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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30
마태복음 6: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유대인들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였고,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원하심을 내 안에 담아내는 것인데 곧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비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기에 그 필요를 이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a).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여기서도 “기도하라”라는 말의 ‘프로슈코마이’는 디포넌트 동사로 원인자가 따로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단순한 명령으로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에 이끌려 기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마태복음 외에도 누가복음 11:2-4에서 간략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말씀하신 것으로 나온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본문은 산상강론(산상수훈) 안에 있다. 예수님은 모세가 율법을 선포한 입장보다 더 높은 권세 즉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강론을 하셨다. 이런 점에서 산상강론 전체를 새로운 율법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죄인이 이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던져놓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향해 가셨고 거기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기에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고 기도문을 주셨는데 흔히 ‘주기도문’이라 칭한다. 오늘날 교인들에게는 ‘기도’가 빠진 ‘주문’이 되어 그저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 되었다. 모임을 마칠 때 목사가 없어 축도는 할 수 없고 그냥 마치기는 허전하여 마침을 위해 이 기도문이 남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원하심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로 친히 만드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으로부터 기원한 기도’ 혹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누가복음 본문과 비교하여 정리하면 여섯 개의 기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흔히 앞의 세 기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뒤의 세 기원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누어서 볼 필요는 없다. 전체가 다 하나님의 원하심을 우리 안에 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b)라고 하였는데 “하늘”은 ‘토이스 우라노이스’(원형 : ‘호 우라노스’)로 정관사가 붙은 복수로 표현되었다. 이는 창세기 1:1에서 ‘하샤마임’을 가리킨다. 물리적인 하늘이 아니라 궁창 위의 물이 있는 ‘그 하늘들’이다(창 1:7-8). 궁창 위의 물이 있는 하늘은 말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실 수 없는 분으로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왕상 8:27)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하샤마임)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즉 ‘그 하늘들’은 ‘성전’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죄인과 소통(교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거룩하신 분이며 인간은 죄인으로 죽은 자요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성막, 성전을 주신 것은 하늘의 하나님, 말씀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말씀을 나누시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전은 하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수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쌍수, 짝, 복수’의 의미로 ‘엘로힘’(신들)이시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데오스 : 신들)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데오스 : 신들)이라 하셨거든(요 10:34-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이라는 말의 ‘기노마이’는 ‘태어나다, 만들어지다’라는 디포태동사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말씀이 된 자기 백성들과 짝을 이루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셨고(출 4:22), 신명기 32:6에 의하면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란 창조주로서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사 64:8, 말 2:10).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아들로서 실패하였다(사 30:9).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마 3:17).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나? 그것은 바로 장자요 아들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분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하늘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열어 보여 주실 때만 가능한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하시고 첫 발을 내 딛으셨을 때 비로소 하늘의 문이 열렸다(마 3:16-17). 예수 그리스도만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다(요 14:6). 그러므로 이제 하늘 문을 여신 분 즉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하늘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말씀으로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실로 예수님은 하늘, 즉 말씀이신 분이 이 땅에 성전으로 아니 성전보다 더 크신 이로 오셨다. 오신 목적은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성전이 되고 하늘이 되게 만드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이었고(눅 22:20) 대속의 죽음이었다(막 10:45).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나의 하나님(마 27:46), 나의 아버지’(눅 23:46)와 ‘너의 하나님, 너의 아버지’를 갈라 놓으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만드셨다는 것은 한몸된 교회로 만드셨다는 의미에서 우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고(롬 5:8)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도록 하셨다. 실로 이 권세는 세상이나 세상의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요 1:12-13).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속과 관련된 표현이다. 상속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엇을 더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리는 모든 영광을 아무 공로나 의가 없는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상속자이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종교와 복음이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가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도에서도 그 차이는 분명하다. 신을 향해 인간의 모든 것들을 쏟아붓게 하는 이방 종교의 신들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 언약 백성들을 아들들로 만들어 놓고 기도하게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불러놓고 진리를 담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성전이 되었고 하늘의 하나님과 하나 된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3-24)
(202411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