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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차 대전문화유산답사> 2018.3.10. 울림 고려시대답사 유성구편
“유성구의 고려시대 문화유산” 답사 후기
○ 일 시 : 2018년 3월 10일(토) 9:00-14:20
○ 코 스 : 대전시립박물관 - 상대동석조여래좌상 - 진잠천 - 상대동 왕버드나무 - 고려시대연못 - 상대동 건물지 - 성북동석조보살입상 - 점심 - 연산 개태사 - 대전시립박물관
○ 참석인원 : 16명
1. 상대동석조여래좌상
이번 답사는 대전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모셔둔 불상 앞에서 모여 간단히 각자 소개하는 인사와 함께 시작하였다.
먼저, 오늘의 답사 해설을 맡은 안여종 대표님은 석가모니여래좌상이라고 소개 되어 있었는데 보통의 방식대로라면 위치, 재질, 신분, 형태 순서로 이름을 정하기 때문에 이 불상은 상대동석조여래좌상이라고 해야 맞다고 설명하셨다.
한 민가의 화단에 방치되고 있던 불신을 2006년도부터 향토사료관에서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었다가 2007년 이후 대전선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2007년 말~2008년 초 무렵 대전선사박물관 류용환 관장이 우연히 원신흥동의 한 절의 스님으로부터 불두만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복원을 전제로 기증받아 접합. 복원하였다. 복원작업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불상 조각장 이진현씨와 지정문화재수리기능자 박순규씨가 맡아서 진행했다.
이 불상의 불두가 다시 분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불두와 불신에 보조물을 고정하는 사진자료를 보여주셨다.
또, 복원을 마친 후 2008년 5월 30일 봉안식을 했는데 이때 고유제에 직접 참석해 찍었던 사진자료도 보여주셨다.
그 후 2012년 10월 12일 대전역사박물관(현 대전시립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상대동석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서 높이 125cm이고 항마촉지인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항마촉지인 자세는 석가모니가 득도하기 바로 직전의 단계로 마귀를 쫒기 위해 지신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자세를 의미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원래 건물을 등지고 모셔야 하는데 대전시립박물관이 처음부터 박물관을 지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고 나중에 용도가 변경된 건물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 위치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답사 일행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는 태실에 대해 울림의 도슨트 이시면서 대전시립박물관 해설사이신 김긍원 선생님께 설명을 들었다.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보관하는 곳인데 이 태실의 주인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의 11번째 왕자 경평군이며 1608년(선조 41년)에 태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 태실은 가수원교옆 태봉에 있었는데 1991년 대전-논산 간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때 출토된 석함 형태의 태실은 발견당시 몸체와 뚜껑이 석회로 단단히 붙여진 상태였다고 한다.
▲가수원 태봉에 있던 태함
2. 진잠천 수달과 상대동 왕버드나무
일행은 상대동석조여래좌상을 본 후 잠시 박물관 뒤편에 있는 진잠천에 내려갔다. 안여종 대표님께서 보여줄게 있다고 하시며 일행을 이끌었는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있었던 건 바로 수달 똥 이었다.
요즘에 대전 곳곳에서 수달이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근래 들어서는 진잠천 대동천과 같은 지류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대전의 수질환경과 그 여건이 수달이 서식하기에 알맞게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도 하셨다.
이 수달 똥의 형태로 봐서는 어제 밤에 왔다 간 흔적이라고 하셨는데 어디 쯤에 수달이 자주 나타나는지 그 지점까지 정확히 짚어서 이런 흔적을 찾아내시는 대표님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일행은 조금 더 내려가서 박물관 우측에 있는 도안문화공원으로 향했다. 거기에 꼭 보여주고 싶으신 왕버드나무가 있다고 하셨다.
이 왕버드나무는 2008년 도안5블럭 건설 당시 발굴된 원골연못 옆에 있던 왕버드나무인데 이곳으로 이식했다고 한다.
대표님은 왕버드나무가 처음에 있었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시며 여러 도로유구 등 유적지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그 곳에는 동서방향으로 500m 가량의 대로가 있었고, 수레바퀴 흔적(도로유구)이 대전에서 최초로 나왔다고 사진을 보며 설명해주셨다.
