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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의식은 유비적으로 꿈과 닮았다. 꿈을 깨면 현실이다.
내재의식에서 사유는 행동보다 앞서서 일반관념을 형성하고 펼쳐가는 노력을 한다.>
『물질과 기억 (1896)』 제3장
벩송(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990 (1919, origine. 1896), 147-
제3장 이마쥬의 잔존 - 기억과 정신 [정신 -> 영혼]
Ch. 3 De la survivance des images - La mémoire et l'esprit 147.
§01 순수 추억 (Le souvenir pur 147-152)
§02 현재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En quoi consiste le présent 152-156)
§03 무의식에 대해(De l'inconscient, 156-165)
§04 과거에서 현재로 연관 (Rapport du passé au présent 165-173)
§05 일반관념과 기억 (L'idée générale et la mémoire, 173-181)
§06 관념들의 연합 (L'association des idées (18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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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꿈의 평면과 행동 평면(Plan du rêve et plan de l'action (187-189)
그러나 이것들은 양 극단에 지나지 않으며, 심리학자는 연구의 편의를 위해 거기에 차례로 위치해야 하지만, 사실상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적어도 인간에게 순수하게 감각-운동적 상태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모호한 활동성의 기저(un substratum) 없는 상상적 삶도 없다.우리가 말했듯이 우리의 정상적인 심리학적 삶은 이 양 극단을 왕복한다.
한편 감각-운동 상태인 S란 기억(mémoire)의 방향을 정하는데, 깊이[첨점]에서 감각-운동 상태란 기억의 현실적이고 활동적인 극단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이런 기억 자체는 우리의 과거 전체와 함께 자기 자신의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현재적 행동 속에 개입하려고 앞으로[위로]밀고 나아간다. 이러한 이중적 노력으로부터 매순간에 기억의 무한히 많은 가능한상태들이 나오며, 즉 우리 도식의 A′B′, A″B″ 등의 절단면들에 의해서 그려진 상태들도 나온다. [188] 우리가 말했듯이, 절단면들은 우리 과거의 삶 전체의 그만큼 반복들이다. 그러나 절단면들 각각은 밑면에 더욱 접근하거나 또는 정점에 더욱 접근하는가에 따라 다소간 넓어지거나 좁아진다. 게다가 우리 과거의 이 완전한 표상[재현]들 각각은 단지 감각-운동적 상태 속으로 틀에 맞게 들어갈 수 있는 것만을, 따라서 행동을 완수할 목적으로 현재적 지각작용에 닮은 것만을 의식의 빛으로 가져온다.
다른 말로 하면 총체적 기억(la mémoire intégrale)은 현재적 상태의 호출에 두 가지 동시적인 운동들에 의해서 응답한다. 하나는 이전(translation)운동인데, 이 운동에 의해 기억은 전적으로 경험 앞으로 향하며, 행동을 위하여 분할되지 않은 채 다소간 압축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 위에서 회전(rotation)운동으로, 이 운동에 의해 [총체적]기억은 자신의 가장 유용한 측면을 보여주기 위해 찰나의 상황으로 향한다. 유사성에 의한 연합의 다양한 형식들은 바로 이 압축(contraction)의 다양한 단계들에 상응한다. (188)
따라서 모든 것은 마치 우리의 추억들이 우리 과거의 삶의 가능한 무수한 환원들(reductions) 속에서 무한정하게 여러 번 반복되었던 것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추억들은, 기억이 압축되었을 때는 더욱더 평범한 형식을 취하고, 기억이 부풀었을 때는 더욱더 개인적인(personnelle) 형식을 취한다.그리고 추억들은 상이하며 무제한적인 수많은 체계화들(systématisations) 속에 들어간다.어떤 외국어의 한 단어가 내 귀에 [누군가에 의해] 발성되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 이 입말 일반(langue en général)을 생각하게 하거나, 또는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발성되었던 어떤 목소리(voix)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유사성에 의한 두 연합들은 다른 두 표상[재현]들의 돌발적인 도달에 기인하지 않는데, 우연(le hasard)이 두 다른 표상들을 현실적 지각작용의 영역 속으로 차례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유사성에 의한 두 연합들은 두 상이한 심정적 성향들(dispositions)에게, 즉 기억의 긴장의 두 구별된 정도들에게 응답하는 것으로, [189] 이쪽에서는 순수 이미지에 더욱 접근되어 있고, 저쪽에서는 직접적 응답하기 위해, 즉 행동하기 위해 더욱 잘 준비되어 있다.