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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하나님께 나아감 * 초대 * 송영 1,27
고백과 사죄 * 신앙고백 고백의 기도 사죄의 선언 감사의 찬양 211
말씀으로 오심 성경 고전 10:19-22 (신274) 조명을 위한 기도 말씀: 우상숭배를 피하라 헌신의 기도
감사로 응답 감사의 찬양 204 감사의 예물 성찬준비 고전 11:23-29 감사의 기도
파 송 * 파송의 찬송 401 * 축도 |
14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로 부터 피하라 15 지혜 있는 자들로서 (간주하며) 말한다. 너희들은 내가 선언하는 것을 (옳다고) 결정하라 16 우리가 축복하고 있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공동체됨이 아니냐? 우리가 떼고 있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공동체됨이 아니냐? 17 즉, 하나의 떡, 하나의 몸이다, 많은 우리가.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떡의 한 부분을 나누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8 육신을 따라서 된 이스라엘을 주의하라.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과 공동체됨이 아니냐? 19 따라서, 내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가? 우상신전의식사가 뭔가 된다고? 우상이 뭔가 된다고? 20 오히려, 그들이 제물을 바치고 있는 것은,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너희들이 귀신들과 공동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21 너희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있으면서, 귀신들의 잔도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의 식탁을 나누어 가지고 귀신들의 식탁도 (나누어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22 아니면, 우리가 주님을 (계속) 질투나게 하고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 보다 강한 자가 아니지 않느냐?
<사죄의 선언> 요한1서 1:8-9 8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I. 탐욕은 우상을 만들고 주님을 질투하게 한다. 1) 고린도의 탐욕,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들 골로새서 3:5
2) 우상의 뒤에는 귀신이 있다. (19,20) 요한복음 8:44
3) 우상은 주님을 질투하게 한다 (21,22) 이사야서 44:17
II. 주님과 공동체되어 성장하는 복을 깨달아야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1)주님과 공동체 된 것을 알면 우상을 이긴다 (16,18) 신명기 14:22-29 고린도전서1:2 고린도전서6:11
2) 주님과 공동체 된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쇄 3:16,17 5:6 6:2 6:15, 19 10: 16,17 신명기 32:21 3) 우리가 피해야 할 우상들 고린도후서 5:16 |
우리가 그리스도와 공동체되는 것을 막는 우상 숭배를 떠납시다. 교회와 공동체 되어서 그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막고 있는 우상숭배로부터 떠나도록 합시다. 우리가 아직도 잡고 있는 우상숭배적인 것이 무엇이 있는지 깨닫고서 주님께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과 공동체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성도와 교회는 그리스도와 공동체 되어서 그리스도를 향해서 성장하고 또 성도들끼리도 거룩한 공동체로써 성장한다. 세상과 다른 영적 독립국으로 성장한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영적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변화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로써 우리가 성장되어 갈 때 열매나 결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성도들을 더 사랑으로 섬기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계속하여서 19절에서 22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와 공동체 되면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우상숭배를 떠나라는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탐욕 때문에 우상을 만들고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을 질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둘째로 주님과 공동체 되어 성장하고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깨달아야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아침에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님과 공동체 되는 것을 막는 우상으로부터 떠나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탐욕으로 우상을 만들 때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주님께서 질투 하신다는 것을 무서워하고 깨달아서 우상숭배로부터 떠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는 공동체 되는 큰 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우리교회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공동체 되고 성도들끼리 거룩한 공동체로 더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I. 탐욕은 우상을 만들고 주님을 질투하게 한다.
