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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산책 (삶의 우물가에 오신 말씀) 1장 -4장
(머리글)
1.요한복음의 특별한 매력
-공관 복음서가 육적인 것(사실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했다면 요한 복음서는 영적인 것(의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했다.
-이레네오 교부께서는 마테오복음서는 사람으로, 루카복음서는 소로, 마르코복음서는 사자로, 요한복음서는 독수리로 상징했다.
-요한복음서는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영적 심안으로 빛이신 예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깊이 있게 전하기에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담론 (예수님과 등장인물이 함께 대화하다 나중에는 예수님 홀로 강론하는 식의 문학 기법) 형식으로 전달하는 기법이다.
이는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 형식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자주 알레고리, 아이러니, 상징주의 기법, 상호참조기법 등을 사용한다. 요한복음서는 성령의 복음서다. 알레고리란 추상적개념이나 영적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구체적 이미지나 사건을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아이러니란 어떤 점을 말하지 않은 척하면서 실제로는 말하거나 진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그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사제 카야파이야기 11장 50절), 상호 참조 기법은 앞부분에 나오는 표현과 뒷부분에 나오는 같은 표현을 씀으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2장에서 여인으로 불리고, 19장에서 여인으로 불리 운다, 4장에서 목마름으로 19장에서 다시 목마름을 표현))
2. 요한복음 저자의 마음을 헤아린다.
저자는 복음서 마무리에서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 31)" 복음서 전체를 통해 그 믿음을 중단 없이 성장해야 함을 강조한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명사인 "믿음"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동사 "믿다" 만을 98번 사용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명사(믿음)는 성장이나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상태, 동사는 성장이나 움직임이 있는 역동성을 담고 있다. "믿는다"라는 행위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세상에서 진리로, 아래에서 위로의 위치이동은 "믿는다"란 행위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까닭은 생명이라는 말이 먼 훗날 천국에서 누리게 될 생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주어지는 생명을 가리키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침묵은 입을 다무는 행위라기보다 귀를 여는 행위다. 두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은 너무나 소란스럽고 분주하여 우리 내면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1부 예수님의 첫 제자들과 세례자 요한(요한1, 35-51; 3,22-29)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
1.찾는 인간 그러나 찾아진 인간(1, 35-39)
-요한 복음서에는 "찾다"라는 동사가 27번 나온다. 대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예수께 온다.
1장에서는 메시아 왕국을 찾아서 또 베드로와 나타나엘이 같은 목적으로 예수께 온다.
3장에서는 니코데모가 영생을 찾아, 4장에서는 왕실 관리가 중태에 빠진 아들의 치유를 위해, 6장에서는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목격한 군중이 먹을거리를 찾아 예수께 온다. 결국 예수님이 먼저 찾아 나서시고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는 것이다.
제자직불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예수님과 스승과 제자 됨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상호성이 있어야 한다.
상호관계의 역동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줄탁동시"를 예를 들 수 있다. 껍질이 깨어지려면 암닭과 병아리가 동시에 같은 지점을 쪼아야 한다.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아주는 행위를 "줄"이라 하고, 밖에서 쪼아주는 행위를 "탁"이라 한다.
그리스도 제자의 삶도 부르심과 찾아 나섬이 동시에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제자의 삶이 시작된다.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누구를 찾느냐? 로 끝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엇인가를 얻고자 찾아왔던 인간이 나중에는 그분 자체를 바라는 것으로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 가운데 가장 거룩한 일은 주 예수님과 인격적 합일이다. (나를 따르라-나를 믿어라 –사랑하라-서로 사랑하여라 로 강조점이 바뀐다) 제자 됨의 길에서 예수님의 요구가 시간이 흐르면서 강조점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은 "무엇을 찾느냐?" 이은 말씀은 와서 보아라"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직접 체험하라고 초대하신 것이다. 초대받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두 제자가 그랬듯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머문다는 그리스어 동사로 메네인으로 신약성경에서 112번 나오는데 그중 66번이 요한께 문헌에 나온다. 이 말은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행동양식이다.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 곁에, 예수님 안에, 예수님 말씀 안에,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곧 예수님과 우리가 나누임 없는 일치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제자들의 행동양식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는 공관 복음과 똑같이 "따르다" 그리스어로" 아콜루테오"
▶성경에서 "흘러가는 시간, 감각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을 "크로노스"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시간, 내적 인간으로 깊어가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시간과 관련해서 인간의 삶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 안에서 정신없이 살다 쓸쓸히 사라지는 허망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시간인 카이로스 안에서 주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영원한 삶이다. 에페소서 5장 16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간을 잘 쓰십시오"라고 명령한다. 여기에 나오는 "시간"이 카이로스다.
