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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1. 2017.07.15.12:50 寧越郡錦江亭記 영월군 금강정 기 / 尤庵 宋時烈 (우암 송시열) 한자 원문을 확보하여
원문에 한글해석을 나열하는 방법으로 교정작업을 했다.
또한 황희`이황 시문에서 한글 해석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 해석을 병기하였다.
2020.03.14.23:39 영월군금강정기/송시열. 해역처 발견하여 인용하여 다시올리다.
2020.03.15. 21:31. 공덕비군 11점 내력 영월문화원 발행 영월의 금석문 인용하여 다시 수정한 후 등록시키다.
2020.03.17.19:27. 민충사 관련 기록 보완하다
2021.02.13. 10:32 ⑤ 郡守李公堥淸德善政永世不忘碑 에서 ⑤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로 바로잡다.
즉 공덕비의 주인공은 李堥(이무)가 李壄(이야) 이었다.
여성친화도시 영월,『錦江女親 不老 행기길』답사 자료집
총소요시간 : 60분(최소)
답사순서
향교-전쟁참전비-김상태 의병장충절비-충혼탑-공덕비군-정사종 충의비
의병장 정대억 의사 순국비 -전재규 상-금강정 -월기경춘순절지처비-낙화암비-민충사-라디오스타박물관
동강(東江) : 동쪽에 있는 강
금장강`금강(錦長江`錦江) : 비단 같이 아름다운 강(조선국시대 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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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월향교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100호
향교는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영월향교는 1398년(태조7)에 설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73년 향교의 기와를 다시 바꾸었으며,
1574년과 1593년, 1604년에 중창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성전(大成殿), 동서, 교직사(校直舍)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며,
1958년 내삼문, 명륜당, 장의실을 재건하고
1964년에 풍화루를 중건하였다.
1983년에는 대성전을,
1986년에 동서무를 해체·복원하고,
1987년에 교직사를 해체 복원하였다.
1992년 동제를 개조·중건하고 대성전의 단청과 현판을 개조하였다.
1993년에는 서제를 개조·중건하였다
영월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의 18성현을 봉안한 대성전, 향교내 성현들을 배향하는 대성전 전면 양측 건물인 동무(서무강론을 하던 명륜당)과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던 곳으로 명륜당 전면 양측에 세워지는 건물인 동재`서재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훈도 1명이 교생 50명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나 1895년 갑오개혁 이후 폐지되었다.
1912년에는 영월초등학교 학생이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초경일, 두차례에 걸쳐 석전제를 거행하고 있다.
대성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지금의 모습은 옛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성현 5위, 송조 2위, 동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
향교에서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이 밝히는 것'에서 유래했다.
입학 조건은 연령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평민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대성전 봉안 25위(5성위+송조2현+동국18현)
5성위(五聖位)
대성지성문선왕 공자(大成 至聖文宣王 孔子)
연국 복성공 안자( 國 復聖公 顔子)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성국 종성공 증자(郕國宗聖公 曾子)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기국 술성공 자사(沂國 述聖公 子思)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추국 아성공 맹자(鄒國 亞聖公 孟子)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송조 6현 중 2현 봉안(宋朝 6賢 中 2賢 程顥`朱熹 奉安)
도국공 주돈이(道國公 周惇頤)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낙국공 정이(洛國公 程頤)
신안백 소옹(新安伯 邵雍)
미백 장재(郿伯 張載)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20현 배향_송조2현 및 동국 18현(東國 18賢).배향 위치순서
동배향(東配享)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650년경-740년경)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1243 - 1306)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 - 1504)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 - 1519)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 - 1570)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6位)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 - 1584)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 - 1631)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1574 - 1656) 동배향(東配享) 제9위(第九位)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606 - 1672) 동배향(東配享) 제10위(第十位)
서배향(西配享)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 857 - ?)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 - 1392) 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 - 1504)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 - 1553)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 - 1560)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1535 - 1598)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1544 - 1592) 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 - 1689) 서배향(西配享) 제9위(第九位)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 - 1695) 서배향(西配享) 제10위(第十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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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참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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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국 김상태의병장 충절비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17-1-1
소재지 :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금강공원 내
건립자 : 삼척김씨 종친회
관리자 : 영월군
김상태(1862~1911)의병장은 삼척 김시로 1862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옥동리에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李康年)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유인석(柳麟錫)대장의 휘하로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도에 걸쳐 일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일군과 싸웠다.
일본관헌은 혈안이 되어 장군의 검거에 노력하였으나 신출귀몰하여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14일 오전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니 향년 50세였다.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는 삼척김씨 종친회가 주축이 되어 1998년 3월15일 이곳 금강공원에 세워졌다.
건립취지 :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1896년 영월에서 의암 유인석 선생의 권유로 의병진에 가담하기 시작하여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정미의병에 참여, 호좌창의군의 중군장이 되어 영월 덕포, 영춘 서벽, 문경 갈평, 영주 죽령 전투에서 무수한 공을 세웠으며, 1908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1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월, 영춘, 순흥, 문경, 원주 등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
자료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open/open300_view.asp?ipp=10&id=21220
김상태의병장 충절사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17-1-2
소재지 : 하동면 옥동리 162(현 김삿갓면). 관리자 : 영월군
김상태의병장은 1862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일가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하동면 옥동리로 이사하여 33세인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영월 덕포전투, 영춘 석벽전투, 문경 갈평전투, 영주 죽령전투 등 수많은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일본군 밀정의 신고로 체포될 때까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체포된 이후에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옥중단식을 벌이다 단식13일만에 순절하니 향년 50세였다.
이 고장에 의병장이 살던 집터가 남아있고 또한 문중에서 건립했던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었던 이 터에 삼척김씨 종친 등이 주축이 되어 김상태의병장 충절사를 건립하였다.
건립취지 : 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삼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여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open/open300_view.asp?ipp=10&id=2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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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혼탑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17-2-1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39번지
건립자 : 영월군민. 관리자 : 영월군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국권회복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서 이룩되었습니다.
국난극복의 과정에서 자기를 버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를 취한 선열들의 위국헌신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가구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정신적 유산입니다.
이곳은 6.25전쟁 중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영월출신 군인, 경찰 등 665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65년 8월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충혼탑이오니.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시고 다시 한번 그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겨 진정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겨레여!
후세에 전해다오
님 위한 넋 여기 잠든다고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붉은 오랑캐와 맞서 우리를 지켜주다,
영원히 잠든 용사가 있다.
조국의 운명과 겨레의 복된 삶을 위해
지상의 온갖 소망과 사랑을 스스로 버린
꽃다운 청춘이 있다.
추모하고저 이 탑을 세우다
長谷 짖고
玄右 朱明燮 쓰다. 1965년 8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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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지키는 이 언덕에서
꽃다운 영령들의 잔잔한 함성을 듣자.
우리는 죽어서도 이 나라를 지킨다.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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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충혼탑은 호국영령들의 높은 뜻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1964년 6월24일 건립되었으며,
2013년 6월6일 제57회 현충일에 즈음하여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합니다.
아아 님이시여!
편히 영면하소서
영월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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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리 선정비군
금강공원 청덕`선정비군 11점
● 시대 : 조선시대● 위치 : 영월읍 영흥7리 산38임
영흥리 선정비군은 영월 KBS 방송국 입구의 화단에 총 10기의 선정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본래 비석거리(엽연초조합과 영월초교 사이)와 창절서원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다. 비문의 글자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좌측부터「군수심연청덕비」,「군수윤순거청덕선정비」,「부사구택규청덕선정애민비」,「군수김륵선정비」,「군수이야청덕선정영세부망비」,「군수한백겸청덕비」,「부사홍용주흥학교정풍화비」,「군수함기섭기념비」,「도지대신심상훈청덕선정비」,「군수이광적청덕선정애민비」순으로 모셔져있다.
① 郡守沈公鍊淸德碑 (군수 심연 청덕비문)
전면 : 郡守沈公鍊淸德碑. 군수 심연 공께서 청렴한 덕으로 베푸신 선정을 기리는 비
후면 : 一千五百八十四年 甲申改刻建碑 (1584년 갑신개각건비) 1584년(선조17년) 갑신에 고쳐 새기고 비를 세우다.연대 : 선조 17년(1584)
영월군읍지 선생안
심연(沈鍊) :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 2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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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郡守尹公舜擧淸德善政碑 (군수 윤순거 청덕선정비)
전면 : 公於崇禎後庚子 十二月二十八日到任 乙巳七月移拜掌
(공어숭정후경자 십이월이십팔일도임 을사칠월이배장)
令而莅奬斈愛民之誠 至勤且篤 邑人立鐵碑 丙子荒年
(령이리장학애민지성 지근차독 읍인립철비 병자황년)
郡守尹公舜擧淸德善政碑
不幸見偸 一鄕老少多年慨惜 鳩財董公 改造石碑 以寓追思不忘忺之爾 崇禎後再丁巳五月改立
(불행견투 일향노소다년개석 구재동공 개조석비 이우추사불망험지이 숭정후재정사오월개립)
연대 : 영조 13년(1737)
공은 숭정후 경자년(1660) 12월 28일에 도임하여 을사년(1665) 7월 장령으로 이임하였다.
군수로 부임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히 부지런하고 독실했다.
읍인이 철비를 세웠는데 병자년(1696)의 흉년에 군수 윤공 청덕 선정비가 불행히 도난을 당하였다.
한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 해 애석해 하다가 재물을 모으고 견고히 일하여 석비를 다시 세워
이로써 과거를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정성을 보였다. 숭정후 재 정사(1737) 5월에 다시 세웠다.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
윤순거(尹舜擧 1596~1668) 경자년(更子年, 1660년 현종 1년)12월28일에 부임하여,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 7월에 장령(掌令) 벼슬에 임명되어 이임했다.
영월군수로 재임 중이던 1663년에 단종과 장릉에 대한 사적을 모은 ‘장릉지(莊陵誌)’를 바탕으로
장릉의 사실(事實)·분묘(墳墓)·사묘(祠廟)·제사(祭祀)·제기(題記)·부록(附錄) 등 6편으로 분류한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였고,
지덕암(旨德庵. 오늘의 금몽암)을 중건한 후
〈노릉지덕암중건기 魯陵旨德庵重建記〉기문을 짓고 목판에 새긴 기문이 금몽암에 계첨되어 있다.