1) 고린도의 탐욕,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들
첫째로 탐욕은 우상을 만들고 주님을 질투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나?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고린도 사람들의 우상숭배 그리고 교인들도 고린도 사람들의 우상숭배에 탐욕 때문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고린도에 살던 교인들은 사람이 만든 그리스 로마에 나오는 그런 신들이 있지요? 신들에게 제사하고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 좋은 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있지만 고린도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정해진 교회당이나 간판도 없었습니다. 일반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교회당을 갖게 된 것은 313년에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야 공식적으로 교회당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시내에는 중앙에는 번뜻하고 휘황찬란한 신전들이 있습니다. 열두 개 이상의 신전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신전들마다 제사장들이 있어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풀타임으로 일하는 신전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목사 하나 없었습니다. 곳곳에 우상의 영향이 있습니다. 로마가 국가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로마 황제나 국가를 세운 로물루스를 신으로 받드는 그런 신전도 있고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주요 5가지신들 아폴로, 비너스, 아스클레피오스 이런 여러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작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신들이 있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병을 고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로의 아들인데 아폴로는 시와 예언의 신이고 병을 고치는 신이라 믿고서 아폴로에게 제사를 지냈고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병을 고친다고 믿고서, 병이 난 사람은 그 신전에 가서 제물을 바칩니다. 뱀이 병을 고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독이 없는 뱀들을 사람 몸을 지나가게 하거나 개를 키워 그 상처를 핥게 합니다.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고 했었습니다. 또 비너스의 미의 신전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을 강조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것 모든 지 그것 가지고 신을 만들었습니다. 돈 버는 것, 건강, 아름다움, 시와 음악, 사랑...... 뭐든지 자신들이 바라는 욕심을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을 보이는 모양으로 우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기도했습니다. 좋을 일이 생기면 그 신이 해줬다고 생각해서 거기서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탐욕 그 탐욕이 많은 만큼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은 곧 우상숭배다." 탐하는 것, 자기 바라는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면 고린도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여서 식사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라피스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물질은 풍성히 내린다는 부자 만드는 신이었습니다. 그때 1세기에 발견 됐던 파피루스 문서에 보면 신전에서 사라피스란 신에게 제사 드린 다음에 식사 초대하는 초대장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초대장은 이런 내용입니다. "나 리몬은(리몬이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냅니다.) 내일 15일 9시에 사라피스 신전에서 사라피스 신이 베푸는 식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자기가 가져간 동물을 잡아서 제사지내고, 고기가 있는 그 식탁은 사라피스 신이 식사를 베푼다고 하고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거기서 친구들을 만나고 맛있는 것을 먹습니다. 또 비너스 신전 같은 데는 맛있는 것을 먹고 춤추며 놀면서 밤새 나쁜 일을 합니다. 어느 한 기록에 의하면 어떤 여성은 밤새 나쁜 일을 했는데 그 동네 사람들과 나쁜 일을 내놓고선 신과 나쁜 일을 했다고 그런 망상에 빠져서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그 후에 식사하고 같이 사람들 모이고 놀고 그런 것들이 우상은 없는 거지만은 그때는 나름대로 마음에 평화를 주었습니다. 또 식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짜죠. 가짜니까 끝나고 나면 불안해지고 멍청해 집니다. 우상은 원래 없는 거니까 없는 걸 있다고 해서 할 때는 뭐 있는 거 같은데 끝나고 나면 허전해 집니다. 그러니까 또 우상에게 다시 갑니다. 마치 술 중독자가 계속 술을 먹듯이 우상 중독에 빠져있는 겁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사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사는 지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초대장을 보내면 친구들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있게 놀러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겼습니다. "우상은 원래 없지 않느냐? 우상이 만든 식탁이라도 우상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친구가 준 신탁이니까 먹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상에 이름으로 건배, 비너스의 이름으로 건배!"해도 비너스는 없는 거니까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그 신전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그것도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분명히 우상 신전에 식사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의 회의에서 우상 신전에 가서 식사하는 것은 안 된다고 이미 결정했고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계속 곳곳에서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 말대로 순종하지 않고 계속 거기 가서 먹고 합리화했습니다. 