이 체계들을 분류하는 것, [즉] 그것들을 각기 우리 심정적 삶의 다양한 “기조들(tons)”[심기(心氣)]에 연결하는 법칙을 찾는 것, 이 기조들의 각각이 찰나의 필연성들에 의해 또한 우리의 개인적 노력의 다양한 단계에 의해 어떻게 기조들 각각이 그 자체로 결정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 세 가지는] 어려운 기획일 것이다. 이런 심리학 전체는 아직도 해야 할 일로 남아있고,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하려는 시도조차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는 이 법칙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류(類)의 안정적 연관들이 있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분석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거기 묘사된 몇몇 관념들의 연합들은 진실하고(vraies), 체험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다른 연합들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거나 또는 실제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서[연합들에서] 정신의 다른 층들 사이에 기계적 접근의 효과만을 느끼기 때문이며, 이는 마치 저자가, 자신이 선택한 심정적 삶의 평면 위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따라서 기억은 긴장의 또는 생명성의 구별되고 계속되는 정도[차이]들이 있는데, 또한 아마도 정의되기에도 불편한 정도[차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혼의 화가[소설가]는 이것들 자체들 사이에 이 정도[차이]들을 곤란 없이 휘저어 섞을 수 없다.
게다가 병리학은 여기서 우리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진리를 – 물론 조잡한 예들에 관해서긴 하지만 – 최근에 확증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히스테리 환자들의 “체계화된 기억상실들(amnésies sysntématisées)”에서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추억들이 실재적으로 현재적이다.그러나 추억들은 모두가 아마도 환자가 더 이상 스스로 위치할 수 없는 지적 생명력(vitalité intellectuelle)의 어떤 정해진 기조(un certain ton)에 연관되어 있다. (189) (2:24, 51QKC) (3:14, 56OK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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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의식의 다양한 평면 (Les divers plans de conscience, 189-192)
이처럼 유사성에 의한 관념연합에 대해 무한정한 수의 차이 있는 평면들(plans différents)이 있다면,인접성에 의한 관념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의 기반을 재현하는 극단적인 평면에서, 평면을 선행하는 사건들과 또한 평면을 뒤따르는 사건들의 전체성에, [190] 인접성에 의해,연결되지 않는 추억들은 없다. 반면에 공간 속에서 우리의 행동[작용]이 집중되는 지점에서 인접성은 운동의 형태로 앞선 유사한 지각작용에게 무매개적으로 이어지는 반작용만을 끌어온다. (189-190)
사실 인접성에 의한 모든 관념연합은 이 양극단 사이에 매개적인 정신의 입장을 함축한다. 만일 사람들은 여기서 또한 우리 추억들의 전체성이 가능한 한 무수히 반복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흘러온 우리 삶의 여러 견본들각각은 자신의 방식으로 결정된 단면들로 절단될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한 견본에서 다른 견본으로 이행한다면, 그 분할의 양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견본들의 각각은 지배적인 추억들의 본성에 의해 특정 지워지는데, 이는 다른 추억들이 지지점들에게 기대듯이 지배적인 추억들에게 기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행동(l’action)에 접근하면 할수록, 인접성은 유사성에 더욱더 참여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해서 연대기적 계속(succession)의 단순한 연관과 구분된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들이 외국어 단어들을 말할 수 없는 경우인데, 즉 단어들이 기억 속에서 서로 환기될 때, 그 단어들이 유사성에 의해서 연합하는지 인접성에 의해서 연합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반대로 우리가 실재적 또는 가능적 행동으로부터 벗어나면 날수록, 인접성에 의한 관념연합은 더욱더 우리의 과거 삶으로부터 연계된 이미지들을 단순하고 순수하게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여기서 이 다양한 체계들에 대한 심화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 체계들은 많은 원자들처럼 병렬된 추억들로 결코 형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몇몇 지배적인 추억들이, [마치] 진실로 빛나는 점들[처럼]이 있으며,이 빛나는 점[지배적 추억]들 주위에는 다른 추억들이 모호한 구름을 형성한다. 이 빛나는 점들은 우리의 기억이 부풀어감에 따라 증가된다. [191]