그 후 영월군민들이 ‘군수윤순거청덕선정비(郡守尹舜擧淸德善政碑)’를 세웠는데, 현재는 금강정으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금강정에 있는 선정비들은 영월초등학교 앞 비석거리와 창절서원 앞에 있었는데, 도로확장공사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윤순거(尹舜擧)
출생일1596년(선조 29) ~ 사망일1668년(현종 9)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척화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祠)를 건립하였다.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윤순거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李珥)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과 주희의 『가례』에 의거해 매년 한 차례씩 모든 종인(宗人)이 함께 모여 조상을 받들고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약을 제정해 실천하였다.
강항을 위해 「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이 포로생활 중에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인 『간양록(看羊錄)』 등을 편찬해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해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 질서인 군신 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동토집(童土集)』·『노릉지(魯陵志)』가 있다.
철원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의 글씨가 전한다.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금구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되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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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府使 具公宅奎 淸德善政愛民碑 (부사 구공택규 청덕선정애민비)
전면 : 府使 具公宅奎 淸德善政愛民碑(부사 구공택규 청덕선정애민비)
후면 : 辛酉十一月日立 (신유십일월일립) 신유(1741년) 11월 일 세움
특징 : 석회암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신년(庚申年, 1740년 영조 16) 3월4일 부임하여, 신유년(辛酉年, 1741년 영조 17) 8월15일 사직하였다.구택규(具宅奎)를 구명규(具命奎)로 이름을 고쳤다. 본관(本貫)은 능성(綾城)으로 1693년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성오(性五), 호는 존제(存齊)로 숙종(肅宗) 40년(1714)에 증광시(增廣試) 병과 8(丙科8)에 합격하였다.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으로 검열(檢閱)·진주목사·동래부사를 지내고, 1739년에 승지를 역임하였다.
1746년에는 교정당상으로 ‘속대전(續大典, 조선의 기본 법전)’ 편찬에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748년 공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753년(영조29)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영월군민들이 ‘부사구공택규청덕선정애민비(府使具公宅奎淸德善政愛民碑)’를 건립하여 현재 금강정에 보존되어 있다.
부사 구택규의 선정비는 1741년에 북면 마차리에도 세웠다.
구택규(具宅奎)
출생일1693년(숙종 19) ~ 사망일1754년(영조 30)
조선후기 공조참판,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초명은 구명규(具命奎).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대사성 구성(具宬)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종주(具宗柱)이고, 아버지는 구혁(具爀)이며, 어머니는 이만저(李曼著)의 딸이다 .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노론의 실각과 함께 외직으로 물러났다. 1731년(영조 7) 진주목사가 되었으며, 1735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739년에는 승지가 되었고 회양부사·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뒤, 1744년 『속대전』의 편찬에 찬집당상(纂輯堂上)으로 관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관동심리사(關東審理使)로 다녀와 삼폐(蔘弊)주 01)를 논하고 대책을 진언하였다. 1746년 『속대전』의 교정당상으로 간행의 책임을 맡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74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형조참판이 되어 전택(田宅)과 노비의 쟁송업무(爭訟業務)를 각각 한성부와 장례원에서 분담하도록 진언하였으며, 『무원록(無寃錄)』을 훈석(訓釋)하여 중간(重刊)하는 일을 주관하였고, 1753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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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郡守金公玏善政碑 (군수 김공 륵 선정비)
전면 : 郡守金公玏善政碑
옆면 : 匠人 朴德□ 장인 박덕□
石手 忠州 姜彦付 석수 충주인 강언부
都□ 辛光付 도석수 신광부
辛千良 신천양
刻 辛白閠 새긴이 신백윤
후면 :
公字希玉 號柏巖 龜城人 以近臣 爲慈乞郡 愛民以誠 勞力不怠 爲政三年 化浹四境 和氣所感 有麥穗之瑞 事聞于朝
(공자희옥 호백암 구성인 이근신 위자걸군 애민이성 노력부태 위정삼년 화협사경 화기소감 유맥수지서 사문우조)
賜表裏一襲 及其爪滿 京還之日 爭追號泣 如離親戚焉 遂立短碣石 以寓去後之恩云 皇命萬曆十七年八月 日.
(사표이일습 급기조만 경환지일 쟁추호읍 여이친척언 수립단갈석 이우거후지은운 황명만력십칠년팔월 일)
공의 자는 희옥, 호는 백암, 구성인, 임금을 모시던 신하로
어머니 봉양을 위해 걸군(고향 가까운 수령자리 요청)하여 본 군에 부임했는데
정성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힘써 보살핌에 태만함이 없으니
3년간의 군치 결과 사방 곳곳에 교화가 스며들어 화평한 기운이 두루 미쳤고
맥수(보리이삭)가 배로 열리는 상서로움(풍요)이 있음에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임금께서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임기가 차서 서울 내직으로 떠나는 날 군민들이 다투어 소리내어 우는 것이 마치 친척을 떠나 보내는 것 같았다.
이에 단비(短碑)를 세워서 떠난 후 은혜를 담아 둔다. 황명 만력 17년(선조 22년 1589년) 8월 일.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
김륵(1540~1616)은 예안(禮安)사람으로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으로 이황의 문하생이다. 1584년(선조 17)에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1585년 충신 엄흥도의 후손인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엄충신의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가 홍문관 교리로 전출되자 영월군민들은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그 후 안동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영월군민들이 皇明萬曆十七年八月에 세운 ‘군수김공늑선정비(郡守金公玏善政碑)’가 금강공원에 있다.
김륵(金玏)
출생일1540년(중종 35) ~ 사망일1616년(광해군 8), 경상우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김만칭(金萬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김우(金佑)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사명(金士明)이며, 백부인 형조원외랑 김사문(金士文)에게 입양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서 예조원외랑·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고, 이듬해 부수찬·지평·직강 등이 되었다.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 신임 군수마다 죽는 변이 있었다.
이에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배알한 후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었으며,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해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했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예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렸다. 그리고 명나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곧,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수축해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또 앞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백암문집(栢巖文集)』이 있다.
추증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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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공 야 청덕선정 영세불망비)
전면 : 郡守李公壄淸德善政永世不忘碑
군수 이무 공께서 청렴한 덕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신 것을
영원토록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빗돌
후면 : 二載爲政 仁風善決 化洽一方 沒世難忘 甲戌正月 日.
이재위정 인풍선결 화흡일방 몰세난망 갑술정월 일.
2년간 군정을 행함에 있어 인자한 풍도로 판결을 잘 내려 교화가 군 전체에 미쳤으니 세상 끝 날까지 잊을 수 없다네. 갑술(1694) 정월 일. 연대 : 숙종 20년(1694)
●1691년(숙종 17) 12월 25일에 부임하였으나, 1693년(숙종 19) 12월 18일 도사(都事)와 다툰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 문관당상(文官堂上). <영월군읍지 선생안>
이야(李壄)는 1648년(인조 26)~1719년(숙종 45). 본관 완산(完山), 자는 중선(仲先).
1691년(숙종 17)에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94년(숙종 20) 승지로 임명. 1697년(숙종 23) 강원도관찰사. 1706년(숙종 32)부터 대사간(大司諫)‧경상감사‧예조참판 등. 1716년(숙종 42)부터 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⑥ 郡守 韓公百謙 淸德碑(군수 한공백겸 청덕비)
전면 : 郡守 韓公百謙 淸德碑
후면 : 廉潔爲政 一片短碣, 惠化無窮 千古淸風, 皇命萬曆三十一年四月日
(렴결위정 일편단갈, 혜화무궁 천고청풍, 황명만력삼십일년사월일)
마음이 깨끗하고 탐욕없는 정치를 하여 작은 빗돌 하나를 세우네
은혜를 베풀어 교화함이 끝이 없으니 아주 오랜 세월 부드럽고 맑은 바람 부네. 황명 만력 31년(선조36년 1603년) 4월일<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자년(庚子年) 8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 2월에 동생 준겸(俊謙)이 4도 도예찰부사(四道都禮察副使)가 되자 상피(相避)에 의해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인사 이동되었다. 영월읍민들이 덕정비를 세웠다.
韓百謙 한백겸
출생일1552년(명종 7) ~ 사망일1615년(광해군 7)
조선시대 호조참의, 강원도안무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천군수(文川郡守)한여필(韓汝弼)이고,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호조참의 등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江原道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거하였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다.
또한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수정해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다. 그 결과 『동국지리지』의 저술과 『기전고(箕田考)』 가운데 실린 「기자도(箕子圖)」·「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밖에 저서로 『구암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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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府使洪公用周興學校正風化碑(부사 홍공용주흥학 교정풍화비)
앞면 : 府使洪公用周興學校正風化碑 (부사홍공용주흥학교정풍화비)
壬午三月 日 士林立 (임오삼월 일 사림립)
부사 홍용주 공께서 학문을 부흥시키고 교육을 잘하여 세상의 풍습을 교화시킨 것을 기리는 빗돌
임오년(고종 19년 1882년) 3월 사림에서 세움
앞면 우측 작은 글씨
公姓洪諱用周 寧無改錯 追慕正直 己亥冬建 (공성홍휘용주 영무개착 추모정직 기해동건)
공의 성은 홍씨이고 휘는 용주이다. 진실로 고칠 것이 없었고 정직함을 추모하였다. 기해년 겨울에 세움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
경진년(庚辰年 고종 17)1880년 7월29일 제수 받자 9월17일 비인(庇仁)에서 영월군수로 영전되어 부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83년 고종 20) 6월15일에 좌천되어 갔다.
홍용주(洪用周)
생몰년대 : ?
