복에 관한 …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서 이순신의 활약이 뛰어났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전략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객관적 자료로 공정하게 접근했을 때 그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聖人이나 神人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공명심에 거짓 장계를 올려 오점도 남겼던 것이 바로 인간적인 면이나 단점이라 하겠다. 원균에 대해서도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를 역적이나 졸장부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보통 열 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를 잘못하면 두고두고 욕하는 경향이 있다. 차범근 감독의 월드컵 대표팀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우린 원균에 대해 전란 중 아들을 잃었고 자신마저 희생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도 나름대로「나라를 위하는 무장으로서 다른 장수 못지 않은 용감한 인물이었다」라는 생각에.
10. 나의 한계와 또 다른 시작
이 글을 마치려는 이 시점에 와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난 나의 능력의 한계에 여러 번 부딪쳤다. 의욕이 앞서고 능력은 따르지 못하는 터라. 내가 主가 되는 작업이 아니라 남이 써놓은 것을 그저 인용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 끝내 펜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여기서 다른 시도를 하고자 한다. 줄곧 내 머리에서 지위지지 않았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겠다. 교수님과 학생 여러분께
스스로 「역사란 무엇인가 ?」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 전 정확한 답을 제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생각해 보니 역사만큼이나 힘든 학문도 없는 것 같더군요. 이는 수학이나 물리같이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답이 '무엇'이라고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히 앞서 바라 본 역사서의 왜곡이라는 문제에선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혹 몇 사학자들과 그 무리에 의해 역사의 왜곡이 자행되지는 않는지 이번 과제를 통해 스스로 그리고 동료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역사 기록의 감시자로 남기를 당부하며 조잡한 글 마무리하려 합니다.
잠시 역사학도로 착각할 뻔한 장사꾼 지망생 올림
참 고 자 료
元均正論 이재범 1983 계명사
월간「말」성낙주(142∼147) 1998. 3 (주) 월간 말
한국역사상의 라이벌 김갑동 1995 신서원
亂中日記 김육훈 1996 학민사
元均將軍實記略史 원주원씨종친회 1980 세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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