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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파워맨
고대 흉노족의 역사
흉노족의 역사는 매우 장구하여 그 시작은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험윤(玁狁)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시경(詩經)에 ‘우리가 집을 잃게 된 이유도, 우리가 잠시도 한가로이 쉴 수 없게 된 원인도 험윤 때문이다’란 글귀가 실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흉노의 중심부는 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투겐 평원의 카라품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
기원전 4세기가 되자, 흉노는 역사에 그 이름이 강렬하게 부각된다. 흉노는 연(燕)을 크게 위협하였고, 특히 진(秦)의 중심부와 인접한 관계로 흉노와 진은 번번이 충돌하였다. 중원의 왕조들은 제각기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들 간의 내전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549년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와 중원간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를 공격했고 이 공세에 밀린 흉노는 오르도스를 버리고 고비 사막 이북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흉노를 몰아낸 시황제는 그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국 시대 각 나라들이 쌓았던 장성들을 새로이 보수하여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시황제의 사후, 진승과 오광의 난을 필두로 하여 중국 각지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때문에 흉노 문제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흉노의 지배자인 두만선우(頭曼單于: 선우의 정식 명칭은 텡그리 쿠투 선우. 하늘의 아들 선우란 뜻)는 후궁의 아들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인 모돈(冒頓: 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표기함. 몽골식 원명은 바토르)이 반발하였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에서 두만은 모돈에게 살해되고 모돈은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모돈 선우는 국가를 정비하고 내정을 튼튼히 한 다음, 주변 부족들의 정복에 나서 동몽골과 만주 서부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예니세이 강과 바이칼 호 주변에 거주하던 정령족(丁零族)을 정복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천산 산맥과 감숙 지방에 할거하던 월지족(月氏族)을 격파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내었다. 남침도 병행하여 시황제에게 상실하였던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도 회복하고, 중국 북부의 도시들도 탈취하였다. 이때 흉노의 강병은 30만이 넘었으며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의 내전으로 인해 흉노에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기원전 201~199년 사이에 벌어진 모돈 선우와 한고조 유방 간의 전쟁은 모돈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특히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 전투에서 모돈 선우는 흉노 대군과 항복한 한의 군대까지 합쳐 무려 40만 대군으로 한고조의 30만 대군을 7일 간이나 포위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한군은 8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결국 한고조는 모돈 선우에게 매년 조공으로 곡물과 비단을 바치고 한의 공주를 모돈 선우에게 출가시킨다는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모돈 선우의 정복 전쟁은 더욱 확장되어 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복속시킴으로써 아시아 초원 지대의 거의 모든 민족이 흉노에 통일되었다. 흉노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 강,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벳 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60년 간 계속된 흉노와 한의 종속 관계는 한무제의 즉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마읍에 10만의 병사를 매복시켜 흉노의 군신 선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두 대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
흉노와 한의 전쟁은 43년간이나 이어졌다.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남지전(漠南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이란 명칭까지 붙여지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한 양상의 전쟁은 결국 양자의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와 문제가 물려준 한의 국력은 대흉노전을 위해 모두 소모되었으며, 한무제는 군비의 각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소금이나 쇠로 된 쟁기, 밥그릇에까지 세금을 매기려는 극악무도한 재정수탈정책이 등장했다. 이 염철론은 이후 국가전매제도의 효시 및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왠만한 범죄도 돈만 내면 해결될 정도로 한의 사회적 기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죽을 당시, 한의 인구는 초기의 4천만에서 2천만으로 감소해 있었다. 결국 무리한 대흉노전으로 인해 한은 멸망의 길을 밟게 되었다.
흉노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한과의 쉴 세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고 20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한으로 끌려갔으며 흉노의 돈줄이 되어주던 중앙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흉노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약점을 본 복속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흉노에게 반란을 일으킨 복속민들은 바이칼호 주변의 정령족, 시라무렌 강변의 선비(흉노에게 멸망된 동호의 후손), 실크로드 북쪽의 오손 등이었다.
