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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87권
75. 차제학품을 풀이함②
【經】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에 있는 바 성품이 없음을 안다면, 4선(禪)과 5신통(神通)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세존이시여, 새로 배우는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모든 법의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가운데서 차례대로 행(行)하고 차례대로 배우고[學] 차례대로 도(道)를 닦으며, 이 차례대로 행하고 차례대로 배우고 차례대로 닦는 도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처음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듣기도 하고,
또는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한 보살로부터 듣기도 하며,
또는 여러 아라한이나 여러 아나함ㆍ여러 사다함ㆍ여러 수다원에게서 듣기도 하는데, 곧
‘있는 바 없음[無所有]을 얻기 때문에 그분이 곧 부처님이요,
있는 바 없음을 얻기 때문에 그가 곧 아라한이요 아나함이요 사다함이요 수다원이며,
온갖 성현이 모두가 있는 바 없는 성품을 얻기 때문에 이름이 있나니,
모든 유위(有爲)의 조작된 법은 있는 바 성품이 없으며, 나아가 털끝만큼도 있는 바가 없다’고 함을 듣게 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말을 들은 뒤에 생각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있는 바 성품이 없다면, 있는 바 없음을 얻기 때문에 그 분이 곧 부처님이요 나아가 있는 바 없음을 얻기 때문에 그가 곧 수다원이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온갖 법은 언제나 성품이 없을 터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겠는가?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서, 온갖 중생들이 모양이 있는 데서 행하고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있는 바 없는 가운데에 머무르도록 하리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니라.
보살마하살이 행해야 할 차례대로의 행과 차례대로의 배움과 차례대로 닦는 도는,
마치 과거의 모든 보살마하살이 행한 바의 도(道)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과 같아서,
이 새로 뜻을 일으킨 보살은 마땅히 6바라밀을 배워야 하나니,
이른바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만일 단(檀)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보시를 행하면서 남들에게도 보시를 행하게 하며,
보시를 행하는 공덕을 칭찬하고 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고 찬탄하며,
이 보시한 인연 때문에 큰 재물과 부를 얻나니,
이 보살은 간탐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중생에게 보시하되 음식과 의복과 향과 꽃이며 영락ㆍ방사ㆍ침구ㆍ등촉 등 갖가지의 살림에 필요한 것을 모두 주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보시와 지계(持戒)를 행하여 천상과 인간 안에 태어나서 크게 존귀함을 얻게 되나니,
이 지계와 보시 때문에 선정의 무리[禪定衆]를 얻고,
이 보시와 지계와 선정 때문에 지혜의 무리[智慧衆]와 해탈의 무리[解脫衆]와 해탈지견의 무리[解脫知見衆] 등을 얻느니라.
이 보살은 보시의 무리ㆍ지계의 무리ㆍ선정의 무리ㆍ지혜의 무리ㆍ해탈의 무리ㆍ해탈지견의 무리들로 인하여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며,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게 되며,
일체종지를 얻고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法輪)을 굴리며,
법륜을 굴린 뒤에는 3승(乘)의 법으로써 중생을 생사(生死)에서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이 보시를 차례대로 행하고 차례대로 배우며 차례대로 도를 닦되 이 모두는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제 성품[自性]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뜻을 내어서부터 자기 자신이 지계를 행하고 남들에게도 계율을 지니도록 가르치며,
계율을 지니는 공덕을 찬탄하고, 지계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찬탄하나니,
이 계율을 지닌 인연 때문에 천상과 인간 안에 태어나서 크게 존귀함을 얻느니라.
가난한 이를 보면 재물로써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지 않는 이에게는 계율을 지니도록 가르치며,
뜻이 산란한 이에게는 선정을 닦도록 가르쳐 주고,
어리석은 이에게는 지혜를 지니도록 가르쳐 주며,
해탈이 없는 이에게는 해탈하도록 가르쳐 주고,
해탈지견이 없는 이에게는 해탈지견을 얻도록 가르쳐 주느니라.
