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과 공 동 체 라 면?
2013-01
항간(巷間)의 삶이 아닌 행간(行間)의 삶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나는 공동체를 오르는 입구인, 이 마을의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마을사람들이나 가까운 인근의 사람들에게서 기억의 복판 속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내가 6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인, 1977년의 여름 장마 비가 된통 쏟아지는 바람에 복마전격인 아수라장의 뒤범벅이 되어버렸던 물난리 속의 일일 것이다. 위에서 내뱉어지듯 하는 억수 바람에, 그 반반하던 운동장은 운전대를 아무렇게나 내둘러가며 이리저리 막무가내로의 기세등등한 커다란 물길을 만들어놓고 갔다. 그래서 터무니를 온통 할퀴고 가면서, 그 창수는 옆에서 벌어지는 쓸려져가는 낭패들을 봐대며, 고소하게 여겨대는 말인 “쌤통”이라는 엉투당투의 물결을 일으키며 휩쓸어대듯 지나치며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동장의 물바다는 그 마당 뒤편의 토대에 자리한 학생들 교실교실의 마룻바닥에다가 온통 흙을 몰아다 넣어 뒤범벅으로 꾸며지는 수렁의 갯벌을 만들어 놓았다. 그 때에 마을 뒤꼍의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한 신평교회의 예배당이 큰 몫을 감당하게 되었는데, 학교 뒤편 울넘어에서 관사 집을 이루고 자리해 사시던 교감 선생님은 학교의 서류뭉치를 끌어안고서 그 예배당으로 살길을 찾아 들르셨으며, 마을의 여러 사람들도 물을 피하여 같이 모여들었다. 그 후 우리 학교 아이들은 교실 마룻바닥의 쾨쾨하게 묵은 색 짙은 갯벌냄새를 맡으며 그 흙 범벅을 퍼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해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학교의 모습이다. 이 학교 이름이 바로 성대초등학교이다. “성대초등학교(聖臺初等學校)”라고 하면, 그 학교의 교명이 기품이 담겨진 근사한 이름처럼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성대(聖臺)” 내가 말을 엮어내 보자면 ‘거룩한 밑바탕을 하고 무릎이나 혹은 허리춤까지 반반하며 널찍하게 솟아오른 들마루’라고 하면 맞는 말쯤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성스럽고 높다란 땅을 밟아가며 뛰놀았기에, 그리고 마을의 예배당에 나다녔기에 목사(牧師)라는 직함이 이름 뒤에 늘 따라 붙어 다닌다.
나는 거울 안에서 보여 지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때는 내 얼굴이 스스로의 눈 안으로 잘생겨져서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서 매번 보여 지는 것은 양 눈썹 위로 한일자를 깊이 그려가며 길게 가로로 새겨 간 주름이 마음을 누른다. 그 주름살들이 세 네 겹으로 놓여진 시루속의 떡채들 같이 보여 진다. 얼핏 마음으로 그려보기는 보톡스를 놓아 대가며 오징어를 잡아늘려 가듯이 얇고 반반하게 메꾸라를 하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심정이 생각 가운데 자리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양미간 사이에 세워져서 세 줄로 아로새겨진 주름살이, 내 마음 판에 끌로 끄저겨가며 자국을 새겨간 질질 긁혀가진 모습들이 역력하다. 나의 얼굴은 나 자신의 얼이 담겨진 그릇이다. 그래서 그 모습은 어떻게 들여다보면 나를 그림문자로 표현화하여 내세워진 “도장”처럼 여겨지는 것이라고나 할까? 요새는 “적당하다. 합당하다. 마땅하다. 온당하다”는 등등의 당당하게 또는 땅땅하게 그래서 단단한 돌 같은 도장들이 나의 머리를 달달 찍어댄다. “적당하게 혹은 적당히”라는 표출되어 다가드는 문자를 접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보통으로 여기기에 사람들은 임시변통이나 눈가림으로 대충해버린다는 좋지 않은 모습으로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그 뜻은 그렇지가 않다. 적당(的當)하다는 말은 엉성하게 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느 때에 꼭 맞는 일을 필요한 기준에 따라 한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대강”이라는 말도 현실에서는 극히 나쁜 뜻으로 통용되나, 대강(大綱)이라는 말은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얼마나 좋은 뜻인가? 