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교황(Pope / Pontiff)
군주보다 강력했던 권력… 파문당한 황제는 사흘간 무릎 꿇었죠
교황(Pope / Pontiff)
정세정 옥길새길중학교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입력 2025.03.05. 00:51 조선일보
지난달 21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탑인 오벨리스크에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이 띄워져 있는 모습. 세계 곳곳에서 교황의 쾌유를 기도하고 있어요. /로이터 연합뉴스
올해 89세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폐렴으로 오래 입원하자 세계 곳곳에서 교황의 건강을 바라는 기도가 이어지고 있어요. 교황의 모국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도시 상징탑인 오벨리스크에 교황 사진을 영상으로 쏘아 띄워 놓기도 했지요.
한편 가톨릭 교회 내부에선 후임 교황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보인다고 합니다. 차기 교황은 현 교황이 사임하거나 선종했을 때 뽑아요. 가톨릭에선 죽음을 ‘선종(善終)’이라고 하는데, ‘큰 죄가 없이 죽는 일’을 뜻하지요.
과거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 교황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세계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오늘은 교황 제도가 어떻게 탄생해 이어져 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교황 제도는 초기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답니다.
기원 후 3세기까지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큰 박해를 받습니다. 로마제국은 다양한 종교를 허용했지만,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거든요. 하지만 이런 박해에도 로마제국 내 기독교 세력은 점차 커졌고, 결국 4세기 초엔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공인받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각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됐고, 각 지역 감독(주교)이 신자들을 이끌었는데요. 4세기 말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돼 점차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도 높아지지요.
교황 제도는 5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선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성 베드로를 최초 교황으로 여기는데요. 실질적으로 교황권이 확립된 시기는 레오 1세(재위 440~461) 때였습니다. 레오 1세는 교회 행정가이자 신학자로 활동했어요. 교회에서 신망이 높던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우월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교황권을 강화했죠. 그는 교회 행정과 교리를 정비해 가톨릭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레오 1세는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교황의 영향력도 확대했어요. 직접 외교 담판을 벌여 외부 세력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낸 것이지요. 한때 유럽을 지배한 로마제국은 분열을 겪으며 당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뉜 상태였어요. 특히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는 크게 국력이 쇠퇴했죠. 이런 상황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유목 민족인 훈족이 서로마를 침략하는데요. 이때 레오 1세가 나서 훈족의 왕 아틸라와 면담했다고 합니다. 이후 훈족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물러났고, 교황은 세속 권력과 맺은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도자로 자리 잡지요.
정치적 영향력 행사하기도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카울바흐가 그린 ‘카를 대제의 대관식’(1861년). 흰색 옷을 입은 레오 3세 교황이 카를 대제에게 황제 관을 씌워주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중세 유럽에서 교황은 유럽 국가들의 왕이나 황제의 정통성을 승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시작은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 관을 씌워준 사건이에요. 로마 귀족들의 반대 속에서 교황이 된 레오 3세는 자신을 보호해 줄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필요했어요. 한편 유럽 각지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카를 대제는 자신이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라는 종교적 정당성을 얻고자 했는데,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죠.
‘카노사의 굴욕’을 묘사한 그림. 파문당한 황제 하인리히 4세(가운데)가 카노사성에 찾아가 교황의 측근 마틸다(오른쪽)에게 무릎을 꿇고 중재를 요청하는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반대로 교황권이 세속 군주의 권력보다 우위인 시기도 있었습니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죠.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독일의 왕 하인리히 4세는 성직자 임명 권한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직자들을 누가 임명하는지는 교황과 세속 군주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는데, 서로 자기 권한이라고 주장했거든요.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를 파문하기에 이르죠. 새로운 왕이 선출될 위기에 처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왕은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으로 찾아가 추위 속에서 무릎을 꿇고 사흘 동안 용서를 구합니다.
하지만 교황의 세속 권력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어요. 연이은 십자군 원정(11~13세기) 실패와 종교개혁으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도 크게 추락하죠. 특히 종교개혁 이후엔 많은 개신교 국가가 교황과 관계를 단절하거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거부해 교황의 정치적 지배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기경 3분의 2 지지로 차기 교황 뽑죠
교황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 대부분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남아 있었죠.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교황의 세속 권력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29년 교황과 이탈리아 정부가 ‘라테란 조약’을 맺어 교황은 바티칸시국의 지도자가 됩니다. 바티칸은 크기가 서울 여의도의 6분의 1쯤 되는 작은 도시국가로, 이곳에 교황청이 있지요.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 전경. 로마의 일부였던 바티칸은 1929년 독립적인 영토를 갖게 되지요. /위키피디아
오늘날에도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황은 어떻게 선출할까요?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를 ‘콘클라베(Conclave)‘라고 해요. 교황 다음의 최고위 성직자인 추기경들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차기 교황을 선출한답니다. 80세까지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있죠.
콘클라베는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채 진행돼요. 매일 두 차례 비공개 투표를 해서 투표자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진행한답니다. 투표 결과는 전통적으로 연기를 피워 알리게 되어 있어요. 3분의 2 이상을 얻은 사람이 없을 때는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새 교황이 선출되면 흰 연기를 피워 올려요.
윤상진 기자 사회정책부
사회정책부 근무. '신문은 선생님' 코너를 기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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