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타이완 여행을 꿈꿨으나 항공권을 구입할 수 없어서 급히 규슈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부지런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를 꺼내 읽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여행 계획과 항공권 및 숙소와 철도 예약을 서둘러 마쳤습니다. 값쌀 줄 알았던 후쿠오카 항공권도 좋은 시간대는 매우 비싸더군요.
2016. 1. 17. 09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10분만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국내선청사로 이동하여 하카타로 가는 신간센을 탔습니다. 하카다에서 아들 철이가 레일패스를 개시한 후에 사가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우리는 첫 답사지인 요시노가리행 열차를 바꿔 탔는데, 2량의 조그만 기차로 출퇴근과 통학용으로 사용되는 듯합니다. 일본은 통학생이 1명이라도 있으면 열차 1칸이라도 제공한다더니만 과연 철도와 전차의 나라더군요.
인천에서 후쿠오카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 걸립니다.
후쿠오카 공항철도역에서 하카타행 전철을 기다리며
오전 11시경이라선지 한가하네요
하카타역에서 레일패스를 개설한 후에 점심용 도시락 '에끼벤'을 샀습니다. 어느 블로그에 꼭 에끼벤또를 먹어보라고 해서~ㅋ
일단 하카다에서 신토스까지 신간센으로 갑니다
신토스에서 요시노가리행 2칸자리 전철로 갈아탔습니다. 안내와 통역을 맡은 철이가 열심히 검색을 하고 있네요.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과 비슷한 짐꾼과 안내역을 맡았습니다. ㅎㅎㅎ
우리는 철도여행을 대비하여 짐을 하나로 했고 등가방 1개와 어깨 가방 1개로 줄였습니다. 짐가방은 철도역사의 보관함에 넣고 돌아다닐 요량으로...
헌데 요시노가리역 보관함이 너무 작아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역무원에게 사정을 말하니 "코뮤니티 센타"에 맡기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코뮤니티에 계신 직원들도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습니다 ^^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지로 2300년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건립한 청동기 유적 마을입니다. 아마도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94년 전후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조선은 멸망후 바다를 건너가 마한을 세웠고 마한은 삼한의 영도 국가가 됩니다. 이러한 국가멸망사는 또다른 이동을 야기하면서 마치 야구의 밀어내기식으로 중국 연 -> 고조선-> 마한 -> 규슈로의 이동이 발생한 것입니다.
요시노가리로 가는 길은 10여분 걸립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사방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좀 썰렁했습니다. ㅋ~
요시노가리 유적은 1986년 발견되어 전세계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면적은 12만 평이나 되고 시대는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까지 600년에 걸친 유적지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모의 청동기 유적지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왜냐하면 청동기 유적지는 입지 환경이 좋기 때문에 그 위로 여러 국가가 계속 성립되어 발굴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진은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입구
열차 시간 맞추느라 늦은 점심을 공원센타에 들어가서 먹었습니다. 날씨가 차가워 구내식당에서 음식 하나 신청하고 에끼벤과 함께 먹었습니다. 식당 종업원은 나이 많으신 남자분인데 허술한 식당에 어울리지 않게 보타이까지 매고 친절하게 서비스 했습니다.
870엔짜리 도시락
야채와 이곳 요시노가리산 적미를 넣고 끓인 탕밥(1050엔), 아주 구수하고 푸근한 맛이 여행객의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습니다. ㅋ~
요시노가리는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랍니다. 좋은 들판에서 좋은 곡식이 나오겠지요...^^
비도 오고 제한된 시간이라 걱정했는데, 마침 유적지를 다니는 셔틀버스가 있어서 위의 지도를 따라 타고 내려와 남쪽마을->창고와 시장->안쪽 마을-> 고대 식물관->북분구묘에 내렸습니다. 북분구묘에서부터는 걸어서 유적 복원 건물과 전시실을 돌아보면서 내려왔지요.
북분구묘는 이와같이 무덤 위에 그대로 전시실을 만든 것입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지는 1986년 발견되어 1992년부터 복원 사업에 들어가 2000년부터 부분적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답니다.
북분구묘 옹관 배치도. 2300년전까지도 일본은 농사도 목축도 할 줄 몰랐고 다만 토기만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었답니다. 한반도에거 건너간 <도래인>들이 벼농사와 청동기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땅콩 껍질같죠? 당시 무덤 양식은 옹관묘입니다. 거대한 항아리 두개를 붙여서 시신을 안치하는데, 시신을 구부려 넣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나라 마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
옹관묘 모형도. 이렇듯 시신을 구부려 안치했습니다.
부장품으로 나온 옥 제품은 사진과 같은 장식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걸이나 머리 장식용으로~
제당 건물 뒤로 북분구묘가 보입니다. 묘 앞의 제당에서 정기적인 제사를 드렸을 겁니다.
옹관묘열에 드러나 있는 옹관묘
옹관묘가 주르륵 있어서 옹관묘열이라 합니다. 유홍준 선생의 책에 보면 2000기의 오관묘가 600미터 가량 줄지어 있는 곳도 나오는데,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습니다. 요시노가리 유적터에 1만 5천기의 옹관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합니다.
