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사이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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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발선인장과 인도고무나무가 우리 집 거실로 이사 온 날 허공이 위태하더니 떠들썩한 식탁을 차린다 악어 울음,낙타 발자국, 잘 구워진 모래, 붉은꼬리열대사다새의 웃음,전갈의 맹독을 한데 모아 지지고 볶고 비비는 특별 메뉴 섞일 수 없는 것을 잘 섞는 것이 이 요리의 비법, 가끔 개성 강한 것들이 부딪혀 스콜을 퍼붓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이 몰려 오지만 이때 맛볼 수 잇는 것이 이곳의 별미이다 지구본을 돌리듯 화분과 화분 사이를 돌리면 철철 넘치는 웃음이나 울음, 때로는 비명까지 모두 제 몸에 갖힌 소리 하나씩 흘린다 신기루 같은 입들이 둘러 앉아 먹은 저녁 엇나간 일기예보처럼 싱싱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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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은 우리 집 저녁 식탁
뿌리처럼 바싹 마른 입들이 허공에 길을 낸다
"막내는 영어 학원에 가서 아직 안 온 거야, 아마 길 건너 게임방에 있을 거야, 이번 학기 휴학하고 주유소 아르바이트 할 거에요, 등록금 걱정 하지 마세요, 내 삶도 충전 좀 할거고요, 아버지 어머니 갈라서실 거 같아요, 대출금이자 날짜는 왜 이리 빨리 다가오지, 이번 달 보험해약해서 이자라도 넣어야겠어요, 이번 추석엔 막내 삼촌 결혼 이야기 좀해요, 언제까지 같아 살아요 집도 좁은데..." 양푼에 어울리지 않은 말들을 집어 넣고 섞일 때까지 돌리는 저녁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섞이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감은사
팽팽한 허공이 균형을 잡고 있다
늘 마주보고 서 있는
그들은 맞수다
쉽사리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저 근성
쓰러지지 않는 비결은 마주보고 있기 때문
서로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대웅전 앞, 사각의 뜰
먼지나 흙이 되어 모두 돌아간 시간
아직 버티고 있는 저 힘
눈동자는 당신의 허점을 살핀다
쓰러지는 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 무서운 것
가까이 있다 멀리가면 맞수가 아니다
일상의 기울기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
이유도 모른 채 중심에서 떠나간 사람들
죽죽 금간 모습으로 감은사 탑 주위를 돌고 있다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 (실천문학사, 2018)에서
첫댓글 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