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언어(meta-language)란 무엇인가
어느 날 대학가의 카페거리를 걷다가 한 찻집에 걸린 근사한 간판을 발견했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였다.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책 이름을 찻집 이름으로 쓰다니, 참으로 멋진 발상이다. 그런데, 그 글씨가 흰색 바탕에 까만색으로 쓰여있었다. 아니 주홍글씨가 왜 까맣지. 도대체 이 간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언젠가는 누군가 담벼락에 "여기에 낙서하지 마시오"라는 글귀를 붉은 스프레이로 크게 휘갈겨 쓴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경고문인가 낙서인가? 경고문이기에는 너무 흉하고 지저분하다.
내가 별것 아닌 사물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옛날 옛적, 가족과 함께 밀양의 표충사에 간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효봉스님의 비석이 있었고, 거기에는 그가 입적시에 상좌들에게 남긴 법어가 새겨져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한 말은 모두 헛소리로다."
내가 그분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스님, 방금 하신 말씀도 거기 헛소리에 포함됩니까?"
다음은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거짓말쟁이 역설(Liar Paradox)'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난문(難問)이다.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는 말한다.
"크레타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만 한다."
상식적으로 모든 문장은 참이 아니면 거짓이다. 그렇다면 이게 참인가 거짓인가.
그의 말이 참말이라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것이고, 거짓말이라면 참이 될 것이다.
왜 이런 역설과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생기는가?
우리의 언어에는 대상언어(對象言語, object language)와 상위언어(上位言語, meta language)가 있다. 대상언어, 즉 일차질서적 진술(first order statement)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상위언어, 즉 메타언어 혹은 이차질서적 진술(second order statement)은 '언어의 성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언어의 이런 위계(order) 또는 수준(level)은 3차, 4차...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메타언어의 사용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의 예를 영어로 표현하면 "S is true if and only if S is false"인데, 이렇게 어떤 '사물'을 가리키지 않고 '문장'을 지칭하는, 즉 '자기지칭(self reference)'적 문장은 패러독스를 야기한다.
이 패러독스의 정체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같은 곤경(困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얼핏 언어유희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집합론의 핵심 과제이자 논리학의 본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제한, 예를 들어 "자기지칭적 문장을 피해야 한다"와 같은 규칙을 만들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러셀(Bertrand Russell)의 <유형이론(Theory of type)>과 타르스키(Alfred Tarski)의 <진리의 의미론(Semantic Theory of Truth)>은 이 난문의 해결을 시도한다.
"자신이 요소이면서 구성요소 모두에 관한 언급은 무의미(nonsense)하다."
"어떤 규칙에 따르면서 그 규칙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한 문장 내에는 같은 계층(order)의 단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들의 주장은 진술의 유의미성(meaningfullness)과 진리가(truth value)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이런 제한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크(Susan Haack)가 지적했듯 너무 작위적이거나 진정한 철학적 해결책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형식논리학의 바탕에는 언제나 인식논리학의 근본 문제가 깔려있다.
우리가 아무리 논리체계를 면밀하게 구축하고 언어체계를 명료하게 해도, 그 시스템 안에는 체계 내의 요소로 설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y)'가 가리키는 것이다. 괴델의 논문은 원래 연역체계의 불완전성에 대한 것이지만 특정의 닫혀진(closed) 언어체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언어의 다양성, 포괄성, 유연성을 발휘하면서도 정확성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메타언어의 숙제이다.
"우물 안 개구리, 바깥세상을 모른다(井中之蛙)."
이건 우물 바깥에 있는 개구리가 쓰는 말이지, 우물 안의 개구리는 쓸 수 없다.
인간은 우주 속의 개구리 같은 존재. 지금도 여기저기 유한자 개구리들이 무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자연계의 피조물에 불과한 월하(月下, sublunary)의 미물들이 초자연(supernature)에 대해 말한다.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天外之天)." 우주 안에 있는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게 과연 의미 있는가.
불교에서는 "불법의 진수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不立文字)"라고 하면서 왜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서책이 필요한가.
"진리는 말을 떠나야 한다(離言)"라고 하면서 왜 스님들은 그렇게 말이 많은가.
밀교(密敎)의 경궤(經軌)인 딴뜨라(眞言, tantra)는 주(呪)한다.
"말이 없는 곳에 뜻이 있고, 뜻이 없는 곳에 진리가 있다... 참된 것이 아니라 참 그 자체(眞), 성적인 것이 아니라 성(性) 그 자체로 들어가라."
이것이 제대로 된 말인가 아닌가. 이것도 메타언어인가.
다따 다야드밤 다미야타 옴 샨티 샨티 샨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부처는 똥 막대기다." "법은 법이 아니다." 이런 선문답들도 분석해보면 대개 패러독스나 안티노미(antinomie) 또는 메타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오묘하게 느껴지거나 아리송한 말놀이로 비칠 수도 있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말은 기독교도에게 핵심 도그마(dogma)이다. 그런데 신이란 완전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참인 토톨로지(tautology)이다. 이같은 항진(恒眞)명제는 동어반복의 하나마나(trivial)한 말, 분석적 진술(analytical statement)이다. 이것이 실재에 대한 언급이라면, 이른바 종합적 진술(synthetic statement)이거나 서술문(descriptive sentence)이라면 이것도 메타언어인가.
부처는 <십이장경(十二章經)>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 다만 정진하라." 이렇게 설(說)하고 열반에 든다. 여기서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불법(dharma)만은 불변이다.
이걸 구분 못하면,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라고 말했을 때, 제자인 크라틸로스(Kratylos)의 "참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면 한 번조차도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도 생성과 변화의 이법(理法, logos) 그 자체는 불변이다.
변하지 않은 것을 변하는 것으로 말해야 하는 것,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말해야 하는 것, '영원', '무한'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일구(一句)를 건네는 것,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해지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과 글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 이것이 메타언어의 어려움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런데 사랑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
그들은 정말 서로 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말뿐인 사랑을 하거나 사랑하는 척하는 걸까.
"그 경치의 아름다움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경치가 진짜 아름다운지 아닌지 도통 모르겠다.
우리가 쓰는 말이란 이렇게 메타언어가 뒤범벅이 되어있으며, 놀랍도록 다채롭고 복잡하며, 엉터리 말장난, 헛소리들이 수없이 깔려있다. 학생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교안을 덮고 강의실을 나오며 지비는 말했다.
"우하하하! 여러분,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서강대학교 교양과목 <철학개론> "제3장: 논리와 언어", "제4장: 언어와 세계" 강의에서. 2008. 9. G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