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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 경양시,평양시,천수시,정서시 섬서성 보계시 계림일대지도(위하 황하 흑하발원지)
감숙성 롱남시(용남시/농남시/융남시) 유이족자치주,감남 장족자치주,사천성 흑하일대
농저(陇右/농우)지역은 정서시 농서현((陇西縣)을 말한다.
감숙성(甘肅省)농저(隴坻)서쪽에서 신강성(新疆省)적화(迪化)동쪽까지를 말함.
바로 흑하 좌측으로 청해성 합랍호(중국어 하라호/순우족 순우리말 하나호), 청해호로 이어진다.
청해호 이남을 해남(海南)이라 하였다.
하남(河南)이라함은 황하강 이남지방을 말한다.
감숙성 천수시 정서시,농남시 섬서성 보계시계림, 한중시 태백산(3761)일대
2013년7월21일 대지진이 발생한 곳은 정서시 농서현(隴(陇)西县),장현(漳縣),무산현(武山縣)
위원현(胃源县/옛청원(淸源)일대. (좌상단)
무산현은 함북 무산군(양강도)으로 들어오고, 위원현은 평북 위원군(자강도)과
충북 청원(淸原)으로 들어온다.
平安北道라는 지명에 平安은 한때 고구려의 연호였고 平北이라는 지명은 감숙성 동부6군과
내몽고 서남부 파단(단파) 길림사막지방 (사반지방)의 평평한 북쪽지방에서 이주해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한자이다.
결정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섬서성 보계시(寶鷄市/宝鸡市),한중시(汉中市/漢中市/韩中市)북쪽,
태백현의 태백산높이 3,761미터는 기독교 성서학자들이 하느님의 천지창조가
기원전 3,761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
이것으로 환인>환웅신화가 서역으로 퍼지면서 문명이 전파되어 바알>여와이야기로 이름이 바뀌어
천지창조가 되었던 것이었으며 이 신화가 신격화되어, 다시 동방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사와 종교사를 뒤집어 버리고도 남을 발견이다.^^.
환인/환웅신화(bc3898)가 성경의 천지창조 bc3761년보다도 137년이나 앞선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출하여 환인/환웅신화를 전파하고도 남는 세월이다.
청해성 청해호 이남에 해남장족자치주(海南藏族自治州)가 있다.
감숙성 정서시(定西市) 북쪽을 서주(西州)라고 하였다.
섬서성 연안시(延安市)가 연주(兗州)다.
섬서성 연안시,한중시(汉中市/漢中市/韩中市)를 기준으로
서쪽은 서한(西漢/전한/유방) 동쪽은 동한(東漢/후한/유수)이 들어선다.
(섬서성은 유림시,연안시,동천시,위남시,함양시(센양시),보계시,서안시,상락시,한중시,안강시,
한성시(韓城市),그리고 영하성 회족자치구가 있다.
영하성 회족자치구가 영주(榮州)이다.
영주이북을 영북지방이라 불렀고, 그이남을 영남지방이라고 하였다.
서쪽은 영서지방, 동쪽은 영동지방이라고 불렀다.)
함양시(센양시)가 몽골침략을피해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요녕성 선양(瀋陽>沈阳市)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심양으로 변해간다.
실제로 발해 멸망 후 감숙성 란주시(蘭州市/兰州市)에 있던 서하국(西夏國)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요녕성 요양인 조양과 심양으로 들어가 흥요국(興遼國), 동단국(東丹國/조양)을 점령하고
동진국(東眞國/심양)을 세우며, 이곳에서 다시 대진국(大辰國)을 선포한 후 동간도 사할린 지방으로
몽골을 피해 옮겨가서 동하국(東夏國)을 세운다. (금나라 요동선무사 포선만노)
청해호를 기준으로 동쪽은 해동(海東)이라고 불렀으며,현재는 해동지구(海东地区)로 부른다.
청해호 이북은 해북(海北)지역으로 해북장족(藏族)자치주가 있다.
청해호 이남은 해남(海南)이라고 불렀고, 해남 장족자치주가 있다.
청해호 서쪽은 해서(海西)지방이라고 부른다.
현재도 청해호 서부지역에는 해서 숙몽고자치주(海西肅夢古自治州)가 위치하고 있다.
감숙성 농남시(롱남시/기원전 고대에는 용남시/융남시)는 감남 유이족자치주가 있으며,
유이족의 조상은 유연족이다.
유연족의 조상은 돌궐족이다.
돌궐은 궐한, 궐연, 궐용, 궐융/궐농, 궐저, 궐강족 등으로 분화한다.
석탈해족이 이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돌궐족의 조상은 북월지족이다.
