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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들뢰즈, 혁명이란 용어를 2장에서 많이 썼는데, 그 혁명은 자연을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의 토대로 보아야 하고, 그 자연의 이법에 맞게 생산하는 욕망이 제대로 드러나는 양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미의 논리에서 화두, 선문답, 공안 중에서 화두를 삼고 삶에서 행한 이들이 퀴니코스였고, 불교에서 탐만치에서 벗어나려는 걸승(대승)일 것이다. 퀴니코스학자들이 헤라클레스를 모방하여 옷 하나 걸치고 지팡이를 지니고 다니듯이, 걸승은 옷 하나 걸치고 바라를 들고 다녔다. 토지체에서 사적 소유를 벗어나 자연의 이법에서 상부상조가 아니키스트였다면, 산업체에서 생산도구의 사적소유를 타파하려는 프롤레타리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 사회체가 오기 전에 두 번의 전쟁에서 한쪽에서 생산도구소유를 넘어서 자본의 소유로 재편(재영토화)를 하는데, 항쟁으로서 저항하여 1차대전에서 레닌이 2차대전에서 마오가 등장했고, 국지전으로 미국과 전쟁에서 이긴 호치민이 있다. 자본의 재영토화 속에서 혁명은 무엇일까를 들뢰즈/가타리가 고민했을 토지체, 산업체, 자본체의 균열을 내고 용출선을 만드는 욕망하는 생산은 무엇일까?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의 단편소설의 합체로서 소설집이었고, 둘의 합작으로 대하소설의 1편으로서 앙띠 외디푸스를 쓴다고 했었다. (56WLI)
*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다루는 방법이 과정이라는 점을 알린다. 이 과정은 삶의 여정과 연관이 있고, 인간의 자연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고, 나아가 생명체로서 자연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인간본성으로 번역되었던 인간의 자연(la nature)은 과정으로서 생명이며 삶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들뢰즈가 벩송의 “삶이 먼저”라는 의미를 자기 방식으로 ‘과정’이라 바꾸어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도전적으로 1966년에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다(1966)」내 보였고 그리고 다음해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으로 아마도 학위논문의 차이와 반복(DR, 1969)의 주제에 맞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앙티-외디푸스(AO, 1972)에서는 1장에서 절대 공간화된 평면위에서 언어 또는 개념으로 철학하는 이들의 전도된 사고를 비판하고, 2장에서 현실일라는 고른평면 위에 사건들은 배치와 배열을 순간마다[찰나가 아니라] 바꾸면서도 개체의 과정은 계열을 만들어간다. 그 계열이 배치에 따라서 소외되고 광기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라는 흐름의 과정은 지속한다. 이 과정에서 배치와 배열에 따른 평면의 변화에 부적응, 결핍, 과잉등을 규정하려는 자들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니 다섯가지 오류추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서 이 형이상학적으로 주지주의자 또는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는 것보다 더 많을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기존의 자료들이 아닌 자료들을 섭렵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플로티노스-샤르트르학파-프란체스코파-루소-바뵈프-푸르동-불랑키-비니-벩송-들뢰즈로 이어지는 삶의 터전(영토화 대 탈영토화)의 대립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자 이런 방식에서 완전한 이데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들과, 부동의 원동자로부터 출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지주의에 물들 자들을 비판하면, 철학은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다루어야 할까? 삶의 터전인 지구, 토지일 것이다. 두 저자의 이런 생각은 천개의 고원(MP, 1980)에서 전개될 것이지만, 그 밑자락을 까는 것이 제3장 일 것이다. 배열과 배치는 삶의 터전, 사건의 공간화에서 이루어진다. 사건의 공간화는 그 사건을 보는 관점이 배치와 배열에 따라 사건과 연관들이 전혀 다른 관점들을 생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건이 현실에서 배치와 배열이 있다기보다, 왜 생성되고 증폭을 하면서 공감과 공명을 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사건을 다루기 전에 3장에서는 터전, 즉 영토화(영역화, 위상화)를 문제삼을 것이다. (56WKE)
*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본성, 종류, 그룹[소속]의 차이가 없다.
* 과정으로서 정신의학, 회화, 소설, 시 등을 개척한 사람들로서 라이히, 빈스방거, 레이잉, 터너, 하디(Thomas Hardy, 1840-1928),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로리(Malcom Lowry 1909-1957)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다른 한편 아르또(Artaud, 1896–1948), 렌츠(Lenz, 1751-1792), 휠더린(Hölderlin, 1770-1843)도 위에 못지 않다.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1절 외디푸스 제국주의
2절 프로이트의 세 원문들.