예를 들어 한 추억이 과거 속에 위치화하는 과정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마치 가방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 추억들의 덩어리(masse) 속에 잠겨있어서, 점점 더 근접하는 추억들을 거기에서 끄집어내기 좋도록 하기 위하여, 위치화하는 그 [한] 추억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이 전혀 아니다. 어떤 다행스러운 기회에 의해, 우리는 증가하는 수많은 삽입하는 추억들 위에 정당하게 [그 한 추억을 잡을]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위치화 작업이란 실재적으로 팽창(expension)이라는 점증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노력에 의해 기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전체로서 현재하고 있고, 자신의 추억들을 점점 더 넓은 표면 위로 펼치며, 그렇게 해서 그 때까지는 혼란되어 있던 더미(amas)속에서 [아직] 자신의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던 추억을 끝내는 구별하게 된다. 게다가 여기서도 기억의 병리학은 우리에게 교훈적인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퇴행적 기억상실의 경우에, 의식에서 사라지는 추억들은 기억의 극단에 있는 평면[밑면]들 위에 그럴듯하게 보존될 것이다. 그리고 환자는, 마치 그가 최면상태에서 완수한 노력처럼, 예외적 노력에 의해 기억의 극단적인 평면들에서 의식에서 사라진 추억들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하부[심층]의 평면들 위에서 이 추억들은, 말하자면 자신들이 기댈 수 있는 지배적인 이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갑작스런 충격, 저런 격렬한 감응(emotion)은 그 추억들이 [미래에] 집착할 결정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사건이 거의 갑작스런 특성에 의해, 우리 역사의 나머지로부터 분리된다 하더라도, 추억들은 망각 속에서도 그것을[나머지를] 따를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충격에 뒤이어지는 망각이 무매개적으로앞선 사건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 이것은 기억에 관한 다른 모든 개념작업들에서는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현상이다.
이 참에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해 보자. 만일 사람들이 최근의 추억들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멀어진 추억들에까지 이런 종류의 어떤 기대를[예상을] 할당하기를 거부한다면, 기억의 정상적인 작업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192] 사람들이 추억을 아무리 단순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기억 속에 사건의 추억을 각인했던 사건 전체는 어떤 일정한 시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간격의 첫 주기를 채웠던 지각작용들은, 또한 이제 잇따르는[연속적인] 지각작용들과 더불어 불가분적 추억을 형성하는 지각작용들은, 사건의 결정적인 부분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한, 진실로 “공중에(en air)” 떠 있었다.
자신의 다양한 예비적인 세부 사항들과 더불어 한 추억의 실종(disparition)과 어떤 주어진 사건에 앞서 있는 다소간 큰 추억들의 - 퇴행적 기억 상실에 의한 - 폐지(abolition) 사이에는 따라서 본성상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5:18, 56OKD) (5:22, 56OKF)
첫댓글 [*7
벩송이 내재의식의 삶을 심정적 삶이라 한다. 현실적으로 신체를 움직이는 삶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반성(반사)은 신체와 연관이 있는데 비해, 성찰은 심리(영혼)와 행동(신체)의 연관을 사유한다. 말하자면 반성은 인간이 자연과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 다루고 조작하며 관계들을 주로 논의한다. 이에 비해 성찰은 영혼이 신체에 지배적 역할을 하게 되는 영혼(정신)의 추론과 극한을 가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의 내부의 문제는 19세기에서야 제기된다.