자기 생각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지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괜찮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탐이 나서 그랬습닏. 숭배할 생각은 없었지만 친구들하고 노는 것, 맛있는 거 먹는 것 그것이 탐이 나가지고 우상의 이름으로 하는 식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여하다 보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같이 어울려 놀 때 자기도 어울려 놀고 어떻게 하다 보면 그냥 자기도 우상이 진짜 있는 걸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특별히 믿음이 어린 성도들 중에는 우상이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나눠진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거기 가서 우상이 축복해 주는 걸로 생각해서 제사는 참석하지 않지만 식사를 하면서 양심이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무엇을 판단하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게 뭘 잘못했느냐? 그러나 자기의 합리성을 믿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게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에도 죄가 있는 겁니다. 내 생각에 맞다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이 있습니다. 탐욕이 내 생각에 들어가 가지고 탐욕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2) 우상의 뒤에는 귀신이 있다. (19,20)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다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상의 뒤에는 귀신이 있다. 19,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따라서 내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가? 우상 신전의 식사가 뭐가 된다고? 우상이 뭐가 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상 신전의 식사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 사실이야. 너희 말한 게 맞아." 그런데 20절 "오히려 이방인들이 제물을 바치고 있는데 그들은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지 않고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데" 예를 들면 병을 고쳐 달라고 아스클레피오스 같은 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 맞다. 그런 병 고치는 신은 없어 우상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식사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거기에는 뭐가 있느냐? 우상의 뒤에는 귀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질병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 걸 감사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가야될 것을 뺏어 가고 있으니까 그 뒤에는 귀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천사들, 귀신들을 모아가지고 귀신의 대장인 마귀는 조직적인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원래 거짓말쟁이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거짓의 아비입니다 (참고, 딤전 4:11).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말을 하게하고 거짓으로 우상을 만들어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우상이 병이 고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또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우상에게 기도하게 하도록 거짓으로 만들어 냅니다.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기도하게 합니다. 마귀에게 귀신에게 기도하게 됩니다. 귀신이 얼마나 악한지 예수님까지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온 세상 영광을 보여주면서 귀신에게 절하면 온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유혹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우상을 위한 식사에 참여하면 너희들은 귀신과 하나 된다.”고 말합니다. 20절에 "그런데 나는 너희들이 귀신과 공동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귀신과 너는 다르지만 귀신과 연결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귀신은 건강이나 행복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탐심 때문에 그게 거짓인지도 모르고 거기에 따라가서 거기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뒤에 있는 귀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 10절에서는 우상숭배는 이런 악과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우상숭배하면, 귀신의 영향으로 음란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되고 탐욕하게 되고 욕설하게 되고 남의 것을 뺏는 것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상은 좋은 것을 약속했지만 우상 뒤에 있는 귀신은 사람을 더 더럽게 만들고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3) 우상은 주님을 질투하게 한다 (21,22)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탐심을 가지고 우상 숭배적으로 나아가면은 주님과 공동체 되는 축복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21절 "너희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있으면서 귀신의 잔도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의 식탁을 나누어 나지면서도 귀신의 식탁도 나누어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우상신전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사교하면서 거기서 친구도 얻고 물질의 축복도 받고 두 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잔을 받으면은 귀신의 잔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는 그냥 우상이름으로 모인 사교 장소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상의 뒤에 있는 귀신과 공동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은 주님이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2절에 이야기 하지요. "우리가 주님을 계속 질투 나게 하겠느냐? 