▶복음 선교의 순서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다음 곧바로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아간다. 이런 모습은 복음 선교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복음 선교는 먼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찾아가 메시아를 전했고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에게, 사마리아 여인은 함께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2. 한 탤런트 사명에 충실한 자 되어(1, 40-42)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간 첫 번째 제자다. 프로토클레토스(첫 번째로 불림받은 자)란 칭호 얻음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서 가장 먼저 순교하는 영광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남자다운"이라는 뜻이다.
안드레아는 요한복음에서 세 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을 예수께 인도한다, (베드로, 오병이어 소년, 헬라인들 인도) 안드레아는 그리스 파드라에서 X자 십자가에서 순교한다.
3.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새 이름을 받은 시몬(1, 42)
▶성경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아브람-아브라함으로, 사라이에서 사라, 야곱에서 이스라엘)
▶케파는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그리스식 이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가 처음부터 드러났기 때문이다.
4. 필립보를 찾으신 예수님(1, 43)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부르심
① 제자들 편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② 앞서 부르심 받은 사람의 인도로 이루어진다.
③공관 복음에서 나오는 부르심으로 주님께서 사도 필립보에게 오시어 당신 사람으로 만드신다.
5. 제자의 삶을 방해하는 선입견(1, 45-51)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하느님의 선물"이란 뜻, 바르톨로메오의 다른 이름이다.-톨로메오의 아들이란 뜻이다.
나자렛은 300명 정도 모여 사는 갈릴래아의 한 마을, 나타나엘은 카나출신이다. 카나는 나자렛에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나타나엘에게 한 예수님 말씀
야곱이란 이름의 의미는 "속이는 자", '탈취하는 자', '움켜쥐는 자'다. 야곱이 야뽁강 체험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열두 아들을 통해 나온 열두지파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만 남았다.
▶메시아/그리스도는 주로 공관 복음에 나오는 신앙고백의 개념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증언은 동정녀 탄생 때 천사에게(루카1, 32) , 예수님 세례 때 하늘로부터 (마르 1, 11),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베드로가(마태 16, 1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백인대장이(마르15, 39)고백한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인데 둘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다.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다.-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위로부터 나신 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인 예수님
"진실로"는 히브리어로 "아멘"이다. 뜻은 맞습니다, 옳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외치는 고백이다.
"사람의 아들"-인자란 칭호는 모든 복음에서 예수님 스스로를 지칭하며 사용한 칭호이다. 인성을 드러내는 칭호,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을 드러내는 칭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인자 또한 하느님의 아들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칭호다. 인자는 하느님과 함께 세상 창조 전부터 선재 하시고 인간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들어 높여 영광되이 다시 하늘에 오르신 신적 존재이시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끊임없는 일치이고,
②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쁘면 자연스럽게 자기 근본을 잊고 인생의 우선적인 것들을 잊으며 무엇보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잊고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휴식이란 사람이 나무에 기대앉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뜻이 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평가하는 기준은
① 충성이다. 누가 하느님께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받았다면 그만큼 크게 봉사하여 충성하라는 것이요, 적은 능력과 자질을 받았다면 그만큼 소박하게 봉사하여 충성하라는 것이다.
②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이든 다 하느님께 받은 것이기에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③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족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인생의 불행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실의와 원망에 빠지는 데서 온다. 불행의 지름길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데 있다. 질투는 결국 하느님께 맞서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poem)이다.
▶사람들은" 겸손"을 잘못 생각한다. 자신을 낮추거나 비하하는 것, 또 자기는 아무 재능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겸손으로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과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알고 그에 맞갖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암브로시오 성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완벽한 겸손의 모범은 성모님이라고 한다.
