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선교학교 마지막 시간.
통일의 집은 가정과 같이 따뜻하면서도 문익환 목사님의 여러 유품들, 기록들이 가득해 박물관 같은 느낌도 풍깁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철저함과 간절함으로 살았는지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받아 왔어요.
통일. 학교에서는 그나마 한 번씩 듣던, 다루던 말인데 점점 멀어지고 있네요. 세대가 넘어갈수록 통일은 멀어지고 있어요.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일을 어찌 혼자 합니까. 상대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뜻을 맞춰야지요. 하지만 북한까지는 보지도 못 하고 남한 안에서도 세대가, 성별이, 지역이, 계급이 지어져 찢어지고만 있으니 통일은 한낱 꿈에 그치게 됩니다.
선생님은 왜 감옥에 가면서까지, 직접 북한에 가면서까지 많은 싸움을 이겨내며 통일 운동을, 민족 운동을 하셨던 것일까. 뜻을 함께해 온 친구들의 죽음? 그 시대의 특징인가?
어느때가 더 힘들었다 판단할 수 없지만 어느때건 운동하기 좋았던 때는 없었다는 기독청년운동 선배의 말씀. 맞다. 그때라고 쉬웠겠는가. 지금이라고 할만하겠는가.
함께 자란 윤동주와는 달랐고 장준하와 다르고 전태일과 달랐을 뿐이지요. 본인은 이들의 죽음을 보며 부끄러웠을지언정 선생님은 이미 본인 안에 뜨거운 운동의 불꽃이 있었으리라. 그 전부터 충분했으리라.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인권, 자아, 정체성, 가치.. 다 좋다. 잘 찾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 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만, 개인만 집중하고 그 안에 가두려는 시대, 홀로 만들고 연대하지 못하고 관계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가 너무 커져 나만 집중하고, 나만, 나만 보게해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
나 하나 잘 사는 인생, 그 것이 옳은 삶인가? 정직하게 질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 배불리고, 편히 자는 삶. 나 하나님 잘 믿어 개인 구원 위해 사는 예배와 찬양. 그런 1인분 인생 사는 것이 구원의 삶인가?
내 욕심, 내 집착이 나를 내 명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함에도 나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닐지요. 서로 사랑하며 관계 맺는 삶. 민중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 우리가 받은 명을 살아가신 실제를 문익환 목사님의 삶을 통해 배웁니다.
선생님이 윤동주의 목소리로, 장준하의 삶으로 살았듯, 나는 누구로 살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분명한 뜻을 세워 살아야 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 나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와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사를, 실제를 살았습니다. 민중과 함께 먹고 즐기고 생활했습니다. 그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분명한 뜻을 기억하며 이제는 내가 없고 오직 예수만 계시는 삶을 따라 삽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이 땅을 통일하는 거대한 관념보다 실제적 작은 생명 살림을, 작은 통일들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결국은 승리하실 하나님이 이 땅을 새 나라로 만드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