이 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한 뒤에는 중생을 성취시키고,
중생을 성취시킨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으며,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을 굴리고,
법륜을 굴린 뒤에는 3승의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이 지계로써 차례대로 행하고 차례대로 배우며 차례대로 도를 닦되 이런 일은 모두가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부터 스스로 찬제(羼提)바라밀을 행하면서 남들에게 찬제를 행하는 일을 가르치며,
찬제의 공덕을 칭찬하고 찬제를 행한 이를 기뻐하며 찬탄하나니,
찬제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에게 보시하여 저마다 만족하게 하고, 계율을 지니게 하며, 선정을 닦게 하고 나아가 해탈지견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의 인연 때문에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게 되며,
부처님 세계를 깨끗하게 한 뒤에는 중생을 성취시키고,
중생을 성취시킨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으며,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을 굴리고,
법륜을 굴린 뒤에는 3승의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찬제바라밀로써 차례대로 행하고 차례대로 배우며 차례대로 도를 닦되 이런 일은 모두가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제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을 행하면서 남에게도 비리야를 행하는 일을 가르치며,
비리야를 행하는 공덕을 찬탄하고 비리야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느니라.
나아가 이런 일은 얻을 수 없나니, 제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무량심(無量心)에 들어가고,
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면서 남들도 가르쳐서 선정에 들어가고 무량심에 들어가고 무색정에 들어가게 하며,
선정에 들어가고 무량심에 들어가고 무색정에 들어가는 공덕을 찬탄하고, 선정과 무량심과 무색정을 수행하는 이를 기뻐하고 찬탄하나니,
이 보살은 모든 선정과 무량심에 머무르면서 중생에게 보시하여 저마다 만족시키고 계율을 지니게 하며, 선정과 지혜를 닦게 하느니라.
이 보시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의 인연 때문에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의 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깨끗하게 한 뒤에는 중생을 성취시키며,
중생을 성취시킨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고,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을 굴리며,
법륜을 굴린 뒤에는 3승의 법으로써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느니라.
나아가 이런 일은 얻을 수 없나니, 제 성품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부터 반야(般若)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에게 보시하여 저마다 만족하게 하고, 가르쳐서 계를 지니고 선정과 지혜를 닦고 해탈과 해탈지견을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자기 자신이 6바라밀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6바라밀을 행하게 하고,
6바라밀의 공덕을 찬탄하며, 6바라밀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고 찬탄하느니라.
이 보살은 이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인연과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나아가 이런 일은 얻을 수 없나니, 제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곧 처음에 뜻을 낸 보살마하살의 차례대로의 행이요 차례대로의 배움이며 차례대로 닦는 도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의 차례대로의 행과 차례대로의 배움과 차례대로 닦는 도란 곧 보살마하살이 처음부터 일체종지와 상응하는 마음으로써 모든 법에 있는 바 성품이 없음[無所有性]을 믿고 이해하면서 6념(念), 즉 염불(念佛)과 염법(念法)과 염승(念僧)과 염계(念戒)와 염사(念捨)와 염천(念天)을 닦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염불(念佛)을 닦는가?
보살마하살의 염불은 물질로써 염(念)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으로써도 염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물질은 제 성품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
만일 법에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이 곧 있는 바 없는 것[無所有]이니라.
왜냐 하면 기억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염불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의 염불은 32상(相)으로써 염하지 않으며,
또한 금빛의 몸을 염하지 않으며,
한 길의 광명[丈光]을 염하지 않고 80수형호(隨形好)를 염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부처님의 몸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에 성품이 없다면 이것이 곧 있는 바 없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기억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염불이니라.
또 수보리야, 계율[戒衆]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고,
선정[定衆]과 지혜[慧衆]와 해탈[解脫衆]과 해탈지견[解脫知見衆]으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이 모두는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에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은 법이 아니어서 생각할 바가 없나니, 이것이 곧 염불이니라.
또 수보리야, 10력으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고,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으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며,
대자대비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이 모든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에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은 법이 아니어서 염할 것이 없나니, 이것이 곧 염불이니라.
