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여신은 장님
우리는 역사가 하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선택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할 수는 있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펼쳐짐에 따라 인류의 복지가 필연적으로 개선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류에게 이로운 문화가 반드시 성공하고 퍼진다든가 덜 이로운 문화는 사라진다든가 하는 증거도 없다.
기독교가 마니교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든가
아랍 제국이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도 마찬가지로 없다.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이익을 측정할 객관적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는 우리에게 없다.
물론 늘 승자는 자기네 정의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승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마니교에게 승리한 것이 인류에게 유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과 의견을 같이할 이유가 없다.
무슬림들은 사산 왕조 제국이 무슬림의 손에 무너진 것이 인루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이익이 명백한 것은 우리가 무슬림 세계관을 받아들였을 때뿐이다.
어쩌면 기독교나 이스람교가 사라지고 패배했더라면 우리는 더욱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하며,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게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하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부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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