본관 ?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충청도(忠淸道) 비인현감(庇仁縣監) 1877[정축(丁丑)] 5월 *지금의 서천군(舒川郡)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영월부사(寧越府使) 1880[경진(庚辰)] 7월(七月)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고종실록 15권, 고종 15년 8월 7일 갑신 2번째기사 1878년 조선 개국(開國) 487년
수심을 측량하던 일본 군함이 비인현의 월하포에 정박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명응(李明應)이, ‘원산(元山)·북청(北靑) 등지에서 수심을 측량하던 일본 군함 천성호(天城號)가 이달 초하루 비인현(庇仁縣)의 월하포(月下浦)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해당 현감(縣監) 홍용주(洪用周)가 문정(問情)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실록>
주) 기해년 : 고종 36년 1899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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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郡守 咸公基燮紀念碑(군수 함공 기섭 기념비)
전면 : 郡守 咸公基燮紀念碑 군수함공기섭기념비
뒷면
夫碑者 表人功德而紀念者也 今我咸侯蒞玆四歲 保越之勝 普越之文 使越之以若疲弊至有光鮮於今日者 功不在玆乎哉□
(부비자 표인공덕이기념자야 금아함후리자4세 보월지승 보월지문 사월지이야피폐지유광선어금일자 공부재자호재□)
文廟則至盡修繕 而子規樓 錦江亭 愍忠祠繼之 以重新興廢矣 非侯之殫誠竭力 烏能致此哉 鄕人之捐義援助固例也
(문묘칙지진수선 이자규루 금강정 민충사계지 이중신흥폐의 비후지탄성갈력 오능치차재 향인지연의원조고례야)
而玆以侯盛德大惠 同于士林表碣 以引繼之銘曰 錦水淸白 蓮山高嶷 彼淸彼高 可比侯德 古蹟新新 庶務昭昭 是時百越
(이자이후성덕대혜 동우사림표갈 이인계지명왈 금수청백 연산고의 피청피고 가비후덕 고적신신 서무소소 시시백월)
知以杜召 一片短碣 永世爾高
(지이두소 일편단갈 영세이고)
昭和十三年 十月 日 士林代表 嚴達煥 謹書 (소화십삼년 십월 일 사림대표 엄달환 근서)
무릇 비석이란 사람의 공덕을 드러내어서 기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함 군수가 이곳으로 부임한지 4년 동안 영월의 승광을 보존하고 영월의 문예를 넓히시어
영월의 이와 같은 피폐한 것들이 오늘 날 선명한 광채가 있도록 이른 것은 그 공이 그 분에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문묘는 다 수선되기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낡아 있던 자규루, 금강정, 민충사가 새로이 중수되었다.
군수의 정성과 힘씀 다함이 없었다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의연금을 출연하여 서로 도움이 관례이기는 하나
이에 군수의 왕성한 덕과 큰 은혜를 사림 일동은 뜻을 함께 하여 비석에 드러내어 계승코자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금수는 맑고 깨끗하고 봉산은 높고 우뚝하네
저 맑음과 저 높음이 가히 군수의 덕에 비길 만 하네
옛 자취 새로워지고 온갖 일들은 밝게 드러나니
이 고장 영월 모든 사람들은 두시나 소신신 같은 선정관으로 알아
한 조각 짧은 비석에 새겨 영원히 그대를 높이노라
소화 13년(1938) 10월 일 사림대표 엄달환 삼가 쓰다.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주) 杜召(두소). 召杜(소두) :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중국 한(漢)나라의 소신신과 후한(後漢)의 두시는 태수(太守)가 되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다스리는 수령이 있으면 그 수령을 이들에게 비유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소두 [召杜]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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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度支大臣 沈公相薰 淸德善政碑(탁지대신 심공상훈 청덕선정비)
전면 : 度支大臣 沈公相薰 淸德善政碑 (탁지대신심공상훈청덕선정비)
丁酉十月日立 (정유십월일립)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의] 度支大臣 沈相薰 1854(철종 5)∼?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가(舜歌).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수구당의 한 사람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長湖院)에 은거하고 있던 민비에게 대원군의 납치소식을 비롯, 왕궁의 근황과 청·일 양국의 출병사실 등 서울의 형세가 호전될 것을 전달해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고종 일행이 경우궁(景祐宮)에 임시 거처하고 있을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경우궁에 들어와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 가장하고 몰래 왕에게 정변의 기밀과 개화당의 진상 등을 알려주어 왕과 민비에게 밀통하였고, 사대당 인물들과 모의하여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우차오유(吳兆有) 등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여 독립당의 혁신정부를 무너뜨렸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동학교도의 탄압에 앞장섰고,
1893년 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올랐다.
1895년 삼국간섭 이후, 친러적 경향을 띠던 수구당내에서 궁내부특진관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탁지부대신으로 재직하였으나
악화(惡貨)인 백동화(白銅貨)와 같은 보조화(補助貨)를 주조하여 유통질서에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가, 1898년에 체직처분을 받았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주) 度支大臣탁지대신 ①대한제국(大韓帝國) 때, 탁지부의 으뜸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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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郡守 李公光迪 淸德善政愛民碑(군수 이공 광적 청덕선정애민비)
전면 : 郡守 李公光迪 淸德善政愛民碑
후면 : 己未二月 □□□ (기미 2월 □□) 숙종 5년 1679년 2월 □□□
<영월의 금석문.영월문화원>
영월군읍지 선생안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 11월 22일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이름을 이연(李演)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본관(本貫)은 성주(星州)로 1628년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휘고(輝古), 호(號)는 은암(隱岩)으로 효종(孝宗) 7년(1656)에 별시(別試) 병과 4(丙科4)에 합격하여 함평현감·강릉현감·영월군수·안변부사를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큰 치적을 남겼다. 영월군민들이 세운 ‘군수 이광적청덕선정애민비(郡守李光迪淸德善政愛民碑)’가 금강공원에 있다.
이광적(李光迪)
출생일1628년(인조 6) ~ 사망일1717년(숙종 43)
조선후기 정언, 지제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이연(李演). 자는 휘고(輝古), 호는 은암(隱巖).
대사헌 이언충(李彦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이세미(李世美)이다.
1650년(효종 1) 생원·진사가 되고, 165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 5) 주서를 거쳐 전적·지평·정언·지제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함경도사를 비롯하여 함평현감·강릉현감·영월군수·안변부사 등을 두루 거쳤다.
수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쌓아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칠순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706년(숙종 32) 공조참판으로서 임보(林溥)의 옥사를 소홀히 다룬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80세로 지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는데, 왕이 조화(造花)를 내려 조정이 모두 성사(盛事)로 칭송하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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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조합장 엄병연선생 공적비/ 1944년 소화19년 甲申 4278년
젊음의 푸른 꿈을 흙에 묻고 뜨거운 執念(집념)은 不死鳥(불사조)되어 헐벗은 農民(농민)의 벗으로 風雲(풍운)이 凄絶(처절)한 逆程(역정)을 걸으며 至死不休(지사불휴)로 한 生涯(생애)를 農村運動(농촌운동)에바친 人間常綠樹(인간상록수)가 여기 있다.
그 분은 바로 嚴公 秉燕(엄공 병연)이시다.
公(공)은 1908년 8월 28일 寧越郡 北面 文谷里(영월군 북면 문곡리)에서 嚴泗源 翁(엄사원 옹)의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時節(시절)부터 남다른 意志(의지)와 氣槪(기개)가 있었다.
頑固(완고)한 家庭(가정)의 挽留(만유)를 무릅쓰고 나아가 弱冠 十八歲(약관 18세)에 寧越公立普通學校(영월공립보통학교)를 卒業(졸업)하였다. 때는 日帝의 彈壓(탄압)이 날로 더하여 겨레의 怨恨(원한)은 山河(산하)에 사무치고 農村(농촌)의 貧窮(빈궁)은 骨髓(골수)에 깊어갔다.
公(공)은 決然(결연)히 일어나 農村問題(농촌문제)는 産業開發(산업개발)로 經濟自立(경제자립)에 있음을 斷定(단정)하고 그 당시 收益性(수익성)이 높다는 잎담배 生産分野(생산분야)에 投身(투신)키로 뜻을 굳혔다.
1929년 영월경작조합(寧越耕作組合) 技士(기사)로 발탁되어 混亂(혼란) 激動期(격동기)에 面政(면정)을 잘 收拾(수습)하였고 그 後(후) 同面 農民會長(동면 농민회장)에 被選(피선)되기도 하였다.
1952년 地方自治制實施(지방자치제실시)에 따라 北面面議會副議長(북면면의회부의장)에 被選(피선)되고, 仝年 民選面長(동년 민선면장)으로 選任(선임)되어 滿三年(만3년) 동안 面民(면민)의 福趾(복지)에 獻身(헌신)하였다.
1956년 8월 江原道議會議員(강원도의회의원)으로 當選(당선) 되니 望重(망중)한 聲譽(성예)가 鄕道(향도)에 떨쳤다.
1961년 8월 組合員(조합원)의 絶對的(절대적)인 支持(지지)로 寧越 葉煙草生産組合長(영월 옆연초생산조합장)으로 選任(선임)되어 七回連任 二十年間(7회연임 20년간)을 在任(재임)하던 中(중)
1979년 2월 11일(음력 1월15일) 宿患(숙환)으로 卒(졸)하니 遠近(원근)이 모두 크게 슬퍼하였다. 이로 미루어 公(공)의 德望(덕망)과 組合員(조합원)의 信任度(신임도)를 忖度(촌도)할 수 있다.
公(공)은 젊음과 꿈과 情熱(정열)을 農民(농민)의 權益擁護(권익옹호)와 組合發展(조합발전)에 마지막 一瞬까지를 아낌없이 바쳤다.
現組合廳舍建立(현조합청사건립)은 公(공)의 血誠(혈성)의 結昌(결창)으로 組合史(조합사)에 기리 남을 業績(업적)의 하나이다.
한 때 聯合會任員(연합회임원)으로 連任(연임)된 바도 있고 專賣廳長(전매청장)으로부터 模範組合長(모범조합장)으로 認定(인정)받아 感謝牌(감사패)와 功勞賞(공로상)을 받기도 하고 聯合會長(연합회장)으로부터 組合指道育成賞(조합지도육성상)을 받기도 하였다.
뜻을 세운 곳에 結實(결실)이 있고 德(덕)을 쌓은 곳에 따르는 이가 있다.
寬厚(관후)한 襟度(금도) 軒昴(헌묘)한 儀表(의표) 壁立千仞(벽립천인)의 그 氣像(기상)을 追慕(추모)하며
公(공)의 生前(생전) 남기고 간 그 功績(공적) 잊지 못해 기리 千秋(천추)에 남기고자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이에 碑(비)를 세운다.
1980년 5월27일
寧越 葉煙草生産組合員一同(영월엽연초생산조합원) 竪(수)
聯合會長(연합회장) 豊山(풍산) 柳時碧(유시벽) 撰(찬)
眞城(진성) 李完栽(이완재) 書(서)
<금강공원 현장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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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종(野隱公야은공) 충의비
본관은 羅州(나주), 生年 未詳(생년 미상), 이름은 嗣宗(사종), 號(호)는 野隱(야은)이다.