3절 생산의 연결적 종합 [참조, 1장 1절] 편집증기계: 과정, ...과 ...과. - 첫째오류, 외삽법
4절 등록의 이접적 종합 [참조, 1장 2절] 기적기계: 전유, 이거나, 이거나. - 둘째오류, 이중구속
5절 소비의 연접적 종합[참조, 1장 3절]독신기계: 적용, 그러므로 ..이다. 셋째오류, 전도된 적응의 오류
6절 세 조합의 요약–[세 가지 적용의 오류가 권력, 권세, 권위의 카르텔과 같다.]
7절 억압과 억제 - 세 가지의 구체적 사태들(faits)과넷째 오류 이전
8절 신경증과 정신병 – 다섯째 오류 “나중에”
9절 과정- 오류를 벗어나기 : 삶은 과정이다.
<중국에서 요순우탕 하나라와 상나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상나라를 뒤엎은 주나라에 대해서 말이 많다. 왜 앞에서 하나라와 상나라의 정권교체에 대해서 보다 상나라(은나라)의 역성혁명(정권교체)에 대해 논쟁과 토지 분할에 대한 담론이 있다. 정자의 논리는 토지를 격자로 나누데 아홉 등분의 논리로서 천문의 중요성이 주나라의 기본이다. 그러면 주나라 앞시대는 어떠한가? 인류 역사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 1200(±)년이 사유의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시기를 주목하지 않았고, 돌에서 쇠(구리)의 시대로 넘어오는 7천년전 다음으로, 논리와 사고의 변화 연대로서 전578년으로 넘어갔다. 나로서는 1200년대 경이 매우 흥미롭다. 주나라 무왕과 주공의 시대이고, 엥겔스가 모계에서 부계 사회로 주목했던 아가멤논의 죽음도 이 시대이며, 이집트의 모세도 그 시대이다. 권력이 천문과 연관 속에 토지위에 등록하여 기호와 기표로 남기며 언어적 구전이 가능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하늘의 기표와 땅의 문자(말투)의 이중화된 전승은 하나의 기표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다. 하늘의 기표와 땅의 기호(signe) 사이의 일치는 한번 지나가면 되돌아 오지 않는다. 하늘의 기표가 상징으로 단선적인데 비해, 땅의 기호는 생성들, 이들의 관계, 이전과 이후의 연관 등으로 다양한 변모들(양태들)을 드러낸다. 종합이 가능할까? 하늘에 단선과 맞먹는 지상의 단선을 위계로 세우는 것이 그래도 가장 비슷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 즈음에 위계는 완성된다. 문자를 통한 교육과 전승은 또다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관한한, 하나의 길, 하나의 의미, 하나의 방향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으리라. 이에 비해 정해진 과정에서 벗어난 길을 사는 이를 스키조라고 부른다면, 과정을 같이 하다가 그만두는 신경증, 길에서 다른 길을 찾는(역성혁명) 신경증, 방향을 달리하는데 방향 잃은 것처럼 규정하 도착증이 있을 수 있다. 스키조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걸승, 남사당패. 판소리패로 나선 이들이 스키조일 것이다. (56W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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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과정 Le Processus 155 201
2.9.1. 출발하다 Partir 155 - [떠남]
신경증과 정신병[정신증] 사이에 본성, 종류, 소속(groupe 집단)의 차이는 없다. 정신증과 마찬가지로 신경증도 외디푸스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외디푸스를 설명해주는 것이 신경증이다. (155)
과정으로서 정신분열증은 욕망하는 생산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되는 욕망하는 생산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조건들 속에서 결정된 사회적 생산의 한계이다. 정신분열증은 우리들의 “병”이요, 현대인의 병이다. 역사의 종말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자기의 탈영토화(토지화)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회적 생산의 운동과 새로운 대지에 욕망을 나르고 거기서욕망을 재생산하는 형이상학적 운동, 이것은과정의 두 방향이다. (155)
역사의 종말에 가서는 이 두 방향이 합한다. “사막은 증가하고(Le désert croît)‥… 표시(le signe 표지판)는 가까우며‥…” 분열증자는 탈코드화한 흐름들을 나르고, 이 흐름들로 하여금 기관없는 신체의 사막을 건너가게(traverser) 하고, 이 사막에 그는 그의 욕망하는 기계들을 설치하고 활발한 힘들의 영속적인 유출을 생산한다. 그는 한계를넘어섰고, 언제나 사회적 생산의, - 욕망하는 생산에 접해 있으면서 언제 이것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 변두리에서 욕망의 생산을 유지하고 있었던 분열을넘어섰다. 분열증자는출발할줄 안다(sait partir). 그는 출발을 태어나고 죽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어떤 것이 되게 하였다. (155-156)
이 욕망의 인간들은(또는 그들은 아직도 현존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와 같다. 그들은 엄청난 고통들, 현기증들, 병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망령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몸짓하나하나를 새로이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자유로운 인간처럼, 책임질 것이 없는, 고독한(solitaire), 즐거운(joyeux) 인간으로서 생산된다. (156)