우리는 주님보다 강한 자가 아니지 않는가?" 우상에게 가면, 그 우상숭배적인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거 같은데 결국 복을 못 받는 이유는 주님 때문입니다. 21, 22절에서는 4번이나 "주님"을 이야기 합니다. "주님의 잔, 주님의 식탁, 주님의 질투, 주님의 강함" 너희들은 주님의 강함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 사랑하여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려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여서 주님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우상의 이름으로 모이는 식탁에 참여하면 주님이 질투하신다는 겁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주님은 질투가 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거룩하게 해주시고, 의롭게 해주셔서 주님과 한 가족으로 한 공동체 되어서 점점 주님의 형상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여서 성장하지 않고 남의 집에 가서 매일 식사하고 있으니 주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 어린이들이 매일 집에서 식사 안하고 옆집에 가서 계속 식사하고, 그것도 착한 사람이 아닌 나쁜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집에는 고기도 많고 아이스크림도 많고 맛있다고, 집에는 한번 씩 들어오고 그 집에 들어가서 계속 식사하고 있으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느낌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 감사하고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주님의 살과 피로써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그 입술로 우상 신전에 가서 “우상이 주는 것을 감사합시다.” 할 때 같이 잔을 든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느낌, 의지가 있습니다. 탐욕으로 우상 숭배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시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로부터 돌아서게 합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죄인들을 더러운 것을 향하여 나가는 사람들을 은혜를 계속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해야 돌이켜야 주님의 은혜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다고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주님과 우리의 공동체 됨을 나누기도 하지만, 고린도 전서 8장 9절에서는 다른 성도들과의 공동체 됨도 파괴한다고 합니다. 우상숭배하면 다른 성도를 실족하게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 나라가 하나님 백성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누어집니다. 다른 사람도 그 탐욕을 향해 가기 때문에 탐욕이 있으면 주님의 교회가 분열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교회가 파괴되는 데도 주님께서 우상 숭배하는 사람 가만 두고 있겠습니까? 질투하시고 당장 가서 뺏어 오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보다 강한 자가 아니지 않는가?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매를 들어서라도 우상숭배에 못나가도 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매를 드는데 우리가 강하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이 있는데 거기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우상 숭배 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주님은 강제로 끌어오고 벌을 내립니다. 권징을 내리십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요즘 우상숭배가 없으니까 그런 우상 숭배는 없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눈에 보이는 그 우상 신전이 우상이 아니죠? 그 뒤에 있는 귀신이 문제지요. 그 영적인 귀신이 우상 숭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4장 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절하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우상이라고 합니다.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비너스나 아폴로나 눈에 보이는 신이 아니라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지만 내 마음에 "너는 나를 구원해라, 내게 복을 달라" 그 앞에 절하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임에도 그 좋은 것이 나에게 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좋은 것이지만 직장이 돈 잘 버는 것이 거기서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목을 매고 살아간다면 주님의 대한 신뢰는 약해지고 거기에 대한 신뢰만 있다면, "좋은 직장 있으니까 난 괜찮을 거야. 돈만이 저축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좋은 친구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공부 잘하니까 좋은 대학가서 괜찮을 거야." 뭐든지 그걸 신뢰하고 그것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주님께선 질투하십니다. 그런 마음이 있을 때는 마음이 나눠지기 때문에 주님께 마음이 다 가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내 마음이 하나님 아닌 것 그것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의지해가지고 자꾸 신뢰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나는 정말 끝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면 당장 그것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모두 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오직 이 모든 세상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도록 합시다.