돌과 철을 잘다루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다
월지의 조상은 귀상족, 휴밀족, 도밀족, 돈밀족, 쌍미족 등이 있다.
(돈밀족은 돈황(敦煌)이 기원이라는 말, 밀(密)이라는 말도 그 근원이 돈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쌍미족(雙彌族)은 북인도의 영향을 받아 양미간 가운데에 점을 찍어 표시한 종족을 말한다.)
이들은 대월지족이 되어 사마르칸트로 들어가 박트리아 왕조와 쿠샨왕조를 세운다.
사마르칸트에서 다시 동진하며 키르키즈스탄으로 들어간 월지가 박트리아 왕조를 이어간다.
북인도 카슈미르로 들어간 귀상족이 귀상왕조를 세웠다가 중인도로 남하하면서 쿠샨왕조를 세운다.
혈통이 희석되는 것을 싫어한 귀상월지가 소월지를 합류시키고 초원의 길 루트를 개척하며
사천성 보주로 들어가 신나라와 무역을 독점한다.
광무제 유수의 동한(후한)건국으로 귀주성으로 밀려나 귀상족이 가장 많이 들어가 귀주성이 되었다.
대월지는 다시 예지국, 대예지, 다예지, 예예국, 아영, 알영, 알지, 대알지 등으로 분화한다.
이로써 촉한, 루란국(樓蘭國), 소하국, 대하국, 성한, 성촉(성한), 예촉 등으로 분열한다.
휴밀족의 후예 휴도왕(휴저왕)의 태자 김일제가 청해성 저족 출신으로
청해성 일대에 살았다가 한무제 유철때 몽염에게 잡혀 들어가 손자 김당과 매형 왕망(황제)이
서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다.
대월지가 중원으로 들어오고 나서 감숙성, 섬서성의 북천축국,
청해, 사천, 귀주, 호남성의 중천축국,
운남, 광서, 광동성 강서성의 남천축국,
절강, 복건성의 동천축국이 세워진다.
이것이 오월의 강남 강동진출로 중국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그리고 범천축국(凡天竺國)이 있었다.
성한, 세한, 열한의 뒤를 이어 감숙성 동부6군에서 남하한 혁련발발, 혁련정이 성촉의 후신
성한으로 들어가 점령하고 무열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김춘추는 성한을 세운 이웅의 후예다.
신라로 들어와 성을 김씨로 바꾼 것이다. (제천지윤전칠엽)
성한왕은 이웅(李雄 )을 말한다.(성한/成漢304~347)
298년에 일어났던 후촉/성촉의 이특(李特~303)을 무너뜨려 차지하고 이어받았다.
진주(秦州 :감숙성 동부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사천성 성도(成都/청두)인 촉(蜀)으로 들어왔다.
그후 이웅과 이류(李流)가 303년에 성도(청두)와 익주(溺州/약수)를 점령하고
304년에 성촉을 밀어내고 성도왕(成都王)으로 즉위하여 306년에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정하였다.
334년에 이웅의 형의 아들인 이반 즉위,
334년에 이웅의 아들인 이월(李越)·이기(李期)가반정을 일으키고 이기가 즉위한다.
338년에 이기의 폭정으로 숙부인 이수李壽)가 다시 반정을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다.
이수는 국호를 한(漢)으로 고친다. (성한/成漢304~347)
343년 이수를 이은 이세(李勢)도 폭정을 일삼다가,
347년 동진의 환온(桓溫)에게 멸망당한다. (이세가 세한이다.)
원래 환온은 촉나라의 이민족 후예로 예촉인데, 성촉을 무너뜨린 성한(대성)의 제후로 떨어졌다.
[예촉, 성촉의 선조는 유비가 서기 200년대 초 이민족 제후를 거느리고 삼국시대를 펼칠 때 제후로 활동]
(환온의 예촉이 촉蜀>초국/楚國)을 재건하려고 서기380년대 전진 부견의 침공(383)을 피해
동진 강서성 예장지방으로 들어가 권력을 주무르며, 전진의 제후국인 전연, 후연, 남연, 성한을 격파한다.
그후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동진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가 되려다가
북위 출신 유유의 진압으로 강서성 예장지방의 예씨 (예장라씨, 나주라씨, 금성라씨(나씨),
안휘 동남부 강소성 서북의 양하사씨, 사탁씨(사택씨), 사마씨와 함께 백제를 거쳐
하한(익산 연립마한/사탁씨/사택적덕)으로 동진 황가 친일족을 이끌고 들어왔다가
백제 동성왕, 위덕왕, 신라 진지왕의 침공으로 환현가문과 사탁씨 일부가
남마한 침미다례국(나주~사천)으로 남하하여 들어온다.