武科(무과)에 급제하여 세자를 시위하는 翊衛司 翊衛(익위사 익위)를 거쳐 軍威縣監(군위현감)으로 있었다. 상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왕(노산군)을 모시기 위하여 군위현감 직을 사직하고 영월로 와서 운둔생활을 하며 상왕(노산군)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1457년 음력 10월 24일 상왕(노산군)이 승하하자 비통함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자결 하려 하자 그의 아들 ‘중경’이 울면서 말하기를 "임금을 위하여 盡忠(진충)하심은 당연한 도리이오나 반드시 임금을 戡葬(감장)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상왕을 염장한 후에 세상을 떠나심이 옳지 않겠는지요."라면서 애원하였다. ‘상왕의 시체를 감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칙명이 있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1457년 10월 24일 어두운 밤에 상왕의 시신을 ‘호장 엄흥도’와 그의 ‘아들 삼형제’가 주동이 되고, ‘야은공’은 ‘아들 중경’을 데리고 영월 冬乙旨山(동을지산.지금의 莊陵)에 상왕의 시신을 암장하고는, 아들 중경에게 당부하기를 “余歸田, 牲以子孫, 爲樵牧, 不求功名”, "余歸田(여귀전)너는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며, 牲以子孫 爲樵牧(생이자손 위초목)이 후 자손들은 나무나 하고 소를 기르며, 不求功名(불구공명)공명을 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淸冷浦(청냉포) 깊은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東鶴誌 卷之三 동학지 권지삼)
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월군과 영월향교가 주관하여 1992년 11월 18일(음력 10월 24일) 영월읍 금강공원에 충의비를 건립하였다. 이어 1997년 4월 4일(한식 다음날) 영월공고 뒤편에 ‘충절사’를 신축한 후 三忠臣삼충신(忠毅公嚴興道충의공엄흥도, 野隱公丁嗣宗야은공정사종, 秋益漢추익한)의 影幀(영정)을 봉안하고 해마다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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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丁大億 義士(정대억 의사) 순국비
전면 비문 : 生 1872년. 歿 1908년. 36세에 생을 마감하시다.
본관 : 羅州. 字 : 敬天.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후면 비문 : 영월읍 삼옥리 출신인 정대억(1872~1908)의사는 야은공 군위현감 정사종의 후손으로서 字는 敬天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그는 지조가 굳고 강직한 성품으로 대의를 위해서는 항상 남보다 앞장서는 인물로 일찍이 乙巳義兵(을사의병.1905년)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丁未七條約(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니 국운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우리민족은 그들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며 痛恨(통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다.
의분을 참지 못한 義士(의사)는 1907년 8월19일 酒泉(주천)에서 道倡義大將(도창의대장)에 추대된 李康秊(이강년)과 함께 丁未義兵(정미의병.1907년)에 참가하여 영월 주천면 판운리 및 덕포리 獨山(독산)전투와 제천, 단양, 충주 등지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여 격퇴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丁大億 義士(정대억 의사)는 1908년 6월3일 청풍면 금수산 까치성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영월로 압송되었으며 일주일 후인 6월10일에 왜병들은 영월읍 五里亭(5리정)에서 義士(의사)의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살해하니 그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정대억 의사는 오직 救國(구국)의 一念(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분이다.
이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義士(의사)의 崇高(숭고)한 뜻을 靑史(청사)에 길이 빛내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光復五十(광복50)주년을 맞아 이 순국비를 세운다.
서기 1995년 8월 15일
세움 : 영월군 군수 김태수
영월교육청 교육장 이재학
영월문화원 원장 김승수
영월군번영회 회장 정문원
글 : 영월향토사연구회 회장 엄흥용
씀 : 나주정씨 야은공파 종친회 회장 정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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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 全在奎 硏究員 追慕碑(의사 전재규 연구원 추모비)
연혁
성명 : 전재규(全在奎)
본적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9리 771-3번지
생년월일 : 1976년 2월11일
가족관계 : 부(父) 전익찬. 모(母) 김명자. 제(弟) 전정아
학력사항
1988년 2월. 내성초등학교 졸업
1991년 2월. 영월중학교 졸업
1994년 2월. 영월고등학교 졸업
1994년 3월~1998년 8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부 지구시스템 전공. 이학사
1999년 3월~2003년 12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구환경과학부 지구물리학 전공
경력사항
1999년 4월~2001년 6월. 육군 예비역 병장
2003년 3월~2003년 7월. (주)삼보지오텍 근무
2003년 11월~2003년 12월. 한국 해양연구원 제17차 남극 월동 연구대 참가
사고개요
상기인은 대한민국 제17차 남극 과학연구단 월동대로 선발되어 2003년 11월 20일 출국.
2003년 11월25일 세종기지에 도착하여 동 월동대 지구 물리 연구원으로 근무 중 남극 킹 죠지섬 해상에서 2003년 12월6일(현지시간) 세종기지로 귀환도중 실종된 동료 월동대원(3인)을 구조하기 위하여 구조대에 자원 동참하여 2003년 12월7일 19시00분경 세종기지 출발 후 2003년 12월 7일 20시 50분경 악천후로 인하여 남극 킹 죠지섬 인근 Ardley 섬 해상에서 구조선이 전복되어 순직함.
늘 푸른 창공을 향한 꿈을 이역만리 남극에서 접고 님은 인류평화와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남극 세종기지에서 헌신하다가 동료를 구하고자 차디찬 노도에 몸을 맡겨 그 뜻을 이루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남겨 놓은 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님이 사랑하던 조국과 우리 모두는 그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작은 비를 빚어 후대에 남기려 합니다.
전재규 연구원을 추모하며
- 공지영
자연을 탐구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임을 보여준,
아름답고 젊은 과학자를 여기 기리고자 합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남극의 긴 밤과 긴 낮
눈과 바람과 별과 달,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위대하며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희망을 가지는 일이고
자기를 버리고 죽는 일은 영원히 사는 길임을 가르쳐준
전재규 연구원
이제 그로 인하여 남극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빙하 위로 피어나는 붉은 꽃 한송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2003년 12월7일 연구원에 추서
2003년 12월 30일 의사자로 결정
2003년 12월31일 국민훈장 석류장 추서
2007년 10월 13일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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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錦江亭)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 ○ 위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893번지
금강정(錦江亭)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만추(晩秋)의 계절이 되면 절벽 밑으로 흐르는 동강(금장강)에 단풍잎이 붉게 비치어 마치 한 폭의 비단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금강정(錦江亭)이라 하였다.
1428년(무신년 戊申年 세종 10년)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처음 건립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10)에 군수 자삼(子三) 이무(李堥)가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
임자년(壬子年, 1792년 정조 16)에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다시 고쳤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계양식(翼工系樣式)으로 겹처마에 8작 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금강정(錦江亭)은 영월팔경(寧越八景)가운데, 금강추월(錦江秋月), 태화단풍(太華丹楓), 계산숙무(稽山宿霧), 봉소귀범(鳳沼歸帆)의 빼어난 경치를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강 건너에는 옛날에 ‘상덕촌(尙德村)’과 ‘밀적포(密積浦)’라고 불리어지던 ‘덕포리(德浦里)’가 있는데, 옛날 마포나루터를 출발한 소금배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까지 와서 물건을 팔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창건했다고 『영월부읍지(寧越府邑誌)』전해지고 있다. 『영월제영(寧越題詠)』에 의하면 그 후, 영월군수 1684년(숙종10) 자삼(子三) 이야(李壄 )가 자신의 녹봉을 털어서 정자를 다시 건립했고, 1684년(숙종 10)에 송시열(宋時烈)이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누정】금강정(錦江亭) 금장강의 언덕 절벽 위에 있다. 선덕(宣德) 무신년에 군수 김부항(金復恒)이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는 금장강에 임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금봉연을 바라본다. 강 밖에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들과 성긴 울타리들이 뽕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한다. 남쪽에는 밀적포가 있으니 나무들이 울창하고, 마을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기문
寧越郡錦江亭記 영월군 금강정 기 / 尤庵 宋時烈 (우암 송시열)
李侯子三(이후자삼)。군수 이자삼은
嘗立朝正言(상립조정언)。일찍이 정언으로 조정에 나아갔으나
廢錮累年矣(폐고루년의)。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하였다.
旣而時事更新(기이시사경신)。드디어 시사(時事)가 경신(更新)되어
群賢彙征(군현휘정)。 어진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정으로 나아갔으나
而侯又抹摋於時世(이후우말살어시세)。 군수(郡守)는 또 당시 세상에서 무시되어
與君平相棄之矣(여군평상기지의)。김만준(金萬埈, 자 君平)과 함께 버려졌다.
侯性好山水(후성호산수)。군수는 산수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는데
聞寧越有蓬萊,太華,會稽,錦江之勝(문영월유봉래,태화,회계,금강지승)。
영월에 봉래, 태화, 회계, 금강 등의 명승(名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悠然有句漏之興(유연유구루지흥)。자연스레 시구(詩句)가 일어나
求出爲郡守(구출위군수)。 군수를 자원하여 나갔는데
其江山淸趣(기강산청취)。 그곳 강산의 청신(淸新)한 정취(情趣)가
果愜宿願(과협숙원)。과연 바라던 바와 일치하였다.
而所謂錦江亭者(이소위금강정자)。 그러나 소위 금강정(錦江亭)이라는 정자는
老而支拄(로이지주)。 쇠퇴하여 버팀목에 떠받쳐져 있었는데
殆不可徙倚矣(태불가사의의)。 거의 그곳을 배회할 수 없을 정도였다.
遂割淸俸(수할청봉)。 드디어 박봉(薄俸)을 쪼개어
將以新之(장이신지)。장차 새롭게 하려고 하니
則監司魚侯翼之聞而嘉之(칙감사어후익지문이가지)。‘감사 어진익(魚震翼)’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亦助事力(역조사력)。또한 힘을 보태었다.
未幾而良構屹然改觀(미기이량구흘연개관)。얼마 되지 않아 정자를 완성하여 새롭게 보인 즉
則以上諸山(칙이상제산)。 정자보다 더 높은 여러 산들이
擧入於拄笏之中(거입어주홀지중)。 모두 기둥 사이로 들어오고
而十里淸流(이십리청류)。10리를 흐르는 맑은 강물은
映帶乎憑檻之外矣(영대호빙함지외의)。 난간 밖에서 서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주) 李侯子三 : 영월군수(寧越郡守) 이무(李堥, 자 子三)
주) 會稽山회계산 :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남동쪽에 있는 명산. 오왕 부 차(夫差)가 월왕 구 천(勾踐)을 포위(包圍)한 곳
淸趣 청취 : 맑고 깨끗한 흥취(興趣)
侯樂其地僻事簡(후악기지벽사간)。 군수는 땅이 후미지고 업무가 한가함을 즐기며
日哦其間(일아기간)。 날마다 그 가운데에서 시를 읊었으니
蓋屋未就(개옥미취)。집 짓는 일을 완성하기 전에
而詩已成矣(이시이성의)。시(詩)를 이미 지어놓았으리라.
