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3. 중국 전래…格義불교 시대
불교에 유교와 도교 색채 입혀 이질감 해소
외래사유가 토착사유와 만나는 과정서 ‘필연적 현상’
오온→오행, 진여→본무 등 타종교 개념 빌려 역술
소승-대승 전래 때 도교수련-현학 유행 자연스레 수용
도안스님 ‘원전 의미 상실’ 폐단지적…격의불교 마감
불교는 실크로드의 개통과 더불어 서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는데 첫 전래는 전한 후기(기원전 1세기)이지만, 본격적인 전래는 후한 초(기원후 1세기) 서역정벌 성공으로 실크로드가 안정적인 교역로로서 기능하게 된 이후에 이루어졌다.
낙양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사찰이다. 중국에 처음 불교를 전한 섭마등.축법란스님이 〈사십이장경〉 등 경전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와 백마사란 이름 붙였다고 한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처음 전래기로부터 구마라집(343?~413)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시기 이전까지의 약 300년간을 ‘격의(格義)불교’의 시대라 칭하곤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면모들이 격의불교의 측면에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격의 자체를 가볍게 비하하거나 부정하는 입장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격의의 불교를 통해서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불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격의’에서 ‘격’은 대비하여 대응 원용(援用)한다는 뜻이고, ‘의’는 곧 글의 뜻이다. 불교의 교의와 용어를 해설하면서 이와 비슷한 중국 세전상(世典上)의 사상 철리(哲理)를 대비하고 원용하면서 이해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격의’란 서진시기의 용례에 의하면 불전을 학습하는 문도 가운데 중국 전래의 세전(世典)에는 통달하고 있으나 아직 불교의 교리에는 밝지 못한 이들을 훈도하는 방법으로 통용하던 것이었다(〈고승전〉 권3 축법아 전).
격의란 실은 토착의 사유 관념과 외래의 사유 관념이 만나는 과정에서 초기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현상이다. 토착인의 사유와 지식의 개념들에 의지하여 외래의 신 사유체계를 해설한다는 것은 효율적이면서 또한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였다.
안세고(Parthia 안식국인, 148년부터 20여년간 역경)는 불경의 본격적인 번역의 시대를 연 분이다. 그는 ‘원기’와 ‘오행’의 용어로 ‘오온(五蘊)’을 번역하였고, 도교의 ‘비상’ ‘비신’ 등의 개념을 빌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용어를 역술(譯述)하였다.
강승회(康僧會, ?~280)는 유가의 경전에도 정통하였는데 “유전(儒典)의 격언이 곧 불교의 명훈이다”는 입장에서 유가 경전을 차용하여 불교의 교의를 해석하는 전법의 방식을 취하였다. 유가의 인정(仁政)과 불교의 자비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를 격의의 방법으로 번역 해설하였고, 불교의 고사(故事)에 유교의 색채를 입혀서 소개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이질감을 해소시켜 불교가 중국사회에 널리 수용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반야경〉 계통의 대승경전을 처음 역경하기 시작한 지루가참(大月氏人. 178~189 譯經)은 도가의 ‘본무(本無)’개념과 용어를 빌려 ‘진여’를 번역하였다.
그런데 격의란 넓게 보면 받아들이는 측에서 자신들이 지녀온 사유와 개념에 의해 외래의 것을 동류화하여 수용해버리는 현상도 해당된다. 이를테면 전래 초기에 아직 불경의 번역 소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에는 불교가 당시 중국 저변에 유행하던 향로(黃老)의 제사나 그 사상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후한 후기 들어 안세고가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번역하여 소승불교의 선법을 소개하자 이를 도교의 수일이나 수원기, 토고납신(吐故納新)의 기공술과 동류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선법은 대.소승을 막론하고 해(解)를 통한 관행이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양자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지루가참과 지겸(支謙, 大月氏人. 222~253 역경) 등에 의해 반야경 등 대승의 여러 경전과 선법이 번역돼 소개되자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현학(玄學)의 귀무론, 무위, 임자연, 청허(淸虛) 사상의 류로 이해했다.
역경승들이 이 용어들을 채택해 사용했기 때문에 후대에 이르기까지 혼용과 혼동의 문제를 초래했다. 대승 반야사상과 현학은 사실 다른 것이지만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한편 역경승들은 당시 중국인들이 쓰고 있던 현학상의 용어들을 의용함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불교 전래기의 중국이 외래의 불교를 일단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사한 사유와 개념의 체계를 지닌 사회였다는 것이 불교의 중국 전래 성공에 무척 중요하게 기능하였다. 특히 소승 선법 전래시에 마침 중국에 유사한 성격의 도교 수련법이 유행하고 있었다. 대승 반야사상의 전래기에 마침 유학의 진부한 예교주의가 배척되고, 초세속주의의 공통성을 지니며 깊은 철리를 논하는 현학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러한 측면들은 이질의 사회에서 나온 불교가 중국사회에 크게 배척받지 아니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었던 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또한 양자가 다른 것을 구분 못하는 혼동의 사태를 야기하였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이루어졌다. 후한말 삼국기에 나온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은 유불도 삼교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명확히 해명하면서 불교를 변호하고 있다.
