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0년대의 세계: 냉전 질서의 형성
1. 중국: 난징의 봄 — 적색 민주주의 중국의 탄생
1950년 10월 9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선포한 장소는 베이징 천안문이 아니라 난징 중산릉이었습니다. 그 장면은 이 신생 국가가 어떤 체제인지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었습니다. 마오의 오른편에는 새 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 된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의 리쭝런이 서 있었고, 왼편에는 정무원 총서기를 맡은 농공민주당 주석 장보쥔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중산릉으로 향하는 마오를 맞이한 것은 쑨원의 아내 쑹칭링이었습니다. 마오는 쑹칭링에게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고, 참배를 끝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새 체제의 성립을 선언했습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새 중국은 단순히 공산당이 천하를 접수한 국가가 아니라, 장제스 정권을 몰아낸 뒤 공산당·민혁·농공민주당이 중심이 된 새로운 형태의 정권교체 국가로 자신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이 대체역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떤 정치체제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중국공산당은 나머지 우당들을 단순한 장식물이나 정통성 유지용 부속기구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산당이 다수지분을 가진 합작회사처럼, 여러 정치세력이 신민주주의라는 기치 아래 공존하는 구조가 보다 강하게 제도화되었습니다. 수도가 난징으로 유지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천하를 새로 점령한 혁명정권이라기보다, 쑨원의 유지를 계승한 공화국의 정통을 되찾았다는 상징성을 강화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대장정과 인민해방대투쟁(국공내전)의 압도적인 도덕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였으나, 실제 정치권력 면에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독 지배자는 아니었습니다.
내전 이후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 역시 실제 역사보다 온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중공 중앙은 “부농경제를 보존하고, 중농의 토지를 건드리지 않으며, 농업생산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지주소작제를 타파한다”는 공식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고, 민족자본가들을 포함한 도시 자본가 계층과도 가능한 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이 대체역사에서는 그러한 공식 노선이 훨씬 더 철저히 지켜졌습니다. 그 결과 1950년대 초 중국 경제는 신경제정책 하 소련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쿨락(кулак)과 네프맨(НЭПман)이 1920년대 초 소련 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듯이, 1950년대 초의 중국 경제에서도 부농과 ‘민족자본가’는 적이 아니라 국가 재건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협력자로 취급되었습니다. 혁명은 승리했지만, 그 혁명이 곧바로 사회 전체의 급진적 균질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전 후 경제재건이 본격화되자, 당-국가 관료의 부패와 정경유착 문제 역시 실제 역사와 유사하게 빠르게 불거졌습니다. 차이가 있었다면, 그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동북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은 이 대체역사에서도 중국 전체 산업력의 7-8할을 쥔 동북지역의 실권자였습니다. 더구나 중앙정부가 난징에 있었던 이상, 동북지방 내 반부패운동은 중앙이 아니라 선양(구 봉천)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오강은 구 만주국 시절부터 정치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온 지역의 실력자 푸쑤징(傅肅敬)과 손잡고, 당내의 이른바 ‘부패분자’를 숙청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가열차게 전개된 ‘삼반운동(三反運動)’은 실제 역사와 달리 ‘오반운동(五反運動)’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북당 내부 숙청은 라이징썬(賴經森)과 같은 지역 자본가들을 ‘적색자본가’라는 이름으로 체제 내부에 깊숙이 끌어들이는 동시에, 마오에게 충성하던 기존 당원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결과 1954년 말이 되면, 가오강은 국가경제최고회의 주석 겸 동북인민정부 주석이라는 사실상 무소불위의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의 아래에는 군사실력자 린뱌오, 당정 관료의 실권자 천윈, 조직과 정보력의 푸쑤징, 재력의 라이징썬이 포진했습니다. 세간에서는 가오강을 동북왕이라 불렀고, 이 네 사람을 묶어 ‘4인방’이라 칭했습니다. 중앙에서는 류샤오치, 덩샤오핑, 예젠잉 등이 가오강을 지지하며, 적색자본가와 테크노크라트 중심의 국가체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갔습니다. 