흉노제국에 불어닥친 불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손을 정벌하러 간 원정군은 엄청난 눈보라에 휩싸여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낭패를 보았고, 더욱이 기원전 68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과 가축 중 6~7할이 사망하는 극한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변 속국들의 이탈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는 점차 흉노의 내부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 내부갈등은 기원전 60년 허려권거선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도기, 호게, 차려, 오차, 호한야 등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내란 상태로 확대되어 끝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혼돈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가 독립하여 질지 선우라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규진을 격파한 뒤,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질지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는 복속민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완전히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 질지의 돌파구는 서쪽이었다. 우선 호한야를 물리치고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기원전 51년 서진을 계속하여 실크로드의 오갈과 신장 위구르 지방의 견곤을 합병하였다. 이어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뒤,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흉노 제국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설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하였고, 질지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 왕국까지 공략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질지 선우의 웅대한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 체제가 채 정비되기 전에, 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탈취한 한은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흉노와 다른 복속 국가에서 차출한 한의 군사 7만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비롯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되었고, 다른 흉노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질지 선우의 죽음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분산되었던 흉노족은, 더욱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소그디아나 동부와 드네프르 강변, 아랄 해 동부 초원 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유목민들을 병합하고,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후반까지 동쪽에서 이동해온 북흉노 무리들을 흡수함으로써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약 2세기 동안 주변 국가들과 큰 마찰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흉노족은 자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고갈, 그리고 350년 경 북중국에서 쫓겨나 이동해온 동족 우아르 흉노족(에프탈 족)의 압력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더 서진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유럽에 훈족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서기 374년으로 이때부터 흉노족은 훈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훈족은 374년, 사령관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남러시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알란족을 정복하였고, 같은 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고트 국왕이던 아르마나리크는 자결하였고 훈족은 후리문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한을 위협하던 훈족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 전술은 서쪽의 유럽 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훈족은 드네프르 강에서 서고트 군을 격퇴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 아타나리크는 375년에 잔존 세력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보호를 구하여 돈 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훈족의 계속된 공격과 막강한 군사력은 당시 어떠한 게르만계 민족도 대항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무수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공포심을 집어먹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도망쳐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해 왔으니 이것이 역사상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민족 대이동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보다 먼저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고, 서고트족의 침입이 이를 더욱 촉진시켜 395년에 로마 제국은 드디어 동서로 나뉘어졌다. 훈족의 등장과 동유럽에서의 급격한 정복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 문헌에 나타나는 훈족에 대한 과장된 묘사와 적개심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진격을 거듭한 훈족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고트족, 알란족, 게르만계의 타이팔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 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 없이 트라키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에 첫발은 내디딘 훈족의 예비 부대는 정찰 전위 부대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 훈의 또다른 부대는 헝가리 초원 지대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즈음 훈족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서서히 로마 영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작지에 거주하던 마르코만니족과 쿠아드족,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족, 트란실바니아의 서고트족들이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해와 이탈리아를 위협하였다.
훈족이 본격적인 로마 침공을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동서 로마가 분열되는 395년 봄이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족은 발칸 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아나톨리아원정은 돈 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 제국의 동부 군단이 주력이었으며 바시크와 쿠르시크라는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원정은 군대의 규모나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훈족의 정예 부대는 에르주룸 지역에서 출발하여 카라수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현재의 말라티아)와 킬리키아(현재의 추쿠로바)까지 진격했다.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현 우르파)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현 수르)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훈의 군대는 395년 가을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 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의 길을 따라 북쪽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398년에도 훈족의 군대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1세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훈족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유린하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
급속히 진행된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과 그에 따른 파괴와 살상은, 특히 그 지역의 동방 기독교 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집필된 훈족에 대한 부정적인 설화와 무용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4백년 경 서부 진영에서 훈족의 원정은 사령관 울딘이 지휘하고 있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딘은 후일 아틸라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족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1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민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을 압박하던 울딘이 투나 강변에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제 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4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으나, 계속되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 장군은 훈족에 쫓겨난 반달, 수에비, 쿠아드, 부르군트 등 여러 게르만계 민족들을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자 훈족이 개입하였다.