유유가 동진황제를 폐하고 유송(송(宋)나라/남송)을 건국한다.)
무열황제 혁련발발은 열한(熱漢)이다. [중국25사에 마지막 남흉노로 기록되어짐]
이것이 김춘추와 문무왕이 말한 성한, 세한, 열한이다.
성한왕 이웅(成漢王 李雄 304~334)
성한의 마지막왕 이세한.(勢漢343~347)
성한을 무너뜨리고 후하>대하를 세운 무열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열한(熱漢)이다.
왜냐하면 혁련발발이 무혈혁명으로 성한을 점령하고 후하를 세우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하여 모신 것이다.(하>후하>대하)
백제를 거쳐 하한, 침미다례로 들어오는 환온, 환현일파/사씨/사택씨, 사탁씨, 사타씨, 예씨가문의
후예와는 원수지간이 된다.
원래 환온의 예촉나라와 이특의 성촉을 이웅이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동진의 강소성 서북, 안휘성 동남부의 양하사씨 사현장군이 전진/전연>후연/남연의 100만 대군을
안휘성 합비 비수일대의 수현에서 격파할 때 환온은 예촉, 후촉/성촉이 이웅의 성한에 멸망당하자,
성한의 제후로 떨어져 있다가 촉(예촉/초국)을 재건하기 위해, 부견이 일으킨
영가의 난 (남북조통일대전/실크로드 천하통일전쟁)을 피해 동진(강소성 남경/건강/난징)으로 들어가
제후로 있으면서 실권을 행사한다.)
성한의 이세(세한) 때 동진의 제후이자 실권자인 환온(桓溫)이 전진의 제후국인 후연을 공격하고
남연을 멸망시킨데에 이어, 고향이었던 사천성의 촉(蜀)으로 가서 성한의 이세를 몰아내고 멸망시켰다.
이특의 성촉을 차지한 이웅, 이류가 환온가문의 촉나라 수도인 청두(성도/成都)와
제2도시인 익주(溺州-성도, 자동, 영안, 강주)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성한의 5대황제 이세한이 망하자 그 후예들이 달아나서 신라로 들어왔던 것이다.
문무왕릉비에 새겨진 제천지윤전칠엽(祭天之胤傳七葉’)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들의 조상이 서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우는 세력이다 보니,
다시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김춘추에게 왜 태종무열왕이라는 왕호를 내렸는지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소성 남경(난징) 동진으로 들어갔던 사천성 성도 환온 ,환현가문의 예촉은 나주의 예장지방으로 이주하고,
안휘동남 ,강소서북의 서진, 동진계 양하사씨 사안, 사현가문은 하한(익산 금마)으로 들어갔다가
백제 동성왕, 위덕왕, 신라 진지왕의 침공으로 일부가 남마한 침미다례국인 여수, 사천으로 남하한다.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여수, 사천의 사탁부가 신라 영토로 들어가자,
사탁부계 진평왕이 진지왕을 4년이 되기전에 몰아내고 하한을 백제 위덕왕(무왕)에 돌려준다.
동진연합군의 후예(사탁부의 진평계) vs 김춘추의 조부 진지왕계(성한,대하계)는 전진연합군의 후예.
환온은 동진에서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도 마지막에 안휘성 동남, 강소성 서북 팽성(徐州/서주/쉬저우)의
하급군관 유유(남송/유송)에게 죽음.
유유는 실크로드 소비종착지였던 안휘성 서화 기자조선지방으로 다시 천도함(구 하남성 상구현).
근초고왕이 해주 안악의 고국원왕을 치고 해주 낙랑국을 차지한 후동진의 동수를 제후로 두며
동수가 하한(익산 금마 연립마한)의 사탁지방(사택부)으로 남하하자, 근초고왕이 동진 연호였던 태화를
4년간 사용하는 것도 동진 황제국을 눌렀다는 뜻이며, 신라 진지왕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사탁부계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후 딸인 선덕여왕이 동진 연호였던 태화를 사용했던 것도
동진 황제국의 문명국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음.
전진연합군의 후예인 진지왕은 익산 하한 사탁지방으로 들어온 동진연합군 환현가문,
동진 주력군인 사현가문에게 중원에서 패했던 일때문에 근초고왕과 똑같이 눌러보려고 침공했던 것임.
중원에서 선진문물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하한을 차지하려는 명분을 만든 것임.
(동진의 8만 기마대군이 비수를 건너 선제 공격하여 100만대군이 와해되고
5호16국(20)국시대가 개막하며 군웅할거시대가 펼쳐져 반도와 열도로 이주하게 되는 것임).