난징의 중앙정부가 명목상 전국을 대표한다면, 선양의 동북 블록은 중국 경제와 행정, 군사, 정보의 실질적 중핵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세력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마오 주석 자신이었습니다. 마오는 국민당 혁명위원회나 농공민주당, 치공당 같은 비공산 정당들에게 권력 일부를 양도하는 것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반동 극우분자’ 장제스를 몰아내고 쑨원의 유지를 계승했다는 서사를 강화해 주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의 실권이 가오강에게 넘어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혁명국가의 권력이 우당과의 협력 속에서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당 내부에서 마오 자신을 대체할 별도의 권력중심이 형성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마오는 결코 상징적 국가원수로만 전면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권위는 국가의 장식이 아니라 권력의 실질적 원천이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공산당 내 좌파였습니다. 그 대표주자인 캉성(康生)은 보이보(薄一波), 천보다(陳伯達) 등과 함께 삼반운동 당시부터 가오강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이어갔으나, 막대한 정치경제적 자원을 보유한 가오강 파벌에 연거푸 패배하며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들은 가오강과 그 일파를 자본주의 추종자들, 곧 주자파(走資派)라고 매도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의 국가가 되어야 할 중화인민공화국이 부농과 자본가의 국가로 변질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좌파의 슬로건은 단순하고도 날카로웠습니다. “부정부패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다시 세우자.” 이른바 창홍타흑(唱紅打黑)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오강 체제는 행정적 실용주의나 경제적 재건의 체제가 아니라, 혁명의 외피를 두른 새로운 특권질서였습니다.
셋째는 농공민주당 등 우당이었습니다. 장보쥔은 삼반운동 초기까지는 가오강을 지지했습니다. 가오강이 적어도 부패한 당관료를 정리하고, 중국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체제는 사실상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질되었고, 도시와 지방의 격차, 노동자와 농민 내부의 빈부격차 역시 가파르게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오강이 만든 체제는 장제스의 관료자본 중심 체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적색의 외피를 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오강은 더 이상 활용 가능한 동맹이 아니라, 타도해야 할 새로운 정치권력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마지막 대륙 근거지를 잃고 몰락하던 ‘국민당 우파’와 완전히 절연한 후,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석직에 오른 후스(胡適) 역시 “중화권 최고 지성”이라는 상징적 위치를 활용해 민혁 내부를 재편했습니다. 그는 천밍수(陳銘樞), 리지선(李濟琛) 등 가오강에게 지분을 나눠받고 거수기 노릇을 하던 군벌적 인사들을 밀어내고, 민혁을 반-가오강 입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련이 있었습니다. 이후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는 현실 역사처럼 정권을 휘어잡지도 못했고, 대대적인 탈스탈린 운동을 감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1950년대 중반부터 배후의 실권자로 부상한 것은 미하일 수슬로프(Михаил Суслов)였습니다. 수슬로프는 공산당이 비마르크스주의 정당들과 협력하는 신민주주의 체제 자체는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복잡성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의 실권이 적색자본가와 테크노크라트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수슬로프의 눈에 우당은 어디까지나 통제 가능한 외곽 파트너였지만, 가오강 체제는 당 내부를 잠식하는 암세포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전혀 다른 입장과 동기에서 가오강을 공격하던 이들의 목적은 묘하게도 한 점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7년 6월, 마오는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이른바 ‘쌍백방침’을 제시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사상과 견해의 자유로운 경쟁을 허용한다는 선언이었지만, 실제 정치의 맥락에서 그것은 훨씬 더 날카로운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가오강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급진적인 비판도 당분간 허용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쌍백방침은 반체제적이고 통제불가능한 비판을 폭발시켜 마오로 하여금 반우파투쟁이라는 급격한 노선 전환을 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의 마오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왼쪽에서의 비판, 오른쪽에서의 비판, 당내 정치투쟁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타고운동(打高運動)’이었습니다.