또 수보리야, 12인연(因緣)의 법으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이 인연의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에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은 법이 아니어서 염할 것이 없나니, 이것이 곧 염불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부처님을 염해야 하나니,
이것이 곧 보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 하는 차례대로의 행이요 차례대로의 배움이며 차례대로 닦는 도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차례대로의 행과 차례대로의 배움과 차례대로 닦는 도 가운데에 머물러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을 두루 갖추고,
공삼매(空三昧)ㆍ무상삼매(無相三昧)ㆍ무작삼매(無作三昧) 내지는 일체종지를 수행하나니,
모든 법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은 모든 법의 성품이 있는 바 없음을 아나니,
이 가운데에는 있는 성품[有性]도 없고 없는 성품[無性]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염법(念法)을 닦아야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착한 법[善法]을 염하지 않고 착하지 못한 법[不善法]도 염하지 않으며,
기별된 법[記法]을 염하지 않고 무기의 법[無記法]도 염하지 않으며,
세간의 법[世間法]을 염하지 않고 출세간의 법[出世間法]도 염하지 않으며,
깨끗한 법[淨法]을 염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법[不淨法]도 염하지 않으며,
성인의 법[聖法]을 염하지 않고 범부의 법[凡夫法]도 염하지 않으며,
유루의 법[有漏法]을 염하지 않고 무루의 법[無漏法]도 염하지 않으며,
욕계에 매인 법[欲界繫法]과 색계에 매인 법[色界繫法]과 무색계에 매인 법[無色界繫法]도 염하지 않으며,
유위의 법[有爲法]과 무위의 법[無爲法]도 염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모든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법에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은 법이 아니어서 염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곧 염법이니, 염법에서는 있는 바 성품이 없음을 배우기 때문에 이에 일체종지를 얻게 되느니라.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모든 법의 있는 바 성품이 없음을 얻게 되니, 이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것에는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염법을 닦아야 하나니, 이 법 가운데는 조금의 염(念)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법을 염함이겠느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염승(念僧)을 닦아야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승가[僧]를 염할 적에는 무위(無爲)의 법이므로 분별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이 있다 하여도 이 가운데에는 조금의 염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승가를 염함이겠는가?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염승을 닦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염계(念戒)를 닦아야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성인의 계율[聖戒]ㆍ결함이 없는 계율[無缺戒]ㆍ틈이 없는 계율[無隙戒]ㆍ흠이 없는 계율[無瑕戒]ㆍ흐림이 없는 계율[無濁戒]ㆍ집착이 없는 계율[無著戒]ㆍ자재한 계율[自在戒]ㆍ지혜로운 이가 칭찬하는 계율[智者所讚戒]ㆍ구족계(具足戒)와 정에 따른 계율[隨定戒]을 염해야 하나니,
이 계는 있는 바 성품이 없어서 조금의 염도 없거늘 하물며 계율을 염함이겠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마땅히 버릴 것을 염[念捨]하여야 하느니라.
자기 자신부터 버릴 것[捨]을 염하고 다른 이의 버릴 것도 염하여 재물도 버리고 법도 버리며 번뇌도 버리나니,
이 버리는 것은 얻을 수가 없다[不可得]도 관찰하기 때문에 조금의 염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버릴 것을 염함이겠는가?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버리기를 염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하늘을 염해야[念天]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4천왕천(天王天)의 모든 하늘은 믿음[信]과 계율[戒]과 보시[施]와 다문[聞]과 지혜[慧]가 있었던 이라 이 세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저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나에게도 또한 그런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다문과 지혜가 있다’고 하며, 나아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모든 하늘까지도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다문과 지혜가 있었던 이라 이 세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저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나에게도 또한 그런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다문과 지혜가 있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 하늘들을 염해야 하되 저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조금의 염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하늘을 염함이겠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6념(念)을 행해야 하나니, 이것을 곧 차례대로의 행이요 차례대로의 배움이며 차례대로 닦는 도라 하느니라.”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에 있는 바 성품이 없다면,
이른바 물질에서 인식까지와, 눈에서 뜻까지와, 빛깔에서 법까지를 염(念)하는 것도 있는 바 성품이 없으며,
눈의 요소에서 의식의 요소까지도 있는 바 성품이 없으며,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와 내공에서 무법유법공까지와 4념처에서 8성도분까지와 부처님의 10력에서 일체종지까지도 그것은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것인지요?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에 있는 바 성품이 없다면, 여기에는 도(道)도 없고 지혜[智]도 없으며 과위[果]도 없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물질의 성품이 실로 존재한다고 보느냐?
나아가 일체종지까지도 실로 존재한다고 보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만일 모든 법이 실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법에 대하여 감히 의심은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오는 세상에 모든 비구로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구하고 보살의 도를 구하는 이들을 위해서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에 있는 바 성품이 없다면, 그 누가 더럽고 그 누가 깨끗하며 그 누가 속박되고 그 누가 해탈하는 것인가?’라고 하며,
그들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계율을 파괴하고 바른 견해를 파괴하고 위의(威儀)를 파괴하고 깨끗한 생활[淨命]을 파괴하리니, 그 사람들은 이런 일을 파괴하기 때문에 3악도(惡道)에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앞으로 오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 물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법에 대하여 꼭 믿어 의심하지도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論】 해석한다.
