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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도성(City of David)
다윗 도성은 다윗이 이민족인 여부스족으로 부터 빼앗아(2사무 5,9)
통일된 새 왕국의 수도로 삼고
정치와 종교(2사무 6장 참조)의 중심지로 삼은 곳을 말한다.
다윗의 천재적인 탁월성은
통합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데에 있다.
예루 살렘은 왕국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남과 북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다가
이스라엘 어느 부족에게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곳이었기에
새로 생긴 정치적인 연합체의 수도로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다윗 자신이 직접 정복해서 얻은 이방인의 땅이었기 때문에
힘센 지파의 눈치와 견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다윗 도성의 북쪽에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인 모리야산이 있고(창세 22,2; 2역대 3,1 참조),
서쪽으로는 티로페이온 골짜기와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로 이어지는
긴 삼각형 모양의 언덕 위에 지어진 천연 요새였다.
이 티로페이온 골짜기와 키드론 두 골짜기는
남쪽 실로암 연못 쪽에서 만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윗 도성은
예루살렘 성곽 밖, 덩 게이트(오물 게이트) 근처에 있는데
다윗의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 규모가 매우 작음에 놀란다.
크기는 남북으로 375m, 동서로 120m, 면적은 대략 3ha 정도이다.
이 자연적인 언덕 위에 사방을 성벽으로 쌓고 네 성문으로 경비 하였으며
남과 북의 성문에는 망대를 설치하였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북쪽 모리야 산으로 도성을 확장하였고(1열왕 9,15 참조)
그 후 서쪽으로 확장되어 갔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히즈키야 임금은 수로와 도시 성벽을 확장 보수하여(2역대 32,1-23),
솔로몬 시대보다 3배 정도로 도시 규모가 커졌었지만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침공으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왔 을 때는 솔로몬 시대의 도시 규모로 축소되었다.
다윗 성: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아 다윗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곳,
그 후 솔로몬이 솔로몬 성전까지 확장.
기혼샘에서부터 점선으로 이어진것이 히즈키야 터널이다.
그리고 히즈키야 터널 끝에 있는것이 실로암 연못(좌)
1.번은 통곡의 벽에 가까운 덩게이트(오물 게이트) 6.다윗 도성 전망대. 7.다윗도성 매표소. 8.기혼샘.
9.가나안 성벽 12.왕들의 정원 13.실로암 연못 14.다윗왕조 무덤
현재의 예루살렘 성곽은
1532년부터 오스만 터키 제국의 슐레이만 2세(1520-1566 재위)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하여 1539년 완성 되었는데,
이때 다윗 도성은 예루살렘 성곽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스코틀랜드 사진사가 찍은 사진(아래)에 의하면
다윗 도성은 계단식 밭으로 된 능선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근대에 접어들어 다윗 도성에 정착하기 시작하는 것은
1874년에 유대교 랍비들과 상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예루살렘 도성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에 다윗 도성 능선에서부터 실완(Silwan) 아랍 마을까지
주거지역은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7년 이후에도 다윗 도성 능선에는 아랍 주민들이 계속 집을 늘려 나갔는데,
최근 들어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인들의 집을 계속 사들여
그들의 영역을 넓혀가며 옛 다윗 도성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윗 도성’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고고학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아래 키드론 계곡을 바라보고 . 키드론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곳...
키드론 계곡과 다윗 도성의 능선 경사도를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은 실완 아랍 마을
예루살렘은 기원전 18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지만
그리 주목을 받는 곳은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 14장에서 처음으로 나오는데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들을 약탈해 가자
아브람이 나서서 되찾아 올 때
‘살렘왕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오는 기사에서
‘살렘’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창세 14,18 :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평화’를 상징하는 ‘살렘’은 예루살렘의 시적 명칭이기도 하며,
요세푸스(Josephus)도 살렘과 예루살렘을 동일시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시편 76,3 :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며 정착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다.(여호 10,1-10; 판관 19,11-12 참조)
기원전 1000년 경 다윗은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린 후(1역대 29,27; 2사무 5,5)
여부스족이 사는 시온 산성을 점령하여(2사무 5,7;1역대 11,4-7)
다윗 왕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여부스족은 어느 누구도 자기들의 시온 산성을 점령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하였지만
다윗의 부하들은 오늘날 ‘워렌의 지하수로’라고 불리는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수로를 타고 올라가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였다.
