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등을 돌아보며
KT지하식당을 나와 밖에서 기다렸으나, 문화원관계자가 보이지 않았다. 광화문지역은 10년 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광화문에는 전에 충무공 동상만이 있었으나, 지금은 미국대사관 앞에 세종대왕 동상도 있었다. 나는 옛날을 생각하며 KT사옥 앞에 있는 지하도를 따라 들어가 보았다. 일행 중 몇 명도 들어왔다. 이 지하도는 교보문고 앞 지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나왔으나, 일행의 목적지가 아닌 것 같았다. 문화회관 앞에는 전에 없던 횡단보도가 있어, 신호를 따라 도로 중앙분리대까지 건너갔다. 전에 승용차가 U턴하기 위한 지하도로가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세종대왕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문화원관계자들과 다른 일행들이 세종이야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곳 세종대왕 동상과 지하 세종이야기는 2009년에, 옆의 충무공이야기는 2010년에 개관되었다고 한다.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는 등의 어록을 남긴 훌륭한 대왕이었다. 대왕은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31년 6개월간) 재위 하시면서 민본사상, 한글창제, 과학과 예술, 군사정책 등을 추진 하셨다. 이곳에는 7개의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왕의 업적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 중 하나인 한글창제, 과학자인 “장영실”을 발탁하여 해시계인 “앙부일귀”와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제작, 음악가인 “박연”의 등용으로 “편종”과 “편경” 등 제작,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 개척 등이다.
<광화문 세종이야기에 있는 "세종 어록">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글자 "한글" 설명문>
<어진 임금이 발탁한 충신 "장영실"과 "박연" 설명문>
<세종대왕 때 개척한 4군 6진>
<세종대왕 때 발명한 천체관측기구를 관람하는 일행 모습>
일행은 버스를 타고 인사동 거리 앞에 있는 운현궁을 찾았다(14:30).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살던 집이었다. 이곳은 내가 광화문에 20년간 근무하면서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 때는 흥선대원군의 유족들이 살고 있어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덕성여대 옆에 있는 정문을 통해 운현궁으로 들어갔다. 운현궁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자원봉사자인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운현궁 정문 모습>
<일행에게 운현궁을 설명하는 문화관광해설사 모습>
<운현궁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지금은 운현궁의 대지 면적이 2,000평 정도 이지만, 대원군이 살아계실 때는 지금의 5배에 해당되는 10,000여 평이었어요. 그 때는 현재의 일본대사관에서부터 덕성여대까지 모두 운현궁의 부지였지요. 그러나 대원군의 후손들이 대지의 일부를 조금씩 팔아서 생활하다보니, 지금의 부지만 남았지요. 1993년도에 드디어 남은 부지를 서울시에 넘겼고, 서울시에서는 중수 등을 거쳐 1997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어요. 운현궁의 주요 건물은 여러분들이 돌아볼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 3개의 건물이지요. 옆에 있는 수직사와 이로당 앞에 있는 유물전시관을 돌아보면 운현궁을 모두 보는 것이고요. 그리고 유물전시관 앞에 있는 호구나무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기념식수를 한 것이지요. 또한 전에는 집을 지을 때 기단을 만들었는데, 일반인은 한개, 양반은 두 개, 정승 등은 세 개, 종묘나 사당은 네 개, 궁궐은 다섯 개를 쌓았다고 해요. 운현궁 노안당은 고종의 아버지가 사는 집이라 기단을 세 개 쌓았어요. 그리고 해설사는 노안당의 굴뚝을 가리키며, 우리의 옛날 건물은 굴뚝 위가 막혀 있는데, 그것은 빗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대신 위를 막은 바로 아래에 사방으로 구멍을 만들어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불이 잘 들도록했어요. 서양에는 굴뚝 위를 막은 것이 없어서, 서양인들이 우리의 굴뚝을 보고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혀를 내둘렀어요.’ 라며 설명을 마쳤다.
<운현궁 유물전시관 앞에 있는 일요예술무대 전경>
<일요예술무대 옆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 식수인 호두나무>
일행은 끼리끼리 흩어져 운현궁을 돌아보았다. 나는 먼저 수직사를 둘러보았다. 현재의 건물은 당초에 있던 건물이 아니라, 서울시가 인수한 후 새로 지은 것이었다. “수직사(守直舍)”는 운현궁 정문 우측에 있는 건물인데,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기거했던 곳이었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고 했다.