성모님이 고백한 마니피캇(마리아의 찬가)을 보면 그분의 겸손을 알 수 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면서 자아를 비우는 것이 참된 겸손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그분의 도구임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의미의 겸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에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는 40년이 걸렸다. 40년 동안 1세대 사람들은 두 사람(갈렙과 여호수아)을 빼고 모두 죽어야 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빼내는 데는 하룻밤밖에 안 걸렸지만, 이스라엘 마음 안에 있는 이집트를 끄집어내는 데는 40년이나 걸린 것이다.
▶나가는 글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께 귀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늘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두 번째는 우리가 부르심 받은 신분에 맞갖게 (마음이나 입맛에 바로 맞다) 그분을 충실히 따르며 섬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형편이 좋든 나쁘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 제자의 삶에 특별히 초점을 두고 기록된 복음서다. 요한복음에는 제자라는 단어가 78번 나온다. (마로 46번, 마태 72번, 루카 37번)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님 제자의 삶에 대해 강조함을 보여 준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 선교가 제대로 될 리 없다.
2부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요한 2, 1-11)
(들어가는 글)
▶요한복음은 카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을 "첫 번째 표징"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 요한복음에서는 공관 복음에서 사용된 기적이란 말보다 "표징"이란 말을 쓰고 있다.
두 번째는 공관 복음은 치유 기적을 첫 번째 기적으로 소개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마르코복음과 루카 복음에는 마귀 들린 자를 고쳐주는 기적이, 마태오복음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기적이 맨 처음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은 카나혼인잔치의 기적을 통해 옛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대치되었음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정결예식에 사용되던 물이 성찬 전례에서 사용되는 포도주 곧 생명의 포도주로 대치되었음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을 유다교 제도나 관습을 대치시키는 분으로 제시한다.
1장: 파스카(해방절)어린양→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으로
2장 전반부: 정결예식의 물→성찬 예식의 포도주로
2장 후반부: 성전과 성전 중심의 예배→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3장: 율법을 통한 구원→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
4장: 야곱의 우물물→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로
이렇게 요한복음 1-4장은 일관되게 "대치"라는 주제로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신원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여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원의 옛 질서와 가치가 새로운 질서와 가치로 "대치"되었음을 역설한다.
▶참고로 5장: 안식일→예수님은 안식일을 대치 완성하시는 분(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면서)
6장: 파스카(해방절)→ 예수님은 파스카를 대치 완성하시는 분(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7-10장 전반부: 초막절→예수님은 초막절을 대치 완성하시는 분(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함으로써 당신이 빛이심을)
10장 후반부: 성전 봉헌절→예수님은 성전 봉헌절을 대치 완성하시는 분(하누카축제: 유다 마카베오가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 성전봉헌축제)) 당신은 양들을 위해 죽는 착한 목자임을 선언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당신 자신을 대치·완성하시는 분으로 제시한 것은 당신이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1. 공생활 시작을 기쁨의 향연으로
우리는 기쁨의 향연인 혼인 잔치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을 보면서 육화된 말씀이 우리와 함께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된다.
2. 기쁨과 축제의 삶을 사신 예수님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는 자연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 황금 들판과 추수(4, 35), 씨앗(마로 4, 28), 공중의 새 보금자리(마태 8, 20), 솔로몬조차 차려입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백합꽃(마태 6, 28-29)과 같은 이미지 뒤에는 창조 세계를 향한 예수님의 경이와 기쁨의 태도가 있다.
▶예수님이 삶을 "축제"로 대하셨다는 점이다. 잃었던 양을 찾아도(루카15, 4-7), 잃었던 동전을 찾아도(루카 15, 8-10), 잃었던 아들을 찾아도 (루카 15, 11-24) 잔치를 벌인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입니다.
바오로에 따르면 우리가 언제나 기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즐거움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이지만 기쁨은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 의존하지만 기쁨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 의존한다. 기쁨은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에서 오기에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니 기쁨을 잃는다는 것은 신앙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 신앙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기쁨이 새고 있다는 말이다.
▶기쁨은 선택이다.