7-2. 이 내부의 문제를 벩송은 세로축의 고깔로 표현했고, 그 내부를 회로로 표현했다. 이 고깔의 꼭지점을 행동으로, 밑면을 비유상 순수추억으로 둔다. 그러면 고깔 전체로서 회로들과 섞임의 총체를 역동성이라 하며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이역동적 고깔은 설명상 두 가지 운동을 동시에 한다. 하나는 심층에서 상층으로 이전(translation)운동과 내부의 뒤섞임과 같은 회전(rotation)이다. 이 둘이 동시적으로 현실의 첨점에 영향을 준다. 이런 하나이지만 두 운동에서 추억들은 앞에서 설명했던 인접과 유사와는 다른 본성으로 활동한다. 이런 의식내부(무의식)를 관념연합론은 층위가 있는 단면들로 설명하려 한다고 벩송은 보고 있다.
[ *8
그러면 층위들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층위들은 벩송의 “기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원자론적 사고의 관념연합론자들이 “추억들”이 두뇌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검토를 앞에서 하면서 추억들이 (인격) 이미지 안에 있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들에게 추억들은 그 내재의식 안에 어떤 경향 또는 방식으로 있는가? 벩송이 보기에, 그들은 추억이, 현실의 단면에서 점에 접촉하듯이, 드러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추억들이 내재의식 속에 “어디에 있다”는 방식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위치화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면, “추억들”이 마치 공중에 떠있듯이 “기억” 속에 –위치와 크기가 불명확하게 –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관념연합론에 대한 비판 속에는, 고대의 원자론의 비판에 대한 길과 같이 가고 있다. 그래, 추억들이 ‘있기는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더라도, 추억이 희미해지는 또는 사라지는 추억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8-2. 벩송이 보기에, 내재의식은 기억의 실재성이고, 게다가 그 기억 속에 추억들이 있어서 조합하기보다, 기억의 능력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면서 현재의 신체적 현실을 움직이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현실(P면의 점S에서)은 기억 역량의 일부이며, 신체가 외부 사물들과 지각작용과 연관에서 기억의 작동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미리 말하지만, 벩송은 추억이라는 단면이든, 요소이든, 원자이든 그런 것이 없다: 가상적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은 운동하고 지속하는 권능이며 역량이다. 이 역량은 생명체가 이어온 역사 속에서 생성-창조한 것이다. 지금 인간 생명체는 현재 이정도로 생성-창조한 것이다. EC에서 말하게 될 것이지만, “강의록(1903-1904)”에서는, 생명의 충력(impeto, elan)말하면서, 이미 생명의 자기창조, 생명의 작동하는 권능을 예고할 것이다.
8-3. 벩송은 비유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한다. 특히 가로축과 세로축은 단순한 축이 아니라 하나는 평면의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회오리 같은 고깔의 “운동성”이다. 그리고 추억들 사이의 유사와 인접의 설명은 벩송의 지속과 기억에 관한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원자론, 관념연합론, 언어와 논리의 통일성으로 가고 있는 신칸트학파의 인식론과 새로 대두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비실재성을 실재성으로 착각하는데 대한 비판의 도형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 관념연합론, 원자론적 유물론, 논리실증주의의 3자의 구성을 통한 주체(sujet)의 우위라는 착각에 있고, 나아가 이런 착각을 사회체에 적용하는 탐만치로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을 낳은 배경이라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이어서 이 앵글색슨철학이 통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지배로 나가면서 자본 제국을 구축하려 한다고 본 것이리라. (56OKF, O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