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이문호칼럼-29
晩秋의 남한산성, 丙子胡亂의 현장에서 한남cbmc 추계 초청행사
2010년도 한남cbmc 추계초청행사는 잠시 한때였지만 비바람이 몰아친 스산한 晩秋의 山城 풍경, 西門밖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잠실 송파 벌판에 10만 淸兵이 우글거리던 幻影, 혼자였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외롭지 않으셨을 한경직 목사님의 마지막 나날에 대한 경외의 심정, 입맛 돋우는 山菜 저녁, 행여 쌓인 낙엽에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내려온 굽이굽이 밤길, 주승중 목사님의 주옥같은 말씀, 이혜숙 사모님의 아름다운 찬양이 어우러져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빅이벤트였다.
11월11일 2시부터 6시 반까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영락여자신학교와 인근 식당 백송에서 회원 34명, 초청인사 12명 등 46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행사는 쌀쌀한 날씨 때문에 김성수 총무가 준비한 비옷까지 챙겨 입은 일행이 한경직 목사님이 소천하시기까지 거처하시던 곳을 찾아 잠시 그분의 깨끗한 일생을 회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어 西門과 수어장대를 돌아보고 신학교에 내려와 정유근 부회장 사회로 본격적인 초청행사를 진행.
“슬픈 역사를 지닌 산성에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는 이영기 회장의 인사가 있었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강광식 직전 회장의 기도...이혜숙 사모의 특송(드디어 잘츠에서 갈고 닦은 소리가 산성에 울려퍼졌는데 몇몇 사람은 나중의 아멘이 언제 끝나는지, 그래서 박수를 언제 쳐야 되는지 몰라 당황하기도)...이어 주승중 목사님의 요한복음 4:5-10 “목마른 한 여인의 이야기” 말씀으로 이어졌다.
주 목사님은 “무한한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허전해 하고 끝없이 목마른 인생을 힘들게 살다 끝내는 허무한 종말을 고하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설파하시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채워지지 않고 마음도 평안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해피엔딩하는 삶을 살자”고 강조...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 뜨끔했는데 언제나처럼 시의적절하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어 초청자 소개와 선물 증정(신용식, 김신영 두 분이 기증)...주승중, 이혜숙 특송(본인들이 열화 같은 앵콜을 묵살했지만 안 들었으면 큰일 날뻔한 명창)...주기도문으로 행사를 끝내고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식당 백송으로 이동. 맛있는 산채와 함께 저녁을 포식한 회원들 일부는 강광식 직전 회장님 따님의 연주회를 보러, 부득이한 일로 불참한 분들은 집으로 향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이영기 회장, 김성수 총무, 이준호 회계 등 임역원 여러분 수고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좋음 말씀 전해주시는 주승중 목사님, 우리 귀를 즐겁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이혜숙 사모님, 피아노 반주해주신 최현정 선생님, 초청에 응해 주신 분들, 찬조해 주신 분들...두루두루 감사합니다.
그리고 화난 여자는 환한 여자로, 따지는 여자는 따뜻한 여자로, 잔소리하는 여자는 잔심부름 잘하는 여자로, 착각하는 여자는 자각하는 여자로, 답답한 여자는 답을 아는 여자로, 빚이 많은 여자는 빛을 발하는 여자로...한남 cbmc 여성 회원님들 모두 ‘어느 날 변한 여자’가 됩시다...공연한 얘기했더니 사방에서 “너나 잘 하세요” 소리 진동하는지 귀가 간지럽네요. 그러나 제 얘기가 아닙니다요. 목사님 말씀이지...
남성 회원님들도 큰소리만 치시지 말고 큰돈 좀 가져다주는 남자, 쪼잔하지 않고 대범한 남자, 한눈팔지 않는 남자,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남자, 시시콜콜 참견하지 않는 남자로 변합시다요. 그런 게 안 되면 몸으로라도 때우시고 그조차 안 되면 넙죽 엎드리시거나 매일 뒈지게 혼나시거나...(끝)
.................................