1957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 운동은 실제로 가오강의 권력을 침식시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동북인민정부는 해체되었고, 난징 중앙정부가 세 개의 성정부를 직접 관리하는 체제로 재편되었습니다. 가오강 역시 국가경제최고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운동은 가오강을 약화시켰지만, 동시에 중국 전체를 거대한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특히 후스는 마오가 결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습니다. 중국 최고 지성이자 이제는 국민당의 수장 자리에까지 오른 후스는 마오가 캉성 등을 동원해 체제를 다시 좌경화하려 할 때마다 이를 파쇼적 경향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추안핑(儲安平) 같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린시링(林希翎) 같은 급진적 학생운동가들은, 이 세계선에서는 국민당 혁명위원회와 농공민주당이라는 정치적 보호막 아래에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획득했습니다. 그 결과 가오강을 공격하기 위해 열어젖힌 비판의 공간은, 곧장 다시 닫을 수 없는 구조적 공간으로 변해 갔습니다.
인민대중은 여전히 마오쩌둥을 쑨원의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후계자, 삼민주의의 계승자, 그리고 ‘민주중국’을 완성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오의 실질적 장악력은 점점 더 약화되어 갔습니다. 중국은 정말로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노농평의회(勞農評議會)가 수립되어 국가경제의 방향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급진적 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 인민공사를 통한 집산화가 정답이다, 노동자 자주관리를 추구해야 한다, 지방자치를 더 확대해야 한다. 서로 다른 노선과 이해관계가 충돌했고, 그것은 더 이상 당이 위에서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차원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한때 독일공산당 좌파가 꿈꾸던 평의회 민주주의와도 닮아 있었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의 범위는 훨씬 더 넓었습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국가도, 자유주의 공화국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 놓인 거대한 토론국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변화는 세계 사회주의권 전체에도 거대한 함의를 남겼습니다. 국공내전 승리 직후 마오가 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아시아의 특수한 조건에서 나온 일시적 변형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고운동 이후의 중국 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단순히 일반화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은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소련식 체제의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책의 차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의 형식, 사회주의의 내용, 혁명과 국가의 관계를 둘러싼 별도의 모델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슬로프 역시 더 이상 이를 관망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중소관계는 점점 더 경색되고 냉각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조선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미쳤습니다. 남민전이 남조선을 휩쓸고, 이창근이 쿠데타로 제거되는 상황 속에서 중국은 더 이상 북조선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국 내부가 정치와 경제, 문화정책의 방향을 두고 자기들끼리 거대한 논쟁에 빠져든 상황에서, 조선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점차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복구되는 것은 소련의 영향력이었습니다. 마오의 쌍백방침을 열렬히 지지하던 인민민주당에게, 조선공산당과 김일성은 위험하지만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위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긴장과 공백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북조선 내부의 대규모 권력변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소련과 동유럽: 회색의 제국
2차대전 종결 이후 소련은 현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했습니다. 미국의 늦은 대독전 참전과 느슨한 연합국 간 공조로 인해 소련은 볼가강 하류를 잠시 빼앗기는 등 실제 역사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더 큰 군사적 승리를 얻었습니다. 현실의 스탈린은 처음부터 전 지역을 똑같은 속도로 소비에트화한 것이 아니라, 군사점령·연립정부·경찰장악·정당통합·숙청을 조합한, 말하자면 “불균등한 공산화”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는 그 전제가 약화되었습니다. 유럽전 종결 국면에서 소련의 점령 범위가 실제보다 더 넓었고, 서방의 대륙 재진입은 늦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의 전후 정통성도 훨씬 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현실처럼 “민주적 외피”를 오래 유지할 필요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은 현실보다 더 빠르게, 더 노골적으로, 더 경찰국가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의 폴란드에서 전후 초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했던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의 인민당(PSL)은 충분한 공간을 얻지 못했습니다. ‘폴란드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는 1946년 말 코민포름 회의 참석차 방문한 모스크바에서 의문사를 당했고, 그 뒤를 이어 정통 스탈린주의자이자 조기 집산화를 주장한 볼레스와프 비에루트(Bolesław Bierut)가 일찍부터 1인 권력을 굳혔습니다. 폴란드는 더 이상 민족적 편차를 잠시 품은 불안정한 인민민주주의가 아니라, 처음부터 보안기관과 당기구가 긴밀히 결합한 정통 위성국가에 가까워졌습니다.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실의 헝가리는 1945년 선거에서 소농당이 압승했고, 공산당은 이른바 “살라미 전술”로 정적을 한 조각씩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그 우회가 덜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라코시 마차시(Mátyás Rákosi)와 에르뇌 게뢰(Ernő Gerő)의 체제는 훨씬 더 빨리, 더 단단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지 임레(Nagy Imre) 같은 내부 개혁파가 성장할 공간 역시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현실 헝가리의 내적 긴장, 곧 초기 다당사회 경험과 강제소비에트화가 뒤엉킨 불안정한 구조는, 여기서는 훨씬 더 일찍 폭력적으로 봉합되었습니다. 그 결과 1953년 이후 헝가리에서 현실처럼 제한적 ‘교정 실험’이 시도될 여지조차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현실의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선거와 연립체제,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의 잔존 권위, 야당 각료 사임, 그리고 1948년 2월 정치위기를 거쳐 공산당 일당체제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의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 체제는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훨씬 빠르고 공고하게 굳어졌습니다. 베네시와 비공산 정당들이 남겨놓은 공화국적 외피는 더 빨리 벗겨졌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된 정통 스탈린주의 국가 가운데 하나로 재편되었습니다.
