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끝머리다. 이른 아침 거대한 동해를 마주하고 서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머나 먼 녹청색 바다가 꿈틀대듯 몰려와 발끝에서 새하얗게 밀려난다. 울울창창 송림을 통과한 꽁지바람이 머리채를 흔들며 전선을 뚫는다. 을사년 벽두에 나의 중심에서 탁본을 뜨듯 떠오르는 한마디 산사어우(山沙魚雨) 정중하게 맞는다. 지나온 반세기를 어설피 보듬고 있자니 더하여 십여 년 세월이 잠깐이다. 새해를 맞으며 또 한 해가 무량하게 흘러갈 것을 헤아려 본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한낱 장삼이사로 살아온 날들의 하릴없음에 민망함이 앞선다. 봇도랑에 자갈 구르듯 미미하게 이끌려온 자신의 깊이를 재는 일조차 송구하다. 굽이굽이 한계령을 휘돌아 내린천 인근을 지날 때다. 오지라 불리는 노루목 산장의 노란 추억들이 불쑥 살아난다. 뒤웅박처럼 따스하게 내걸린 알전구들 밑에서 아라리 한 가락 구성지게 뽑아내던 이의 해사한 얼굴이 만화경같이 펼쳐진다. 마치 소꿉놀이로 치환되는 옛 시절의 덮개같다. 사람다운 냄새를 찾아 아득한 길 헤매던 십여 년 전 희미한 장면들이 낱장으로 떠올랐다 흩어진다. 거기서부터 태백준령 아래로 서너 시간을 내달린다. 푸른 말갈기처럼 겹겹이 내려앉은 산맥들의 묵중한 기운이 장쾌하게 다가온다. 심호흡으로 그 신령스러움을 한껏 풀어본다. 각기 모양이 다른 한 폭의 수묵화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난다. 반도를 수놓은 산야가 다정한 지기처럼 정답게 물결친다. 울진군 백암산 골짜기에 이르러 험난한 고개를 오르내린다. 두 귀를 쫑긋대게 만드는 옛이야기 하나 툭 튀어나올 법하다. 속속들이 내다뵈는 마을길을 돌아 비로소 동해 언저리로 흘러든다. 이윽고 이곳에 이른 날들이 몇몇 해던가. 아득한 바다 너머로 어림수를 놓는다. 새삼 꼽아보지 않아도 한 세대를 이룬다. 길고 긴 시간의 수레바퀴 사이로 내 생애에 떠나간 이들은 자취가 없다. 파도를 흠뻑 들이킨 모래사장이 삽시간에 발자국을 지운다. 한가롭게 웅얼대는 해변의 고요가 물결에 휩쓸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수심을 알 길 없는 물의 무게가 태고의 층을 이룬 모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 부드럽게 받아내고 가볍게 밀어내는 모래층의 흡수력은 언제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 살아가는 동안 모든 상황과 절차들이 이런 자연스러운 밀당의 힘으로 구른다면 얼마나 좋으랴. 자연현상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는 인간의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니 문제다. 시야 밖으로 펼쳐진 해안선이 평정심을 되돌린다. 사그락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해변을 걷는다. 빽빽한 솔숲의 향기가 비릿한 바다내음과 절묘한 조화로 뒤섞인다. 평해사구 습지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모래사장 한쪽에 몸을 떨고 있는 자그마한 염생식물들이 애처롭다. 이파리를 모두 떨구고 비쩍 마른 줄기를 손톱만큼 삐죽이내밀고 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이다. 산다는 것은 부질없음을 떨쳐버리고 저렇듯 의연하게 안으로 재무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부유하는 인생을 여미기에는 은근하고 끈질긴 인내심이 최상이라는 듯 묘한 자각을 일으킨다. 갑자기 환호작약하는 어린것들의 고음이 귓가에 와 닿는다. 물결에 쓸려온 작은 물고기 한마리 에 화들짝 터지는 고성이다.서슬 푸른 동해가 무거운 어깨를 들썩인다. 은빛을 반짝이며 팔딱이는 물고기에 생동감이 넘친다. 두 주먹을 말아 쥐고 어쩔 줄 모르는 꼬마들의 눈빛도 덩달아 생기발랄이다. 움켜쥘 새도 없이 덮치는 거센 파도가 일시에 물고기를 휘감고 사라진다. 아쉬움과 탄성이 동시에 솟구친다. 제 세상을 만난 듯 흰 거품 사이로 유유히 몸을 감추는 물고기가 어느새 흔적도 없다. 위기의 순간을 거침없이 뚫고 나아가는 돌파력이 눈부시다. 그 탄력 있는 유연합이 부럽기만 하다. 한때는 내게도 그러했거늘 오늘은 다만 빈 마음으로 유유자적 오전을 보낸다. 연말연시 하루 반나절이 눈 깜박할 새 지나고 있다. 이제는 서서히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저녁 무렵 눈발이 날리다 캄캄한 고속도로 위에 잠시 가는 비를 뿌린다. 빗물이 차창의 먼지를 지울 정도의 양이라 다행이다. 쉼터에 내려 차 한 잔의 여유로 숨을 돌린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이 상쾌하게 차오른다. 도심을 멀리 벗어나 온화하게 잠겨드는 어둠 속을 응시하자니 만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주관하는 조물주의 손길이 신비 그 자체다. 매양 하찮은 인간의 심사만이 떠들썩한 부끄러움을 불러들인다. 새해 첫날이 저물고 있다. 스쳐간 단상으로 마음을 채운다. 산사어우 (山沙魚雨), 산처럼 굳세고 모래처럼 부드러우며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비처럼 자비로운 심성이 내 안에 굳게 자리하기를 소망한다.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태도와 덕목의 부족을 스스로 다스려 보는 것이 사년의 목표다. 강인함과 부드러움, 유연성과 자비로움에 대한 교훈을 마음에 새긴다. 한 장의 묵은 달력을 미련 없이 떼어낸다. 느닷없는 영욕의 시간이 함성으로 얼룩이는 밤, 거리를 평정할 난세의 영웅은 오지 않는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먹구름 헤치고 차갑게 오시는 어진 사람 하나 손꼽아 기다린다. 그가 만일 심해의 대양처럼 속 깊은 이라면 더없이 반가울 일이다.
첫댓글 월간 한국수필 202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