夫江山之名(부강산지명)。무릇 강과 산의 이름은
固有不約而冥會者(고유불약이명회자)。 진실로 기약하지 않아도 암암리에 만나는 경우가 있어
人之覽之者(인지람지자)。사람들이 이를 봄으로 인해서
因之而起其遐想焉(인지이기기하상언)。그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然今蓬萊之上(연금봉래지상)。그리나 지금 봉래산 위에는
未必有不死之藥(미필유불사지약)。반드시 불사약(不死藥)이 있는 것이 아니고,
太華之顚(태화지전)。 태화산(太華山)의 꼭대기에
未必有十丈之蓮(미필유십장지련)。 반드시 10 장(丈)이나 되는 연(蓮)이 있는 것도 아니며,
而會稽之下(이회계지하)。회계산 아래에
亦豈有芰荷之水乎(역기유기하지수호)。또한 어찌 기하(芰荷)의 강물이 있겠는가?
惟所謂錦江者(유소위금강자)。 생각건대 소위 금강(錦江)이라는 것은
是蜀中之水(시촉중지수)。 이것이 촉(蜀) 지방에 있는 강(江)으로서
而屢形於草堂之詩(이루형어초당지시)。초당의 시에 여러 형태로 보이니
無亦有冤禽之啼血乎(무역유원금지제혈호)。원통한 새가 울면서 토했던 핏물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月白山空(월백산공)。 달 밝고 산이 텅 비었을 때
如聞其一二聲(여문기일이성)。 만약 한두 마디의 그 새소리를 듣는다면
則侯必悽然而泣下(칙후필처연이읍하)。 군수는 반드시 처연(悽然)하게 눈물이 흘러내려
不覺淸興之翻成感緖矣(불각청흥지번성감서의)。 맑은 흥으로 바뀌는 느낌의 실마리가 되는 것도 모를 것이리라.
未知侯果然否(미지후과연부)。 군수가 과연 그랬을지 안 그랬을지 알지 못하겠기에
聊以書問之(료이서문지)。오로지 글로 써서 물어보노라.
원문 : <宋子大全卷一百四十四 / 記(송자대전144권 / 기. 한국고전종합DB>.
해역 : <陶山書院博約齋 權甲鉉 (도산서원박약재 권갑현)>. http://cafe.daum.net/dosanseowon
옮긴이 : 金源植(김원식)
遐想(하상):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생각함
芰荷(기하) : 芰 마름 기. 1. 마름(바늘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의 수초). 荷 연 하. 멜 하. 1. 연(蓮). 연꽃과의 여러해살이 물풀.
所謂(소위) : ①이른바 ②세상(世上)에서 흔히 말하는 바
○ 시문
○ 錦江亭(금강정)
退溪 李 滉(퇴계 이황)
鵑啼山裂豈窮年(견제산열기궁년) 산이 찢기도록 두견이 울어 그 몇 해인가
蜀水名同非優然(촉수명동비우연) 촉과 강 이름이 같으매 우연치 않도다.
明滅曉簷迎海旭(명멸효첨영해욱) 번쩍이는 처마에 바다햇살이 비치고
飄蕭晩瓦掃秋煙(표소만와소추연) 오래된 기왓장에 가을의 연기가 소소하다.
碧潭風動魚遊錦(벽담풍동어유금) 푸른 강에 바람 일 때 고기가 비단같이 놀고
靑壁金生鶴踏氈(청벽금생학답전) 푸른 벼랑에 구름이 이니 학이 방석에 내려앉았네.
更約道人携鐵笛(갱약도인휴철적) 다시 도인과 언약하여 쇠 피리를 가지고 와서
爲來吹罷老龍眠(위래취파노용면) 피리한번 부니 늙은 용이 잠을 깨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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鵑啼山裂豈窮年(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는 어찌 한 평생 산이 찢어져라 우는지?
蜀水名同非偶然(촉수명동비우연) 촉나리의 강 이름도 한 가지라 우연이 아니구나.
明滅曉簷迎海旭(명멸효첨영해욱) 큰 아침 해를 맞으니 가물거리던 처마가 다가오고,
飄蕭晩瓦掃秋烟(표소만와소추연) 낡은 기와를 칠하듯 가을 안개 쓸쓸히 나부끼네
碧潭楓動魚游錦(벽담풍동어유금) 단풍나무 흔들리는 푸른 물가엔 아름다운 물고기 노닐고
靑壁雲生鶴踏氈(청벽운생학답전) 구름이 이는 푸른 절벽엔 학이 융단을 밟고 있네.
更約道人携鐵笛(갱약도인휴철적) 도인과의 약속을 바꿔서 날라리 들고서,
爲來吹破老龍眼(위래취파노룡안) 남김없이 다 불어 잠자는 늙은 용을 돌아오게 하리라.
※ 출처 : 退溪集(퇴계집) 退溪先生文集券之一 詩 (퇴계선생문집권지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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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江亭(금강정)
黃 喜(황 희)
軒高能却署(헌고능각서) 난간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簷豁易爲風(첨활이위풍)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시원하더라
老樹陰垂地(노수음수지) 늙은 나무가 땅에 그늘을 드리웠고
遙岺翠掃空(요령취소공) 멀리 펼쳐진 푸른 산은 하늘인 듯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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軒高能却署(헌고능각서) 헌함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簷豁易爲風(첨활이위풍) 처마가 트여서 바람이 불어오기 쉽다.
老樹陰垂地(노수음수지) 늙은 나무는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
遙岺翠掃空(요령취소공) 먼 봉우리는 푸르름이 공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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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江亭(금강정)
南元壽(남원수)
봉래산과 금강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꽃잎 떨어진 맑은 물에 민충 절벽 잠겼구나
푸른 수심은 가신님의 넋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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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
금강공원 동강의 절벽 위에는 조선시대 영월의 기생이었던 경춘(본명 고노옥)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동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는데 그녀의 심성을 후대에 알리고자 1795년(정조 19년)『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비석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석 뒷면의 내력을 살펴보면, 소설 ‘춘향전’의 인물과 같아 춘향전의 실존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비문의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
越妓瓊春(월기경춘) 영월기생 경춘(瓊春)은
故李侍郞莅越時(고이시랑리월시) 예전 이 시랑(李侍郞)이 영월 땅에 부임해 왔을 때,
所眄以其初許身也(소면이기초허신야) 눈에 들은 바 되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故欲自潔以守(고욕자결이수) 이런 고로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여 수절코자 하였는데,
及後官之來(급후관지래) 후임 관리(부사)가 오게 되자
衙內人有强之者(衙內人有强之者) 관아 내의 사람으로 그녀를 강제하는 자가 있어서,
數被箠楚(수피추초) 수차례 추초(箠楚: 볼기를 치는 형벌)를 당하매,
殆不能堪(태불능감)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一日盛服而入(일일성복이입)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서 (관아에)들어
言笑自如曰(언소자여왈)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倘無數日呼喚(당무수일호환) “만약 수일간만 부름이 없다면,
當調病軀(당조병구) 마땅히 병난 몸을 잘 조섭하고는
一聽所欲(일청소욕) 원 하는 바(욕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翌朝遂往訣其父墳(익조수왕결기부분) 이튿날 아침 마침내 아버지 묘소로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歸爲諸弟梳(귀위제제소) 돌아와 여러 동생들을 위해 머리를 빗겨 주었다.
仍起往錦障江邊(잉기왕금장강변) 이어서 일어나 금장강변으로 가서는
坐於絶石崖歌數闋(좌어절석애가수결) 벼랑 끝 단애에 앉아서 노래 몇 수를 부르니
泣下沾裳(읍하첨상) 눈물은 치마를 적시는데,
悲恨不自勝時(비한불자승시) 슬픔과 한을 누를 수가 없었다.
稚弟在傍(치제재방) 그 때 어린 동생이 옆에 있었기로,
乃詒而使之去(내이이사지거) 이에 그를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고는,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즉분신투수사세임진십월) 즉시 분연히 몸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니, 때는 임진년 10월로
其年十六(기년십육) 그녀 나이 16세였다.
家人奔往(가인분왕)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拯之衣衿(증지의금) 옷깃을 건져 올리는데,
有隱映物(유은영물) 무엇인가 은연히 비치는 것이 있어서
裂縫視之(열봉시지) 꿰맨 자리를 뜯고서 보니,
乃李侍郞筆(내이시랑필) 과연 ‘이 시랑’의 필적이었다.
嗚呼 其死也(오호 기사야)오호라! 그녀의 죽음은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시고지종용취의자하여재)지난날 의를 위해 의연히 목숨 바쳤던 이들과 견주어 볼 때, 못함이 없지 않은가!
今都巡察使巽菴李公(금도순찰사손암이공)이제 도순찰사(都巡察使) 손암(巽菴) 이공이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이대총재출안관동절행부) 대총재(大冢宰)로서, 관동의 절행부(節行部)를 살피던 차에
過越州聞而奇之曰(과월주문이기지왈) 월주(영월)를 지나다가 보고를 접하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以賤籍而乃能辨此(이천적이내능변차) “천적(賤籍)에 오른 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니
此眞烈女也(차진열녀야) 이는 참으로 열녀로다.
烏可無樹風聲之道乎(오가무수풍성지도호) 어찌 풍성지도의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수연봉속월수비입일편석식기처) 마침내 봉급을 내어
영월군수에게 그녀가 순절한 곳에 일편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기도록 부탁하고,
又屬余記其顚末(우속여기기전말) 또한 나에게는 그 전말의 내용을 기(記)하도록 부탁하였다.
余惟瓊春之死(여유경춘지사)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距今爲二十四年(거금위이십사년) 오늘로 24년이 지나서야
始得表顯之(시득표현지) 비로소 그녀를 드러내어 표장하게 되었으니,
微我公瓊春之節其將湮沒而已也(미아공경춘지절기장인몰이이야) 우리 공(巽菴李公秉鼎 손암이공병정)이 아니었다면
경춘의 절행 그것은 어쩌면 인몰되어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乙卯八月(을묘팔월) 을묘(1795년, 정조 19년) 8월
平昌郡守南羲老記(평창군수남희로기)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문을 짓고,
寧越府使韓鼎運書(영월부사한정운서)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비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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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巖(낙화암)
상왕(노산)이 객사 관풍헌 앞마당에서 승하하시게 되자 상왕을 모셨던 시녀와 종인들은 ‘이승에서 모셨던 임금님이 저승에 가셨으니 빨리 따라가서 모시자’ 하여 절벽아래 금장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한 장소이다.