하한으로 들어갔던 사탁씨는 사택부(좌평 사택적덕)가 적통이었기 때문에 동진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한자만 살짝 바꿔 사택부로 전환하는 것이고, 동성왕, 위덕왕의 하한 침공으로 여수, 사천으로 남하했던
사탁씨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귀족과 비주류였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사용하는 것임,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사탁부가 신라에 병합되고 사탁부계 진평왕 때 하한을 침공한 진지왕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셋째딸 선화공주 때문에 하한을 백제 위덕왕>서동태자(무왕)에 돌려주는 것임].
성한(成漢)
1대 태종(太宗) 무황제(武皇帝) 이웅(李雄) : 306-334 성한왕
2대 애황제(哀皇帝) 이반(李班) : 334
3대 폐제(廢帝) 이기(李期) : 334-338
4대 중종(中宗) 소문황제(昭文皇帝) 이수(李壽) : 338-343
5대 이세(李勢) : 343-347 세한
6대 이순(李恂):420~421
후하>대하-무열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407-425. 열한.
[이특의 후촉/성촉을 점령하여 차지하고 이씨로 바꾸었기 때문에 태종 이웅부터 시작하는 것임.
원래 같은 뿌리라면 태조부터 시작하고 이특이 태조가 되어야하는 것인데,
태종부터 시작하므로 전혀 다른 이민족이 이특의 성촉을 점령하고 시작하는 것임.]
김춘추 선조가문이 이세(李勢)이후로 이주해 온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남은 세력은 나라가 끊어졌다가 6대 이순을 1년간 모시고 끝이 난다.
중간에 기년이 비기 때문에 그 후예들이 신라로 들어가
실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왕호를 사용하게 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서,
보장왕을 섬서성 서안으로 잡아가 항복시키고,
다시 요동으로 보내 요동도독부의 요동군 조선군 왕에 봉한 지역은 산서성 진성시 일대이다.
660년 반도백제가 멸망하고 하남성 정주시 옛 한성백제로 끌려갔던 의자왕과 부여융의 백제인들은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 진평2군으로 백제의 웅진도독부(12,807명)를 다시 옮겨 살게 한다.
고려의 남은 무리(餘衆)를 모아 운성시, 진성시 일대에 있다가 섬서성, 사천성 북부의 말갈 6부족,
청해성 동부에 살았던 돌궐족 중에서, 보장왕이 말갈6부족을 모아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산서성 양천시 공주로 보냈는데, 얼마후 보장왕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갈 6부족은 고려인과 길림성 집안 동모산으로 달아나 대중상이 세운 후고구려로 들어간다.
백제의 웅진도독부는 고려인과 말갈인들이 달아났으므로,
산서성 진성시로 다시 들어가 살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동성왕, 무령왕때 백제2군이었던 진평성(진성시)과 고평성(고평시)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무령왕과의 싸움에서 1차전에서 패하고 2차전에서 승리하여 고구려 땅이 된다.
탁발선비족인 북위의 후신 동위>서위>동위(고환/고태/구태)>(북제/고양)]>
우문선비의 서위(북주)>수>당은 실크로드 물류도착지에서
상업무역을 담당할수있는 실력이없어 고구려가 멸망하자 섬서성 서안으로 끌려간 보장왕을
산서성 진성시,고평시 진평2군에서 조선왕에 봉했는데 하남성 정주시 백제왕에 봉해진 의자왕>부여융의
1만2천여명을 진평2군 하서시랑으로 보내 고구려재건운동과 백제부흥운동을 차단하자,
보장왕이 말갈6부족과함께 고구려재건운동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산서성 양천시 공주로 유배당한다.
청해성 서령시(西寧市)는 광개토대왕이 천수시에서 서령시(庶寧市)로 천도하는 곳이다.
서령시(庶寧市)를 서령시(西寧市)로 바꿔 표기해놓은 것이다.
원래의 서령시(庶寧市)는 서쪽으로이주하여 천도하였다고해서 서령시(西寧市)로
바꿔부른것이다. 그당시는 이곳을 해서지방이라불렀다.
산서성 진성시(진평성),고평시(고평성) 구려현의 구려국(句麗國)을 광개토때 차지하고,
고려(高麗)에 편입하여 장수왕 때 정식으로 고구려(高句麗)가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산서성 진성시로 보내 백제의 남은 무리(餘衆)를 모아,
부여융에게 맡겼다는 이야기이다.
의자왕은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끌려갔다가 하남성 정주시에 있는 한성백제 왕으로 봉해진다.
