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이스라엘, 여수룬
이사야 44:1~2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하면서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고 낙망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좌절감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금 용기와 소망을 갖도록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도 동일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해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대하여 세 가지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주시며 자기의 신실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처음에 언급된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야곱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 이름은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형 에서와 어머니 리브가 뱃속에 있을 때에 형과 늘 다투더니 출산할 때에도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하다가 힘에 밀려서 결국 형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나왔습니다. 늘 경쟁의식이 있고 형 에서가 장자권을 가진 것을 시기하면서 탐내어 팥죽을 끓여 배고픈 형에게서 기어코 장자권을 자기에게 넘기도록 맹세까지 해서 빼앗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형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였을 때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받아들이고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라고 자기를 속인 채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고 차분하게 기도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늘 인간적인 욕심과 수완을 발동해서 자기의 욕심을 이루려고 했던 야곱은 그 결과로 형에게 미움을 사서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살 수 없게 되어 결국 홀로 도망치듯 외갓집으로 갑니다. 거기서 그는 부모의 바람을 따라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둘째 라헬을 아내로 삼고자 했으나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큰 딸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14년 동안 한푼 받지 못한 채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외삼촌이나 장인인 라반으로부터 일하면서 열 번이나 품삯을 속여 한푼도 벌지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는 그가 남을 속인 대가로 속이는 일을 배나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삶을 야곱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점점 알게 되고 자기의 수완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이 살아 있고 인간적인 애정에 의하여 움직이는 인간적인 모습의 주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주님을 믿는 백성들 중에서 야곱과 같은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이나 행동에서는 세상 냄새가 많이 나고 인간의 기질이 아무 많이 배여 있는 사람입니다. 욕심과 야망과 인간적인 애정에 이끌려서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면서 때로는 욕망을 이루려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꾀도 부리지만 그런 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행한 대로 거두어 쓰라린 실패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 같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나의 종 야곱”이라고 거듭 거듭 불러 주십니다. 죄도 많고 실수도 많고 욕심도 많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조차 때로는 이용해먹는 자입니다. 그래서 삶이 엉망이 되고 인생이 갈짓자처럼 이리 저리 방향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를 붙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여전히 섭리 속에서 다루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 같은 우리들을 여전히 자기의 종이라고 부르시니,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이름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외삼촌댁 밧단아람에서 이십년을 지난 후에 외삼촌을 피하여 도망쳐 나온 후에 요단강의 지료인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에 밤을 새며 기도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입니다. 형 에서가 사백 명의 무장한 종들을 이끌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온다는 소식을 자기 종들로부터 전해 듣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끼고 얍복강을 건너지 못한 채 홀로 남아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 있을 때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달려들어 씨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 천사라고도 호세아서는 말씀하고 있지만 야곱이 이름을 물어도 알려주지도 않고 그가 후에 그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을 보면, 그 밤에 함께 새벽녘까지 씨름하신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님은 과거에도 두 천사와 더불어 아브라함에게도 종종 나타나셨던 여호와이시기에 우리 주님께서 육신을 입기 이전에 이 땅에 자기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 씨름이 끝나고 축복해달라고 매달리는 야곱에게 주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고 “야곱이니이다”라는 대답을 듣자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었음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고귀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이제 야곱은 성숙해졌습니다. 잔꾀를 쓰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문제와 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고난 중에도 낮아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긴 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세상의 많은 시련과 원수들과 믿음과 기도로 맞서 싸워 이기고, 고난 중에 인내함으로 이겨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야곱처럼 고난 속에 점점 우리 자신이 깨어집니다. 부서집니다. 자기 신뢰가 박살이 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잔꾀를 쓰지 않습니다. 자기의 연약과 한계를 처절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문제만 생기면 무조건 하나님 앞에 덜퍽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절대 못보내드린다고 하면서 눈물로 끝까지 매달려서 기어코 응답을 받아냅니다. 그래서 브니엘의 새벽에 죽일 기세로 달려오던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보자마자 마음이 돌변하여 눈물이 쏟아지고 동생이 불쌍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끌어안고 동생을 품고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변화가 있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회개하면서, 순종하면서 인생의 순례길을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의 이름처럼 그렇게 점점 이기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짐으로써, 엎드림으로, 포기함으로, 항복함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찾아와 놀랍게 일하심으로 점점 이기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이름이 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수룬입니다. 여수룬의 이름은 신명기 32:15, 33:5,26에 사용되고 여기 본문 말씀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네 군데의 구절에서만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야사르’ 곧 올곧다는 의미의 단어에서 나왔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캘빈 선생이나 다른 학자들은 이 단어를 ‘사랑하는 자’라고 해석합니다. 즉 여수룬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극히 사랑스러워서 부르는 애칭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스러운 자기 자녀가 컸는데도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우리 아가’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러한 애정이 듬뿍 담긴 말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고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무한한 애정을 가진 부모처럼 사랑하심을 보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하나님의 ‘여수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각별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시내산에서 친히 보여주시고 율법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법도를 알려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그 성막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강림하셔서 그들과 함께 광야를 함께 다니시며 수많은 잘못도 범하지만 늘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약속의 땅을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선물로 주시어 기업으로 누리게 하시는 크나큰 복을 받는 백성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민족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그와 같은 거룩한 선지자들을 가진 백성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스라엘 각 지파들을 축복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여수룬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담긴 이름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직전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이스라엘 각 지파를 축복하면서 부른 아름다운 호칭 여수룬은 분명 만민 중에서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품 안을 처소로 삼고 그의 영원하신 팔로 감싸서 보호받으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원수들로부터 철저히 보호받고 높임받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백성을 두고 한 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여수룬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육백년, 칠백년 후인 이사야 선지자가 다시금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다시 언급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부르는 하나님 백성은 어떤 상태입니까 하도 죄 짐으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히며 완고하여 결국 바베론에 끌려가는 처참한 상태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아무런 희망이 없고 다시는 일어날 기약도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내가 택한 여수룬아”라고 불러주시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타이밍(timing)입니까?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2절에 이르기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 지어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으니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어와 둥둥 내 사랑, 내 아기”라고 부르면서 사랑으로 기르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여기서 여수룬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바벨론에 끌려가서 온갖 설움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그 때에 이스라엘이 절망과 낙심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여전히 내 아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4절 말씀이 이 여수룬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 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이사야 49:14~18)
그렇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지금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고난과 시련 속에 슬퍼하며 낙심하고 있을 때에 주신 이 위로와 소망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야곱처럼 인간적인 연약함이 많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자기 종이라고 여전히 인정해주십니다. 고난 중에 우리들은 점점 승리하여 주님의 백성으로 성장하여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 세워주셔서 인격적으로나 삶의 고난과 맞서 승리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내 아가야”라고 하시면서 사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그분은 직접 낳았고 품에 기르신 엄마와 같은 분이시기에 자기 뱃속에서 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품에 안고 끝까지 붙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 중에라도 일어나십시오. 죄 중에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이요 동행하여 주실 것이요 이기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통하여 끝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