이 도로유구엔 양 옆에 가로수를 심었었고 배수로인 암거가 중간 중간 있었다고 한다.
왕버드나무는 이 곳 도안문화공원으로 옮겨진 뒤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하니 너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님께서는 왕버드나무 보호수 안내판에 원래 어느 곳에 있었는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점은 울림과 같은 시민단체에서 노력해야 할 점 같다.
우리 일행이 여기서 눈 여겨 본 또 하나는 왕버드나무 옆에 세워져 있는 선돌이었다. 이 선돌도 상대동 유적이 발굴될 때 왕버드나무 옆에서 같이 발견되었다고 하셨다. 이 선돌의 이름은 상대동원골선돌로 붙여져 있긴 한데 보통 선돌과는 모습이 좀 달랐다.
잘 다듬어져 있고 맨 윗부분의 사방이 깎아져 있어서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는 역할 즉 받침대 역할을 했을 것 같아 어느 누각의 받침돌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누각이었는지 다른 받침돌들은 어디에 있고 1기만 왕버드나무 옆에 있었던 것인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알아낼 만한 자료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3. 상대동 고려시대 연못
우리 일행이 향한 답사지는 상대동 고려 연못(高麗池)이다.
2008년 트리플시티 5단지 아파트 건립 중 고려시대 연못(993㎡)이 발굴되었다. 이 연못은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연못으로 주변의 산에 있는 돌을 깨어 석축을 쌓았는데 한 번 고친 흔적이 있다. 1차 크기는 남북 33.5m, 동서 28.3m이며 약간 일그러진 장방형 평면이다. 가장 잘 남아있는 남서쪽 모서리에는 5~6 단의 석축이 남아 있는데, 깊이가 65cm 정도이다. 연못 안에서는 고려 초기의 청자를 비롯하여 대량의 실생활 옹기들과 목제유물들이 나왔다. 연못 주위에 커다란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원두막 같은 높은 건물들이 서 있었다.
실제 연못 유구는 지하에 그대로 묻고 지상에 현재 연못을 복원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아파트 입주민들의 재산권침해 등의 문제에 대한 민원이 있었으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현재와 같이 복원하고 보존하게 되었다. 이 고려시대 유적을 잘 보존하여 아파트의 홍보자원으로서 잘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이 고려시대 유적을 지키기 위해 우리 울림의 모단체인 대전문화연대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여 고려시대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큰 이 연못을 지키고 지금과 같이 복원하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다.
4. 상대동 고려시대 건물터
상대동 고려시대 건물터는 유성구 상원초등학교 내에 있다.
2009년 트리플시티 9블럭 아파트 건립 중 대규모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고려시대 건물터는 트리플시티 902동이 건립될 자리에서 발굴되어 현재 이 아파트의 902동이 없다.
동서 98m, 남북 107m의 방형 구획을 너비 2m의 담장으로 돌렸고, 남쪽에 계단을 갖춘 2개소의 출입문이 있었다. 동쪽에 중심구역이, 서쪽에 부속시설이 있었던 듯하다.
모두 5차에 걸쳐 지은 흔적이 나타났으며, 부호장 창정 등 고려 시대 지방관리의 명칭이 기와에 찍혀 나왔다. 12~13세기 초의 청자도 나왔는데, 대전 구완동 가마(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5호; 대전 중구 구완동에 있는 고려 말~조선 초의 가마터)에서 구운 것도 있다.
현재 이 발굴터는 매장하여 지상에 잔디를 심어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유적은 개성의 만월대와 파주 혜음원지에 다음가는 고려 시대 대규모 건물 터로,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3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 유성현의 관아 건물이라는 가설, 둘째 임금이 여기서 멀지 않은 개국사찰인 연산 개태사에 갈 때 머물던 행궁이라는 가설, 셋째는 광도원 원터라는 가설이 있다.
관아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일반 적인 관아 건물과 비교해서 훨씬 크기 때문에 임금이 머물던 행궁이라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듯 하고, 어떤 가설이 맞든지 이곳은 고려 시대 초기 유성의 위상을 말해주는 중요한 건물 터임은 틀림없다.