얼마 안있다가 1년후 의자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재건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당나라에 의해
부여융(扶餘隆)의 아들 부여문사, 부여문선,부여덕장 등은 다시 옛 백제땅이자 고려땅인 산서성 진성시
건안고성으로 백제인들을 이끌고 들어갔다는 말이다.
보장왕은 서안으로 끌려갔다가 산서성 진성시 진평2군 [진평성, 고평시 고평성]에서
실크로드 무역품을 관리하는 조선왕에 봉해졌으나, 예식진이 반도 웅진성에서 백제 의자왕을 배신하고
보장왕에게 백제인을 관리하게 하여 백제, 고구려 재건운동을 동시에 차단시키게 하고
당나라 정1품직 관리에 오른다.
보장왕과 고려인들이 말갈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섬서성 서북부, 감숙성, 청해성 일대의
말갈, 돌궐지역으로 달아나고, 보장왕은 다시 양천시 공주로 유배된다.
속말갈 6부족은 동만주 길림성 동모산에 있던 대중상의 후고구려로 달아나 대조영의 동모산 발해인이 된다.
하남성 정주시 정주 한성백제에서 산서성 진성시로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부(12,807명)를 옮겼던 것이다.
요사(遼史)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漢末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爲渤海大氏所有...忽汗州爲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한말 공손도가 이곳에서 웅거했다.
손자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건원이라 하여 한(漢)을 이었으나 위(魏)에게 멸망했다.
(晉陷高麗 )무너진 진(晉)나라 [진한의 후신국인 진국]에서 고려가 나온 이후에 모용수에게 귀속되었다.
(여기에서 진(晉)나라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아닌 진국(晉國)을 말하는 것이다.
진국을 진시황이 점령하고 실크로드 중심지였기 때문에 한자만 바꿔 진국의 이름을 빌려
비슷하게 진(秦)이라고 짓는 것이다.)->실크로드 요충지 민족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서....
(보조주석:"진(晉)나라의 전신이 진국이며 진국의 전신이 진한(辰韓>晉韓>晉國))이다.
전진의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북조를 통일하면서 동진을 칠때 모용수는 부견의 수하장수로 있다가
독립하여 산서성 진성시일대의 옛 진(晉)나라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구려가 나왔고, 감숙성 평양시(平凉市)고원족(固源族)의 후예인 고려가 내려와서 점령하고,
낙랑군 구려현(句麗縣)의 구려국을 병합하여 고구려가 되었다.
이곳에 진(晉)나라가 있었는데 유연족이 내려와 조나라를 세웠다가
강소성 남경 동오의 조비가 하남성 낙양에서 한나라 헌제를 폐위하고 위(魏)나라를 건국한다.
후일 다시 산서성 대동시 평성에서 북위로 성장한 위(魏)나라의 탁발선비족(탁발규/북위)이 내려와
산서성 진성시, 하남성 낙양을 점령한다.
북위의 전신 대나라가 부견에게 멸망하고 탁발규가 남하하기 전에
전진의 부견이 서진을 세운 사마염을 낙양에서 살해하면서 천하를 호령하고,
하남성 낙양으로 들어가 다시 점령하고 진왕(晉王)에 오른다.
청해성 서부 저족인 백마저 추장의 아들인 부견이 감숙성 완천 [원천]의 서진을 점령하고 전진을 세운 뒤에,
서역을 평정하고 돌아와 청해성 동부지방에서 해동천왕에 오른후 남하하여
산서성 진성시의 진평성, 고평성 진평2군인 하서시랑을 차지한다.
서진의 사마염은 전진의 부견에게 점령되어 죽고나자, 사마염의 동생 사마예는 하남성 낙양의 서진인을 이끌고
강소성 남경으로 달아나 동진을 건국하자, 부견이 남조 천하통일전쟁인 영가의 난을 일으키며 침공하여
안휘성 비수 [수현-기자조선 탄생지/ 실크로드 소비종착지]전투에서 동진의 사현장군에게
100만 대군이 패하자, 5호 16국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각자 독립하여 모용수가 차지하고,
후연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후연은 분열하여 서연, 남연, 북연등으로 분열하다 멸망한다.
북연의 고운(모용운)이 고구려인이고, 백성들도 고구려 후예들이다.
고운은 다시 산서성 대동시 평성(옛 북위수도)으로 들어가게 된다.
북위의 관중 남하로 대동시 평성이 비게되자, 그곳을 지키는 원북위 구세력들의 소외감으로 반발을 샀다.
그래서 북연을 평성으로 보낸 것이다.
산서성 대동시에 있는 대동강, 천지, 길주 등의 지명이 평안도, 함경도로 이동해온다.