1726년 영월부사를 지낸 윤양래의 탁본첩에 기록되어 있는 실물의 낙화암 비석은 금장강 물속에 잠겨있고, 현재의 비석은 1924년에 세웠으며, 비문(碑文)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면) : 落花巖
(후면) : 端廟朝諸侍女及諸從人(단묘조제시녀급제종인)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同日投水殉節(동일투수순절) 같은 날 금장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英宗戊寅(영종무인) 영조 34년(1758)년에
愍忠祠賜額(민충사사액)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英宗壬戌知府洪聖輔(영종임술지부홍성보) 영조 18년(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始立碑刻落花巖三字(시입비각낙화암삼자)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隆熙庚戌夏(융희경술하)융희 경술(1910)년 여름에
碑頭半落沉水(비두반락침수) 비석 머리 부분 절반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았는데,
同年冬有何不良之人(동년동유하불량지인)동년 겨울 어떤 못된 부랑자가
投碑于水忍不可言(투비우수인불가언)나머지 비석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今玆本郡守李錫僖·保勝會長池昌永(금자본군수이석희·보승회장지창영)
이에 본 군수 이석희(李錫僖) ‧ 보승회장 지창영(池昌永)이
詢謀僉同(순모첨동) 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上報李王(상보이왕) 이왕(李王)에게 보고를 올리고,
特蒙激勸之恩允(특몽격권지은윤) 특별히 격려하는 윤허를 받은바 힘입어
不日告功(불일고공)얼마 아니 되어 일을 모두 마치고
立于舊址爾(입우구지이) 옛터에 비를 세우게 되다.
甲子 參月 日 갑자(1924년) 3월 일
本郡守 李錫僖 본 군수 이석희
保勝會長 池昌永 보승회장 지창영. 石工 李聖心 석공 이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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殉節碑(순절비)
(전면)殉節碑
(후면)
李朝 端廟 駐蹕寧越(이조 단묘 주필영월)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丁丑十月 二十四日(정축십월 이십사일) 정축년 10월 24일
天命不休 奄遭昇遐(천명불휴 엄조승하) 천명이 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侍從侍嬪 九十餘人(시종시빈 구십여인)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一體殉節(일체순절)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다.
花落成仁(화락성인)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忠貫日月(충관일월)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哀拯江山(애증강산)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名登靑史(명등청사) 그들의 이름은 청사에 올라
千秋不朽(천추불후)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舊址不變(구지불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立碑表忠(입비표충)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寧越面長金南圭 영월면장 김남규
面議員一同 면의원 일동
檀紀四二八八年十一月 日 建立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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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烈巖記 / 洪直弼(창렬암기 / 홍직필)
人皆有一死(인개유일사)。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死得其所難矣(사득기소난의)。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苟得其所(구득기소)。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則死有榮於生者(칙사유영어생자)。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以所惡之甚於所欲也(이소악지심어소욕야)。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然死生之於人大矣(연사생지어인대의)。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在男子猶然(재남자유연)。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于婦人乎(황우부인호)。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재관면패옥지군자유연)。관을 쓰고 패옥을 찬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充後宮下陳之類乎(황충후궁하진지류호)。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三代之制(삼대지제)。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世婦以下(세부이하)。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自稱曰婢子(자칭왈비자)。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婢之言卑也(비지언비야)。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未必皆敦詩禮之敎(미필개돈시례지교)。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著柔靜之德(저유정지덕)。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彼引羊車得蝶幸者(피인양차득접행자)。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固是貽羞彤管(고시이수동관)。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而寄情邊衣(이기정변의)。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題詩紅葉(제시홍엽)。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用紓其幽怨者(용서기유원자)。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亦豈女史內官之道哉(역기녀사내관지도재)。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以故歷代革國之際(이고력대혁국지제)。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未聞有宮婢殉國者(미문유궁비순국자)。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豈秉彝之性爾殊哉(기병이지성이수재)。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積欝之氣(적울지기)。켜켜이 쌓인 울분이
因變故而發之(인변고이발지)。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所以不志于死也(소이불지우사야)。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當百濟之亡(당백제지망)。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宮人爭投於白馬江(궁인쟁투어백마강)。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故名之曰落花巖(고명지왈락화암)。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花巖之名(화암지명)。낙화암이라는 이름은
將與天地同其悠久(장여천지동기유구)。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而扶蘇屋社(이부소옥사)。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猶有一段生氣者(유유일단생기자)。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賴有是耳(뢰유시이)。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월약단묘지손황우월야。 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구궁인수시우청령포관풍헌)。 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調護其飮食起居(조호기음식기거)。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備經百罹於霧露之中(비경백리어무로지중)。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而玉體無愆者(이옥체무건자)。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左右服勤之功(좌우복근지공)。與爲多焉耳(여위다언이)。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逮端廟陟遐(체단묘척하)。단종께서 승하하시자,
咸赴越之錦障江而死(함부월지금장강이사)。 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浮屍蔽江(부시폐강)。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是日也雷雨大作(시일야뢰우대작)。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烈風拔木(렬풍발목)。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黑霧彌天(흑무미천)。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經夜不散(경야불산)。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이날이 바로 정축년(1457)10월24일이다.
邑人憐之(읍인련지)。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名其地曰落花巖(명기지왈락화암)。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襲白江也(습백강야)。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設壇于巖上(설단우암상)。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有事則禱(유사칙도)。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知府洪聖輔樹三字碑(지부홍성보수삼자비)。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卽巖西十數武(즉암서십수무)。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建祠而祭之(건사이제지)。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愍忠祠是也(민충사시야)。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後知府曹夏望(후지부조하망)。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改落花曰彰烈(개락화왈창렬)。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鑱巖壁而銘之(참암벽이명지)。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余來越中(여래월중)。나는 영월에 와서
遊錦江亭(유금강정)。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自亭而上(자정이상)。위로 올라가
歷愍忠祠撫花巖碑(력민충사무화암비)。 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泛舟錦江(범주금강)。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摩挲彰烈巖(마사창렬암)。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徘徊久之(배회구지)。한참동안 배회하며 不忍去(불인거)。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수사자위언월야환패황홀)。 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往來於祠巖之間(왕래어사암지간)。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若有覩焉云(약유도언운)。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苟其然者(구기연자)。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芳魂貞魄(방혼정백)。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不與大化同其冥漠歟(불여대화동기명막여)。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嗚呼。아아!
婦寺之忠(부시지충)。부시(婦寺 시녀와 종인)의 충성스러움은
惟服事宮闈(유복사궁위)。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趨走唯諾而已(추주유낙이이)。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不遑講君臣之大義(불황강군신지대의)。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辨熊魚之取舍(변웅어지취사)。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而臨難致命(이림난치명)。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視死如歸(시사여귀)。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無一人苟免(무일인구면)。若斯人之爲者。약사인지위자。 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歷選千古(력선천고)。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靡與倫匹(미여륜필)。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詎不奇哉(거불기재)。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當是時(당시시)。당시
背恩喪義(배은상의)。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賣國販君者(매국판군자)。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咸出於赤芾蔥珩(함출어적불총형)。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而蹈節輕生(이도절경생)。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乃在於紫衣紅袖何哉(내재어자의홍수하재)。 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所謂卿士(소위경사)。그 까닭은 무엇인가?
利害亂其中(리해란기중)。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禍福奪其外(화복탈기외)。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而巧於趨避(이교어추피)。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故瞞天讕人(고만천란인)。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至於斯極(지어사극)。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若婢子者(약비자자)。궁녀의 경우는
全理義之良心(전리의지량심)。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不爲怵疚(불위출구)。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靡所計較(미소계교)。요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故决性命於危迫之際(고결성명어위박지제)。 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而有所不避也(이유소불피야)。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端廟聖德罔愆(단묘성덕망건)。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불이충령이혹홀관어지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以故無內寵(이고무내총)。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사인자개비승은지류야)。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特以眞誠所發(특이진성소발)。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與共患難(여공환난)。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義不可以苟活耳(의불가이구활이)。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豈欲與殉名之烈士(기욕여순명지렬사)。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爭不朽於竹帛哉(쟁불후어죽백재)。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昔田橫之客五百(석전횡지객오백)。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重峯之士七百(중봉지사칠백)。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而咸同日幷命者(이함동일병명자)。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시내남자지신의관지족)。 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氣義相感(기의상감)。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至百死而不貳者固也(지백사이불이자고야)。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若至廁椒掖之側(약지측초액지측)。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侍巾屣之末者(시건사지말자)。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기지태산홍모지중경재)。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用能殺身成仁如此(용능살신성인여차)。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比兩者又加難矣(비량자우가난의)。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是所謂侍御僕從(시소위시어복종)。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罔非正人者耶(망비정인자야)。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嗚呼(오호)。아아!
目見天地崩坼(목견천지붕탁)。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人物消盡(인물소진)。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而鼎湖之弓劒莫攀(이정호지궁검막반)。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蒼梧之廵狩未追(창오지순수미추)。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劫火餘焰(겁화여염)。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炎炎來逼(염염래핍)。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亦何忍無死哉(역하인무사재)。어찌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시기가이이자호。구사약인)。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老死帷閫之內(로사유곤지내)。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孰知其純忠姱節(숙지기순충과절)。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與日月爭光乎(여일월쟁광호)。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然有知無知(연유지무지。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亦何與當人分上哉(역하여당인분상재。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只是天理當然(지시천리당연)。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吾不得不然耳(오불득불연이)。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嗚呼。오호。
天憂無疆(천우무강)。끝없는 우환일지라도
無往不返(무왕불반)。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端廟復九五之位(단묘복구오지위)。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備千乘之禮(비천승지례)。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黃流玉瓚(황류옥찬)。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饗于淸廟(향우청묘)。종묘에 모셔졌고,
珠丘花欄。煥乎喬陵(주구화란。환호교릉)。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死事之宗英文武(사사지종영문무)。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咸配食于仙寢之傍(함배식우선침지방)。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而侍女寺人(이시녀시인)。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亦與於其間(역여어기간)。여러 임금께서
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렬조추원지성숭보지전)。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殆無虧欠(태무휴흠)。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於是焉神理人情(어시언신리인정)。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各安其正矣(각안기정의)。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沉江化碧之血(침강화벽지혈)。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其將怡渙而無憾乎(기장이환이무감호)。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抑亦凝結不散(억역응결불산)。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與盂山錦水(여우산금수)。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同其崩絶乎(동기붕절호)。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吾不得以知之(오불득이지지)。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故述以文而志之(고술이문이지지)。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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愍忠祠(민충사)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 1984.6.2 ● 시대 : 조선시대
● 건립 : 영조18년(1742) 어명으로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 세움
단종 임금이 훙서[薨逝]·붕어[崩御]·승하[昇遐]하시게 되자 그 비보를 접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신 종인과 시녀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다.