II. 주님과 공동체되어 성장하는 복을 깨달아야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우리가 우상 숭배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공동체 되어 서 성장하고 있는 여기에 큰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주님과 공동체 된 것을 알면 우상을 이긴다 (16,18)
고린도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공동체 되어서 성찬에서 은혜 받고 예배 때 은혜 받고 있으면서도 우상의 식탁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공동체 되는 이 안에, 주님과 공동체 되고 주님의 은혜를 받는 이 안에, 모든 축복이 들어있다는 것을 깜박깜박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 18절에서는 세 번이나 "무엇이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어요.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알고 있는데도 잊어버리니까 "이게 아니냐?"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왜 잊어버렸느냐? 이것이 아니냐? 16절에 "우리가 축복한 잔은 그리스도에 공동체 됨이 아니냐? 이미 공동체 되어 있지 않느냐? 그리스도에 떡을 통해 공동체 된 것이 아니냐?" 18절에 "육신을 따라서 된 이스라엘이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과 공동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미 공동체에서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 그걸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족한 것처럼 다른 곳에 친구 사귀려고 맛있는 거 먹으려고 또 재미있는 것 보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안에 이미 공동체 안에 축복이 다 들어 있으니까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좋은 것이 있을 태니까 이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 18절에 "제물을 먹는 자는 제단과 공동체 됨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구약의 경우를 염두해 두고 이야기 하는데 신명기 14장 22, 29절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릴 때 혹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화목제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많이 가져옵니다. 개인이나 가족이 먹은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져다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남은 것은 제사장과도 나누고 레위인과도 나누고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같이 먹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자기가 제사를 드리진 않았지만 초대 받아서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사를 드리지 않고 초대 받아서 갔지만 식사하는 것을 통해서도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 전서 10장 18절에서는 제물을 먹는 모든 자들은 제단과 공동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제단이라는 것은 제단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사를 드리지 않았지만 제사 음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사를 드린 사람과 같이 제사장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제사장과 제사를 드린 사람, 같이 먹는 자는 모두가 하나님과 공동체 되고 제단과 공동체 되었다고 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보다 영광이 훨씬 큽니다. 구약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지만 고린도 전서 1장 2절은 우리 성도들이 바로 성전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얻은 자들."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 성도라는 말이 구약의 성소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 성전에는 성전의 앞쪽을 성소라고 했습니다. 안쪽을 지성소라고 했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성전도 없었고 교회당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어디 있느냐? 성도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그 자체 성도들 자체가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제사를 다 폐지하신 다음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써 제사를 드렸고 이제 그 제사의 효과가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공동체 모임 가운데서 그 제사의 효과가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바로 성전이 된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로써 성도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보여 주었고 또 성도들을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의 제사로써 교회를 계속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고린도 전서 6장 11절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어지었고, 거룩하여 졌고, 의롭게 되어 졌다. 전에 성전이 거룩했지만 이제 우리들이 성전이고 성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우리가 깨끗하여 졌고 거룩하여 졌고 의롭게 되어 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번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시제는 과거 시제라 하는데 과거에 한번 된 것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성도들의 모임 안에서 주님께서는 일하셔서 우리 죄를 계속 씻어 주시고 우리를 점점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없으니 이방 신전은 눈에 보이는 큰 성전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휘황찬란하게 잔치를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탐이 나서 그곳에 가야 되겠는가?”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 너무 얕잡아 봤습니다. 작게 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니다. 너희들이 바로 성전이다. 보이지 않지만 너희들이 성전이고 너희들 안에서 주님과 공동체 됨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십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학벌도 좋지 않고, 가문도 좋지 않았습니다. 교회당 건물도 없고 전임 목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라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을 성전 삼으셨고 계속 거룩하게, 깨끗하게, 의롭게 만드는 일이 영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고린도성도들이 영적인 세계를 깜박깜박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입니다. 영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찾아서 주님과 교제하는 데서 떠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공동체 되어서 주님의 성전으로써, 주님의 몸으로써 계속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복음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하면서 계속, 예배드리면서 계속 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 주님과 공동체 된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쇄