대동시 남부지방 태원시 (광무제 유수의 동한이 들어서기 전 세력을 키우는 곳)에 있는 북한산도
서울로 이동해오고, 산서성 서북부 삭주시는 평북으로 이동해온다")
아들 모용보는 구려왕 안(安)으로써 평주목으로 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원위 태무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이 거주하는 곳인 평양성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본래 요동경이다.
당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후에 발해대씨가 여기에 있었는데... 홀한주는 옛 평양성이며. 중원현덕부라고 부른다.
평주는 하북성 북평 이북지방을 말한다. 그서쪽에 태항산맥이있고 산서성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안동도호부는 산서성 양천시를 말한다.
(구려왕 안씨(勾麗王 安氏)가 안국선우(安國單于 둔도하(屯屠何)88년-93년 이도의 동생)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만선우 모돈선우, 노상선우, 안국선우(安國單于), 구려호 선우(句黎胡單于/구리호선우)로 이어진다.
노상강도(로상강도)라는 말이 노상선우때문에 나오는 말임. (실크로드 길목을 막고 중간세금 착취)
광개토때 이들 세력을 평정하고 이들의 근거지였던 서령시로 천도하기 때문이다.)
평주는 유주이다.
유주는 원래 산서성 태원시에 있었다.
북위 시절에는 평주라고 불렀다.>후에 하북성 북평 이북지방으로 옮겨간다.
안동도호부는 보장왕이 양천시로 유배되어 죽고 난 후에 보장왕 손자 때부터 옮겨가서
덕무가 다스리며 당에 입조한다. (보장왕의 3년상을 치루고 제사를 모시려고 옮겨감)
당나라는 조공 조건으로 안동도호부 덕무의 후고구려국을 국가로 유일하게 공식 인정하였다.
안동도호부는 산서성 진성시, 운성시, 영제시, 태원시, 양천시일대.
안서도호부는 감숙성 장액시, 돈황시 안서현 하서회랑일대.
안북지역은 섬서성 영하성 회족자치구, 내몽골지방.
안남도호부는 사천성, 운남성일대.
<안동도호부의 이동경로>
총장원년(668년∼773년 :6년간 존속):평양성 (감숙성 평양시>서령시>산서성 대동시)
상원원년(674년∼676년 :3년간 존속):요동군 요동고성 (산서성 진성시 신요동)
의봉2년(677년∼713년:37년간 존속):신성 (산서성 운성시동부)
개원2년(714년∼742년:29년간 존속):평주 (산서성 태원시)
천보2년(743년):요서 (산서성운성시,영제시 옛고죽국(동명왕이색리국에서남하하여 고죽국왕에 오름
이곳에 백이숙제묘가있다. 산서성운성시 서북쪽과 섬서성 동남부 위남지구 사이에
한성시(韓城市)가 위치하고 있다.
농저(陇右/농우)지역은 정서시 농서현((陇西縣)을 말한다.
감숙성(甘肅省)농저(隴坻)서쪽에서 신강성(新疆省) 적화(迪化)동쪽까지를 말한다.
보장왕이 말갈 6부족과함께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다 실패하고,
양천시 공주로 유배당하고 나서 고려인과 말갈 6부족인 속말갈, 백똘, 불열, 호실, 안거골, 안호거, 백산은
하남(河南)의(陇右/농우)지역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황하강 상류이남인 청해호 이남의 해남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웅진도독부를 요동고성(산서성 진성시)으로 옮겼다가 산서성 건안고성으로 옮기면서,
서주(감숙성 정서시북부), 연주(섬서성 연안시)로 백성들을 옮겼는데,
또다시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건안고성은 산서성 운성시 좌측으로 영제시(永濟市)가 있는데 그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오르도스로 나가는 주요 길목인 하서주랑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다시 감숙성 돈황시, 장액시, 란주시로 가는 오르도스 길을 오르내리며,
실크로드에서 들어오는 물류를 하서주랑을 통해 산서성 진성시에 있는
물류 종착지인 하서시랑으로, 물류를 실어나르는 역활을 시키기 위해 보낸 것이 틀림없다.
섬서성 연안시(延安市)동부의 위남지구 한성시(韩城市/韓城市).
섬서성 동부 위남시(渭南市)북쪽에 연안시(延安市)가 있다.
연안시 동부의 위남시 관할안에 한성시(韓城市)가 있다.
산서성 운성시 서북부와 황하강 상류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문(龍門)이라는 곳이
현재의 한성시(韓城市)다.
이곳으로 나중에 백성들이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한성시에서 태어난다.
