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삼비의 세 정사 (50)
부처님의 명성을 들은 꼬삼비(Kosambi)의 세 거상이 오백 대의 수레에 공양물을 싣고서 멀리 사왓티를 찾아왔다.
보름 동안 설법을 들으며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린 세 장자는 사왓티를 떠나며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꼬삼비로 오셔서 안거하십시오. 제자들이 당신을 위해 정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 세 명의 장자는 고사까(Ghosaka), 꾹꾸따(Kukkuta), 빠와리까(Pavarika)였다. 꼬삼비로 돌아온 세 장자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정사를 각각 하나씩 건립하였다. 고사까가 세운 정사는 고시따라마(Ghositarama)이고, 꾹꾸따가 세운 정사는 꾹꾸따라마(Kukkutarama)이며, 빠와리까가 망고동산에 세운 정사는 빠와리까암바와나(Pavarika Ambavana)였다.
꼬삼비는 마가다국의 서쪽에 위치한 왐사의 수도였다.
기원전8세기 웨다의 권위를 신봉하던 빠우라와(Paurava)제국이 대홍수로 몰락하면서 아리야인의 땅으로 불렸던 꾸루, 빤짤라, 맛차, 수라세나는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고, 강가강 중류에 새로운 국가들이 흥성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꾸루(Kuru)족 일파가 이주하여 새롭게 건설한 도시 꼬삼비였다.
꼬삼비는 서쪽으로 수라세나의 마두라(Madhura)와 야무나( Yamuna)강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 아완띠의 숫제니(Ujjeni)와 육로로 연결되었으며, 동쪽으로 강가강의 뱃길을 따라 와라나시와 마가다국 그리고 앙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다.
또한 꼬삼비는 꾸루, 빤짤라, 맛차, 수라세나에서 쇠토해가던 바라문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세 장자의 귀의로 꼬삼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부처님 교단은 바라문교의 본토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흥종교에 배타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갖가지 모욕과 멸시를 감수해야만 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새롭게 귀의하는 이들에게도 남다른 신심과 의지가 요구되었다.
그런 척박한 토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싹을 틔웠고, 또 고결한 꽃을 피웠다.
랏타빨라(Ratthapala)역시 눈부신 꽃다발 가운데 한 송이였다.
랏타빨라는 꾸루의 툴라꼿티까( Thhllakotthika)출신이다.
출가를 허락지 않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랏타빨라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일주일 동안 땅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시위를 해야만 했다. 그의 부모님은 결국 아들의 죽음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아들이 출가한 후에도 부처님 교단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후 아라한이 된 랏타빨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교화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꾸루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승가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세력가들의 후원과 보호가 필요했다.
꼬삼비의 우데나(Udena)왕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첫째 왕비 사아와띠(Samavati)였다.
사마와띠는 왕궁에 꽃을 나르는 시녀 쿳줏따라(Khujjuttara)가 전한 부처님 말씀만 듣고 귀의하였다.
그날 이후 왕비는 자기의 시녀를 스승처럼 섬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일같이 전해 들었다.
왕비는 부처님을 직접 뵙고 싶었지만 질투심 강한 우데나가 허락할 리 없없다.
사마와띠는 궁전 담벼락에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부처님을 향해 남몰래 합장해야만 했다.
이를 안 셋째 왕비 마간디야(Magandiya)가 부처님과 사마와띠가 내통하고 있다며 우데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마간디야는 꾸루의 깜마사담마(Kammasadamma)출신 미녀였다.
그녀는 왕의 사랑을 두고 경쟁한 사마와띠도 미웠지만 부처님과는 더욱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언젠가 깜마사담마를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의 당당산 모습에 반한 바라문 내외가 자기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아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부처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딸을 앞에 두고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딸들이 유혹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름다운 여인도 결국의 똥오줌으로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하다며 거절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에 감복한 바라문 부부는 동생에게 딸을 맡기고 비구와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부부가 동생에게 맡겼던 딸이 바로 셋째 왕비 마간디야였다.
“똥우줌 가득한 가죽주머니”라는 말은 모욕으로 받아들였던 마간디야는 옛날의 상처를 잊지 않고 있었다.
마간디야의 끈질긴 음해에 성질 급한 우데나는 사마와띠와 궁녀들의 죄를 추궁하고 나섰다.
시기심에 불탄 왕은 화살 끝에 독을 바르고 시위를 팽팽히 당겨 위협했지만 사마와띠와 궁녀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담장 너머 법문만으로 그들은 이미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평온한 여인들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민 우데나는 군사들에게 활을 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심을 떨친 그녀들 앞에서 화살은 낙엽처럼 떨어졌다. 감복한 우데나는 왕비와 궁녀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고 용서를 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우데나는 왕비의 청에 따라 부처님과 비구들을 궁월로 초대해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쿳줏따라를 ‘우바이 가운데 가장 박식한 사람’이라 칭찬하고, 사마와띠를 ‘우바이 가운데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며 칭찬하셨다.
일화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