수보리는 부처님 말씀을 신복하여 받아들이면서,
‘온갖 법이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능히 4선(禪)과 신통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큰 보살로서 거의 부처를 이룬 이들은 잘 행하시지만, 지금 아직 모르고 있는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이야 어떻게 행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새로 뜻을 낸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모든 법의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가운데서 차례대로 행하고 차례대로 배우고 차례대로 도를 닦으며, 어떻게 이 차례에 따른 행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차례대로의 행과 차례대로의 배움과 차례대로 닦는 도 때문에 이 새로 뜻을 낸 보살은 비록 한량없는 겁 동안 뜻을 내었다고 해도,
그가 아직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지 못했으면 그 모두를 새로 배우는 이[新學]라 함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이런 사람들이 새로 배우는 이라면, 다만 보시와 지계 등을 행하라고만 가르쳐야 되거늘,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모든 법의 있는 바 없고 필경 공한 성품 가운데서 행하라”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답】 지금에야 비로소 있는 바 없고 필경 공한 법에 들어가는 것을 밝히시기 때문에 있는 바 없음을 행하게 하며, 그러면서도 이 보살은 있는 바 없는 것과 필경 공한 것으로 보시와 지계 등의 행에 화합시킨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약을 먹일 적에 꿀을 발라주면 이내 삼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록 새로 뜻을 낸 이라 할지라도 깊은 공을 관찰하게 하는 것이니, 허물될 것은 없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혹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듣기도 하고 또는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한 이로부터 듣게도 된다.”라고 하셨다.
‘모든 부처님’이란, 과거와 현재 세상의 부처님이다.
‘모든 부처님께 많이 공양한 이’라 함은, 변길(遍吉)보살ㆍ관세음(觀世音)보살ㆍ득대세(得大勢)보살ㆍ문수사리(文殊舍利)보살ㆍ미륵(彌勒)보살 등이다.
네 가지 성문(聲聞)인 성인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벽지불은 설법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 등 성인은 모두가 있는 바 없음[無所有]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이런 분별이 있다.
성인은 비록 선정 등 모든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열반을 위하기 때문이며,
열반은 곧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요 있는 바 없는 법이니, 이 때문에
‘모든 성인은 열반으로 인하여 이런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온갖 유위(有爲)의 조작된 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있을 뿐이니, 실로 정해진 성품이 없으며 나아가 털끝만큼도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유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色]이요,
둘째는 물질이 없는 것[無色]이다.
물질의 법[色法]은 파괴하고 분별한다 해도 아주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거나 진실한 것이 없고,
물질이 없는 법[無色法]에서는 곧 한 생각까지도 일정하거나 진실한 것이 없다.
이 파괴하는 뜻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로부터 이런 법을 듣는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집착하는 마음으로 설명하지만,
성인들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설명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다만 성인들부터 들을 뿐이다.
그때에 차례대로 배우고 있는 보살은 이런 법을 듣고 비지(比智)로써 헤아리고 결정하여
‘모든 법은 구경에는 반드시 공하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얻으신 실상(實相) 가운데에 들게 되나니, 이른바 고요히 사라지고[寂滅] 희론이 없는 모양[無戱論相]이 그것이다.
내가 부처님이 되거나 부처님이 되지 않거나 간에 꼭 같아 다름이 없는 것이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실상은 늘어나지도 않고[不增] 줄어들지도 않아서[不減] 다시 얻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법도 없기 때문이요, 또한 상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을 제도할 때에도 중생은 필경에는 공하여 그 본말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의 소원으로 짓는 공덕과 성불할 때의 신통력은 모두가 꿈과 같고 환과 같으리니, 그 때문에 하나도 정해지거나 진실한 모양이 없어서 필경 공한 것이다.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같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발심하여 부처님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함에 대하여 문답하겠다.
【문】 만일 모든 법은 마침내 공하여 있는 바 없는 것임을 안다고 하면,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나는 무엇 때문에 발심하여 부처님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가?