로마군과 울딘이 지휘하는 훈의 군대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함으로써 서로마는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로써 훈족의 위세가 온 유럽에 진동하였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들은 훈족의 위협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훈의 서부 유럽 경영은 이제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 상태여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울딘은 훈의 서부 지역을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404~405년, 그리고 409년에 투나 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비잔틴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하였다. 또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울딘은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 제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410넌 울딘의 사망으로 훈 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 위임되었다. 그는 412년에서 422년까지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422년은 훈 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해였다. 이 해에 훈 왕가의 네 형제인 루가, 문주크, 아이바르스, 옥타르가 서로 권력을 두고 쟁패하여 루가가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문주크가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의 엘리그(Elig, 번왕)에 봉해졌다.
울딘의 정책을 계승한 루가는, 422년 비잔틴이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반란을 획책하며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비잔틴군을 패퇴시켜 연간 금 350 리브레(1Libre= 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가는 6만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하였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요하네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35세이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가의 진영에 가담했다. 훈의 침공에 비잔틴 군대는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고 퇴각함으로써, 로마의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에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릭과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의 공격을 피해 훈 제국에 망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루가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 제국이 로마의 내정과 대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434년 봄, 루가는 사망하였고 아틸라와 블레다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훈 제국의 왕으로 등극할 당시 40세였던 아틸라는, 부친인 문주크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숙부인 루가에게 양육되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정복 전쟁에 참가하면서 주변의 여러 종족과 국가에 대한 정황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으며, 통치자로서의 덕목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경륜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 아틸라는 그의 형 블레다와 함께 훈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블레다는 낭만적이고 예술을 즐겼고, 군의 작전과 대외 관계 수립 등 통치권은 아틸라에 의해 행사되었다. 숙부인 아이바르스와 옥타르는 각각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번왕으로써 전왕 루가 시대의 지위를 계속 누렸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협조자로서 11년 간 제국의 경영에 참가하다 445년경에 사망하였는데, 세간에는 아틸라의 암살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434년 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파견된 비잔틴 사절단이 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왕인 루가는 사망했으므로 아틸라가 그들을 맞았다. 아틸라는 비잔틴 영토의 마르구스 성채 맞은편에 있는 투나 북안의 콘스탄티아 성벽에서 비잔틴 사절을 말 위에서 사절단을 맞으며, 평화를 위한 훈의 요구 조건을 단호하게 전달하였다. 첫째, 비잔틴은 훈의 복속민들과의 접촉과 연대를 일체 중단할 것. 둘째, 훈에서 비잔틴으로 도망간 자들을 즉각 돌려보낼 것. 셋째, 양국의 무역 거래는 지정된 국경 마을에서만 행할 것. 넷째, 비잔틴의 훈에 대한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금 700리브레 (약 315kg)으로 할 것 등이다. 이것은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이라 불리웠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건 없이 평화 협정을 수락했으며, 협정 이행의 첫 단계로 도망자들을 훈에 인계하였다. 아틸라는 그들을 비잔틴 영내에 있는 트라키아의 카르수스에서 처형함으로써,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그의 권위와 위세를 각인시켰다.
그 후 아틸라는 제국 동부 지역을 원정하여, 435년 볼가 강변의 샤라구르 족의 반란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동부 지역 중심지는 드네프르 강에, 서부 지역 중심지는 투나 지역에 있었다.
훈 제국에 편입된 영토는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발트 해안까지,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였으며, 예속된 종족의 수는 45개에 이르렀다. 복속민들은 단지 정치적 통합체로서 훈의 일원이었을 뿐 고유의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였으며, 종족이나 민족, 국가 단위로 동족의 부족장이나 총독, 왕의 통치를 받았다. 5세기 중엽까지 훈 제국 내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었다.
