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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실천한 국희종 선생
조동희
한국 무교회에서 김교신, 송두용, 박석현, 노평구 하면 어떤 분들인지 모르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국회종 하면 ‘이름은 들어보았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아, 『성서신애』지에 자주 글을 올렸던 분’ 정도로 기억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국희종 선생은 8․15 광복 후의 여명기에 의사가 되어서 봉사와 전도에 평생을 바치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선생을 ‘한국의 슈바이처’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무교회에서의 모임을 늦게 갖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생전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분이기에 이 분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선생 사후(死後)로 매년 한 권씩 다섯 권의 책이 나왔지만 이 분의 삶에 대해서는 제1권에서만 간헐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알고자 하는 분들을 위하여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선생이 걸어간 길을 박상익 교수의 카페에 올릴까 합니다.
1. 어린 시절에서 무교회 신앙을 만나기까지
국희종(鞠喜棕) 선생은 이 땅에 개화의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는 1926년에 전남 목포에서 여러 사람의 축복 속에 태어났습니다.
부친 국순홍(鞠淳弘) 선생은 1925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의 부란취병원에서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어머니 최명순(崔明順) 여사는 종가(宗家)이자 전통 유가(儒家)의 며느리로서, 양의가 귀한 시절에 의사의 아내로서 큰 살림을 이끌어가면서도 아홉 남매를 기독교인으로 자라게 한 여장부였습니다.
부란취병원은 미국 남(南)장로교의 선교 단체에서 설립했으며, 설립자금을 낸 분의 이름을 붙인-당시 목포 유일의 병원이었습니다. 병원에는 선교사, 의사, 간호사 등 상당수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직원들은 매일 아침 경건회(chapel)를 가졌고, 일요일이면 교파에서 세운 양동교회에 (의무적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순홍 선생도 주일마다 교회엘 나갔고, 어린 희종이 어느 정도 자란 후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희종 선생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기독교 신앙을 접하였으며, 그 후 신앙에서의 교회 생활은 해군 군의관 시절을 거쳐 여수 애양원 시절까지 계속되게 됩니다.
국희종 선생의 어린 시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유복하였습니다. 대종가의 장손이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아버지가 부란취병원에 근무하는 동안 병원의 사택에 살면서 직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개화기를 벗어나지 못한 시절에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신 문물과 예수를 만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행운이자 큰복이었습니다. 또한,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교회 유치원에 다니던 다섯 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80원짜리 풍금을 선물로 받았는데-쌀 한 가마니에 5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의 고급형 피아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악기일 것입니다. 그래서였던지 선생의 건반악기 연주력은 일찍부터 전문가 수준이었습니다.
더욱 큰 선물은 부모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린 희종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그 영향이었던지 선생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받기보다는 주길 좋아했고, 평생동안 드러내지 않고 없는 사람들에게 잘 베풀었습니다.
선생의 학창시절은 유치원과 보통학교를 마치고는 모두가 타향살이였습니다. 목포에서 단 한 곳뿐이었던 희성유치원과 목포제일보통학교를 마친 후 중학생활 5년은 경성(서울)에서, 의학전문학교 4년 가운데 1년 반은 함흥에서, 광복 후 삼팔선이 생김으로 해서 나머지 2년 반은 광주에서 보내게 됩니다.
1948년 6월 광주의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선생은 가족이 있는 목포로 내려가 아버지 밑에서 임상수련을 하는 한편, 목포여자중학교에서 수학과 화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어렸을 때 나가던 양동교회의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이 때에 선생은 평생을 예수께 의탁할 것을 결심합니다.
이후 1950년 6월 중순에 서울의과대학에서의 생화학 연구를 위하여 상경했던 선생은 육이오 동란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렵사리 귀향했다가 1․4 후퇴 뒤인 1951년 1월에 경남 동래군 장안면에서 진료반(정부에서 운영) 반장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2년 뒤에 해군 군의관으로 임관, 전방으로 배치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협정이 발효되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옮겨 근무하는 동안 피난민들이 세운 여좌동의 천막성결교회를 숙소로 정하고 종지기로 봉사하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 매달림으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때 해군병원에는 중상이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개 성격이 난폭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치료하는 의사라 할지라도 대들기가 일쑤였지만 선생은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서 상당수의 환자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일과 시간이 지나면 천막교회 인근을 돌면서 병이 있어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무료로 진료해 주었습니다.
이 후에도 전역할 때까지 파주, 포항 등지로 근무지가 바뀌었지만, 가는 곳마다 병사들을 교파를 가리지 않고 부대 인근의 교회로 인도했으며 주민들에게 의료봉사도 계속하였습니다. 매달 나오는 봉급은 입원 장병들의 복리비와 민간의료 봉사비용으로 쓰여져 주머니는 항상 비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생을 보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국 아무개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빈정대곤 했지만 선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군의관 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에게는 하나의 꿈이 생겨났습니다. ‘전역을 하게 되면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를 해야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8년도에 서울의 한 책방에서 한 권의 신앙잡지를 만나면서 꿈이 바뀌게 됩니다. 신학의 꿈 대신 독립전도를 하겠다는 꿈을 갖게 해준 책, 그 책은 일본의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선생의 『嘉信』지였습니다.