주거지. 마을 양식은 기원후 300년 것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도래인'들이 600년 사는 동안 마을에서 초기 국가로 넘어가 소위 "야마타이국" 시절쯤이 될 것 같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일본 최초의 국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히미코'라는 무녀가 수장으로 지배했다고 하지요. 결국 일본 최초의 국가란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명인들에 의해서 건국되었음을 요시노가리 유적은 입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자기의 권위자인 윤용이 박사는 "그러므로 요시노가리 답사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이자 곧 우리 청동기시대의 답사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래서 저도 이곳에 오게 된 것이지요. ㅎㅎ
창고. 고구려 부경이 떠오르지요. 아마도 쥐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창고를 세우고 곡식을 보관했을 겁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장소로 정사를 돌보던 곳. 북내곽 안에 있습니다. 최고의 신녀(무녀)가 거주하던 대제전.
지붕 꼭대기를 보면 임진왜란 때 왜의 장수 투구장식이 연상됩니다만~~ㅋ 안으로 올라가 보니 아래와 같은 모형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북내곽이 끝나는 지점은 이런 식으로 ㄹ 자형의 입구을 만들어 놨습니다. 외부의 침입을 방비하는 전략이겠습니다. 대문 위로는 새 2마리가 앉아있네요. <도리이>라고 부르지요.
망루에 올라가 남내곽 내부와 창고와 시장 방면을 본 사진
역시 망루에서 남쪽 마을 방향으로 찍은 사진
망루에 올라 찍은 파노라마 사진
남내곽을 지나자 전시실이 나타납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을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여 도표를 만들었습니다.
야요이 시대 전기 - 야요이 시대 중기 - 야요이 시대 후기. 일본은 '도래인 시대' 600년을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일본 열도의 원주민은 <조오몬 토기>를 제작하여 조오몬인으로 불립니다. '아이누족'의 원조상이라 하지요. 이들은 불행하게도 '도래인' 즉 한반도인에게 밀려서 훨씬 열악한 환경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오늘날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에 소수만이 살고 있다하니 문명의 빛과 어둠은 항상 그렇듯이 함께 찾아옵니다. ㅠㅠ~~
신석기 연모.
조오몬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를 제작한 사람들이었지만, 농사를 지을 줄도 청동기 연모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일본 열도가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다음에 고립되어 그랬던 것같습니다. 무려 1만 5천년가량 대륙에서 떨어져나와 고립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 무렵 갑자기 야요이인(도래인)이 등장하여 자신의 생활터전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밀어내기 역사의 한 과정이 더 있었던 셈입니다.
중국 연 -> 고조선 -> 마한 -> 도래인(야요이) -> 조오몬(아이누); 홋카이도로 이주
토기류
옹관들
반달형 돌칼과 여러가지 석기들
부여 송국리식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칼의 가운데가 잘룩하게 들어간 한국식 동검
마을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목책을 성처럼 두르고 나뭇가지 끝을 날카롭게 깍아 '사카모기'를 세우고, 그 사이로 해자를 파놓았습니다.
환호 입구<도리이> 앞에서.. 요시노가리 유적 답사를 마치고서..
일본에는 신사나 유적지 입구에 <도리이>(조거=새 조, 거주할 거)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새가 산다'는 뜻인데, 옛사람들에게 새는 태양의 메심저이고, 벼나 곡물의 영을 운반하거나 악령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상징이라 합니다.
다시 요시노가리역사로 가는 들길에서...
요시노가리 유적의 발굴 이후로 현대 일본인을 구성하는 주류가 한반도임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졌다고 합니다. 인류학자 고야마 슈조는 <조몬 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조몬 말기 일본 총인구는 겨우 7만 5800명이었는데,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자 59만 4900명으로 급격히 늘었다고 합니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에서 농경문화를 가져온 한반도인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한국어는 신라어 계통이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의 언어는 고조선 계통의 고구려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견이 한일간의 나쁜 감정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냐마는 한일 고대사의 역사적 공통 분모를 발견함으로써 앞으로 한일간의 평화 교류에 도움이 되길 빌어봅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랍인과 유대인처럼 한일 양국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음에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 58쪽에서 인용함)
첫댓글 좋은데 갔다오셨군요. 그 시간에 저와 이기영교수 부부, 김민곤 부부 등은 남인도와 스리랑카에 있었답니다.
비오는 큐슈가 조용하고 한가롭습니다.
몇 년 전에 오창길 샘이 인솔하여 기타큐슈의 환경, 생태 관련 탐방을 했었는데, 제주도의 기후와 식생의 비슷함을 느끼고 왔었는데...
마지막 맨트(유홍준 교수)가 와 닿습니다.
와우,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오셨다구요? 참으로 멋진 곳으로 여행하셨군요. 함께 가신 멤버도 쟁쟁하니 즐거운 추억담이 많겠습니다. ^^
감상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