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 읽은 날짜: 5월 25일(6월 21일)
* 줄거리 : - 임진왜란시 23전 23승, 전승의 이유는?
1. 옥포해전 - 30여척격파, 6척 도주
-발발한지 왜병 20여일에 한양에 입성하다. 이순신 20여일 이 지난후 출전하다. 일본수군은 조총과 활 그리고 일본도. 조선수군의 판옥선에는 총통(500보이상)있으니 적의 조총(100보내외)피해를 입지 않고 적선을 격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싸우다. 그것은 포격전 원거리포격전이었다. 하지만 원균과 용맹한 장수들은 원거리포격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승리란 적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목을 베는 것이었다. 그래서 적선에 아군의 전선을 접근시키고 후퇴할 경우 끝까지 추격해야 한다고 여겼다.
- 이기는 것 역시 습관이다. 이겨놓고 시작하라, 첫판에 이겨라
2. 합포해전 - 승리 후 쉬지 아니하고 여세를 몰아 적선 5척을 잡기 위해 전군 출전, 따라잡아 포를 쏘고 적군 배가 좌초되자 왜병, 배를 버리고 도망하고 조선판옥선은 일본배를 그대로 들이박았다(당파하라-일본배 그대로 무너짐. 당파전술과 총통의 집중발사와 거북선을 이용한 돌격전이 이순신 임진왜란시 사용한 전술이다. 일본배는 총통을 발사할 때 반동으로 선체가 견디지 못하는 약한 배라서 총통을 싣지 못했다).
3. 적진포해전 - 하루 동안에 두 번 해전 승리후 첩보에 고리량에 도착했으나 적이 보이지 아니하자 속도를 늦춰라, 적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수색하라(신중함), 적이 있다는 것에 다시 척후선을 띄우고 적진포는 입구가 좁으니 장사진(긴뱀처럼 차례로 지나가면서 포격하고 다시 돌아 포격을 가하는 방법)을 펼쳐라 - 육지로 도망간 왜구는 육지숲 바위에서 해안으로 총으로 쏘자 불화살과 조란탄(골프공만한 쇠구슬 400여개가 발사되는)을 발사하자 13척의 배와 최소 2000여명의 일본군이 붕괴되었다.
- 세 번째 승전함 - 군대의 약점은 배후이며 측면이다. 칭기스칸은 상대의 배후를 치기 위해 약 500킬로미터의 키질쿰 사막을 횡단했다. 도저히 사람이 건널 수 없다는 죽음의 사막을 칭키스칸이 대군을 이끌고 건넌 이유는 바로 배후를 치기 위함이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안에 있다(승리에 도취하지 마라, 등 뒤에 적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4. 사천해전 - 군왕의 몽진, 평양으로 승전보를 올리자 가선대부라는 벼슬을 받음. 원균으로부터 사천에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거북선과 출전하고 일본군은 사천만 입구 산언덕에서 기다리고 있다. 썰물시 공격하지 못했으나 밀물시 총통을 공격함으로 일본군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다. 그때 거북선이 공격하다. 적군 중앙에 있어 포를 쏘자 적군배가 부서지고 조총으로는 거북선을 뚫지 못하였다(당파전술도 같이 함).
- 비책을 준비하라, 전쟁터에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이순신은 비장의 신무기, 비책을 들고 나왔다. - 영국군의 보병이 기병을 이기다 긴 활로, 칭기스칸 철제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다. 독일군 세계 최초의 기관총으로 연합군5만의 병력을 무찌르나 영국군 탱크가 처음나왔을 때 기관총으로 탱크의 철판을 뚫지 못했다. - 자신만의 비책이 있어야 한다. 나의 비장의 카드는 무엇인가?
5. 당포해전 - 당포에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에 출전함. 적이 이미 조선수군을 알고 있으니 조선수군의 피해가 걱정이 되지만 가장 약한 일본군의 약점은 가장 견고한것이 가장 약한 곳이다. 거북선으로 적선이 보호하는 대장선을 공격하라 격파함(귀정자구 대장) - 한니발군대의 보급기지 스페인의 뉴카르타고를 스키피오가 공격함. 상대의 강점을 약점으로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하라.