5. 성북동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성북동석조보살입상은 성북동 산뜸 마을 동북쪽 산중턱에 있는 봉덕사(옛이름 봉소사) 안에 서 있는 석조보살상이다.
우리 일행이 봉덕사에 들어가니 이 절의 주지스님께서 나와 계셨다. 석조보살입상을 보려고 답사 왔다가 말씀드리고 직접 이 보살상에 대해서 설명좀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진잠초등학교 옆 돌샘골에 ‘한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불이 나서 보살상이 절터에 엎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봉덕사가 봉소사인 시절 1대 주지스님이신 운암스님과 이 지역 경찰서장, 그리고 진잠초등학교 출신이면서 성북동에 사시는 노선생이라는 분과 함께 세분이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 보살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현몽하셔서 나를 일으켜달라고 하셨다는 꿈을 똑같이 꾸시고 수레 6개를 이어서 가지고 가 193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셨다.
스님은 이 불상은 관세음보살상이라고 하시고 고려시대에는 미륵부처라고 불렀다고도 하셨다.
1995년에 봉덕사의 현 주지스님의 현몽에 보살상이 나타나서 “내 신발을 찾아다오” 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스님께서 보살상을 발견한 돌샘골 밭주인이 촛대받침으로 알고 있던 바위 윗부분에서 발가락 부분이 보여 확신을 갖고 바위를 파내어 이곳으로 가져오셨다고 하셨다.
문화재청과 복원작업 협의를 하는데 다시 분리되지 않도록 철심 3개를 박아서 연결하자고 했는데 그때부터 스님께서 항문이 너무 심하게 아프셨다고 했다. 다시 문화재청에 연락하여 한 개만 박자고 건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자 바로 아픈게 없어지셨다고 말씀해주셨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이후 충청지방에서 유행한 토속적인 보살상으로서, 머리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양 옆에는 장신구를 매달았던 듯한 구멍이 있으며, 귀에는 귀걸이를 길게 내려 뜨리고 화려한 장엄구를 달았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를 감싸 흘러내리고 있으며, 오른손은 곧게 아래로 내려 손바닥이 앞(밖)을 향하도록 하고, 왼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있는데 무엇인가를 잡고있는 듯 하나 마모가 심하여 알 수 없다. 양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다.
봉덕사 앞마당에는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진잠초등학교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는데 이 석탑 또한 돌샘골 한사에 모셔져 있던 석탑인 것 같다.
스님께서는 아래 몸돌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6. 세동 느티나무
일행은 봉덕사에서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세동으로 향했다. 산길이라 좁고 구불구불한 험한 곳을 지나 어렵게 찾아간 세동에는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가 야관문백숙을 엄청 든든하게 먹은 후 잠시 세동을 둘러보았다.
세동 마을입구에는 1945년 광복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있었다. 1945년 백운산 기슭에서 30여년생 느티나무를 동민 합심으로 2일간 작업하여 옮겨 심은 수호목이며, 2006년 마을주민 조철행씨가 영송정이라 명명하였고, 1945년 乙酉 광복 기념 식수라고 기록하였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150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00~110년 정도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대표님께서 말씀해주셨다.
대전에서 해방기념으로 심은 식수가 다수 있었겠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나무가 이 세동 느티나무이다.
한편, 해방기념비도 대전에 2기가 남아있다. 보문산에 있는 「을유팔월십오일기렴 해방기념비」해방기념비와 유성초등학교에 있는 「해방기념비」가 그것이다.
보문산에 있는 해방기념비는 1946년 8월 15일 해방1주년 기념일에 대전부민의 성금으로 대전역 광장에 을유해방기념비를 세웠다가 1971년 8월 보문산공원으로 이전하였다. 한글로 세운 비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시민들이 많이 볼 수 있고 의미있는 장소로 다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또, 유성초등학교에 있는 해방기념비는 한자로 解放記念碑라 새겨 있고, 왼쪽에 단기 4278(1945년)년 8월15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 세운 정확한 내력은 아직 모른다. 대전이 전국에서 해방기념비와 식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나 그 관리나 관심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다같이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세동 마을안내판을 보면서 현위치와 하세동, 중세동, 상세동의 위치를 짚어주시며 마을 이야기를 간략히 해주셨다. 개태사에도 가야해서 일행은 세동에서 길게 머물지 않고 바로 개태사로 향했다.