南漢山城
저는 남한산성 西門밖 전망대에서 옛날 삼전 나룻터, 淸태종의 10만 대군이 포진했던 벌판을 내려다보며 역사 전공한 전문가도 아닌 처지에 그동안 사방에서 틈틈이 주워들은 風月을 읊었습니다만 귀중한 시간을 마냥 끌 수도 없고 해서 짧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왕 남한산성까지 올랐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한 번 읽어두시는 것도 좋을 듯싶어 다음 애기들을 정리해 붙입니다.
남한산성은 원래 삼국시대부터의 안보 요충지. 임진왜란 이후 여진족이 일어나면서 북방 정세 험악해지자 정묘호란 몇 년 전부터(인조 2년 1624년) 유사시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로 피란할 경우에 대비하여 8km 성곽을 축성하고 守禦장대와 행궁 등을 지었음. 수어청을 설치해 군사를 주둔시키고 식량 비축을 시작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당하기 전에는 뭘 모르는 벼슬아치들이고 백성들이라 모든 게 不實.
西門밖 전망대에서 잠실 송파 쪽을 내려다보며 375년 전 겨울의 스산한 광경을 그려보았지만 남한산성은 10만 대군에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산성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한달반을 농성하다 결국 한 나라의 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치욕의 현장. 서울에서도 승용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사철 아무 때 손자손녀들과 올라와 西門에서 각자 자기 아파트 찾아보며 역사와 현실 얘기를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일 듯합니다.
청군은 항복 빨리 하라고 대포 공격을 퍼부었는데 홍이포란 이름의 대포는 원래 명나라가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것. 명군이 북경 밖 산해관에서 사용했고 청나라 태조인 누루하치가 그 파편에 맞아 결국 죽었다고 함. 밤낮 가리지 않고 쏘아대 행궁 마당에도 떨어지고 성벽 여러 곳이 무너지고...청군은 산성 동쪽의 망월봉 아래에 항복을 권유하는 招降 두 글자를 쓴 흰 기를 꽂아놓았고 산성 동쪽의 汗峰에 올라가 홍이포를 쏴댔다.
청군도 추위에 야영하면서 얼어 죽는 군졸과 말이 속출하는 등 죽을 고생을 했는데 몇 차례 공격도 했으나 가파르고 성벽이 높아 번번이 실패. 그동안 경기도 군사 1만여명이 산성 잠입에 성공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에 조선군 사기는 좀 올랐으나 사람이 늘어나면서 식량난은 가중되었다고.
청태종은 “살고 싶으면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싸우고 싶거든 빨리 나와 한바탕 붙어 결판을 내자”는 편지를 보내 인조의 심사를 괴롭혔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군사가 지금 수지의 광교산에서 잠간 승리하고 함경도 군사가 청군을 조금 괴롭힌 전투도 있지만 양군이 많은 병력을 동원해 맞붙는 전면적인 전투는 없었다. 청나라도 명나라 공략 때문에 배후근심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항복받고 끝냈으니 망정이지 몽고나 왜놈들처럼 아예 점령하고 남쪽까지 내려갔다면 피해가 막심했을 것인데 항복 받고 두 달 만에 철군한 건 그나마 다행.
삼전도 항복식
1월30일 아침 임금은 곤룡포 대신 푸른 남색 옷을 입고 백마 타고 서문을 거쳐 내려가. 의장병 없이 승지 등 15명, 시종 50여명만 수행. 산 아래에 내려가 거적 깔고 앉아있으니 청 기병 수백명이 달려와 호위해 데려가...仁祖가 三田度에서 降伏할 때 淸 太宗에게 보인 禮는 三跪九叩頭 라고 하는 것으로 세 번 무릎을 꿇고 한번 꿇을 때 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콩콩콩 찟는 것...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靑衣를 입고 서문을 나갈 때 성안에는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며 청태종 홍타이시는 삼전도에 9층으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황금 걸상에 앉고 키가 큰 군사 수만명이 도열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
임금이 100보 정도 걸어 들어가 뜰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려 할 때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자 임금은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하며 사양. 3궤9고두의 예를 행하고 단에 올라 西向하여 좌정. 南向하여 앉은 태종이 술과 안주 베풀어 놓고 軍樂 연주. 연회가 끝날 때 태종이 모피 옷 두 벌을 내리자 그 중 한 벌을 입고 뜰에서 3번 절하여 사례했는데 태종의 허락을 받고 그날 동대문을 거쳐 밤 10시 쯤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46일만의 환궁이다. 한양 거리에는 시신이 즐비하고...포로가 된 양반집 부인이나 처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옷을 뒤집어쓰고...집들은 약탈당하고 불타고...도성은 그야말로 目不忍見의 참상이었다.