주님과 공동체 되었다는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책입니다. 주님과 공동체 되어 있고 공동체 안에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모든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는 계속해서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느냐?" 잊어버리는 것을 다시 일깨웁니다. 너희들이 주님과 공동체 되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3장 16, 17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걸 알지 못하니까 교회당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 대신에 인간의 지혜를 계속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말하는 것을 그만둬라 예수님 복음만 전하고 들어라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5장 6절에서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절에서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셔가지고 온 덩이 하나의 거룩한 덩이로 만들어 주었는데 그걸 알지 못하느냐? 그걸 알지 못하니까 교인 중에 음란한 사람도 생기고 그런 죄 지은 사람도 있는 데도 권징도 안하고 내버려 두는 잘못을 하고 있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런 죄 지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권징해서 교회를 성장하게 하려면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이미 우리는 거룩한 한 덩이가 되어 가지고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장 2절에서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교인들끼리 문제가 있으니까 교인들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가서 목사, 장로, 집사끼리 소송을 버리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세상을 판단할 사람인데 어찌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 판단해 달라고 하겠느냐?” 교인들끼리 추하게 세상 법정에서 싸우는 것의 해결책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6장 15절에서도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19절은 "너희의 몸은 하나님께로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 알지 못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왜 모르고 있느냐? 너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줄 알지를 못하느냐? 그러니까 너희가 음란한 행동을 하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너 몸이 아파서 비틀거릴 때도 있고 내가 죄와 싸울 때 연약함이 있지만 그러나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데 성령께서 너희 안에 있는 데, 어떻게 감히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을 가지고 성령의 몸을 가지고 그렇게 죄를 짓는 데 쓴다는 말이냐? 그건 너희들의 귀한 신분에도 맞지 않고 주님께 맞지 않는다." 음란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그리스도와 공동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이야기 하면서 오늘 10장 16절에도 "우리의 잔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됨이 아니냐?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에 공동체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작은 죄라도 너희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주님이 싫어하시는 데로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가지 말라는 것이죠. "이미 너무 큰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왜 잊어버리려고 하느냐? 알지 못하느냐?"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질투 나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지 않는 게 아니냐?" 신명기 32장 21절 구약 성도들에 대한 경고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아닌 자로 우상으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분노를 격발하리라" 주님께서는 피 흘려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몸으로 거룩한 존재로 거룩하게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다른 데로 간다면 주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느낌으로 좋은 것을 따라 가지 맙시다. 주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귀한 존재인지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합시다. 주님의 몸의 거룩함과 성결에 참여 하고 있습니다. 귀하신 몸답게 처신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 몸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고 먹고 마시고 친구 얻는 것 때문에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되겠습니다.
3) 우리가 피해야 할 우상들
우리는 주님의 귀한 몸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우리도 우상숭배를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이시대의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상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기 바랍니다. "오늘의 운세, 오늘의 손금, 신문 같은 데서 이것, 재미로 볼까?" 그거 재미가 아닙니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아주 유명 일간지에서, 스포츠 신문에서 이런 걸 만들고 거기에 무당 선전, 운세 선전, 손금 선전 재미로 봅시다고 합니다. 재미가 아닙니다. 영적인 사실을 주의하십시오. 또 "점쟁이한테 갔더니 그 점쟁이 용하더라." "와 진짜 점쟁이들 잘 알아맞히네." 그것에 솔깃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지난 시간에 음담 패설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불쾌한 반응을 보여서, 그 말을 못하게 만들라고 그랬지요? 특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누구 이야기 들었더니 점쟁이 용하더라." "귀신은 미래 일은 잘 못 맞히지만 옛날일은 잘 알아맞히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서 끌려가지 마세요. 더러운 것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탐심을 버리십시오. 원래 좋은 것이지만 탐욕을 가지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만복이 나오고 나의 제산도 건강도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 나온다는 걸 알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거기에 매여 있으면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됩니다. 요즘에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대학교"라고 들었습니다. 대학이 종교가 되어 "대학교" 대학교가 우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대학에 가지만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대학에 가는 건 아닙니다. 