민충사는 동강 절벽위에 있는 금강정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당입구에는 윤사국(尹師國)이 쓴 현판이 걸려 있고, 김병선(金柄璇)의 중수기(重修記)와 안구순(安球淳)의 중수기가 현판 뒤쪽에 걸려 있다.
세조 3년(1457)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한 뒤 단종을 모시던 종인(從人)과 시녀가 금장강에서 투신하여 죽자, 마을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이곳을 ‘낙화암(落花岩)’이라 부르고 단을 설치하여 기도하였다.
영조 18년(1742) 왕명으로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1741년 9월15일 부임~1742년6월7일 사망)가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愍忠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왼쪽에는 ‘從人之神位(종인지신위)’, 오른쪽에는 ‘侍女之神位(시녀지신위)’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영조 22년(1746)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낙화암의 이름을 「창열암(彰烈巖)」이라고 바꾸고 영조 25년(1749)에는 부사 김응복(金應福)이 사당을 보수하여 「민충(愍忠)」이라 개칭하여 불렀으며, 영조 34년(1758) 민충(愍忠) 사액(賜額)을 받아 중수하였고, 정조 15년(1791)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사우(祠宇)를 개건하면서 강원도관찰사 윤사국이 현판을 썼다.
이후 한국전쟁 때 대파된 것을 1956년 군수 남원수(南元壽)가 중수하고, 1986년 영월군수 안구순(安球淳)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한식날과 음력 10월 24일(단종의 기진제 忌辰祭. 승하하신 날)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 영조 34년(1758 무인년) 10월 4일
장릉을 봉심한 홍상한을 소견하고 창절 서원과 민충사를 개수토록 하다
~낙화암(落花岩)이 있는데, 그때 궁인(宮人)들이 사절(死節)하였기 때문에 ‘낙화암’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토민(土民)들이 사당을 세운 것도 또한 치제(致祭)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또 들으니, 그곳에서 약간 몇 리(里)쯤 떨어진 곳에 민충(愍忠)이라고 하는 작은 사(祠)가 있다고 하는데,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중건(重建)하도록 하라. 이런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절개를 세운 것은 지나간 역사에서는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중건한 뒤에도 도신으로 하여금 수령(守令)을 차정(差定)하여 치제하도록 하라.~
[민충사(愍忠祠) 역주 장릉지속편 162~171쪽]에서의 기록
세조3년[정축 1457] 노산군의 노복과 시녀가 영월군에서 동쪽으로 2리쯤 떨어진 금강(錦江)변의 층층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 고을 사람들은 이들을 가엽게 여기며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巖)’ 이라 명명했고, 그 곁에 제단을 설치하여 기도하는 장소로 삼았다.[영월부지]
영조18년[임술 1742]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 1685~1742)가 낙화암 위에 짤막한 갈석(碣石)을 세우고 ‘落花巖(낙화암)’ 세 글자를 새겼으며 낙화암 앞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3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신령이 깃드는 장소로 삼았다.
그리고 ‘사흘 갈이’의 제전(祭田)을 마련한 뒤, 영월부 호장으로 하여금 그 세금을 거둬들여, 매년 한식 때마다 제사를 설행케 하였다. 이어서 의례 절목[儀節 의절]을 작성하여 영구히 준행할 규식으로 삼았다.
그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유 모년 모월 모일에 호장 모는 감히 노복과 시녀의 신위께 밝게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데 우리 단종께서는 영월에서 왕위를 양보한 뒤, 정축년에 변고를 만나 백마를 타고 골짜기로 돌아가셨지요.
이때 꽃잎이 흩날리고 아름다운 옥이 부서지자 금강도 목메어 울었습니다.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 것은 바로 임금을 위한 절의였지요.
그러나 충성스럽고 절개가 곧은 혼백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바, 저승세계가 적막했고 원통한 기운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청명의 절기를 만났기에 사당 문을 활짝 열고, 삼가 술과 과일, 포와 젓갈을 여러 신위께 공손히 바치나이다[영월부지]
영조22년(1746) 영월부사 조하망(1682~1747)이 상용축문을 고쳐짓고, 매년 한식 및 10월24일에 한꺼번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또한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彰烈巖 창렬암’으로 바꾸었는데 바위에 새기지는 않았다.*(사실은 새겨져있다)
<상용축문 常用祝文>조하망(曺夏望)
端廟至德 (단묘지덕) 단종의 성덕은
在周奉伯 (재주봉백) 주나라 태백과 같거늘
蓁蓁百粤 (진진백월) 초목 무성한 영월 땅에서
事變罔極 (사변망극) 망극한 변고 일어났지.
嗟惟絳幘 (차유강책) 아 붉은 두건 쓴 병사와
爰曁紅袖 (원기홍수) 붉은 소매 저고리 입은 시녀는
間關絶峽 (간관절협) 험준한 골짜기까지 힘겹게 따라와
昕夕左右 (흔석좌우) 조석으로 곁에서 모셨다네.
仙馭莫追 (선어막추) 선왕의 수레 따르지 못했으니
奚惜一死 (해석일사) 한 번의 죽음 어찌 아끼겠는가!
拚得分明 (변득분명) 결연히 목숨을 버린 것은
固自有所 (고자유소)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게지.
嵯峨鐵壁 (차아철벽) 깍아지른 절벽에서
其水淵淵 (기수연연) 깊디깊은 강물 속으로
爭赴如歸 (쟁부여귀) 집으로 돌아가듯 대수롭지 않게
孰後孰先 (숙후숙선) 나린히 다투어 뛰어드니
烈氣天咷 (열기천도) 매서운 기상에 하늘도 흐느끼고
寃氣嶽坼 (원기악탁) 원통한 기운에 저 산도 무너졌지.
江山不老 (강산불노) 강산은 언제나 옛 모습 그대로요
月星永晣 (월성영절) 일월성신은 영원히 빛나건만
人情自激 (인정자격) 사람 마음은 절로 격렬하도다!
百歲如昨 (백세여작) 그 옛날이 마치 어제 일인 양
是日芬苾 (시일분필) 오늘 향기로운 제수 마련하여
爰有禮式 (원유예식) 이렇게 제향 의식 설행하노니
英靈洋洋 (영령양양) 성대한 혼령이시여!
庶幾來格 (서기래격) 내려와 흠향하시길. [영월부지]
영조25년[기사 1749] 영월부사 김응복(金應福 1683~ ? )이 사당을 중수한 뒤 ‘민충(愍忠)’ 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전향청(典香廳) 2칸을 건립하였다.[영월부지]
영조34년[무인 1758] 10월, 장릉(莊陵)을 복위한 지 60년이 지났으므로 대신을 보내 장릉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셨다. 또한 육신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하사하며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치제하도록 명하셨다.
이어서 전교하시기를(전교내용은 승정원일기 영조34년 10월4일 조에 자세하다) “듣건대 이곳에서 몇 리쯤 떨어진 곳에 민충 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관찰사에게 명하여 중건토록 하여라. 이처럼 미천한 자들이 이처럼 절의를 세운 경우는 옛날 문헌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중건을 마치고 나서는 관찰사에게 명하여 수령을 차정(差定)한 뒤 치제케 하여라.” 라 하였다.
그리고 ‘민충’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본도 관찰사 심수(沈鏽 1707~ ? )가 하교에 의거하여 사당 건물을 개건하였다.[정원일기]
동월15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동월27일에 끝마쳤다. 주상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내려간 예관(禮官)들은 민충사에도 겸하여 치제하여라.” 라 하였다. 이에 28일에 치제하고 편액을 걸었다. 편액을 하사하고 치제한 이후, 본부의 향임(鄕任)으로 하여금 매년 두 차례의 제향을 거행케 하였다[영월부지].(*제문은 전하지 않는다)
정조15년[신해 1791] 2월15일, 전교하시기를 “본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영월부에 위치한 민충사의 창건 연대와 본 사당에 배향된 순절한 자들의 규모, 그들의 성명을 기록한 문헌의 유무를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여라.” 하였다.[정원일기]
4월17일,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규장각에 보고하기를 “본부의 민충사는 낙화암 옆에 있는데 바로 단종의 노복과 시녀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입니다. 창건한 연대와 배향된 자들의 성명에 대한 기록은 본래부터 없습니다. 한편 연대가 오래되어 기울고 무너진 탓에 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는바, 이곳 역시 차례대로 수개(修改)할 계획입니다.” 라 하였다. 연신이 이러한 내용을 아뢰자 주상께서 옳게 여기셨다.[정원일기]
<愍忠祠刱建記(민충사창건기)> 홍성보(洪聖輔)
歲辛酉之秋(세신유지추) 신유년(1741. 영조17)가을,
余出守于寧越府(여출수우영월부) 나는 영월부의 수령으로 부임(영조17년 8월15일 임명. 승정원일기)하였다.
府東五里許(부동오리허) 영월부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有落花巖(유낙화암) 낙화암(落花巖)이 있는데,
高四五十丈(고사오십장) 높이가 너댓 길(40~50장) 정도 되는
臨江壁立(임강벽립) 절벽이 강을 마주한 채 서 있다.
莊陵陟遐後(장릉척하후) 단종께서 승하하신 뒤,
侍女從人登是巖(시년종인등시암) 시녀와 노복이 이 바위에 올라
投江而死(투강이사) 강물에 투신하여 죽자,
邑人憐之(읍인련지) 고을 사람들이 이들을 가엾게 여기며
名之曰落花(명지왈낙화)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붙였다.
按『丙子錄』云(안병자록운) 병자록(丙子錄)을 살펴보건데
魯山以天順丁丑十月遇變(노산이천순정축시월우변) “노산군께서는 천순 정축년(1457, 세조3) 10월에 변고를 만났는데,
是二十四日酉時也(시이십사일야) 바로 24일 유시(酉時)였다.
侍女從人爭投郡之東江(시녀종인쟁투군지동강) 시녀와 노복이 영월군 동강(東江)에 다투어 몸을 던지니,
浮屍滿江(부시만강) 수면에 뜬 시체가 온 강에 가득했다.
是日雷雨大作(시일뇌우대작) 이날 천둥과 소나기가 크게 일어나더니
烈風拔木(열풍발목) 사나운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뽑았고,
黑霧彌空(흑무미공) 허공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終夜不散(종야불산)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라 하였다.