한성시(韓城市)용문(龍門)의 사마천에 의해서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때 한성시 주변 일대에 서하, 량(凉), 량(梁), 백적, 한(韓)이 있었던 곳이다.
량(凉)은 전진(前秦)의 부견이 무너지자 감숙성으로 가서
후량(後凉/여광呂光/386~403/전진장수)을 건국한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에게 멸망당함)
북량, 서량 등도 세워진다.
발해가 철리족, 철륵족을 점령하고 복속하는데,
철륵족자치주는 청해성, 섬서성 서북에 현존하고 있다.
그곳에 토족이 살고 있으며, 거란족도 살고 있었다.
지금도 감숙성, 청해성, 섬서성 서북 일대에는 토족자치주와 토가족자치주가 형성되어 있다.
말갈의 일족인 철륵족자치주도 현존하고 있다.
보장왕이 속말갈 부족과 연합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는 말갈족인,
백똘, 불열, 호실, 안거골, 안호거, 백산은 모두 섬서성, 청해성, 감숙성 지명이다.
민산의 민인(閩人)이 살았던 감숙성은
초나라 굴씨들에 의해 점령되었던 민융, 로융/노융, 강융, 유응국, 로자국인들이
호남성 장강(양자강/낙수)상류에서 서융, 로융, 견융이 되어,
사천성, 청해성, 감숙성으로 떠돌다가 내려와서 귀주성, 호남성을 거쳐
복건성 건안/건양지구(建陽地區)로 이주하였다가
반도로 들어오게 된다. (이곳의 건양성은 남한(南韓)이다.)
오월과함께 기원전 전국시대, 5호16국(20국)시대, 5대10국시대에 강동, 강남 진출하였다가
5천축국을 세우고 살다, 유송>송>명에 패해
반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백제 멸망후 광서, 광동일대에 북한(北韓)을 세우고 강서, 복건 일대에 남한(南韓)을 세운다.
그러므로 섬서성 동남부에 있는 진성시의 건안고성에서 영제시(永濟市)로 옮겼다가,
섬서성 위남시 관할의 한성시(韓城市)는 웅진도독부가 폐쇄된 후
이주해가서 세운 곳으로 판단된다.
원래 건안(建安)이라는 말이 섬서성 서안에서 나라를 세운 황제의 연호에서 왔기 때문에,
섬서성 안으로 들어와서 살게했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
그당시에는 산서성이나 섬서성이나 모두 하나의 산시성으로 불렀고,
산시성 안의 황제 연호였던 건륭, 건안안의 사람들로 불렀다.
훗날 당나라 초기 두개로 나뉘어져 섬서성과 산서성으로 분리하였던 것이다.
실크로드에서 들어오는 물류에 대한 혜택을 산서성의 이민족들까지 모두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섬서성 건안안으로 들어온 이민족에게만 혜택을 주어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자치통감에 분명히 농저(陇右/농우)지역으로 말갈, 고려인들이 흩어졌다고 하였으므로,
그들은 감숙성 정서시 농서현일대인 농저지역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청해성, 섬서성 유림시(兪林市) 농현(隴縣/ 陇县롱현/용/룡현/융현)에 머물렀다.
(돌궐족이 용현, 룡현, 농현 발음을 융으로 함)
고려자리로 웅진도독부가 들어갔던 건안고성은 실크로드 물류중심지였던
산서성 진성시 진평현의 하서시랑과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의 하서주랑이었다.
즉, 당나라가 짐꾼으로 쓰려고 다시 보낸 것이다.
또한 물류를 지키는 용병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오나라의 후예 오족(오손,오게,정령,오환,동오,산월)은 조선, 진나라, 한나라 때부터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는 용병부대로 주로 활동하여 용병술에 능했다.
강소성의 산월은 손권의 동오에게 토벌되어 북방으로 달아나게 되는데,
군징집을 피해 동오족도 북방으로 많이 달아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훗날 동호족과함께,
섬서성 영하성 회족자치구인 영북지방과 영남지방에서 활동하다가,
경북지방으로 들어와 선우알씨 가야문명을 만들어 낸다.
그피가 그대로 이어져 처세술과 군사반란에 능하다.
경북, 경남지방의 어원도 감숙성 경양시(慶阳市/慶陽市)에서 온 것이다.
자치통감(上元 원년 674년)
散徒其人於河南 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
그 무리를 흩어지게 하여 하남 농우의 각주로 보냈다.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에 계속 살게 하였다.
보장왕이 고려인과 말갈 6부족을 움직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다가 적발되어,
당나라가 취한 조치를 말하고 있다.