【답】 마침내 공하여 있는 바가 없어서 장애됨이 없다면, 발심하여 부처님이 된다 한들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또 만일 마침내 공하여 모든 희론이 사라졌다 한다면, 어떻게 발심하는 것을 막겠는가?
만일 막는다면 그것은 곧 성품이 있는[有性] 것이거늘 어떻게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것[無所有性]이겠는가?
【문】 만일 발심에 장애되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발심하지 않아도 장애되지 않아야 하거늘, 보살은 왜 편안히 머물러 있지 않고 발심하여 갖은 고통을 받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이 있으므로 마땅히 발심해야 한다.
어떤 이는
‘여러 친족과 아는 이들이 모두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지 못하면, 그 때문에 이 세상에서나 뒤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뇌를 받게 된다.
나는 다행이 힘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을 저 많은 고통을 여의게 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좋은 음식과 약을 얻었는데, 고향의 친척이나 아는 이가 여러 가지 병이 들어 고생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발심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보살은 비록 모든 법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고향의 친척 때문이라도 발심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또 생각하기를,
‘나는 비록 모든 법의 실상을 듣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아직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 선정에 있지 못하며, 지혜가 성숙하지 못하고 모든 고뇌를 받고 있다.’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서 모든 공덕을 쌓고,
있는 바 없음의 법[無所有法]을 증득하여 스스로를 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위한다.
이 보살은 또 대승(大乘)의 깊은 이치를 듣고 중생의 평등과 법의 평등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달리 여기는 마음이 없으므로 부처님이 될 수 있다.
비록 또 중간 사람이나 원수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마음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필경 공한 마음 때문에 번뇌가 미미해지고 얇아져서 원수나 친한 이나 평등하기 때문이니,
그는 생각하기를,
‘원수나 친한 이는 정해진 것이 없고 인연 때문에 친한 이가 혹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혹은 친한 이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큰 인연으로써 인욕(忍辱)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기 때문에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원한을 참아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원수 보기를 마치 친한 이처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험한 길을 지나려 할 적에 길잡이를 공경하여 정중히 모시는 것과 같고,
또 용한 의사가 비록 몸은 천하다 하더라도 존귀한 이처럼 정중하게 대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헤아리며 분별하기를,
‘중간의 사람이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는 소용없다 하더라도 그는 곧 불도(佛道)의 인연이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일종의 차례대로의 행이요 차례대로의 배움이며 차례대로의 도라 하나니, 이 때문에 과거 세상에서 보살이 행한 바로써 증명을 삼은 것이다.
【문】 차례대로의 행과 차례대로의 배움과 차례대로의 도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별이 없다. 행(行)과 배움[學]과 도(道)는 그 뜻이 하나인데 말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에는 행이라 하고 중간에는 배움이라 하며 나중에는 도라 한다.
행을 보시(布施)라 하고 배움을 지계(持戒)라 하며 도를 지혜(智慧)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행을 지계라 하고, 배움을 선정이라 하며, 도를 지혜라 한다.
또 행은 바른 말[正語]ㆍ바른 행위[正業]ㆍ바른 생활[正命]이라 하고,
배움은 바른 노력[正精進]ㆍ바른 기억[正念]ㆍ바른 선정[正定]이라 하며,
도는 바른 견해[正見]ㆍ바른 생각[正思惟]라 한다.
이 여덟 가지의 일을 비록 도(道)라고 하더라도 분별하면 세 가지로 나뉘게 된다.
바른 견해는 곧 도의 본체[道體]라서 이 도를 일으키고,
바른 생각ㆍ바른 말ㆍ바른 생활은 바른 견해를 돕기 때문에 행이라 하며,
바른 노력ㆍ바른 기억ㆍ바른 선정은 바른 견해를 성취시켜 견고하게 하므로 이것을 배움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을 행이라 한다.
처음에 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시라바라밀을 배움이라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5욕을 따르면 금지하기도 어렵고 제어하기도 어려워 잠시도 쉬는 일이 없는데 점차로 시라바라밀과 선바라밀로써 이 마음을 억제하고 조복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배움이라 한다.
찬제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도라 하나니, 왜냐 하면 인욕을 선(善)으로 삼고 반야를 지혜로 삼기 때문이다.
선과 지혜를 두루 갖추는 까닭에 도라 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눈이 있고 발이 있으면 뜻한 대로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라고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을 세 가지 일의 차별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차례대로[次第]라고 하는가?