噫(아!) 此等是當日使令於王前者也(차등시당일사령어왕전자야) 이들은 당시 임금 앞에서 시중을 들던 자들이다.
士君子盡分所事之義(사군자진분소사지의) 직분을 다해 한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군자(士君子)의 의리에 대해
非有素講於平昔(비유소강어평석) 한 번도 강론한 적이 없는데도,
而皆能委命於變故之際(이개능위명어변고지제) 변고가 일어나자마자 모두 목숨을 바쳤다.
其志有足以悽愴感動(기지유족이처창감동) 그 뜻이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바,
而雖謂之不在五百義士之下(이수위지불재오백의사지하) 이들의 행동이 500명의 의사(義士)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不爲過矣(불위과의) 결코 과장은 아니다.
歷觀前後(역관전후) 전후 사적을 두루 살펴보건대,
凡所以僞莊陵立節者(범소이위장릉립절자) 무릇 단종을 위해 절의를 세운 자들은
無論其死生(무론기사생) 그 생사를 막론하여
靡不崇奉而尸祝之(미불숭봉이시축지) 높이 떠받들며 배향하지 않음이 없었다.
獨此等尙闕一區壇宇以報其誠節羈魂餒鬼(독차등상궐일구단우이보기성절기혼뇌귀)
그러나 유독 이들에게는 그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기 위한 자그마한 제단이나 사당조차 베풀지 않았다. 이에 굶주린 채
啾啾棲遑(추추서황) 떠도는 혼백들이 구슬피 흐느끼며
於錦水`淸泠之間(어금수`청령지간) 금강(錦江)과 청령포(淸泠浦)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거늘,
曾不若無祀鬼有春秋一盂之薦(증불약무사귀유춘추일우지천) 무사귀(無祀鬼)처럼 봄가을로 한 그릇의 제수(祭需)조차 올린 적이 없다.
豈其人微地卑賤(기기인미지비천) 어찌 그 사람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不屑於表章(불설어표장) 표창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未有能闡發乎否(미유능천발호부) 천양(闡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觀人(관인) 사람을 살필 때에는
當觀其所成就(당관기소성취) 마땅히 그가 성취한 바를 살펴야지,
不當以人而廢之(부당이인이폐지) 신분의 미천함 때문에 그 사람의 성취를 폐기해서는 안 된다.
撫跡興想之際(무적흥상지제)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흥에 젖을 때마다,
竊懼其因湮無傳(절구기인인무전) 이들의 행적이 끝내 인멸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逐就巖之西稍(축취암지서초) 마침내 낙화암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아가
擇一淨區(택일정구) 정결한 땅을 고른 뒤,
建三架屋子(건삼가옥자) 3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以作棲神之所(이작서신지소) 신령들이 깃드는 장소로 삼았다.
東一間屬諸從人(동일간속제종인) 동쪽 1칸은 노복들의 공간으로 정하고,
次西一間屬諸侍女(차서일간속제시녀) 그 다음 서쪽 1칸은 시녀들의 공간으로 정했는데,
以倣男左女右之義(이방남좌여우지의) 이는 남좌여우(男左女右)의 뜻을 따른 것이다.
最西一間(최서일간) 그리고 가장 서쪽의 1칸은
則用備祀夜 供饌之廚(칙용비사야 공찬지주) 제삿날 밤 제찬(제찬)을 이바지하는 부엌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又置田三日耕(우치전삼일경) 또한 사흘갈이 밭을 마련하여,
付諸府之戶長(부제부지호장) 영월부 호장으로 하여금
歲收其稅(세수기세) 그 세금을 해마다 거둬들여
以每年寒食設祭以酹之(이매년한식설제이뢰지) 매년 한식제향을 설행케 하였다.
祀需品式(사수품식) 제수의 품식(品食)은
從節目設行(종절목설행) 절목에 따라 거행하되,
卑永久無廢(비영구무폐) 영원히 그만두지 않게끔 하였다.
且書落花巖三字刻之石(차서낙화암삼자각지석) 以昭後人之觀焉(이소후인지관언) 아울러 후인들이 살 필 수 있도록
‘落花巖(낙화암)’ 세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겨 넣었다.
仍念往在乙丑(잉념왕재을축) 아! 옛날 을축년(1685년, 숙종11)
先王考按東營(선왕고안동영) 우리 조부께서는 강원도 감영을 안핵하며
刱祀六臣(창사육신) 육신사(六臣祠)를 창건하고,
以戶長嚴興道配食之(이호장엄흥도배식지) 호장 엄흥도를 함께 배향하였다.
輔生於是年(보생어시년) 나는(洪聖輔) 이 해에 태어났거늘
而令爲地府(이령위지부) 지금은 영월부 수령이 되어,
又擧前人未遑之事(우거전인미황지사) 이전 사람들이 미처 손대지 못한 일을 거행하였다.
有可行而不行(유가행이불행) 자고로 세상일 중에는 마땅히 거행해야 하나 손대지 못한 일이 있고,
待時而後行者(대시이후행자) 때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거행하는 일이 있다.
自古己然 而玆二事之必吾祖孫而行之(자고기연 이자이사지필오조손이행지) 이 두 가지 일이
우리 조부와 나를 기다린 뒤에 이렇게 거행되었으니
於似有不偶然者在焉(어사유불우연자재언) 또한 우연치 않은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하다.
遂感而爲之記云爾(수감이위지기운이) 이에 느꺼워하며 이상과 같이 그 기문을 짓는 바이다.
<愍忠祠改建告由祭文> 朴基正 (민충사개건고유제문/박기정)
在昔丁丑 (재석정축) 옛날 정축년 일은
事有難言 (사유난언) 차마 말하기 어려워라!
白馬翩翩 (백마편편) 백마 타고 너풀너풀 떠나시고
地覆天翻 (지복천번) 땅이 뒤집히자
從人侍女 (종인시녀) 노복과 시녀들
左右蒼黃 (좌우창황) 좌우에서 허둥대다가
爭捐一死 (쟁연일사) 다투어 목숨을 버렸나니
祇今留芳 (기금류방) 지금까지 그 명성 전해지네.
先朝起感 (선조기감) 감흥을 느끼신 선왕께서
十行絲綸 (십행사륜) 열 줄의 전교를 내리시어
賜祭宣額 (사제선액) 치제하고 편액을 하사하니
幽鬱畢伸 (유울필신) 근심과 원통함 모두 풀렸도다.
矗立危巖 (촉립위암) 우뚝 솟은 가파른 절벽은
錦江之西 (금강지서) 금강 서쪽에 있고
遺風烈烈 (유풍열열) 그들의 기풍 여전히 뜨겁거늘
汀草萋萋 (정초처처) 강가 잡초는 어찌나 무성한지.
舊祠將傾 (구사장경) 옛 사당 무너질 듯 하기에
爰謀改建 (원모개건) 이에 새로이 고쳐짓고자
虔告厥由 (건고궐유) 정성껏 그 이유를 고하며
用伸奠獻 (용신전헌) 제수를 바치나이다.
時序(시서)
愍忠祠(민충사) / 黃胤錫(황윤석)
【卽端廟宮女內官報祀處(즉단묘궁녀내관보사처)】
【바로 단종의 궁녀와 환관에게 보답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按『莊陵志』(안『장릉지』) 장릉지의 기록을 살펴보니
記上王東遜也(기상왕동손야) 상왕께서 양위하고 동쪽으로 가실 때,
有二別室許陪(유이별실허배) 두 명의 별실(別室)이 상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蓋宮女有爵(개궁녀유작) 대개 궁녀에게는 작위가 있는 법인데,
而降稱別室也(이강칭별실야) 낮추어서 ‘별실’이라 부른 것이다.
獨無姓氏(독무성씨) 그런데 유독 이들의 성씨가 전하지 않기에
余攷諸家譜(여고제가보) 여러 가문의 족보를 고찰해보니,
有曰端宗後宮權氏 完女也 見南原尹譜(유왈단종후궁권씨 완녀야 견남원윤보)
남원윤씨(남원윤씨) 족보에는 단종 후궁 권씨(權氏)는 완(完)의 딸이라 적혀 있고,
有曰端宗淑儀金氏 兵曹判書師禹女 見尙山金譜(유왈단종숙의김씨 병조판서사우녀 견상산김보)
상산김씨(商山金氏) 족보에는 단종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병조판서 사우(師禹)의 딸이라 적혀 있었다.
此其二別室投江(차기이별실투강) 이들이 바로 강물에 투신했던 두 별실이다.
惟內官姓名無留(유내관성명무유) 반면 내관(內官)의 성명은 전하는 바 없으니,
赤可悲也(적가비야)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이다20) .
愍忠祠 / 黃胤錫(민충사 / 황윤석)
江上沿崖松徑微(강상연애송경미)。강벼랑 따라 소나무 오솔길 희미한데
幽幽祠屋對斜暉(유유사옥대사휘)。적막한 사당이 석양을 마주하고 있네.
當時狐鼠應羞死(당시호서응수사)。당시의 쥐와 여우는 수치심에 죽어야 하리니
莫作尋常婦寺譏(막작심상부사기)。대수롭지 않게 아녀자와 내시라고 기롱치 마시오.
- 頤齋遺藁卷之三 詩(이재유고권지삼 시)
주) 황윤석黃胤錫 • 생년 1729년 • 몰년 1791년
• 조선 후기의 운학자(韻學者) :성모(聲母), 운모(韻母), 성조(聲調)와 같은 한자(漢字)의 음운(音韻)을 연구하는 학문
• 본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 저서(작품) 이재유고|이재속고|이수신편|자지록|자모변|화음방언자의해
• 대표관직(경력) 장릉참봉|사포서직장|사포서별제|익위사익찬|목천현감|전생서주부|전의현감
[내용]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頤齋亂藁 이재난고』정해년(丁亥年, 1767, 영조43) 9월8일조에 보이는 주석으로 시제 아래에 적혀있다.
단종 후궁 권씨(權氏)는~사우(師禹)의 딸이라 적혀 있었다. : “국역조선왕조실록 > 단종 2년 갑술(1454,경태5) > 1월 10일(임술) >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金師禹)·권완(權完)의 딸을 잉(媵)으로 할 것을 아뢰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첫댓글 정사종 공은 영월에 사는 정씨들의 파조이며 단종을 동을지산에 엄흥도와 함께 장사를지낸 충신으로 그의 14대손인 정대억은 의병장으로 싸웠다. 정사억이 아니고 정대억입니다.수정부탁합니다.고맙습니다.
제목에서의 정사억 를 정대억으로 수정했습니다. 발견 알림 고맙습니다.
@김원식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