루마니아의 경우에는 그 변화가 더욱 노골적이었습니다. 현실 역사에서 나름의 독자노선을 추구할 여지를 보여주던 ‘감옥파’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 대신, 모스크바와 직접 선이 닿아 있던 아나 파우커(Ana Pauker)가 집권했습니다. 이는 루마니아를 현실보다 훨씬 더 일찍, 훨씬 더 깊게 친소적이고 교조적인 위성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루마니아는 더 이상 나중에라도 자율성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나 파우커 체제 아래에서 보안기관과 당의 중앙기구가 사회 전반을 재편하며, 소련의 남서부 방어선에 충실히 봉사하는 국가로 굳어졌습니다.
불가리아에서는 이미 국제적으로 저명한 스탈린주의 혁명가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가 자연스럽게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불가리아를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은 루마니아처럼 외래적 모스크바파를 얹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혁명적 정통성을 확보한 노혁명가를 전면에 세워 두고 그 아래를 완전히 교조적 국가기구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디미트로프는 현실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지 않았고, 오히려 불가리아식 인민민주주의의 상징적 얼굴로 오래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래에서 실무를 장악한 것은 벌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와 같은 교조적 스탈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동구권에서도 가장 질서정연하고 가장 숨막히는 모범 위성국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서부와 남부 발칸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앞에서 잠깐 다루었듯, 티토와 파르티잔 세력은 유고슬라비아를 1943-44년부터 더 완전하게 장악했을 뿐 아니라, 공산권에 더 유리해진 영-소 간 ‘퍼센티지 합의’를 지키려던 스탈린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리스 민주군을 지원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 혁명이 실제로 성공해버렸다는 데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즈다노프를 보내 티토를 ‘좌익모험주의자’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혁명의 성공 앞에서 그 노선을 잠시 접었습니다. 차라리 티토를 국제사회주의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배후에서 조용히 알렉산다르 란코비치(Aleksandar Ranković)와 같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쪽을 택했습니다. 에드바르드 카르델리(Edvard Kardelj),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처럼 훗날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인물들은 이 과정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면 베오그라드가 굳이 현실처럼 노동자 자주관리, 시장사회주의, 공화국별 경제분권으로 갈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유고슬라비아는 동구권 제2의 병참 중심지이자 서구권에 대항한 무력의 핵심이 되었기에, 오히려 스탈린식 중앙통제체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고는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실험장이 아니라, 영웅적 국제주의의 수사 아래 보다 경직되고 보다 군사화된 국가동원형 사회주의 국가로 굳어져 갔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 변화는 더욱 급진적이었습니다. 현실 역사에서도 스탈린은 대숙청 시기 KPD 망명객들 다수를 제거하고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와 그 소수 일파가 지배하는 체제를 강요했습니다. 이 세계선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스탈린과 모스크바 정치국이 독일을 중립지대화할 계획을 훨씬 더 빨리 접었다는 점입니다. 베를린 전체를 장악한 마당에, 라인란트와 남서부, 바이에른 일부만을 가진 ‘연합국 하 독일’은 대문을 뻥 차면 무너질 듯한 썩은 오두막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독이 곧바로 붕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울브리히트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이라는 연립형 외피가 아니라 공산당(KPD) 일당체제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카를 레너(Karl Renner)의 오스트리아 정권도 일찍 붕괴한 끝에 1951년 분할되었고, 동부 지역은 독일사회주의공화국에 흡수되었습니다. 독일 중부와 오스트리아 동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산업 전선으로 통합되었고, 동독은 현실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동시에 훨씬 더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유럽은 현실보다 덜 다양하고 덜 유동적이며, 처음부터 더 깊게 중앙집권적 블록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1953년 이후 소련 권력승계에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동유럽이 더 빨리, 더 강경하게 묶인 만큼, 그에 대한 저항 역시 더 일찍 나타났고 또 더 일찍 짓밟혔습니다. 