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이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 8:6)
아가서는 솔로몬이 사랑하는 신부 술람미 여인을 위해 쓴 연가이다. 역사상 정경성의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가 아가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가서에는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 그 이상의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언약적인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그 큰 사랑, 그리고 교회가 어떠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그려낸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어떠한 사랑의 감정과 연합의 정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끊을 수 없는 사랑 - 도장처럼 품고
아가서 8장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 무엇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다. 이 사랑을 아가서는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라고 말한다. 구약에서 도장은 팔찌처럼 팔에 끼거나 손에 끼는 반지와 같은 것이었고, 그 반지를 끈에 매달아 목에 걸기도 하였다. 아가서는 도장을 목에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아내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품 가까이에서 연합의 감정으로 살아가라고 노래한다.
구약성경에서 도장은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것은 작지만 자신의 전 재산과 같고 자신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연합하기를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며 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결정적인 만남은 아내와 남편의 만남이다. 그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용납하며,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짝지워 준 고귀한 형상으로 알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고갈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당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을 힘입어서 배우자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교회에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고 사는 것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끊을 수 없는 사랑 - 죽음과 같은 사랑
또한 아가서는 그 사랑이 죽음과 같다고 말한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여기에서 ‘질투’라고 번역된 단어는 ‘열애’, ‘열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또한 ‘스올’은 성경에 많은 곳에서 ‘음부’라고 번역된 단어이다. 스올은 사후 세계로 모든 생기가 사라지고 음울하며, 축축하고 칙칙한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한다. 그런데 스올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들어가도 가득 차지 않는 곳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곳이 아닌 하상 허기진 자처럼 입을 벌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받아내는 곳이다. 즉, 사랑은 죽음 같이 엄정하고 강한 것이며, 열애는 스올과 같아서 아무리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만족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언제나 사랑받는 사람 앞에 자신의 초라함을 느낀다.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에게 상처주고 고통스럽게 한 날들이 회상되며 상대방의 아픔이 마치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공감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은 강하고 스올은 무섭지만 사랑은 그것들보다 더 뛰어난 감정이다. 물에 빠진 아들을 보고 헤엄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물에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죽음의 공포를 이긴 것이다. 사랑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열애만이 스올을 무서워하지 않게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은 그 끝이 영원한 생명과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중심을 드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다. 그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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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에는 사랑에 대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Love is as strong as death)”(아가서 8:6). 이 범상치 않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깊이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저절로 떠오르게 됩니다. “왜 사랑을 죽음에 비유했을까?”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 과연 있을까?”
먼저“왜 사랑을 죽음에 비유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위력, 곧 사랑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큰 위력과 힘을 발휘하는 것 옆에 사랑을 갖다 놓고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은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려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호하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브리서 9:27)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인생들의 삶의 끝자락에 무지막지한 힘으로 버티고 서있는 이 죽음의 위력을 보기 좋게 끝장내버리는 더 강한 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죽음 앞에 무릎 꿇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절절매는 사랑은 웃기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한 것입니다. 아니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과연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 있을까?”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있다!”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들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는 말씀처럼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두려움에 벌벌 떠는 인생들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십자가의 사랑, 곧 죽음을 불사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곧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형틀에 내던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우리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생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하는 무지막지한 죽음의 힘을, 한순간 무용지물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사망의 그늘을 물러가게 하고, 무덤의 어두운 세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끝장내는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부활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친히 증명해 내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친히 보여 주신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믿으므로 그 분 안에 거하고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도 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이타적이 됩니다. 사랑하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중의 하나가 사랑인데, 이 사랑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것과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퍼주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웃으면, 자기도 웃습니다. 상대가 울면, 자기도 웁니다. 상대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 됩니다. 상대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됩니다. 자기를 잊고, 온전히 상대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신비로운 체험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지니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 사랑의 길을 갔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이 길을 갔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돌에 맞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숨을 거둡니다.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이신 주기철 목사님께서도 이 길을 갔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람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이 끝자락에 내 이름도 당당하게 올리고 싶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유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