기쁨은 하느님께 대한 확신과 자신감에서 솟아나는 태도의 문제이다. 거울은 결코 먼저 웃지 않는다. 거울은 우리가 먼저 웃어야 따라서 웃는다. 시련과 어려움 중에도 기쁨을 선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받은 이의 표징이라고 했다. 신학자 슈메만은 신자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교회 안에서 기쁨이 줄어드는 것과 정비례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기쁨은 고통과 시련 외로움과 불행 가운데서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수많은 인간적 기쁨을 찾게 하십니다. 존재와 삶에서 드높여지는 기쁨, 정결하고 성화된 사랑의 기쁨, 자연과 정적에서 느끼는 평온한 기쁨, 때때로 일을 성공시킨 데서 얻은 꾸밈없는 기쁨, 순결과 봉사와 참여의 투명한 기쁨, 그리고 희생을 요구하는 기쁨 등을 찾게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기쁨을 정화하고 온전케 하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의 옛 가치관과 선입견을 버리기를 요구받는다.
①요구받은 사람은 나타나엘이었다. 그리스도가 나자렛촌 동네에서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
②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진다. 신앙생활은 엄숙하고 경건해야 하며 자주 단식하고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선입견
③사마리아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지역을 지나 갈릴래아로 내려가신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④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심으로서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남녀유별의 선입견을 버리도록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4. 구원 역사에서 성모님의 역할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보통 7일간 계속된다. 콥틱어(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인 고대 이집트 언어)로 쓰인 요한복음서를 보면 성모님은 신랑의 이모였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예수님의 양부 요셉은 이미 돌아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 12살째에 요셉은 돌아가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성모님을 "여인"이라고 부른 것도 깊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성모님을 늘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2, 1, 3-5, 12:19, 25, 26) 딱 두 차례 "여인"이라 부른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인 카나 혼인 잔치와 끝나는 시점인 십자가 위에서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처음과 끝에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름으로써 성모님이 다만 예수님을 낳은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의 어머니가 되심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른 것은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이 맡았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초대교회의 신학적 성찰을 복음서에 담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구원사에서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성모님의 구원사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이 점은 다음의 두 가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성모님을 여인이라는 칭호를 들은 것은 요한복음서 첫날부터 따지면 7일째 되는 날이다. 요한복음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가 있기까지 네 차례 시간 경과를 보도한다. 이튿날(1, 29); 이튼날(1, 35); 이튼날(1,43); 사흘째 되는 날(2, 1) 이상 네 차례 시간 경과를 따져보면 카나혼인잔치는 일곱 번째 날에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종말론적 혼인 잔치를 통해 신자들과 하나가 됨을 기념하는 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여인"으로 불린 것이다. 이 점은 성모마리아가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새로운 하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린다. 신약 백성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여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은 한번 더 성모님을 가리켜 "여인"이라 부르고 있다. 곧 공생활의 마지막인 십자가 위에서 이다.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문맥을 살펴봐야 한다. 문맥은 영어로 context로 con(함께)과 text(본문) 그래서 "본문과 함께"라는 뜻이다. 문맥을 넓게 볼수록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가장 넓은 문맥은 성경 전체다.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부분을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초대교회 전통을 물려받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헌장 62장에서 성모님의 중재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중재가 가능함을 선언한다.
교회 62장
중재란 쌍방 간에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성모님의 중재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중재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듯 성모님의 중재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은총의 중재자가 되어 주님께 기도드린다.
5. 인간의 협조가 필요한 예수님
▶여섯 항아리
이스라엘에서 여섯이라는 숫자는 부족함,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7은 완전수이지만 7에서 하나가 빠진 6은 불완전수의 극치를 의미한다.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율법 시대가 복음 시대로, 유다교가 그리스도교로 대치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일꾼들은 물독의 물을 퍼서 잔치 책임자에게 가지고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해당 구절에 나오는 "안틀레오"라는 단어는 “물을 바가지로 푸다”라는 뜻이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신다는 점이다.