동독 봉기는 1953년이 아니라 1951년에 터져 진압되었고, 1953년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유사한 봉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났으나 역시 무력으로 눌렸습니다. 따라서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시점에서 정치국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유화의 실패가 아니라 통제력의 이완이었습니다. 현실 역사와 마찬가지로 말렌코프는 집단지도체제의 표면적 수장이 되었고, 모두가 위협을 느끼던 베리야는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흐루쇼프가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모험이 아니라 봉합이었고, 정치국이 원한 것 역시 스탈린주의의 해체가 아니라 스탈린 없는 스탈린주의의 재정립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하일 수슬로프가 중심 권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각자 ‘스탈린 없는 스탈린주의’의 청사진을 내세우며 공회전하던 말렌코프, 흐루쇼프, 카가노비치, 미코얀, 불가닌 같은 인물들에게, 뛰어난 스탈린주의 이론가이자 선전선동 계통의 거물이던 수슬로프는 사실상 “스탈린 이후의 유일무이한 교리 해석자”처럼 보였습니다. 말렌코프는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교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흐루쇼프는 조직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누구도 안심시킬 수 없었습니다. 반면 수슬로프는, 적어도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말과 논리, 그리고 그 논리가 언제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1957년 수슬로프는 중앙위원회 의결로 전연방공산당 서기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등장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선택한 회색의 승리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슬로프가 1930년대식 대숙청 공포정치를 재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리야 제거 이후 보안기관은 당에 더 깊게 종속되었고, 대숙청의 무차별성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유화가 아니라 공포의 제도화였습니다. 현실의 1937년식 무작위 테러는 사라졌지만, 대신 당 규율과 이념 검열, 행정감찰과 보안기관 감독이 촘촘하게 결합한 안정적 억압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여전히 명목상 연방의 1인자인 말렌코프가 내세운 소비재 및 경공업 육성책은 제한적으로 수용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탈린식 중공업 우선주의를 조금씩 조정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코시긴(Алексей Косыгин)은 리베르만(Евсей Либерман)이 제시한 구조개혁 노선을 거부하고, 훨씬 더 제한적이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경제체제를 손보는 데 그쳤습니다. 소련은 무모한 모험을 피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수슬로프는 서방과의 화해정책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흐루쇼프처럼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과격한 외교적 도박 역시 피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혁명의 조숙한 대확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회주의권의 방어와 규율이었습니다. 수슬로프는 1958년 코민테른을 재건했지만, 그것은 국제공산주의의 이상을 좇은 낭만적 복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무렵 점점 가시화되던 ‘중국식 체제’의 위협을 불식시키고, 동유럽을 더 강하게 조이는 한편, 빠르게 난징 노선으로 경도되던 제3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쥐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까웠습니다. 코민테른의 부활은 혁명의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해석권을 다시 모스크바가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조선 문제에 대한 수슬로프의 처방은 그래서 매우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소위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인민민주당 정권도 지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민전을 통해 무절제한 침투전을 벌이다가 일본의 전면 개입을 불러온 김일성 일파 역시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수슬로프의 눈에 여운형과 김두봉 계열은 지나치게 중국식 실험에 경도된 느슨한 전선주의자들이었고, 김일성과 정찰총국 계열은 혁명을 국가전략이 아니라 군사적 모험으로 오해한 위험한 실천가들이었습니다. 둘 다 모스크바가 원하는 조선 혁명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수슬로프에게 필요한 것은 확장도 모험도 아니라, 전시하의 북조선 국가를 다시 당의 지휘와 국제공산주의의 규율 아래 넣는 일이었습니다.