격의불교 시기에 활동한 포교사들은 역경사업에서 뿐 아니라 실로 다방면에 걸쳐 불교의 전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중국 사회 저변에서는 부주(符), 치병, 점성, 양재(禳災. 재앙을 물리침), 기복, 길흉예언 등을 위한 도술이 널리 유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교사들은 그러한 도술에 부회(附會)하여 그러한 류의 술법을 자주 겸용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외래 포교사들이 신이의 행적을 보인 바 있다.
안세고는 풍기(風氣)로 길흉을 알고, 지진을 예측하였으며, 침맥(針脈)의 술을 쓰거나 얼굴을 보고 병을 치료하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안반수의경 서 ‘출삼장기집’ 권6). 특히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란기에 불교를 국가의 힘으로 보호 장려하게 하는데 결정적 공훈을 세운 불도징(佛圖澄. 232~348))의 긴 전기(고승전 권9)는 거의 모두 그의 신이한 사적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중국에 와서 행화한지 38년 동안에 900에 가까운 사찰을 짓고, 1만에 이르는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가운데 걸출한 대표 제자인 도안.축법수.축법태.축법아.승낭.법화.법상 등은 스승을 이어 북조와 남조가 곧바로 불교국가 불교사회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신이의 법술을 통해 법을 펴는 것이 불교의 본령은 아니지만, 완강한 토착 신앙 내지 사상계의 반발과 거대한 정치 세력의 탄압을 해소하여 불교를 존숭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이를 펼쳐 보일 필요가 있었다.
불교가 차츰 중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가면서 유불도 삼교가 이제 정형(鼎形)을 이루는 형세가 되자 삼자 사이에 본격적인 우열과 동이론이 전개되었다. 남북조 초기에서부터 성행하게 된 이 논쟁을 ‘삼교논형(三敎論衡)’이라 칭한다. 승우의 〈홍명집〉과 도선의 〈광홍명집〉 〈고금불도논형〉 등에 수록된 이 장대한 논쟁의 기록들은 동양사상 사상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중국사회는 불교국가가 되고 있어 논쟁의 결과도 불교의 우세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당시 현학의 명사는 현학에 의거하여 불리(佛利)를 담론하고, 불교의 명승은 불리로써 현학을 담론하는 풍조가 보편화 하였다. 청담이 유행하던 남조의 동진~송대에는 스님들이 청담의 일류 명사로써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삼자가 논쟁을 통하여 상호 이해가 높아졌고, 나중에는 ‘삼교일치론’이 크게 부각되어 이후 중국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근현대 중국불교사회의 저변에 보이는 삼교의 습합으로 융합된 모습은 ‘삼교일치론’의 전개에 따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격의불교 시대를 마감하는 결실과 총결산의 업적은 도안(312~385)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격의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여 원전의 뜻을 잃게 한 다섯 가지 사항(五失本)을 제시하였다.
(1) 범어 원문에서 어느 문구를 강조하거나 음운을 조화시키기 위해 도치한 구절을 한문의 방식대로 번역한 것 (2) 중국인의 문(文, 修飾)을 좋아하는 기질에 영합하기 위해 질박한 원전에 수식을 가하여 번역한 것 (3) 범어 원문에 반복하여 간곡히 기술한 부분들을 번잡을 피하기 위해 삭제한 것 (4) 범어 원문은 말미 부분에 전편의 요의를 총결한 ‘의기’가 있었는데 이를 번역하지 아니하고 버린 것 (5) 원문에서는 전편의 내용을 다음 편의 서두에 요략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번역에서는 이를 버린 것.(출삼장기집 권8 ‘마하발라야바라밀다경초서’)
그러나 이 지적 가운데 격의로 인한 본의(本義)의 훼손이나 혼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도안도 아직 격의의 풍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일까. 아니면 격의로 원용된 자구들도 깊이 터득한 자리에서 본다면 본의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필자는 후자의 편을 들고 싶다.
위진(魏晉) 이래 반야학의 흥기와 함께 본무.즉색.식함.환화.심무.연회 등 육가칠종의 반야학이 나왔는데 이를 삼론이 아직 역출되지 않아 중관의 이해가 부족한 사정에서 나온 것으로 비평하기도 하지만 대승 반야의 의(義)에 이러한 육가의 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느 일면의 의에만 편집(偏執)하여 여타의 면을 회통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일 뿐이다. 이 가운데 도안은 ‘본무’의 종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본무는 반야의 의로서의 본무였지 현학의 그것은 아니었다.
도안은 역경의 쉽지 않은 점 세 가지(三不易)를 들었다. (1) 성인의 가르침은 현금의 세속에 따라 적절히 설파된 것인데 번역시에는 시기가 다르니 이것이 어렵다 (2) 1000년 이전에 설파된 깊은 뜻을 말속(末俗)의 세간인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기 어렵다 (3) 아라한이 모였어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것이 어려웠었는데 아직 해탈하지 못한 역경인이 불경의 원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당시 중국의 여러 사정과 포교승들이 당면하였던 역경(逆境)과 고난, 그리고 도안이 토로한 번역의 어려움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박건주/ 전남대 사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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