6. 가장 좋은 것을 나중에 내어놓으시는 주님
▶여기에서 항아리는 두세 동에는 80-120ℓ를 가리킨다. 돌항아리가 여섯 개니 480~720ℓ가 된다. 오늘날 포도주병으로 무려 600병이나 되는 양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대다수는 우리에게 주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복과 은총에 감사하기보다 한 가지가 없는 것에 붙들려 불만족스러워하고 불행해한다는 것이다.
7. 기적에서 표징을 보아야 한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을 요한복음은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징"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은 표징이라는 말을 사용할까? 표징이란 "겉으로 드러난 특징이나 상징"이라고 되어 있다. 곧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구체적 사물이나 경험 세계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기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그 기적이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가? 하나는 기적 행위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적을 통해 전달하려는 영적 진리이다.
카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도 크게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다. 미완성을 상징하는 6개의 물항아리에 포도주를 가득 채우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완성된 구원을 갖고 오시는 메시아임을 알려준다. 두 번째는 영적 진리에 대한 메시지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예수님의 신적 존재와 영적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이기에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징이라 한 것이다.
3부 니코데모를 가르치심(요한2,23-3,21)
(들어가는 글)
▶성경의 장 구분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스티븐 랑톤(1228년사망)이 처음 창 안 했고 산 카로의 휴고 추기경이 1238년 성경 색인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로베르토 에티엔네가 완성했다.
▶십계명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613개 계명은 물론이요 10,633개나 되는 세칙도 철저히 지키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 바리사이파이다.
▶산헤드린은 의장 포함 71명으로 구성된 유다 최고회의 또는 최고법정이었다.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한 통치자라고 그리스 성경에는 되어 있는데 이는 산헤드린 의원이라는 말이다. 산헤드린은 자국민에 대한 종교적 사법 권한을 갖고 있었다.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영적 어둠 속에 살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 왔다는 의미이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엘리야 엘리사 이후 기적을 행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없다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혹시 이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이란 구절이다. 위로부터는 그리스어로 아노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위로부터, 다시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 따라 위로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면으로 번역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은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가, 곧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태어난다로 번역하면 우리 편에서 구원체험 곧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동사 데이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는 길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거듭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많은 신자가 자기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은총을 인간적 행위로 대치하는 것은 물론이요, 교만에 빠져 다른 신자들을 쉽게 단죄할 수 있다. 자기가 착하게 살고 좋은 일을 하고 계명을 잘 지키니까 잘난 사람이며 확실하게 구원받으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처럼 열심히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단죄한다. 우리 모두는 다음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10년 전에 회심한 사람이 10년이 지나고 나서 바리사이가 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예수님은 왜 창녀와 세리들이 바리사이들 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또한 순결하고 사랑스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는 교만이다. 우리가 범하는 죄들은 우리 자신한테서 오지만 교만은 지옥에서 온다. 천사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도 교만 때문이었다. 교만은 회개의 가능성을 없앤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겸손해야 한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이고, 제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겸손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늘나라를 상속해 주시는 무상의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분 사랑에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맞갖은 응답을 드리기 위해서지,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조건적이다. 구원은 민족 차원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디.
▶ 변화와 성숙은 성령이 하시는 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성사로 주어지는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이번에는 육과 영을 대비시켜 설명하신다. 요한복음의 육은 바오로가 말하는 육과는 다르다. 바오로는 인간의 죄스러움을 가리키기 위해 육을 사용했지만 요한복음은 한계와 나약, 무상성을 지닌 인간 그리고 죽을 운명의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육을 사용한다. 육은 인간의 영역이고 영은 하느님의 영역의 대조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성숙(성화)시키고자 역사하시는 데 협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히 우리 몫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또 주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인간의 변화와 성숙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때 곧 성령의 성화 작업에 협조하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
▶성령의 이름은 바람
예수님은 니코데모는 물론 니코데모처럼 위로부터 거듭남(성령에 의해 탄생)이라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바람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사실 그리스어 사전이나 히브리어 사전을 찾아보면 바람과 성령은 둘 다 같은 단어다 (그리스어:프네우마, 히브리어: 루아흐) 훗날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에서도 예수님은 바람을 통해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다. 예수님이 바람이라는 말을 쓰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① 바람은 성령의 자유로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람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는 바로 성령의 모습을 가리킨다. 성령은 하느님 자신이므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다.