삼전도비
전쟁 끝난 후 청이 요구하여 대청황제공덕비를 만들어 세웠다. 지금도 석천호수 옆 송파구 삼전동 민가 사이에 존재하는데 몽골, 여진, 한문 등 3 문자로 쓰여있다. 당시 치욕적인 비문을 짓지 않으려고 선비들이 서로 회피했다고 한다.
삼학사와 60만 조선인질의 혼백은 어디에...환향녀의 비극
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을 일컷는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척화의 수괴'로 지목된 이들은 심양에 끌려와 청조의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청군들은 포로를 잡으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포로 사냥에 혈안이 되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갔다. 기록에 의하면 포로가 60만명이라고 돼 있는데 청은 포로가 돈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明을 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많은 병력과 노동력이 필요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향 땅에 돌아온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며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는 조선의 남성 중심 문화 앞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는데 오늘날 화냥년이란 말은 당시의 환향녀가 변한 것.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면
당시 民心은 척화파와 선비는 물론 백성들도 反淸, 親明, 오랑캐와 一戰不辭 요구...사태 파악 못하고 큰소리만 치는 척화파들...현실과 괴리된 명분론에 밀려 화 자초한 어리석은 군주...愚衆이랄까 어리석은 백성, 포퓰리즘, 리더십의 문제 등은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세계 역사를 볼 때 알렉산더와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 최고 권력자에 의한 親征 사례도 많고 우리만 해도 隨양제, 唐태종이 고구려 영토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패주했고 오직 淸태종만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우리 역사상 초유의 임금 항복을 받아낸 유례없는 침략자이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직접 항복 받는 꿈을 꾸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서도 북한을 두둔하는 좌파들은 對北 응징론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明淸이 교체되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인식한 병자호란 당시의 주화파가 아니라 히틀러에게 양보하다 2차 대전의 참화를 자초한 챔버린 같은 유화론자이자 무조건 북한을 감싸려는 종북, 친북주의자일 뿐이다.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임진왜란 일어나자 그해 9월 누루하치가 구원병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조선이 “아무리 급하다고 어떻게 감히 오랑캐 군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며 사절. 당시는 임진왜란, 명군 파병, 청나라 대두 등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때...명은 우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청은 “우리는 원래 조상이 같은 한 통속인데 왜 조선이 漢族인 명나라를 돕느냐”고 견제....양쪽 꼽새가 된 우리는 대단한 난국인데도 임진왜란의 은인인 명나라에 충성해야지 오랑캐 상대할 수 없다는 친명주의자들이 득세.
광해군이 그나마 양면외교, 실리외교, 중립외교로 난국을 돌파했으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인조반정)는 친명주의로 회귀...광해군은 명나라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어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군대를 파병하면서 “형세 보아 유리한 쪽에 붙어라. 명군이 이기면 열심히 싸우고 청군이 이기면 청군에 항복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고 강홍립군은 결국 청군에 항복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퇴위한 광해군 부자는 강화도, 제주도를 전전하며 유배 살다 천수를 마쳤다.
평소 누루하치는 “명나라만 무찌르면 조선은 주머니에 든 물건이다”고 했고 인조는 “누루하치는 오랑캐 작은 도적일 뿐, 우리나라에 어찌 그깟 도적놈 하나 막을 사람이 없겠느냐”고 큰 소리를 쳤다.