그는 [자유로운 인간, 짜라투스트라는] 자기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숭고한 질병처럼 살아간다. 여기서 한 정신과의사는 무엇을 가치있게 하고 가치있게 할 것인가? 정신의학 전체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야스퍼스(Jaspers, 1883-1969) 만이 그리고 레잉(Laing, 1927–1989)이 과정(processus)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관념]을 가졌다. (156)
“만일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미래의 인간들은 우리의 이 밝은 시대를 정말 몽매한 세기(siecle d’obscuratisme)로 보리라고 나는 상상한다. 그들은 아마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우리들 보다 더 재미있게 즐길 것이다. 그들이 웃는 것은 우리들이다. ... 남들이 광기는 진실한 광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환자들의 광기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강요하는 파괴의 산물이다. 우리가 우리 환자들에게 문제 삼는 광기는 이 이상한 총합(integration)으로 자연적으로 나을(치유할) 수 있을 법한 것의 엉성한 위장, 거짓 꾸밈, 기괴한 풍자화이다. 참된 정신적 건강은 이런 또는 저런 방식으로 정상적 자아의 해체를 함축한다‥…”(156-157) [레잉의 인용문]
2.9.2. 화가 터너 Le peintre Turner 157 -
런던을 방문하면 우리는 으레 피티아(Phythia)를 방문한다. 거기에는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가 있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벽을 돌파하며 그러면서도 이쪽에 머물러 있다는 것 ..... 그의 그림은 세 시기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만일 정신의학자가 말할 것이 있다면, 그는 처음의 두 시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57)
첫째 시기의 그림들은 세계의 종말의 재난들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눈사태와 폭풍우가 그려져 있다. 터너는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둘째 시기의 그림들은 망상의 재구축과 같다. 여기서는 망상이 숨겨져 있다. 또는 망상이 푸생(Nicolas Poussin, 1594-1655)과 로랑(Claude Gellée, dit le Lorrain, 1600-1682) 또는 네덜란드 전통에서 이어받은 고도의 기술과 어울려 있다고 하겠다. (157)
그런데 비길 데 없는 어떤 것이 셋째 시기의 그림들의 차원에서 나타난다. 그 그림들은 터너가 보여주지 않고 비밀스레 숨겨놓고 있던 그림들의 계열이다. 우리는 터너가 그의 시대보다 아주 앞서 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조차 없다. 다만 거기에는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그리고 영원한 미래로부터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또는 영원한 미래로 도망가는 어떤 것이 있다. (157)
[셋째 시기 그림에서] 캔버스는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에 의하여 그야말로 부서지고 찢겨있다. 안개 낀 금빛 배경만이 살아남는다. 이 배경은 강한 강도를 지니고 있고, 캔버스를 찢으로 오는 것에 의하여 깊숙이 관통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정신분열(Schizo)이다. 모든 것이 흐릿하다(se brouiller, 휘저어있다). 바로 거기에 (붕괴가 아니가) 돌파구(percée)가 생겨난다.(157-158)
2.9.3. 과정의 중단들: 신경증, 정신병, 도착 Les interruptions du processus: névrose, psychose et perversion 158 -
기묘한(étrage) 영미문학: 하디(Thomas Hardy, 1840-1928)로부터,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로부터 로리(Malcolm Lowry 1909-1957)에,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로부터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와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출발하여 규준을 휘젓고, 흐름을 지나가게 하고, 기관없는 신체의 사막을 통과하게 할 줄 안다. 그들은 한계[경계]를 뛰어넘고, 벽을,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셔버린다. 물론 그들은 과정을 완수하는 일에는 실패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 (158)
오래전에 엥겔스(Engels, 1820-1895)는 이미 발작(Balzac, 1799-1850)에 관하여, 위대한 작가란 어떤 작가인가를 밝혔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의 정통적이고 전제군주적인 시니피앙을 무너뜨리고, 필연적으로 지평선에 혁명의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며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기를 마지않는 사람이다. (158)
문체를 흐르게 하고 흘러가게 하고 또 터뜨리게 하는 것 - 그게 욕망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전적으로 정신분열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158)