② 바람에는 여러 가지 바람이 있다. (순풍, 회오리, 미풍 등) 성령께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하신다.
③ 바람은 어디에나 불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듯이 성령께서도 어디든 현존하시면서 전체적 진리를 갖고 계신다.
▶성령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서 보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러고는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스스로 오류에 빠지며 다른 사람까지 오류에 빠지게 한다.
▶닫힌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수 없다.
열린 어금닛소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삼위일체 신앙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론의 핵심 개념으로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 (세 인격)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한 하느님이시라는 교리다.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여서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3. 생명을 주시는 분(3, 13-36)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들어 올려짐"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신학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들어 올려짐"이라는 말은 (휩소토) "고양되어지다", 또는 "영광을 입다"라는 의미다. 공관 복음서는 십자가를 수치와 비참으로 보지만 요한복음 저자는 십자가를 영광의 자리로 표현한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신적 정체를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아닌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들어 올려짐"(휩소토)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사용된다.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분의 주권적 통치가 이미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주권적 통치가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시작된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무에 매달린 뱀을 바라봄으로써 용서와 치유를 받고 다시 살 수 있었다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죄의 상처에서 치유받고 무엇보다 죄의 세력이 가져온 죽음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으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둥 위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들이 독사의 독으로 죽지 않은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생명"의 의미
요한복음은 생명에 대한 신학을 전개한다. 로고스 찬가에서 처음 생명(1, 4)이라는 말이 나온 후 다시 언급된다.
요한복음을 쓴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20, 31) 그러니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생명"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나온다. "살다"라는 동사가 (자오.) 17번, "생명"이란 명사 "조에"가 36번 나오는데 이 둘을 합친 숫자는 신약성경 어떤 책보다 가장 많이 나오는 숫자다. 이런 점 때문에 요한복음을 "생명의 복음서"라 부른다. 요한복음은 "생명"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생명"으로 끝을 맺는다. 1장 4절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고 시작하여 20장 31절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은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로 끝을 맺는다.
▶생명과 목숨
요한복음에서 생명과 목숨은 구별되어 사용한다.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는 "조에"이고, 목숨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쉬케"다. 조에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을 가리킨다. 목숨은 임시적이고 찰나적이지만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 저자는 조에 곧 생명을 36번 쓰고 있는데 이 가운데 17번을 "영원함"과 같이 쓰고 나머지 19번은 조에만 나온다. 요한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면 같은 의미로 공관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요한복음이 하느님 나라보다 생명을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을 선호한 것은 네 가지 이유에서다.
①생명을 얻는다 란 표현을 씀으로서 우리가 미래에 영생을 누리는 것은 물론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영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②하느님 나라는 유다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므로 헬라계 출신 그리스도인들한테는 낯설기에 그리스도교에 그 근원을 둔 생명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③하느님 나라는 외적인 것(공간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생명은 내적인 것 곧 구원의 내면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④요한복음 독자들은 하느님 자녀가 된 이들로써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 함으로서 인내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복음은 영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언젠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로고스 찬가에도 나오듯이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킨다.
영생의 현재성을 알려주는 다른 구절들도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5, 24)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 3
영원한 생명이란 먼 훗날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분을 아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정신과 느낌으로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 자신을 상대에게 완전히 귀속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 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성경에서 만일 오직 한 장만 가져야 한다면 루카 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가질 것이요, 한 구절밖에 가질 수 없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져갈 것이라고 한 사람이 있다. 이는 복음서의 진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를 가장 핵심적이고 감동적으로 요약, 압축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들어본 많은 신 가운데 죄인들을 사랑하는 신은 하느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죄인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고 하셨다. 이런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어둡고 죄스런 모습까지도 솔직히 내어놓을 수 있다.
▶"너누나" 그리스어 "후토스"
- "이런 식으로"로 번역할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강조한 것이고, "너무나"로 번역할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외아들이란 말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외아들에서 "외"는 그리스어 모노게네스, 곧 "홀로 태어난"보다 "유일한"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유일한 관계이기에 둘은 동일시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해 보았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들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인간을 구원했다는 점과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믿지만, 그 하느님이 바로 자신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
4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요한 4, 1-42)
(들어가는 글)
▶바리사이 니코데모와 사마리아 여인(5번 결혼, 남자와 동거, 윤리적으로 문제)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구원이 필요하고 니코데모를 통해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롭게 산다 해도 구원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음을,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천대받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산다 해도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다룬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4, 42)로 고백한다.