이 때,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족이 서로마 영내를 지나가며 유린과 약탈을 일삼았고,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곤경에 처했다. 이에 로마는 재차 아에티우스를 파견해 훈에 원병을 요청했다. 2년간에 걸친 농민 반란은 아에티우스와 아틸라가 보낸 원병의 도움으로 겨우 반란 주모자를 처형하고 소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르군트족의 군디카르 왕이 벨기에 지역을 침공하여 훈의 서부 지역을 위협하였다. 훈의 서부 지역 왕인 옥타르의 지휘 아래 네케르 강변에서 벌어진 훈과 부르군트족간의 대전투에서 군디카르 왕을 포함하여 2만 명의 부르군트 병사가 전멸함으로써 훈의 군대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은 중세 독일의 유명한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주력이 훈에 의해 패퇴된 전투 결과, 부르군트, 바야부르, 프랑크, 롱고바르드족 같은 많은 민족들이 새롭게 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440년 이후 아틸라의 비잔틴 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아 협정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고 훈으로부터의 도망자 송환을 거부한 것에 연유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훈의 포로 중 고트족 출신 아르네기실후스를 송환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으로 임명해 훈 접경의 트라키아에 파견함으로써 훈을 자극하였다. 또, 국경 시장에서의 거래 원칙도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종종 위반되었다. 특히 마르고스 주교가 콘스탄티아 근교의 있는 훈의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해 비잔틴에 대한 훈족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
이 때,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 게이세릭은 지중해 진출을 방해하는 비잔틴에 대항해 아틸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 군대는 마르고스의 점령을 시작으로 1차 발칸 원정에 나서 지금의 베오그라드인 싱기두눔과 나이수스를 점령했으며 트라키아에서 서로마의 중재로 진격을 멈추고 비잔틴과 다시 협정을 맺었다.
서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평화 협정 준수를 확실히 약속하고, 그에 대한 보장으로 자신의 아들 카르필리오를 인질로 훈 궁정에 보냈다. 아에티우스의 제안을 수락한 아틸라는 투나 강변에 산재한 비잔틴 성채들을 접수하고, 훈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될 수 있는 발칸 반도의 요새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445년, 형 블레다의 사망으로 아틸라는 명실공히 권력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동서 로마를 비롯해 그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훈과의 협정을 또다시 어기자 아틸라는 447년, 제 2차 발칸 원정을 시도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의 대군은 두 방향에서 비잔틴 영내를 공격해 사르디카, 필리포폴리스, 마르키아노폴리스, 아르카디오폴리스 등을 함락시키고 각 도시들을 약탈했다. 훈군은 계속해서 테살리아의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아티라(현 이스탄불 외곽 부육 체크메제)에 포진하였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테오도시우스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아틸라에게 보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아나톨리우스 협정’으로 알려진 이 휴전 조건은 투나 남쪽 5일 거리 공간에 비잔틴 군대를 주둔시키지 말 것이며, 양국 무역 시장은 훈의 변경 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훈에게 금 6천 리브레(약 2천 7백kg)를 지불하고, 그동안 바쳐오던 연공을 세 배로 늘려 금 2천 1백 리브레(약 945kg)으로 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
비잔틴의 재정 상태로는 이렇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연공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는 아틸라 암살 음모를 획책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때 아틸라의 관심은 동로마(비잔틴)보다는 내분에 휩싸여 약화되고 있는 서로마에 더 쏠려 있었다. 서로마에 대한 아틸라의 군사적 원조는 43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서로마는 훈에 대한 공납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령관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아틸라는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매진했다. 448년, 2년간 계속된 군비 증강과 정치적 안정이 일단락 되자, 드디어 서로마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취했다. 우선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 3세(425~455)황제의 여동생이자 한때 자신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약혼 반지를 보낸 바 있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결혼 선물의 지참금으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틸라는 이를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451년 초, 헝가리 중앙에서 서쪽으로 원정을 개시한 훈군은 8~10만의 규모였다. 훈군과 동일한 규모의 게르만과 슬라브 복속민 군대가 합류하여 그 규모가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20여 만의 훈 연합군이 451년 3월 중순경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에 진입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도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훈에 적대적인 부르군트와 서고트, 프랑크족을 규합하여 훈과 동일한 규모의 대군을 형성하여 갈리아를 지나 북상하였다.