- 진해 앞바다 해전 - 백성들의 정보를 믿고 적선을 찾아가 배를(6척) 불태움
6. 당항포해전- 전라우수군 판옥선 25척과 합류하여 50척이 넘는 대함대를 구성하다. 좁은곳으로 몰아 총통을 하지 않고 화살을 쏘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화살로 응전하고 진격해오기 시작하자 조선판옥선은 불화살이 꽃혀 불이 붙어, 후퇴하라는 명령에 유인작전에 걸려들어 더 빨리 노를 저으면 이순신함대를 쫓아왔다. 정박한 일본배를 공격하면 육지로 올라간 일본군들이 조선민간인에게 보복할것을 걱정하여 육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유인하여 수장시킬 전략이었다. 일본 전선26척은 총통이 발사되자 무너지고 거북선으로 휘젓다가 한척만 남겨두고 이순신은 후퇴함 - 그리고 다시 명령을 내림 “적은 반드시 나머지 한척의 배를 타고 당항포를 빠져 나올것이다.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잔적을 모조리 소탕하라” 일본군이 배를 모두 잃으면 육로로 후퇴하면서 백성들에게 저지를 만행을 막기 위한것이었다. 이순신이 예상한대로 그날밤 한척의 배에 탐승인원이 훨씬넘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몰래 나오다 매복에 걸려 전멸됨. - 자신의 행위가 끼칠 영향을 생각하라 ,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보라
7. 율포해전 - 첩보에 출동하였으나 역풍에 밀려 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공포탄을 계속 발사함 적은 총통을 두려워하여 전속력으로 달리니 노를 젓는 격군들이 지치자 율포라는 작은 해안으로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함. 그때 총통으로 적선을 맞춤.
첫 출전에 황옥천이라는 군관하나가 탈영하자 참수, 일벌백계
8. 한산대첩 - 유인하여 학의 날개로 적선을 쳐부수다 양쪽에 거북선이 빠져나가는 전선을 당파하다. 59척 파괴 9000명의 군사를 파괴함.
9. 안골포해전 - 먼저공격하자 적은 세척의 배만 나와 자살특공대로 지구전을 계획하고 있는듯했다. 즉 일본군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과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뒤에 남겨둔 조선수군을 불러 단숨에 격파하다. 부산으로 가 함대시위하다. 세를 과시하다.
10. 부산해전 - 장사진으로 포격하다 130여척을 수장하다. 전면전을 하다.
11. 웅천해전 - 삼폐와 의능인 승려 600명과 상륙작전을 하다. 견고한 목책을 설치한 채 사위에서 반격해 오는 적을 향해 나아갔지만 물이 빠지자 퇴각함. 이순신은 웅천해전의 결과 조차 정확하게 기록해놓지 않았다.
12. 견내량 봉쇄작전 - 한산도에서 척후선만 보내다 적선900척을 주시하니 적들이 먼저 움직여 견내량에 모이다. 진주성(7만 조선민관군학살됨 - 논개) 함락소식에 적들이 모이자 견내량입구 첨자진에서 일자진으로 일본군 쳐들어오지 못하다. 이기려거든 방어하라 (1차대전후 프랑스육군장관A.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마지노선은 총길이만도 750킬로미터에 이르는 방어선이었다. 스위스까지 연결되는 난공불락의 요새선으로 어느누구도 뚫을수 없을것이라 생각했으나 2차대전 독일 기갑부대에 의해 붕괴되었다. 최전선에서 지켜라 이순신은 4년반 동안이나 일본군을 남해 동쪽 바다에 꽁꽁 묶어 둘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제 1선에서 지켰기 때문이다. 2차 당항포 및 진해해전 배후봉쇄로 21척을 모조리 격침.
13. 칠천량 해전 - 이순신 체포되다. 무군지죄-임금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죄였다.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정에 명령에 출전하여 일본군유인에 하루종일 헤매다 풍랑에 판옥선20여척을 잃었다. 가덕도로 회군하여 도착하자 매복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자 배에 오를것을 명령하여 영등포로 도착 수군400여명이 전사. 여기서도 매복기습받자 칠천도로 도주, 일본 척후선이 조선판옥선 4척을 불태우고 돌아갔지만 보초도 세우지 않았는지 외즐포에서 기습으로 패배가 짙어지는 가운데 경상우수사배설은 전장을 외면하여 철수명령을 내려 12척만 벗어났다. 원균은 고성땅으로 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때 판옥선100여척과 수군 1만이상이 전사했다. 전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 최고사령관이 전사한 보기드문 패전이었다
-원균과 조정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늘의 적도 어제의 적과 똑 같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 어란진해전 - 어려울때 앞장서라
1597년 8월 18일 12척의 장흥의 회령포에서 배를 인계받음 이때 몹시 아팠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8월 24일 해남의 어란포로 이동. 이때 적선8척이 어란포의 이순신을 공격하자 53살의 몸이 정상이 아니지만 배를 타고 직접 지휘하다. 적을 몰아내다.