다윗은 이민족인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성곽 도시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다윗 도성에 옮겨 놓음으로써(2사무 6장 참조)
다윗 도성은 명실상부한 다윗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2사무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968년과 1984년 사이에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
기원전 1000년부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이르는 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25개의 다양한 지질층이 발견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하여 많은 왕들이
다윗 성에 장사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으며
신약에서 사도행전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언급으로 시온산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는 전승이 생겨났고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시기에는
시온산 위에 다윗의 무덤이 생겨났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성은 지금의 시온산이 아니라
오늘날 다윗 도성 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이다.
다윗 도성의 실로암에 가까운 곳에 무덤 형태의 큰 묘실을 발굴하여
이것을 왕들의 무덤이라고 하였으나 아직 통일된 의견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제2차 성전 시대의 창고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다윗 왕조의 무덤이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히즈 키야 터널을 직선거리로 뚫지 않고
'S' 자형으로 만든 것은 위에 있는
왕들의 무덤을 피해간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1열왕 2,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열왕 11,43 솔로몬은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성에 묻히고...
1열왕 14,31 르하브암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
사도 2,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 다윗도성의 아래쪽, 실로암 연못에 가까운 쪽에서
바위돌을 깎아 만든 방들이 발견 되었다.
고고학자인 R.Weill에 의하면
이것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 왕조의 무덤이라고 주장 했다.
그 증거로 히즈키야 터널이 직선으로 뚫리지 않고 'S'자형으로 만든것은
그 위쪽에 있는 왕조의 무덤을 비켜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Weill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은 2차 성전시대의 저장창고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기원 후 2세기경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가
2차 유대 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한 후
예루살렘을 로마의 지방 도시로 건설하면서 무덤 위에 있던 돌들을 다 뜯어가
현재는 무덤의 모양은 거의 파손되었고 앙상하게 남아 있다.
기혼샘(Gihon Spring)
여부스족이 살았고, 다윗이 다윗 도성을 건설하여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들 수 있었던 천연적인 요인은
바로 예루살렘의 유일한 샘물인 ‘기혼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아래, 키드론 계곡에서 생겨나는 기혼샘은
여름의 건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서 힘차게 흘러 나오는 기혼 샘물은
메카까지 지하로 흐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승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기혼샘은 과거에는 불규칙적으로 물이 솟아 나오는
카르스트 지형(침식된 석회암 대지) 샘물이었다.
히브리어 '기혼'(gihah)는 '힘차게 분출하는'의 뜻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혼샘은 더이상 불규칙적이지 않고
하루 2,000 세제곱미터(cubic meters)의 물을 규칙적으로 품어낸다고 한다.
다윗 임금은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여
기혼샘에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1열왕 1,20-45 참조)
1열왕 1,33: 33 임금이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
34 거기에서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시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치시오.
38 그리하여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크렛 사람들과 펠렛 사람들이 내려가,
솔로몬을 다윗 임금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데리고 갔다.
39 차독 사제가 기름 담은 뿔을 천막에서 가져와, 솔로몬 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모든 백성이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쳤다.
기혼샘은 지상으로 놓여 있는 ‘실로암 수로’와 지하에 수직으로 건설된 ‘워렌의 수로’
그리고 ‘히즈키야 터널’과 연결되었다.
일찍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 여부스족들도 전시를 대비하여
기혼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비밀 통로(워렌의 수로)를 만들어 놓았었고,
후에 히즈키야도 이 기혼 샘물을 이용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었다.
2역대 32,30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 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이다.
히즈키야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였다.
1899년에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에 이르는 지역에 대하여 발굴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터널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나안 터널’이다.
이 터널은 기원전 1800년경인 중 청동기 시대 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가나안 터널은 히즈키야 터널과 비슷한 모양이나 물이 말라 있다.
다윗성1 가나안 터널 - 이강근 박사
첫댓글 이강근 박사님과 함께 성지 다윗성 여행을 편안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
자료 감사합니다.
늦은 밤 마중 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