1959년 5월 코민테른 극동위원회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조선 혁명의 성과는 무질서한 군사주의나 무원칙한 전선주의 속에서 보존될 수 없다. 공화국의 정상적 국가기구와 당의 지도적 역할을 회복하고, 개인적 모험과 분파적 자의에 의해 왜곡된 혁명적 실천을 시정하며, 국제사회주의 진영의 공동전략에 부합하는 조선의 정상화(нормализация)를 달성하는 것은 현 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업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공화국 민족보위상 자리에서 해임되고 가택연금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3. 미국과 일본: 태평양의 반공 철선
1945년 초 FDR의 사망 이후 1948년까지 이어진 트루먼 행정부는, 후대 미국 정치사에서 대내외적으로 모두 실패한 정부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를 상실했고, 인도 문제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제국 해체의 폭발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으며, 중국에서는 워싱턴이 보기에 끝내 “잘못된 정부”였던 장제스 정권에 막대한 자원과 정치적 신용을 퍼부은 끝에 스스로의 정당성까지 갉아먹었습니다.
대내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후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했고, 노동문제에서는 강경 진압도, 사회적 타협도 아닌 어정쩡한 해법만을 반복하다 당내 반대파와 공화당 양쪽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트루먼이 임기 말 의욕적으로 밀어붙인 군대 내 인종분리 철폐는 후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분명 의미 있는 조치로 평가되었지만, 당시의 훨씬 더 살벌한 냉전적 공기 속에서는 정치적 역풍을 불러왔습니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실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정세 아래에서, 그 조치는 스트롬 서몬드(Strom Thurmond)를 위시한 남부 민주당 인사들이 1948년 대선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공화당의 토머스 E. 듀이(Thomas E. Dewey)를 지지하는 재앙적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성립한 듀이 행정부는 애초부터 미국 외교전략의 우선순위를 다시 짜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설계를 맡은 사람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이었습니다. 덜레스는 세계질서를 읽는 방식부터가 현실의 자유주의 국제주의와 달랐습니다. 그의 지침은 매우 명확했습니다. 첫째, 대서양 세계에서는 현상유지를 중심으로 한 수세적 전략을 취한다. 둘째, 미국 외교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여야 한다. 셋째, 미일동맹을 대소련 세계방위의 제1축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워싱턴은 더 이상 유럽 전체를 되찾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넘어간 대륙에서는 버티는 데 만족하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인 태평양에서 냉전의 새로운 구조를 짜려 했던 것입니다.
듀이와의 약속대로 국방장관으로 입각한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바로 그 태평양 전략의 군사적 골격을 만드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의 눈에 일본은 패전국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이 아시아 전체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도 냉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줄 거의 유일한 고도 국가기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린 일본 해군을 집중적으로 재건해 주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단순한 제국해군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전범재판으로 사실상 초기화된 군부의 잔재 위에, 육군과 해군의 병렬적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해공군 위주의 통합군을 새로 구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옛 대본영의 실질적 후계조직인 통합막료부는 상설조직으로 재편되었고, 그 직할 아래에는 해군육전대의 확장판이자 전혀 새로운 전후형 개입군인 수륙기동대(水陸機動隊)가 창설되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 방면의 방위를 일본에게 위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일본은 그 위탁을 자신들의 국가적 재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부터 듀이 행정부의 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이러한 구조를 보다 이념적이고 국내정치적인 차원에서 밀어붙인 인물이었습니다. 1957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닉슨은 반공국가로서 미국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려 했습니다. 조지프 매카시가 주도하던 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는 신설된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DHS)로 이관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조직개편이 아니었습니다. 매카시 식의 “일단 질러놓고 보는” 마구잡이식 공산주의자 사냥을, 보다 건조하고 행정적이며 전문적인 국내 냉전 체계로 번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존 에드거 후버의 FBI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분명히 담겨 있었습니다. 허버트 브라우넬 주니어(Herbert Brownell Jr.) 