벽파진 1차 해전 -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배설은 결국 도망쳐 임진란이 끝난후 고향에 숨어있다 권율에게 잡혀 참형을 당했다. 추운 겨울에 이순신은 추위와 병사들은 여름옷으로 추위 속에 적선 5척이 도착. 13척이 아군을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에 한강으로 도망가서 도성이나 지키자는 상황에 전투명령을 내렸다. 적이 도망가자 이순신은 소규모의 적을 쫗아내며 더 큰 적을 기다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14. 벽파진 해전 - 일본군의 전략상 치명적인 실수는 칠천량 승전 분위기에 취해 수로가 아닌 육로로 북상하면서 이순신에게 시간을 벌게 하였다. 조정(왕)에서, 힘들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서 도우라고 했을때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다시 시작된 불패신화
- 적선 8척이 어란포로 접근해 올때 싸울것인가 후퇴할것인가? 싸웠다. 그리고 추격도 했다. 다시한번 일본군의 내습을 막하낸 뒤 장수와 부하에게 군기와 군령을 강조했다. 소규모 부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군기와 사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밤 적의 야습이 있을것이다. 불화살과 신기전으로 물리치다. 이제 진중에 자신감과 지휘관에 신뢰가 감지되었다.
- 나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가? 어떻게 신뢰감을 주는가?
첫째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순신은 싸우면서 보여주었다. 다음은 통찰력이다. 전체전황을 읽고 남보다 한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쳐들어온 적을 멀리 쫓지 않았다. 패배한 적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달도 없는 그믐밤 야습을 시도할 것이다.
15. 명량대첩
- 밀집된 방패가 견고하다. 전선200여척이 어란진을 출발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거북선도없는 판옥선 13척으로 명량 울둘목 앞에 서다. 뒤에는 병선으로 가장한 어선이 있었고 백성들도 다 나와지켜 보았다. 이순신은 “한사람이 길을 지키면 능히 천명을 막아낼 수 있느니라” “필사즉생 필생즉사.” 13척의 숫자로 수백척의 왜군을 이길수 있다고 믿는 군사는 없다는 것을 이순신은 느낄 수 있었다. 집중 오로지 집중만이 희망이다. 대장선만 남겨두고 조선함대 뒤로 처지다 대장선만 포위된 채 싸우다. 육지에서 백성들은 야유하다. 조류가 바뀌다. 6시간마다. 뒤에 처진 조선함대가 대장선에게 오게되고 일본전선은 밀려나고
- 오래 전 이순신은 명량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하고 이곳에서 기다렸다. 명량에 힘을 집중했다. - 지금도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힘을 집중해야 한다.
- 절이도 해전 - 전선50척과 수급40개를 베었다. 명나라 진린은 싸우지도 않았지만 수급을 달라고 하자 주었다.
- 1차예교 해전 - 이순신휘하의 지휘관과 군관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명나라 유정은 방관하다.
16. 예교 해전 - 85척의 판옥선이 되었다. 적선50여척을 불태우다. 완전히 회복되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예교성에 주둔한 전선100척과 1만5000명의 병력이 철수를 서둘렸다. 전공에 사로잡혀 진린이 이순신의 퇴각신호를 무시함으로 갯벌에 갇혀 있게되고 장수를 구하려고 조선수군도 120여명의전사자를 내었고 명은 함대19척, 절반 2500여명이 죽었다.
- 시인 박목월도 굴욕의 강을 건너 아버지가 왔노라고 노래했다. 조선판옥선을 주면서까지 명나라 진린을 설득하여 왜선을 치다. 한신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불량배들의 가랑이사이를 기었다. 한 되 짜리 그릇에는 한 되 밖에 담을 수 없다.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견뎠을 모욕감과 굴욕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17. 노량해전 - 바람 앞에 맨몸으로 설 때 비로서 인생의 주인이 된다. 최후의 전투 - 방어래를 물려라(군사들의 잡담을 막기위해 입에 물리는 나뭇가지다) 협공을 받게 되어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반포하라 그리고 근접전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하여 좁은 바다에서 물길이 막힌 관음포로 일본 배는 도망갔다 최후의 발악으로 대들었다. “잡아라 단 하나의 적도 살려보내지 마라” 이순신은 직접 북을 치기 시작했다.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그의 나이 54세 갑옷을 입지 않고 철릭을 입고 싸우다.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이지만 이순신은 무인이었기에 장수이었기에 적을 섬멸하였다. 마지막순간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지금도 바람은 분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나에게 불어오는 고난과 고통의 바람 그 앞에 맨 몸으로 서라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