2.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의 의미
▶구약성경에서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라헬, 모세와 치포라는 공통적으로 우물가에서 만남 후 혼인한다.
구약의 우물가 만남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 요소가 있다.
①한 남자가 우물가로 간다 ②한 여인이 온다 ③ 물과 관련된 대화 ④ 남자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 ⑤ 여인이 남자에 대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자기 집이나 마을로 달려간다. ⑥ 낯선 남자가 여인의 집에 초대되고 이어서 혼인을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 만남 또한 항목 6항을 빼고는 다 갖추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다. 삶의 목마름에 지쳐 있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찾아오시어 생명의 물을 주고자 하신다. 그런 그분을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의 신부가 되고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 된다.
▶요한복음은 모두 떠나고 마치 예수님과 그 여자만 있었던 것처럼 보도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온전히 그 죄인한테만 향해 있고 그 사랑을 그녀에게 넘치도록 쏟아 일으켜 주신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수 없는 상태에 떨어진 사람을 더할 수 없이 사랑하심으로서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시는 분이다.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피정이나 성체조배로 그분과 함께하는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다. 신앙생활에서 진정한 성장은 그분과 은밀한 만남을 가짐으로써 온다.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극복하고 유혹을 이겨내는 태도, 난관과 위험 앞에서도 차분함과 평온함을 유지하는 자세 등은 그분과 만남으로 가능하다.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복합적 태도
그리스어 성경에는 9절에서는 선생님이 아니라 당신, 너이다. 그러다 11절에 가서야 태도를 바꾸어 선생님이라 부른다.
( 풍습과 관계된다,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한 존재로 보았다. 그릇을 함께 사용하지 말 아야 한다.)
▶예수님이 유다인의 정결 예식과 사회규범을 어기면서까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만일 예수님이 당대의 사회규범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절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중 누군가가 전혀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님 없이 어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모든 인간적 규범과 제약을 넘어서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다가와 새 삶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②지금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반목과 분열이 있다. 종교, 인종, 민족 간, 남녀 간의 갈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예수님 뜻이 아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오랜 반목과 분열을 넘어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 구원만이, 곧, 우리의 영혼 구원만이 중요할 뿐이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 이외는 어떤 물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줄 수 없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그분뿐이심을 알고 다가갈 때에만 비로소 그분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복음 선교 비법
어떤 사목자의 강론은 내용도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어떤 사목자의 강론은 내용은 깊은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사목자가 평신도의 삶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출발하는 것만큼 강력한 호소력은 없다. 그러므로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영혼을 그늘지게 하는 것들,신음을 내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
여인이 예수님께 한 말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주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선물로 주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제한된 인식 능력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야곱의 우물과 예수님의 생수가 다른 점
예수님은 마시다란 단어를 두 번 사용한다. 첫 번째 마시다는 계속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시제다.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기에 그럴 때마다 다시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에서 "마시는" 은 한 번만 마시면 족하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시제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한 번 마시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는 뜻이다. 11절과 12절에 언급된 우물은 그리스어로 "프레아르"인데 이는 물이 저장된 우물을 가리키며, 14절에 나오는 샘은 "페게"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생명의 물은 예수님이 주실 성령을 가리킨다. 그런데 생명의 물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 곧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가르침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면 다시 말해 그분이 주시는 성령과 가르침(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살 수 있는가? 하나는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난 존재로서 더 이상 육의 자녀가 아닌데도 계속해서 육의 자녀처럼 살아가기에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 곧 성령의 인도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 우리 행동의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육의 욕망에 우리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서 욕심과 집착을 하며 죄스런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목마름"을 허락한 경우이다. 영성가들이 말하는 "영혼의 어둔 밤"이 그러한 경우다.