장관이 이끄는 DHS가 집중한 것은 특히 중국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과제는 단순히 간첩을 잡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3세계 민족주의와 중국 노선의 접점을 미국 국내에서 사전에 끊고, 대학과 지식인 사회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며, 중국식 사회주의가 지닌 매혹이 미국 사회의 자유주의적 공간으로 침투하는 것을 봉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면서도, 둘 모두를 분명한 적으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적대의 결과로 미국이 끌어안은 파트너들은 종종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곳은 노골적으로 우경화된 반동국가였고, 어떤 곳은 사실상 파시스트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에게 중요한 것은 그 체제의 내적 성격이 아니라, 그것이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기능을 수행하느냐는 점이었습니다. 미국은 점점 더 “좋은 정권”보다 “작동하는 반공 정권”을 선호하는 나라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미국이라는 강력한 후원자 아래 자율성을 얻은 일본에서는 국민협동당을 중심으로 한 당-국가 체제가 더욱 공고화되었습니다. 아리마 요리야스(有馬頼寧)에 이어 다시 전면에 복귀한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대외노선을 “반제국주의적 반공 공동체 질서”로 선명하게 재규정했습니다. 그것은 제국주의를 부정하면서도 제국의 기능을 포기하지 않는 절묘한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식 파시즘 체제를 냉전적 국가장치로 완성한 인물이었습니다. 1952년부터 내각총리대신 겸 국민협동당 총재직을 강력하게 쥔 그는, 조선 문제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강경한 방책을 취했습니다. 이창근 제거, 기리시마 호 사건, ‘특수군사작전’ 실행, 북폭 개시가 모두 그의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공격적인 반공 질서 구축을 시도했습니다.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 정권을 옹위했고, 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의 호치민에 대한 내부 권력투쟁을 지원했으며, 호치민과 결탁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을 폐위하고 반공적인 시릭 마탁(Sirik Matak) 왕자를 옹립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패전국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자신을 질서의 설계자이자 관리자로 다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은 결코 완전히 같지 않았습니다. 닉슨에게 조선 문제는 어디까지나 전형적인 냉전국가의 시각에서 이해되는 사안이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이중 위협으로부터 태평양 방위의 중추인 일본 열도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반도는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닉슨은 남조선의 체제가 왕국인지 공화국인지, 지도자가 이창근인지 주아문인지, 심지어 조선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지조차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조선이 미국의 상위전략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느냐뿐이었습니다. 조선은 민족국가의 운명을 논할 대상이 아니라, 소련과 중국을 막기 위한 방어선의 일부였습니다. 미국은 조선을 사랑하지 않았고, 조선을 떠맡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조선을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기시에게 조선은 훨씬 더 중층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전략 요충지가 아니라, 일본이 다시 제국 아닌 방식으로 제국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가르는 결절점이었습니다. 조선을 놓친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전후 내내 주장해 온 “반제국주의적 반공 공동체 질서”라는 자기서사가 완전히 붕괴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시에게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외국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과 질서를 명분으로 재구성된 준-종속적 공동권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통해 행사하는 것은 총독부의 통치가 아니라, 안보·경제·정보·군사 개입을 통한 구조적 지배였습니다. 그리고 기시는 그것이야말로 더 현대적이고 더 정교한 형태의 제국적 기능이라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로 그 때문에 기시에게는 깊은 딜레마가 생겼습니다. 조선 문제에 더 개입하면 할수록, 남조선은 일본에게 더 종속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재식민화의 언어로 읽힐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그토록 부르짖던 아시아 해방의 담론 역시 약화되었습니다. “공동체 질서”를 말할수록 현실은 종속으로 기울었고, “해방”을 말할수록 조선 민중의 눈에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만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조선의 내부 문제를 방치한다면, 일본은 제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뿐 아니라, 국가안보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겪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기시는 경성에 총독부를 다시 세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선반도를 상실한 국가지도자로 남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독약인 줄 알면서도 점점 더 깊게 조선 문제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조선 민중이 일본의 개입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더욱 깊숙한 개입 외에는 다른 출구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
@E.E.샤츠슈나이더 엄..... 좀더 레닌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이며 (민주적)사회주의와 척을 진 중국이군요 그나마 문화, 외교빼면 이것저것 유해진? 소련이니 다행이랄까요
+트로츠키는 이 세계선에서도 패배하네요 죽진않았으니 한잔해(?)
@E.E.샤츠슈나이더 요 스토리는 따로 연작으로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