또한 거기에, 외디푸스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는 문학을 기성질서에 순응시키고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데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나 독자들의 개인적인 외디푸스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작품 자체를 거기에 종속시키려 하는 외디푸스의 형식(la forme oedipienne)이다. (159)
이런 이유로 외디푸스는 정신분석적이기에 앞서서 문학적이다. 여전히 아르또(Artaud, 1896–1948)에 대해 브르똥(Breton, 1896-1966) 같은 사람, 렌츠(Lenz, 1751-1792)에 대해 괴테(Goethe, 1749-1832) 같은 사람, 휠더린(Hölderlin, 1770-1843)에 대해 쉴러(Schiller, 1759-1805) 같은 사람이 있어 문학을 초자아화 하고,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주의하라, 멀리가지 마라! 잘 못을 저지르지 마라(서툰 짓마라)! 베르테르는 맞고, 렌츠는 틀렸어! 외디푸스적 형식의 문학은 장사꾼의 문학이다. (159) - [김수영(1921-1968)에 대해 조지훈(1920-1968) 같은 사람.]
아르토가 잘 말했다: 모든 글쓰기는 돼지 같은 짓이다. ... 어느 악의에 찬 비평가는, “아르또의 언어가 정신분열증환자의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기 위해서는” 시니피앙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정신분열자는 본의 아닌, 족쇄가 채워진, 고분고분한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점에서 문자 그대로 글쓰기(écriture)에는 반대되는 것이다” (160).
아르또는 정신의학을 산산조각 나게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정신분열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신분열자이기 때문이다. 아르또는 문학의 완수이다. (160)
오래전에 그[아르또]는 기표의 벽을 뚫었다: 아르또 즉 정열증자(le Schizo). 그의 고뇌와 영광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는 사회가 욕망의 흐름들을 탈규준화하는 중인 정신병자로부터 무엇을 만드는 지를(반고흐 사회적 자살자) 고발할 권리가 있고, 또한 신경증적 또는 도착적 재코드화의 이름으로 사회가 문학을 정신병에 대립시킬 때, 사회가 문학으로부터 무엇을 만드는 지를(루이스 캐롤, 문학연구의 겁장이) 고발할 권리가 있다. (160)
2.9.4. 탈영토화의 운동과 영토화들 Mouvement de la déterritorialisation et territorialités
매우 극소수만이 레잉(Laing, 1927–1989)이 정신분열증의 벽 또는 한계의 돌파라고 부르는 것을 실현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주 보통 사람들” 이다. ...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신경증자] 벽에 접근하고 무서워서 후퇴한다. 또는 오히려 기표의 법률 아래 다시 떨어져 내려가, 거세의 각인을 받고 외디푸스 속에서 삼각형화된다. ...[두 번째 부류(도착자)] 다른 사람은 좀더 실재적으로 이국적인 처녀지를, 좀더 인공적인 가정을, 좀더 비밀스런 사회를 원한다. .. [세 번째(정신병자)] 또 다른 사람들은 외디푸스 장치에 또는 도착적 조잡품에 구역질이 나서 때로는 격렬한 폭력으로 벽에 공격한다. 이 때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기관없는 신체에 후퇴한다.(161)
외디푸스의 신경증의 토지, 인위적인 도착자의 토지, 기관없는 신체의 정신병의 토지: 때로는 과정이 덫에 걸려 삼각형 속에서 빙빙 돌고, 때로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보고, 때로는 그것이 공전을 계속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대신 끔찍한 악화를 초래한다. 이 세 형태는 각기 그 밑바닥에 정신분열증을 가지고 있다. (162)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은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또 동시에 이 돌파의 실패이다. “어떻게 이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가, 왜냐하면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이 벽의 밑을 파고 줄(lime)로 뚫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천천히 참을 성 있게”고흐의 편지 (162)
내기(l’enjeu, 담판)은 단지 예술 또는 문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편] 예술기계, 분석기계, 혁명기계는 억압-억제 체계의 약화된 틀 속에서 이것들을 기능하게 하는 외생적인 연관들 속에 머물러 있던가, [다른 한편] 또는 하나의 동일한 욕망하는 기계를 키우는 영양을 주는 흐름 속에서 서로 서로 부품과 톱니가 되거나 이 기계들이 일반화된 폭발을 위하여 참을성 있게 불 켜진 지엽적인 그 만큼의 불들(feux locaux)이 되거나 이기 때문이다. - [이것들은] 분열(la schizo) 이지 기표가 아니다. (162) (6:26, 56WLG)