그자리로 백제의 웅진도독부가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산서성 진성시(晋城市)의 하서시랑(河西侍郎/廊)과
운성시(云城市),영제시(永濟市)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는 이야기이다.
중원 물류중심의 3각주는
하서회랑(감숙성 돈황시 안서현,장액시,란주시~ )
하서주랑(산서성 임분시(옛임둔군), 운성시, 영제시~ )
하서시랑이다.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 고평시 고평성 진평2군 물류종착지)
하서시랑과 하서회랑 사이를 오르도스라고 부른다.
오르도스 사이를 오가면서 물류를 실어나르는 짐꾼들과 용병들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조선과 한나라시대 때 짐꾼과 물류를 지키는 용병으로 일하다가 성장하여
3각주를 장악해 버리게 된다.
광개토대왕 때 3각주를 모두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고 5호16국시대, 5대10국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기원전 318년전부터 209년에 두만선우를 죽인 모돈선우와 노상선우 때 장악한 바도 있고,
대월지가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중간 세금을 가로채면서 막대한 부를 형성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졌다.
노상선우(로상선우)가 실크로드 중간세금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형성하면서 "로상강도"라는 말이
이때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삼성이 섬서성 서안으로 다시 진출했다.
미래의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그반대로
서남아 중앙아 동북아 물류를 원할하게 하고, 남북한의 전쟁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설마 우리 조상들이 고대시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발판으로 남아 있었던 만주에서
풀 뜯어먹고 살았다고 주장하는 요동 동북 3성설은 제3의 신요동설인 것이다.
요동이 세번에 걸쳐서 이동하게 된다.
첫번째 요동은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일대,
두번째 요동은 산서성 진성시 동남부일대로 옮겨간다. (신요동)
세번째 요동은 당나라에 저항하기 위하여 요녕성 대련반도 일대로 옮겨가서
천리장성을 쌓고 대항하는 것이 제3 신요동이다.
p/s
[려말선초 1400년 제2차 왕자의난(방간,박포)때 이방간은 이방원이 죽이려했다는
박포의 이간질에 속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익주(益州)로 유배당하게 되는데
익주(益州)가 바로 익산(益山) 금마 금마저, 왕궁, 완주 삼례, 전주 일부지방 까지를 말한다.(완산은 완주, 전주)
기원후 100년대 후반 200년대 초 촉한의 유비가 사천성 성도 예촉, 성촉 등 이민족 제후를 거느리고
삼국시대를 펼칠 때 사천성 익주(益州)는 주도가 성도(청두)이지만 그 이전에는 보주가 중심지였다.
[보주는 허황후가 태어난 곳].커후나게>허후나게, 커천나게>허천나게, 커벌나게>허벌나게, 칸>한.
고려, 조선 초기의 익주(益州)가 익산(益山)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 (전주, 군산 등)으로
인구가 빠져나갔다는 뜻임].-익주는 발해시대때 솔빈부였음.
솔빈부(率賓府)에서 솔(率)은 그 지역민의 우두머리에게 전권을 주고 제후로 두어 다스리는 지역을 말하는데,
그 지역민의 자주성이 강할때 부여하는 제도임.
신라가 백제, 고구려의 새로운 땅을 점령했을때 가명으로 신주[新州]라고 이름을 짓고
차후 점령지역민들이 사용하던 옛 지명으로 한자 부수만 살짝 바꿔 다시 짓는 것과 같이
익주[益州]라는 지명은 그 지역의 수도(주도)에 해당하는 곳이 정세변화로 자주 이곳 저곳으로 옮겨갔을때
정확히 그 지역의 왕이나 제후가 어디에 머무는지 잘 모를때 익주라고 표현하는 지명이고
여러 지역을 한데묶어 한 지역으로 표현할때 사용하는 지명이다.
그래서 익주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민족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왔다는 뜻이며 고구려, 발해망인들이
익주(이리/익산)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한자이자 지명이다.
[사천성 익주(성도/청두, 자동, 영안, 강주, 보주), 감숙성 이리강의 이리하, 익산의 안승 고구려 보덕국,
발해 마지막왕 대인선의 후예, 솔빈부등...]-익주의 인구가 가장 많아 익주(익주>이리>익산)로 불려진 것임.
산서성 진성시 고구려의 요동성 성주 강이식 장군의 묘는 하북성 석가장을 거쳐 진주시 하곡양으로 옮겨 가매장 한후,
당에 밀려 요녕성 개주시>심양시(선양시)에 다시 가매장했다가 고구려의 멸망으로 반도 익주(익산 보덕국)로 들어온 후,
최종적으로 경남 진주시로 들어가 진주강씨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