마침내 훈군이 4월 7일 메티스와 두로코토룸을 정복하고 파리 근교의 아우엘리아눔(현 오를레앙)에서 그 곳에 진주하던 아에티우스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서로마와 훈, 서방 세계의 2대 강국의 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벌어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치열한 접전 끝에, 쌍방 모두 16만 5천명이란 전사자를 남기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
유럽의 역사가들은 19세기 이래 로마군이 궤멸되지 않고 훈이 퇴각한 이 전투를 로마의 승리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 전쟁 당일 밤 로마군의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아에티우스 자신이 훈 진영에 포위, 고립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사실이 밝혀졌고, 로마군에 소속되어있던 프랑크군과 테오도리크 왕이 전사한 서고트군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결과적으로 훈의 서로마 침공은 로마 제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던 갈리아를 폐허로 만들어 서로마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 전쟁 후 명장 아에티우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아틸라의 훈군은 갈리아를 떠난 지 20여 일만에 수도인 판노니아의 세게드로 귀환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또다시 대규모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교황 레오 1세의 시종관이었던 프로스페르티로의 기록에 의하면, 무저항의 진격을 계속한 아틸라의 공세에 방어력을 상실한 아에티우스는 황제 발렌티아누스에게 이탈리아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452년 봄, 아틸라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베네치아 평원에 도착했다. 아퀼레이아 성을 함락시키고 또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에밀리아 지역을 정복하고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 근교에 이르렀다. 공포에 질린 민중의 소요와 적의 공격에 다급해진 서로마 황실은 교황과 원로원의 화평 건의를 받아들여 긴급히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 레오 1세로 이루어진 사절단은 452년 7월 중순경 민시오강과 포강이 만나는 강변에 진주해 있던 아틸라를 방문해 협상을 했다. 교황은 서로마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여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아틸라는 5년 전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수도 점령을 눈앞에 두고도 철수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면서, 문화 보호 차원에서 로마를 초토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틸라는 로마 교황의 방문을 이미 서로마가 비잔틴 제국처럼 자신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프리스쿠스가 448년 훈의 수도를 방문한 서로마 사신 로물루스의 전언을 기록한 대목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아틸라는 다음의 공격 대상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임을 밝힘으로써 동서 로마가 이미 자신의 통치하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제국은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게르만 제후의 딸인 에리카(일디코, 힐디코)와 결혼식을 치루던 날 밤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만,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후반 새로운 아틸라 연구는 그가 중세의 폐쇄된 기독교 사회에 의해 철저한 야만인, 약탈자로 폄하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훌륭한 덕목과 통치력, 뛰어난 국제 감각과 탁월한 지휘관의 재능을 가졌던 당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틸라의 사후 훈 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다. 아틸라의 아들인 엘락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 연합군과 판노니아에서 벌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뎅기지크는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이 유럽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지친 훈족을 이끌고 흑해 서안으로 이주해갔다.
이르네크의 영도하에 훈족은 당시 남러시아 평원에서 모습을 보이다가, 발칸 반도와 중부 유럽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불가르족과 마자르족(헝가리)족과 합류하여 그들에게 많은 정치, 군사, 문화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마자르인들을 인솔하여 헝가리 땅에 정착해 왕국을 세운 족장 아라파드는 자신을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으며 현재도 헝가리 인들은 아틸라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