1627년 1월(인조 5년) 정묘호란 발발...“두 나라는 본디 원수 진 일이 없는데 조선이 아무 까닭도 없이 명을 도와 우리를 공격했다. 태조인 누루하치가 죽고 태종이 즉위했는데도 조선에서는 한 사람도 조문하거나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며 4만명이 내침...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했으나 결국 ‘형제지국’ 맹세하고 철군.
그 후 홍타이시가 나라 이름을 淸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자 조선에서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다”며 형제관계를 단절. 청이 君臣의 예를 요구했으나 척화파가 우세한 조정에서는 거부, 항전 의지를 피력.
1636년 4월 조선은 태종의 황제 즉위식에 일단 사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외국 사신 중 유일하게 절을 하지 않는 등 좀처럼 황제의 나라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두 사신이 우리는 형제의 나라, 君臣관계가 아닌데 어찌 절을 한단 말인가고 절하기를 거부...비현실적이지만 기개는 대단...태종이 죽이지 않고 풀어줘...국내에서는 김상헌 등 척화파가 일전불사론을 주장...1636년 내내 척화파, 주화파 대립하는 통에 인조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뭐 하나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조선은 오로지 명나라 하나만을 섬겨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매달린 채 세월 보내면서 전쟁을 자초한 꼴.
청나라 태종은 조선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기를 요구했으나 불응하자 “명을 멸망시키기 전에 조선의 죄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親征을 선언...12월2일 팔기군 13만명이 심양을 출발...병자호란은 임진왜란 끝난 지(1592-1598) 38년 만에 발생한 참화.
조선은 평안도 곳곳에 산성을 쌓고 지켰으나 침입 전 태종은 편지를 보내 “너희 나라가 산성을 많이 쌓았으나 내 당당히 대로를 따라 갈 것이니 산성으로 나를 막을 수 있느냐. 너희 나라가 강화도를 믿는 모양인데 내가 조선팔도를 짓밟을 때에 조그만 섬을 가지고 임금 노릇 하고 싶으냐. 너희 나라의 의논을 짐작하건대 모두가 선비이니 붓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청은 곳곳의 산성을 무시하고 내달려, 전광석화로 한양을 점령해 항복 받아내는 게 목표.
1636년 12월8일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남으로 질주...12월14일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고 남대문을 나섰으나 청병에 길이 끊겨 다시 들어왔다가 광희문을 통해 송파구 방이동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피난...남한산성에 병사 14,000명, 벼슬아치와 노비, 가족 등 1300명 등이 들어왔는데 식량은 한달치 뿐...청병은 압록강 넘은 지 일주일 만에 한양을 무혈점령하고
1637년 1월30일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을 때까지 10만 명이 한달반 동안 산성을 완전 포위했다.
그믐에 홍타이시가 4만명을 인솔하고 도착하는 등 적병은 계속 늘어나 온 들판이 청병 일색인데 구원병은 오지 않고 상하 모두 戰意를 상실...1637년 설날 태종이 동쪽 산에 올라와 성안을 내려다 봐...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됐고 1월23일 병사들이 척화파 신하들을 내놓으라고 데모(당시 청병은 척화파들을 내놓고 임금이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등 반란이라도 일으킬 듯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정.
1월30일 삼전도에서 항복식을 마치고 2월2일 태종은 전체 군대를 이끌고 철수 시작했는데 조선군 장수들은 척화를 주장한 문인들을 마치 종놈이나 하인처럼 대했다. 말만 앞세운 문인들이 척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기세 등등한 무인들 때문에 문인들은 벌벌 떨었다. 1644년 3월 明나라가 멸망함으로서 동북아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세상이 됐다.
이상 그동안 제가 여러 책들을 보면서 대충 줄거리를 정리한 내용입니다...제가 언젠가 남한산성 가던 버스 속에서 어느 커플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는데요...남편이 남한산성은 선조 때 얘기다고 하고 부인은 아냐, 인조 때 일어난 얘기야 하면서 다투더라고요...우째 이런 일이 ! 과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또 다시 화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알고 제대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끝)
첫댓글 이문호 사장님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5시에 본 행사한다고 하여 업무보다 말고 과속해서 도착하니 아쉽게도 행사가 끝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강광식 전회장님 따님의 피아노 연주회도 보는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