그런데, 이런 말들이 왜곡의 수모를 면치 못한 이유도, 아마 이 의미들이 서구식 측정치를 표시하는 계량(計量)이 불가능하다는 데 연유한 것은 아닐까? 적당이나 대강은 도저히 숫자로는 표현하기 힘든 뜻을 담고 있기에 계량화되지 못하는 것은 과학적이다 라고 여기지 않고 주술적, 미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며 희생의 점철로 몰려진 것은 아닐는지? 나는 신을 의지해서는 살지만 주술적으로 혹은 미신적으로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믿는 신을 들여대며, 명료화로 표명되는 과학적인 허우적댐에서 광란의 질주를 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럴만한 헛된 힘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말을 만들어 주셨다. 그것은 “항간(巷間)의 삶이 아닌 행간(行間)의 삶” 구구변명의 변변치 않은 사람의 입가들 사이에서 그림들이 그려가고 싶지가 않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는 기나긴 겨울 동안 “남산 위의 저 소나무”로 그냥 있고 싶다. 그래서 잘 들어나지 아니하는 행간을 가로질러가는 삶을 살고 싶다. 항간의 삶이 흑살이와 같은 겉살이라면 행간의 삶은 속살이의 삶일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우리의 현실과 이상 사의의 두 차원의 얘기의 말들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6-18). 우리는 이 구절의 시작에서처럼 “그러므로”의 생활, 다시 말하면 그럭저럭이 아닌 “그러한 까닭으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보이고, 보이지 않고를 굳이 따지자면 성서에서는 못 보는 편을 택하고 든다. 그 말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말한다(로마서 2:28-29). 적당하다는 말을 계속하자면 성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고린도전서 14:40).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적당하게 하라”는 성서 얘기를 새롭게 번역된 성서에서는 “품위 있게 하라”라고 되어있다. 품위(品位)라는 글 모습을 보니, 먼저 달에 김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제목이 생각난다. 내가 보건데 품위의 “품(品)”자라는 글자는 입구(口)자 세 개가 가지런히 쌓여져 있다. 그 네모진 입구(口)의 모양을 보니, 사각의 틀 안에서 여러 사람의 실재들로 짜여 진 ‘사진각구’ 안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마을의 노인어르신 댁을 가뵈면 천정 밑 벽에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서 걸려나온, 그러면서 그분들이 출입하였을 문지방쯤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자손손들, 사진각구는 가세를 이룬 그 집 안 사람들을 드넓게 들어내 주고 있다. 그래서 그 각구는 결코 작은 실물이 아니고 고스란한 면면의 얼굴들이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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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지명수 권희숙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성탄절을 앞두고 대덕교회에서(이중삼 목사님), 2012년 12월 23일에 성탄 선물로 겨울옷과 컴퓨터프린터 그리고 간식거리 등을 공동체 식구들에게 선사하여 주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금성교회.진명구.김기홍.정이삭.최영애.라홍채.박종만.이은주.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1인).채윤기(박현실).박병민(진선미).양오석.임영호(고은성).수영교회.대덕교회.그리스도의집(옹인숙.김요한.금산파리바게트.5회).조정리교회(이정애.2회).충청남도의회(박찬중외1인).주식회사EG(이광형)..반석전원교회.이원교회(김은진).동춘교회4남선교회(김상수).새내교회(박완철외6인).오미순(2회).신건태.성대초등학교(26인).새희망교회(차길선외3인).신평교회.대전소망교회(성기명.이주석).신흥교회(성호경.이권종).김종성가족.신평반점(문창준).오정교회(최세영).김용환(최정숙).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동춘교회6여전교회.금산군북초등학교자모회(4인).금산군모란회(5인).대주산업(살림교회)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