<운현궁 정문 우측에 있는 수직사>
<운현궁 건물의 굴뚝과 앞에 있는 이정표>
다음은 노안당으로 운현궁의 건물 3채 중 제일 앞에 있었다. “노안당(老安堂)”은 고종 1년(1864)에 지은 건물로 노락당 및 이로당과 함께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으며,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다. 이 건물들은 지은 후, 한 번도 불이나거나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노안(老安)은 “논어”의 ‘노자(老者)를 안지(安之)’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고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이었다. 노안당은 바로 뒤에 있는 노락당과 함께 1864년에 상량하고, 같은 해 완공했다. 평면은 T자형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실내를 구성하고,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를 달았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이고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이었다. 공간 구성과 적송 사용 및 세부기법은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 주었다. 노안당 현판은 서예가인 대원군이 직접 쓴 것이었다. 또한 마루방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쓴 예서가 걸려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건물 기둥마다 한문 붓글씨인 주련이 붙어 있었다.
<운현궁 노안당 전경>
<대원군이 쓴 운현궁 노안당 현판>
<운현궁 노안당 마루방 풍경>
<운현궁 노안당 마루방에 걸린 "무량수각" 서예 작품>
<운현궁 노안당 뒤쪽 모습>
뒤의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의 안채로 노안당과 같은 해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一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의 구성을 보여 주었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색이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냈다. 고종3년(1866) 고종과 명성황후 민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운현궁 노락당 모습>
<운현궁 노락당 현판>
<명성황후가 부대부인 생신을 맞아 방문한 모습>
<운현궁 노락당 뒤쪽 모습>
제일 뒤에 있는 건물인 “이로당(二老堂)”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二老)’는 흥선 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앞쪽에 있는 노안당과 노락당 보다 늦은 고종6년(1869)에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로 평면은 口자형으이고 실내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인데, 사면의 가구구조에 차이를 두어 공간의 위계를 드러냈다. 이곳에는 부대부인이 거처로 썼다. 특히 운현궁은 물맛이 좋아, 건물 곳곳에 우물 터가 있었다. 또한 노락당과 이로당에도 대원군이 직접 쓴 현판과 기둥에 주련이 있었다.
<운현궁 이로당과 현판 모습>
<기둥마다 걸린 이로당 주련>
<운현궁 이로당 우물>
<운현궁 노안당과 노락당의 뒷 모습>
<운현궁 이로당의 뒷모습>
3채의 건물을 돌아보고 이로당 대문 밖으로 나오자, 오른쪽에 유물전시관이 있었다. 이곳은 흥선 대원군과 관련된 유물 전시를 통해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말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의 가례를 올릴 때 입는 예복, 대원군의 조복, 척화비, 당백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 현판>
<종합연대표>
<흥선대원군 조복과 부대부인 원삼>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쇄국양이 설명문>
또한 고종이 거처하던 창덕궁과 운현궁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고종 전용 "정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1912년에는 현재의 운현궁 뒤에 양관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했다.
<운현궁 노락당 뒤에 있는 양옥, 현재 덕성여대 소유>
운현궁 관람을 마치고, 길 건너편에 있는 인사동 거리로 갔다. 인사동 거리는 서울의 중심에 있는 거리로, 화랑 및 표구사들이 많은 곳이다. 특히 전부터 고미술품이나 골동품들이 많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코스 중의 한 곳이었다. 여기서는 운이 맞아 좋은 골동품을 잘 고르면 아주 좋은 물건을 헐하게 사는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일행은 끼리끼리 짝을 지어 인사동 골목 여기저기를 살피고 다녔다. 문화원 한문서예반의 선생님과 함께한 몇 명은 인사동 거리에 온 김에 관성필방에 들려 붓을 살펴보았다. 요즈음 대부분의 필방들은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 붓을 매 온다고 했다. 여기도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만, 필, 묵, 연(붓, 먹, 벼루)을 제조 판매하는 곳이었다. 선생님이 붓을들고 오랫동안 살펴보더니, 물건이 좋다며 흥정하기 시작했다. 같이 간 사람들도 선생님이 흥정한 값에 대부분 붓을 한 자루씩 샀다. 돌아오는 길에 인사동에서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뒷골목 냉면집에 들려 막걸리를 마셨다.
<인사동 거리 풍경>
일행은 버스를 타고 인천 송도로 향했다. 인사동은 시내 한 복판이라 마포와 영등포를 빠져 나가는 길이 많이 막혀 속도가 매우 늦었다. 버스가 경인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어느 정도 속도를 내서 달렸다. 일행이 저녁을 먹을 인천 연수구 군산 아구찜식당에 도착(18:10)했다. 언덕 위에 있는 식당 3층에 올라가니, 아구찜과 아구탕이 신나게 끓고 있었다. 마침 이 자리에는 연수구 문화원장(조복순)이 나와 인사말을 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벌써 캄캄한 밤(19:45)이었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40분 쯤 달려 숙소인 영종스카이리조트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첫댓글 운현궁 관람을 눈으로 보고 글로보고 두번 이나 보니 운현궁 구경을 완료한것 같습니다,
저도 운현궁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지요.
물론 "운현궁의 봄" 이라는 책은 읽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