【답】 수보리의 생각하길,
‘만일 온갖 법이 있는 바가 없다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이 공한 법 가운데서 어떻게 점점 차례대로 배워야 되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차례대로’라고 한다.
모든 법은 비록 공하여 알기 어렵다 하더라도 차례대로 행하여 힘을 얻기 때문에 능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다리에 의지해 맨 첫 칸부터 점차로 올라가면, 맨 위가 비록 높고 또 어렵다 하더라도 그곳에 닿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차례대로의 행[次第行]’이라 함은, 네 가지로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자기 자신이 단(檀)을 행하고, 남들에게도 단을 행하게 하며, 단의 공덕을 찬탄하고, 단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찬탄한다.”는 것이다.
간탐하는 뿌리를 잘 뽑아내고, 단바라밀을 깊이 사랑하며, 중생에게 자비로써 대하고, 모든 법의 실상을 통달하는 것을 말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능히 네 가지로 단바라밀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보시를 행하면서도 남들에게 보시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이도 있나니, 그는
혹 다른 이가 성을 낼까 두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혹은 자기 때문에 보시하게 되면 그것이 부담이 될까 해서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는 보시하게 하면서 자기는 보시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혹 어떤 사람은 갖가지로 보시의 덕을 찬탄하면서 남에게는 권고하여 보시하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보시를 행하면서 남에게도 보시하도록 하고 또한 보시의 덕을 찬탄하면서도, 남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혹 어떤 계율을 깨뜨린 악인이 보시하면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시주(施主)를 보고 기뻐하면서도 찬탄하지 않는 이도 있나니, 그는 삿된 견해를 지니어 보시의 과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저마다 두루 갖추지는 못했지만 보살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大悲心]으로 착한 법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네 가지 일을 잘 행하나니,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이 만일 자신만 보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금세에서는 조금이나마 그 중생들을 이롭게 하나, 그들은 업의 인연에 따라 빈궁한 곳에 떨어지고 만다.
이 때문에 보살은 중생들에게 가르치되,
“나는 재물을 아끼지 않아서 비록 그대에게 많은 보시를 하지만, 그대도 또한 후세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니, 그대도 지금 당장 스스로 보시해서 뒷날에 스스로 얻어야 한다.”라고 하느니라.
보시의 진실한 공덕과 갖가지 인연으로써 중생에게 보시를 하도록 가르쳐 주며, 보시를 행한 이를 보면 비록 그가 계율을 깨뜨린 악인일지라도 다만 그가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덕만을 생각할지언정 그 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니, 이 때문에 기뻐하며 찬탄하는 것이다.
또 3보(寶)의 그지없는 복전(福田) 가운데에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하는 복은 다함이 없으며, 반드시 부처님 도에 이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는 미래 세상의 그지없는 공덕을 관찰하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이 네 가지로 보시를 하나니, 세상에서마다 재물이 풍부하게 된다.
이 보살은 비록 재물이 많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보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6바라밀 등의 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그 중간에도 저절로 재물이 풍부하여지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쌀을 거두기 위하여 벼를 심으면 볏짚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과 같다.
보살은 재물의 과보를 얻을 때에는 간탐하는 마음을 여의고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보시하되 밥을 구하면 밥을 주는 것이다.
【문】 이 보살은 보시할 때에 먼저 어떤 사람에게 보시해야 하는가?
【답】 이 보살은 비록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보살이 보시할 때는 반드시 먼저 모든 부처님ㆍ큰 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과 그리고 모든 성인들에게 공양한다.
만일 이런 성인이 계시지 않으면 차례로 계율을 지니고 정진하며, 선정을 닦고 지혜 있는 이와 욕탐을 여읜 사람에게 보시하며,
만일 이런 사람도 없으면 온갖 출가한 제자들에게 보시하며,
만일 이런 사람들도 없으면 다음에 5계(戒)를 지니면서 10선도(善道)를 행하는 이와 1일계(日戒)와 3귀(歸)를 지닌 이에게 보시한다.