6. 대화 주제를 바꾸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생수라는 주제로 구원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지만, 여인이 알아듣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당신의 신적 정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여인의 믿음을 고취시키려 한 것이다. 나타나엘의 경우처럼 말이다. 나타나엘은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다. (1, 48-49)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서 예수님을 "예언자"로(4, 19), "그리스도"로(4, 29) 고백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이어야만 한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자녀가 된 이들이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활동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의도는 성령, 곧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성령, 곧 진리 안에서 당신을 예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인간만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도 나름대로 귀한 생명체이지만 그들 안에는 진리의 성령이 사시지 않기에 하느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유일한 특권인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진리의 성령 안에서 제대로 드릴 수 있는가?" 예배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누구에게"란 뜻인 전치사 "프로스"와 "입맞추다, 키스하다"란 의미인 "퀴네오"가 합쳐진 단어다. 누구에게 입을 맞춘단 말인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사제가 미사드릴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제대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과 함께 신령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
①무엇보다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②미사에 적극적으로 참례해야 한다.
③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④지금 드리는 미사가 우리 생애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봉헌해야 한다.
9.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문장을 그리스어 성경으로 보면 "에고 에이미"로 되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는 이다"가 된다. 에고 에이미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히브리어로는 "야훼"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이렇게 "두 사람 간의 대화시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온전한 돌봄을 받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마치 루카 복음에서 늘 남성을 등장시키면 다음에는 여성을 등장 시킴으로써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려 했듯이 요한복음은 각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돌봄을 강조하고자 이러한 대화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13.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의 성장
▶사마리아인들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 곁에(1, 38-39), 예수님 안에(6, 56:15, 4-5), 예수님 말씀 안에(8, 31), 예수님 사랑 안에(15, 9-10), 머무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실제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는 체험이 필요하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성사 생활에 참여하고, 개인 기도 시간을 가지면서 예수님 안에 머물 때 믿음의 성장과 더불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요 세상의 구세주임을 존재 깊은 곳에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5부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심(요한4,43-54)
▶생명과 믿음의 메시지
이 기적 이야기는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생명이다.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아이를 살려 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한다. 다른 주제는 믿음이다. 이 에피소드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로 끝난다.(4, 53) 또 이야기 중간에도 믿음이 강조된다. 요한복음은 이 두 가지 곧 생명과 믿음을 밀접하게 연결하게 함으로써 "믿으면 살 것"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두 개의 기적을 비슷하게 끝낼 뿐 아니라 다른 점에서도 둘을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①카나에서 두 번째 기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두 기적 사이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도록 그 기적이 첫 번째와 같은 장소인 갈릴래아 카나에서 일어났음을 밝힌다.
②두 번의 기적 사건에서 매번 예수님이 기적 행위를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결국 행하신다.
③기적은 순전히 예수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에 의해 일어난다. (일꾼이 순종, 왕실 관리가 순종)
④기적을 목격한 이들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 첫 번째 기적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두 번째 표징에서는 왕실관리와 그의 온 가족이 믿는다.
▶체면이 걱정된다면 생각해 보라. 벌거벗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주님의 체면은 어디에 있는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냄새 나는 발을 닦아주는 주님의 체면은 어디에 있는가? 눅눅하고 더러운 외양간 구유에 누워 계신 주님의 체면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만이 생사 문제의 답임을 깨달은 사람한테는 인간의 체면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다.
▶역동적으로 성장해가는 왕실 관리의 믿음
그가 보인 믿음 성장의 3단계
①첫 단계는 기적에 의지한 믿음, 또는 눈에 보이는 은총만을 추구하는 믿음이다
②두 번째 단계는 말씀에 의지한 믿음이다.
③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믿음이다.
▶많은 신자가 믿음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주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그런데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계속 성장해 나아가는 동적인 것이다. 1장을 공부하면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 저자는 "믿음"이란 명사는 한반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동사만 무려 98번이나 사용했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렇게 "믿는다"란 동사를 100번 가깝게 사용한 것은 믿음의 결단이 한 번의 선택이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은 일생에 [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문제 앞에 설 때마다 믿음의 결단을 늘 새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믿음이 성장하여 언젠가는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받으면서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믿음의 체험을 통해 점점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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