그건 공부란 신에게 모든 걸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학벌에 노예가 되지는 마십시오. 서울대 그게 뭐에요. 헛된 거 아니에요? 서울대가서 사람이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사람이 되고 제대로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실제지, 서울대라는 건 어떤 허상이에요. 망상을 잡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실력되는 만큼 대악에 들어가면 됩니다. 주일에는 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가족과 사람들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실력 주신 만큼 대학 들어가면 참 행복합니다. 쥐어짜듯이 주일에도 계속 공부해서 자기 실력도 안 되는데도 억지로 어떤 대학에 들어가면 미래도 계속 공부해가지고 자기 실력도 안 되는 데 계속 공부해가지고 그 대학에 들어가면 계속 그렇게 살아야 되요. 차라리 어느 생활이든지 정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땐 예배드리고 쉴 때는 쉬고 할 일 다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그 다음에 어떤 대학에 가서도 그런 식으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실력에도 안 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 봤자 또 그렇게 고통스럽게 쥐어짜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탐욕에 빠지면 결국 인생은 비참하게 되는 거예요. 겉으로는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업이다. 그렇게 자살한 사람들 보지 않았어요? 귀신은 아주 잔인해요. 겉으로는 우상으로 가짜로 만들어가지고 거기한번 모여들기 시작하면 나중에 비참한 거예요.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 정말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좋은 직장도 포기하고 주일의 주님의 거룩함에 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포기하고 학원도 포기하고 주님께서 너무나도 유쾌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질투하시는 주님께서 너무너무 유쾌하게 생각하시면서 만복의 근원 주께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도들의 모임이 이방신전의 식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실컷 잘 드려놓고 2부 순서로 친교 하는 데는 우상 숭배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이 그랬잖아요. 실컷 예배는 잘 드려놓고 다른 곳에 가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요? 사업에 좀 도움이 되기 위해서 큰 교회 출석하는 사람 교양 있는 교회에 나가서, 교양 있어 보이려고 교회 나가는 사람들 교회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 만나서 자기도 공부 잘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를 우상 숭배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면 주께서 주시는 복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모임에서 그걸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면 이름은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데 마음속에 그것이 더 커져있으면 말은 주님인데 사실 공부, 돈, 사업상 관계 이게 커가지고 그걸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니까 성도들의 친교의 중심에 우상숭배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이 되니까 "좋다. 2부 모임은 정말 좋았다. 네트워크가 잘되고 공부 방법 잘 배우고 정보 잘 얻었고 이렇게 좋다"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실망하곤 합니다. 마음의 깊은 평안. 그런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을 겸하여 주시는 데 그냥 항상 평안만 얻으려고 교회 오는 것도 그것도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모여서 마음 평안 주는 이야기만 골라서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실망해가지고 돌아서는 것 주님께 불평하고 서로에게 불평하는 그것이 우상 숭배적 성도의 친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6절에서는 "이제 누구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성도들은 성도들이 키 크고 작고 제산 많고 적고 나한테 뭘 줄 수 있고 줄 수 없고 그런 식으로 더 이상 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써 주님과 공동체된 자로써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만들어 주신 사람으로 깨끗한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 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영적 실상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만남에서 서로에게 그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그걸 있는 걸 보고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이고 서로에게 있는 거룩함과 주께서 주신 거룩함과 깨끗함을 나누고서 그 영적 친교를 가지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성결과 거룩함이 부족할 때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대로 기대하고 그것이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아닌 어떤 것이 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탐욕적으로 나아가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 아닌 어떤 존재가 마치 내게 행복을 주는 것처럼 기도하듯이 무엇을 찾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좋은 학교 못나오더라도 좋은 직업 못 가지더라도 우리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있지만 이미 우리는 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적으로 좋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우리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영광된 천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행복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계속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피 흘려 사신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안에 어떤 것에 가서 사랑을 바치고 세속적인 이익 때문에 거기에 나가다가 귀신과 하나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을 벌을 해서라도 우리를 돌이키기 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과거 언제 한 순간 구원받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우리 마음을 뺏어간 우상이 있으면 돌이켜서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께 머물러 있을 때 당장 큰 복이 없어 보이더라도 신실하게 주님의 은혜를 받을 때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지만 때가 되면 더 큰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느낌이 은혜가 많든지, 적든지 신실하게 주님 안에 머물러서 주께서 주시는 영적 세계의 깨끗함과 영광스러움의 복을 누리는 우리 성도들, 성도들 사이도 그런 복이 넘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