7. 연산 개태사(開泰寺)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사찰이며,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이다.
이규보가 쓴 〈개태사 조전원문〉에 의하면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토록 한 국립 개국사찰이다. 이것이 우리가 대전의 고려시대 유적답사에 연산 개태사를 오게 된 이유이다.
전쟁을 끝내고 승리로 이끈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개국사찰인 개태사를 왕이 방문 할 때 지낼 행궁이 필요했을 것이고 우리가 답사했던 상대동 건물터가 유성현터 치고는 너무 규모가 커서 그곳이 바로 행궁이 아니었을 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그 연장선으로 연산 개태사까지 코스에 넣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개태사 입구에 길지 않은 소나무길이 있고 이 길 끝에 천운지(天運池)라는 연못이 있고 연못 위에 놓여 있는 개운교를 건너면 개태사 입구역할을 하는 신종루(神鐘樓)를 통과해 개태사 경내로 들어간다.
1)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論山 開泰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개태사의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고려 초기 개태사 건립(940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석불이다. 이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신체가 원동형으로 처리되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머리는 소발에 정수리가 큼직하며, 얼굴은 둥근 역삼각항이나 큰 눈에 비해 코와 입은 작은 편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손 모양은 중생을 보호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이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2) 개태사 어진전
개태사에는 이 사찰을 창건한 태조 왕건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는 어진전이 있다. 이곳에서 기일마다 제를 올렸다고 한다.
왕건의 옷 한 벌과 옥대가 보관돼 있었으며,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에 나아가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실제 공민왕은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가부의 점을 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3) 개태사철확(開泰寺鐵鑊, 시도민속문화재 제1호)
이 철확은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커다란 철제 솥이다. 창건 당시 주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데 개태사가 폐허가 되자 벌판에 버려져 있다가 조선 고종 24년(1887년)에 있었던 정해년의 대홍수로 약 2km 하류로 떠내려 왔던 것을 최근에 현재의 이 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형태는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직경 289cm, 둘레 910cm, 높이 96㎝, 두께 3cm이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4) 개태사오층석탑 (開泰寺五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74호)
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옛 터에 남아 있었는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옮길 당시 아래 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즉, 높직한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다.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에는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한편, 창운각에는 단군영정이 봉안되어 있어서 특이했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개태사를 돌아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혼자서였다면 선뜻 들어가 볼 수 없었을 것 같은 실내 공간도 들어가서 살펴볼 기회가 주어져서 뜻 깊었다. 상대동건물터와 연관지어 보게 되니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 유적이 남한에서는 남아있는게 별로 없어서 이번 일정이 더욱 의미있었다.
글쓴이 : 허혜경
첫댓글 정말 답사기를 잘 정리하셨습니다. 함께했던 그 시간이 그대로 되살아난 느낌입니다. 올해는 특히 고려 건국1100주년 이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의 대전에 남은 고려의 유적을 더 찾아보고 보존합시다~
답사기 정리를 너무나 잘 올리셨네요
정말로 다시한번 답사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수고많으셨어요 ~~^^
김긍원선생님, 김동순 선생님.. 친절한 댓글도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고려시대 유적답사 아마도 저희 울림이 처음 연속으로 진행하는 주제답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머지 지역의 고려시대 답사에도 많은 회원과 시민들이 참여했으면 합니다. 또한 후기가 너무 좋습니다. 다녀오지 못한 분들도 이 글을 보면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어요. ㅎㅎ
대표님께서 주신 옛날 사진자료들 덕분에 내용이 훨씬 풍성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사후기 너무훌륭해요. 제가 놓친부분까지 잘 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
잘 보았습니다...
허혜경님 너무 멋진 후기 감사해요.
이렇게 글과 사진까지 올려주시니 더 좋습니다.
개태사도 가 보고 싶었는데 약속이 있어 못갔습니다.
후기 읽으니 가본거나 진배 없네요~~감사
역시나 너무 잘 써주셨네요^^
후기만 읽어도 풍성해지는 느낌입니다~
좋은 답사 후기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