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파스는 있었다 / 정성화
마음이 울적할 때 나는 곧잘 동요를 부른다. 처음에는 마음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약간 슬픈 곡을 택한다. 연이어 두 곡쯤 부르고 나면 마음의 물기가 절반은 걷힌다. 마음이 내 성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부르는 노래가 '아빠와 크레파스'다. 노래 한 소절 끝에 나오는 '음 음' 이라는 후렴구가 처져 있는 내 마음을 살짝살짝 들어 올려 준다.
"밤새 꿈나라엔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음 음)"
크레파스 통에 들어있던 크레파스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나뭇잎을 타며 노는 정경을 상상하면 이내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크레파스에 대한 기억들이 내 마음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도 그 즈음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몇 가지 소지품만으로도 그 집의 형편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운동화와 고무신, 보온밥통과 양은 도시락, 책가방과 책보, 크레파스와 크레용 등.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서 미술 시간에 36색 크레파스를 펼쳐놓고, 점심시간마다 보온밥통을 꺼내는 아이라면 틀림없이 부잣집 아이였다.
다른 것은 그다지 부럽지 않았는데, 36색 왕자크레파스만큼은 욕심이 났다. 이층 양옥집처럼 위 아래층에 색색의 크레파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는데다 금색, 은색도 들어 있었으며 크레파스 통 위에는 금빛 왕관을 쓴 왕자님이 언제나 웃고 계셨다.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것에 대한 갈망을 더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이 셋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는 크레파스가 한 통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단층 슬래브 집을 닮은, 옆으로 한 줄에 그치는 20색 크레파스였다. 불평을 해 대는 우리들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셋이 돌아가면서 쓰라고, 학용품도 아껴 써 버릇해야 나중에 잘 산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어머니의 말이 맞는지 두고 보자. 시집가서 내가 못 살기만 해 봐라.'하고. 서로 미술 시간이 겹치는 날이나, 크레파스를 받으러 갔으나 못 만나는 날은 정말 막막했다. 지금도 '크레파스'하면 황급히 교실 복도를 뛰어가는 내 모습부터 생각난다.
크레파스로 그리는 그림이 좋았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물감이 엉뚱한 곳으로 번지거나 붓을 잡은 손에 힘 조절하기가 힘든 수채화에 비해, 크레파스 그림은 나를 재촉하지 않으면서 도화지 크기 백배쯤은 자유를 주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멈추고 드러눕는 크레파스야말로 확실한 내 편이었다. 나는 풍경보다 사람을 즐겨 그렸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면서도 쉽게 섞이지 못하는 내 마음을 크레파스는 착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크레파스는 자신의 색 위에 다른 색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낸다. 보라가 없을 때는 빨강과 파랑이 마니나 걱정을 나누고, 초록이 없으면 노랑과 파랑이 서로 힘을 합친다. 노력을 하면 20색 크레파스만 갖고도 색상이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나에게 보여 주었다. 어쩌다 물컵을 엎질렀을 때에도 크레파스 그림은 물기를 툭툭 털어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더러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마음까지 푹 젖어선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다.
미술 시간을 마치고 크레파스를 제자리에 정리하는 시간도 좋았다. 열심히 뛰어다닌 크레파스의 몸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낄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 머리에 다른 색을 잔뜩 뒤집어 쓴 크레파스는, 때 묻은 점퍼를 입고 귀가하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헀다. 약주 기운이 있는 아버지를 부축해 이부자리에 눕혀 드리고 나면, 아버지는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드셨다. 크레파스들도 그렇게 달게 한숨 잘 것 같았다. 나란히 누운 크레파스 위로 하얀 종이를 덮어 주고 크레파스 뚜껑을 닫아 주는 순간의 고요함이 나는 좋았다.
그 무렵 우리 집 식구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잤다. 누운 모습이 한 통의 크레파스였다. 우리 육남매의 색도 제각각이었다. 언니는 우리들의 밑그림을 그려 주는 노랑이었던 것 같다. 밑그림이란 표현하고 싶은 형사이의 바깥 선을 그려 주면서 전체적인 구도를 잡아 주지만, 그림이 완성된 후엔 짙은 색에 묻혀 버린다. 그렇다고 그 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도 그 노랑 선은, 우리들 마음이 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언니에 비하면, 나는 아마 연두와 초록이었지 싶다. 새잎을 내고 다시 무성한 잎으로 키우기 위해 우리 집의 녹색 계열을 다 끌어다 썼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떤 색이었을까. 자신의 색을 버린 채 그저 자식의 바탕색으로만 한 평생 살아오신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자주 내 눈에 차오르는 눈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눈물과 같은 색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제는 사물함을 정리하다 아들의 이름이 적힌 크레파스를 발견했다. 두꺼운 책 밑에 놓여 있는 바람에 통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얼른 크레파스를 꺼내 들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장 선배가 사사건건 시비조에다 노골적인 구박을 해 댄다는 아들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아들의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들이 이 크레파스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몇 개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몇 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이 보였으며, 나머지 것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크레파스를 싼 종이가 찢어진 것, 종이가 아예 벗겨진 것, 두 동강이 난 것, 너무 닳아버려 이젠 손에 쥘 수도 없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같은 통에 들어 있었다.
크레파스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색을 갖고 태어난다.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절대 똑같을 수는 없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색이 가장 좋다고 우기면서 살아온 게 아닐까. 다른 색의 크레파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흉보거나 업신여긴 적도 많았던 것 같다. 혹시 아들이 나를 그대로 닮은 것은 아닌지.
아들도 크레파스처럼 제 몸에 닳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른 색과 잘 어우러지면서, 세상이라는 도화지 위를 열심히 뛰어다녔으면 한다. 부디 크레파스 병정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