# 덧글 ***
들뢰즈는 외디푸스적 가족, 즉 신성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가족이 해체되면, 가정은 없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모든 사회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부분이며, 그 각각 누구나가 연관이 연결되어 있는 한 사회라는 분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개인은 사회체에서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없는 개인이 아니라는 의미는 가정이 가족의 외디푸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의 한 통과방식이다. 정체성의 자기 생성은 거기서 형성되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생성과정의 일부로서, 개인은 아직도 형성중이라는 의미에서 고아 또는 미혼자와 같은 처지이다. 어쩌면 고아란 의미는 그가 차이와 반복과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는 구혼자와 같은 처지를 말할 것이다.
생산양식을 넘어서, 소비라는 개념으로 보아, 소비 양식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은 어쩌면 자본주의라기보다 분업체제에 대한 기본 관점의 변경일 수 있다. 분업의 전지구적 확장은 잉여생산의 최대치일 것인데, 그 최대치를 평준화 또는 수평화를 풀 수 있는 방식은 새로운 공동체의 개념이 필요할 것이다. 야생도 야만도 문명도 아니면서 문화라는 개념과도 다른 개념이 필요할 것 같다. (40SKF) (옮김, 4:20, 56WLC)
(6:16, 56WLF) (7:13, 56WLG) (7:26, 56W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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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푸생(Nicolas Poussin, 1594-1655), 프랑스 화가, 고전주의 대표자들 중의 하나.
1600 로랑(Claude Gellée, dit le Lorrain, 1600-1682), 프랑스 로렌지방 출신 화가.
1749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바이마르 공국의 시인, 극작가. 렌츠와 2살 차이다.
1751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 참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1759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 시인.
1770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 시인, 극작가, 엠페도클레스의 죽음(La Mort d'Empédocle, 1826)
1775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영국의 화가. 주요작품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éméraire, 1838)」
1799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 프랑스 소설가. 사실주의 문학.
1820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경제학자. 칼 맑스와 공동작업을 한 작품들이 있다.
1832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본명 찰스 럿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 작가, 수학자, 사진사이다. 놀라운 나라의 엘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 거울 나라의 엘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 1871), 여기에 나오는 넌센스 시(詩) 「재버워키(Jabberwocky)」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 1876),
1840 하디(Thomas Hardy, 1840-1928), 영국 소설가, 시인. 빅토리아왕조 시대 농촌을 몰락을 소설화하였다.
1853 반 고흐(Van Gogh, 1853-1890), Lettre du 8 sept. 1888. (40RMF)
1883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 철학자. 정신과 의사. 스트린트베르그와 반 고흐(Strindberg et Van Gogh, Swendenborg, Hölderlin, 1953).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1891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시인, 시각예술가, 수필가, 극장주. 반 고흐 사회의 자살(Van Gogh le suicidé de la société, 1947) (9) Le Pèse-nerfs, 1925
1896 브르똥(André Breton, 1896-1966) 프랑스 시인, 작가. 쉬르레알리슴 이론가.
1909 로리(Malcolm Lowry 1909-1957), 영국 소설가, 단편 작가 및 시인
1922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미국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
1926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1961.
1926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 미국의 시인,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의 지도적인 시인, 그는 군국주의, 물질주의, 성적 억압에 반대하였다.
1927 레잉(Ronald David Laing, 1927–1989), 스코틀랜드 정신과의사 ‘반정신의학’의 선구자.영국에서 반정신의학 운동(avec David Cooper, Aaron Esterson) La politique de l'expérience, 1967(tr.fr. Stock,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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