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한 장면
잠실 사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롯데백화점 식당가에서 월남 쌀국수를 시켜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 후에는 커피 한 잔 하러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다.
광화문 근처에서 본 리저브 코너가 이곳에도 눈에 띄었다.
저기서 마시는 커피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그쪽 자리로 가서 앉았더니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여기가 리저브 자리인 건 알고 앉으신 거죠
딴에는 노인 둘이 자리가 비어 앉은 줄 알고 물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메뉴판을 넘겨보며 가격을 흘긋 확인했다
생각보다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예전에 남산을 뛰고 들렀던 심 커피에서 받은 가격 충격 때문인지
이번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냥 일반 아메리카노보다 약간 더 비싼 리저브 아메리카노
그중에서도 G 사이즈 두 잔을 시켰다
커피를 기다리며 잠시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처음 에스프레소를 접했던 이탈리아 여행의 기억
짧지만 진한 커피 한 잔의 여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는 조용히 잠실 거리를 적시고
나는 갈라파고스 원두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더 부탁했다
바리스타는 센스 있게 두 잔에 나누어 내어주었다
우리는 커피 향에 기대어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했다
잔 속의 커피가 식어가도 대화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이야기라 해봐야 성질 고약한 친구 흉이나 보고
한때 방탕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 지금은 형편이 안타까운 친구 이야기뿐이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저브라는 이름 아래 앉아 있는 이 순간
우리가 찾는 건 아마 커피 한 잔의 고급스러움보다
조금 더 특별하고 조금 더 품격 있는 일상의 조각이 아닐까 하고
세월이 흘러도 그런 작은 사치쯤은 여전히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법이다.
조용히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가끔은 아무 일도 아닌데 마음이 복잡한 날이 있다
오늘처럼 아픈 친구를 보고 온 날은 더욱 그렇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고
눈을 감으면 나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기어 올라온다
그럴 때 나는 케모마일 차를 꺼낸다
냉온 정수기에서 온수를 한 컵 따라놓고 티백을 넣는다
노란 빛의 찻물이 잔을 채워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케모마일의 향은 자극적이지 않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을 달랜다
위장의 긴장도 풀리고 어깨에 들어간 힘도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다
한 모금 마시면 몸속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면서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사람들은 이 차가 숙면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효능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차의 진짜 힘은 하루를 천천히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는 여유에 있다고 믿는다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면 하루의 복잡한 일들이 조금은 멀어지고
내 안의 불안한 생각들도 속도를 잠시 멈춘다
오늘 낮에 마신 커피 탓에 잠 오지 않는 밤
케모마일 한 잔은 나에게 약이 아니라 위로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언제나 조용한 향기처럼 내 곁을 지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