矢內原忠雄. 그 이름자를 보는 순간 선생의 뇌리에서는 중학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1940년 9월에 들었던 경성 YMCA 회관에서의 「학생과 기독교」, 「로마서」 강의가 생각난 것입니다. 몇몇 학우들과 함께 참가했던 그 강의에서 열변을 토하던 矢內原忠雄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의 정책에 대한 반전․반식민주의로 동경제국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된 矢內原忠雄 선생의 강의는 중학생 희종에게는 매우 인상이 깊어 그 이름이 가슴 한 구석에 깊이 새겨졌던 것입니다. 그런 이름을 18년이 지난 뒤 책방에서 보게 되니 선뜻 그 책을 집어들었고, 그 책으로 인해 꿈이 바꾸어지게 된 것입니다.
2. 의료 선교-무의촌을 찾아서
1959년 8월 31일. 이 날은 선생이 6년 반 동안의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날입니다. 집안에서는 이 날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목포에 계시던 아버지가 광주로 옮겨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를 도와 병원 운영을 맡든가, 아니면 도회지에 병원을 내고 결혼을 한다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앞길을 인도해 주소서’ 하는 간구 끝에 가족들의 염원과는 달리 여수에 있는 나병 환자촌인 애양원을 소개받고 그 곳으로 가게 됩니다.
여수 애양원은 육이오 동란 때에 손양원 목사가 “목자는 양떼를 버리지 않는다”는 가르침대로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공산군들에 의하여 순교한곳으로, 1959년 당시에는 환자 수가 무려 1,200 명이 넘었지만 진료해 줄 의사도 없이 선교사 한 사람이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의 신상기록이나 병형 분류, 진료기록들이 미비되어 있었습니다. 원 안에 의사가 오랫동안 없다 보니 체계적인 진료가 이루어지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 시절, 의사가 귀하기도 했지만 나병환자들을 진료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애양원에 부임하면서부터 틈틈이 미비한 부분들을 보완해 나갔고, 밤으로는 마을을 돌면서 환자들을 계몽도 하고, 전도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애양원은 서서히 진료 체계가 바로 서기 시작했고, 따라서 선생과 환자들 사이도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생을 그 곳에 오래 잡아두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이 애양원에 간 지 반년쯤 지났을 때 미국에 있는 애양원 후원 단체에서 젊은 의사를 보내오게 됩니다. 그 곳에서의 선생의 역할이 끝날 때가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선생은 새로 온 미국인 의사가 애양원 생활에 적응할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하나님께 앞길에 대한 간구를 하게 됩니다. ‘음성 나환자촌을 만들어 운영케 해 줍시사’ 하는 간구였습니다.
그 무렵, 한 통의 편지가 선생에게 날아듭니다. 광주에 있는 동부교회의 백영흠 목사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내용인 즉,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란 곳에 전남대학교 농대 임업과 교수였던 김준(金準)이란 사람이 교수직을 버리고 뜻을 같이하는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김준 씨는 그리스도 신앙에 힘쓰는 사람으로 육이오 동란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에서 몇몇 분들과 함께 헐벗은 산들에의 조림과 농촌 계몽활동, 선교활동들을 하고 있는데-그 곳이 마침 무의촌 지역이니 그들과 함께 일을 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준 교수는 영광 군남 출생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매우 두터운 분이자 신앙 공동체를 꿈꾸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 특히 농촌이 못사는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반이 더 되었기 때문에 농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가난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톨의 밀알이 되고자 명예를 버리고 산간 오지로 들어가 농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음성 나환자촌을 세워달라는 간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김준 교수를 만난 후 복흥 지역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음성나환자촌 건립이라는 꿈을 접고 농촌에서 의료선교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복흥 지역은 평지의 고도가 평균 삼백 미터쯤 되는 곳으로 사방이 내장산, 추월산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 분지입니다. 때문에 여순 사태 훨씬 전부터 좌우간 충돌이 심했고, 휴전협정이 발효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총성이 멎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토벌작전이 끝날 때까지 좌와 우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습니다. 집들은 토벌작전 때에 모두 불태워져서 얼기설기 얽어놓은 움막들이 대부분이었고, 의복들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영양실조에 걸려 얼굴들이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문화 시설은 말할 것 없고, 교회도 김준 교수가 이끄는 집회소가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선생은 나환자촌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무의촌 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겠구나 생각하고 그 일을 복흥에서 시작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60년 9월8일. 선생은 드디어 복흥에 닻을 내리고 의료선교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첫댓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 선생님은 장기려 박사님과 비슷한 점이 참 많은 분 같습니다.
순창군 복흥면에서 무교회 여름집회를 여러 차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국희종 선생의 전도 중심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