만일 이런 사람들도 없으면 다음에는 중간 사람으로서 바르지도 않고 삿되지 않은 이에게 보시하며,
만일 이런 사람도 없으면 다음에는 5역죄(逆罪)를 지닌 나쁜 사람에게도 보시하며, 그리고 모든 짐승들에게도 주지 않을 수 없으니, 보살은 보시로써 온갖 중생을 거두어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먼저 5역죄를 지은 사람과 선근이 끊어진 이[斷善根者]와 가난한 이로서 늙고 병든 이와 하천한 거지에서 축생에 이르기까지 보시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인자한 어머니에게 많은 자식들이 있을 때에 먼저 야위고 병든 자식을 생각하여 그가 바라는 것을 주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은 굶주린 범이 자기 새끼를 잡아먹으려 하면, 대신 제 몸을 던져 보시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문】 이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우선 어디서부터 보시해야 하는가?
【답】 온갖 중생들은 그 모두가 보살의 복전이니, 그것은 대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언제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써 중생에게 베풀려고 하거늘 하물며 의(衣)ㆍ식(食) 등에 분별이 있겠는가?
또 보살은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으면 평등하여 차별이 없지만,
아직 무생인을 얻지 못한 이면 혹은 자비심이 많이 있는 이도 있고,
혹은 분별심이 많이 있는 이도 있나니,
이 두 가지 마음은 한꺼번에 같이 행할 수 없다.
자비심이 많은 이는 먼저 가난하거나 나쁜 사람에게 보시하며 생각하기를,
‘복전 가운데에 심으면 과보는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중생이 불쌍하기 때문에 먼저 가난한 이부터 이롭게 하자’고 하나니,
이러한 복전은 비록 좋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 자비심 때문에 큰 과보를 얻는다.
분별심이 많은 이는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께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공양해야 한다’ 하면,
모든 법을 분별함으로써 부처님의 몸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마음가짐은 작다.
그러나 그 마음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복전이 양호하기 때문에 역시 공덕도 크다.
만일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 가운데에 들어가므로 마음이 자유자재하여 두 가지 일을 다 함께 행하게 되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또 모두를 마치 부처님과 같이 본다.
이러한 보살은 인연 따라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문】 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옷과 음식 등을 주라고 하지 않고 “밥을 구하면 밥을 준다.”라고 말씀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밥을 구하는데 마실 것을 주거나, 마실 것을 구하는데 옷을 준다면, 받는 이의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복덕이 적다. 이 때문에 “밥을 구하면 밥을 주라”라고 하신 것이다.
【문】 어떤 사람은 부끄러워서 또는 두려워서 비록 구하는 것이 있어도 해도 말을 못하는 이가 있거늘, 어떻게 그가 구하는 바를 다 알겠는가?
【답】 보살은 그의 용모를 살핀 뒤에 때와 필요한 것과 그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해야 하며, 혹은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이라면 살림에 필요한 것을 그의 뜻대로 줄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런 보시로 인하여 계율[戒衆]을 성취하게 되나니,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옷과 음식을 보시하고 있지만, 그 얻게 되는 이익은 심히 적어서 계율을 지니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하고,
항상 괴로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것[無惱無畏]으로써 중생에게 베풀게 된다.
보살은 이 지계(持戒)의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계율을 수호하기 위하여 선정(禪定)의 마음을 내게 되고, 산란하지 않고 깨끗하기 때문에 지혜[慧衆]를 이루게 되나니, 희론이 없고 모든 집착을 버리는 이것이 곧 지혜의 모양이다.
이 지혜 때문에 모든 번뇌의 속박을 깨뜨리고 해탈[解脫衆]을 얻으며,
그리고는 분명하게 알고 보면서 해탈을 증득하기 때문에 해탈지견[解脫知見衆]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먼저 보시를 행하고 그리고 5중(衆)의 인연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문】 보살은 마땅히 6바라밀을 행하여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야 하거늘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5중을 말하는가?
【답】 법은 비록 하나라 하더라도 갖가지 다른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 때문에 5중을 말한다 해도 잘못은 없다. 이 사람은 하나의 바라밀 가운데서 모든 바라밀을 일으키려고 한다.
보시를 주(主)로 삼아서 설명을 하자면,
이미 먼저 설명한 지계(持戒)는 시라바라밀이라 하고,
선정과 해탈은 선바라밀이라 하며,
지혜와 해탈지견은 곧 반야바라밀이다.
온갖 바라밀을 행할 때에 여러 나쁜 일들을 참아내는 것은 곧 찬제바라밀이라 하며,
모든 바라밀을 능히 일으켜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으면 그것을 곧 비리야바라밀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바라밀의 이름만을 말하지 않고 5중을 말하는가?
【답】 이 사람은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려 하므로 이 가운데의 지계와 선정만으로는 화합중계(和合衆戒)와 청정계(淸淨戒)와 무진계(無盡戒)을 얻지 못한다.
요약하여 말하건대, 모든 계(戒)를 다 포섭하는 것을 계중(戒衆)이라 하니, 이로써 번뇌를 파괴하고 2승을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으로써 군대[軍]라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합하여야 비로소 군대가 되어 원적을 격파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머지 중(衆)도 이와 같다.
보살은 자기 자신이 선정 등을 얻으면 또한 중생들도 얻게 하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하며,
중생들을 교화한 뒤에는 자기의 공덕과 중생의 공덕을 가져다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 모두 회향한다.
이 두 가지 법을 갖추면 곧 일체종지를 얻고 법륜을 굴리면서 3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차례대로의 행이요, 차례대로의 배움이며, 차례대로의 도라 한다.
거친 것[麤]을 먼저 하고 세밀한 것[細]을 뒤에 하며, 쉬운 것을 먼저 하고 어려운 것을 뒤에 하면서 점차로 익히고 배우는 것을
‘차례대로[次第]’ 라고 한다.
그 밖의 다섯 가지 바라밀도 그 이치에 따라 분별해야 하나니, 모든 법의 성품은 비록 있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세속의 이치[世諦]에 따라 행하여 뒤바뀜[顚倒]을 깨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 염불(念佛) 등의 6념(念)은 곧 첫 번째 차례에 해당하는 행이니, 행하기도 쉽고 얻기도 쉽기 때문이다.
【문】 6념 가운데서 말씀하기를, “물질로써 부처님을 염하지 않는다.”라고 하셨거늘 어찌하여 쉽다고 말하는가?
【답】 어떤 법은 함께 행해지기 때문에 쉽다고도 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쓴 약을 먹을 적에 꿀을 타면 삼키기 쉽다고 하는 것과 같다.
6념의 뜻은 초품(初品)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6바라밀과 6념은 부드럽고 행하기가 쉬워서 삿된 소견을 내지 않으므로 이 보살은 차례대로 법을 배우게 되지만,
그 밖의 3해탈문(解脫門) 등은 사유하고 헤아려서 혹은 삿된 소견을 내기도 하므로 이 가운데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만일 진실로 있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차례대로의 행 등이 있겠습니까?”라고 따지므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반문(反問)하시면서,
“그대는 성문의 지혜로써 물질 등의 법을 보는데 그것은 일정하고 진실한 법이더냐?”라고 하셨다.
그는 대답하기를,
“물질 등 온갖 법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인연(因緣)의 화합으로부터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어서 일정하거나 진실함이 없거늘 어떻게 있다고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진실로 일정한 것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어떻게 차례(次第) 등으로 공을 따지면서 차례법이 공을 여의지 않는다 하는 것이더냐?”라고 하셨다.
그때에 수보리는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그 때문에 말씀드리기를,
“저는 의심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오는 세상에 3승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물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공하여 있는 바 성품이 없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죄가 중하고 지혜가 둔하기 때문에 공한 모양을 취하며 곧 말하기를,
‘그 누가 더럽고[垢] 그 누가 깨끗하단[淨] 말인가?
범부와 악인은 무엇 때문에 더럽다 하고 출가(出家)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깨끗하다 하는가?’라고 할 것이며,
이런 사람은 부처님 말씀의 깊은 이치에서 무슨 일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 공에 집착하면서,
‘지계(持戒) 등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곧 삿된 견해를 내어 바른 소견을 깨뜨리며,
바른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조그마한 인연에도 계율과 위의를 깨뜨리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출가한 사람은 필요한 물자를 속인에게서 바라므로 곧 거짓말을 하여 옷과 음식 등의 이익을 구하면서 바른 생활[正命]을 깨뜨리게 되고,
이런 죄를 심기 때문에 3악도(惡道)에 떨어지며, 혹은 속인을 중히 여기는 이런 허물들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도를 얻었으므로 모든 법에서 받아들일 것도 없고, 또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한 법을 들었거늘 어떻게 희론을 펴며 의심을 내겠습니까?
또 저는 언제나 무쟁삼매(無諍三昧)를 닦으면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있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