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27
얼마 전 고인류학 논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2000년대 들어 고인류학의 핫플레이스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논문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한 동굴에 그려진 멧돼지를 묘사한 벽화가 늦게 잡아도 4만5500년 전 작품으로 현생인류의 가장 오래된 구상화로 밝혀졌다는 내용이다.
내 머리에 아시아 핫플레이스로 먼저 떠오르는 곳은 알타이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이다. 이곳에서 발견한 손가락 뼈의 게놈을 2010년 해독한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가까운 미지의 인류로 밝혀져 데니소바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술라웨시섬 남쪽에 있는 플로레스섬도 2004년 꽤나 떠들썩했다. 섬의 리앙부아 동굴에서 발견한 미지의 인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불과 5만 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
아시아 핫플레이스의 시작은 서아시아 조지아의 드마니시 아닐까. 2000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약 180만 년 전 호모속 인류의 화석이 보고돼 화제가 됐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이미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났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 2000년대 초 서아시아 조지아의 드마니시에서 약 180만 년 전 호모속 인류의 두개골 화석 다섯 점이 잇달아 보고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 이들의 두개골 내부 표면을 정밀하게 분석해 뇌 표면 형태를 추측한 결과 현생인류보다 유인원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취히리대 제공
○ 호모 에렉투스의 한 아종으로 분류
그런데 드마니시인이 호모 에렉투스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체형을 추측하게 하는 뼈들은 호모 에렉투스임을 알려주지만(다만 키가 145~166㎝로 작다), 생김새는 턱이 많이 튀어나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뇌용량도 호모 에렉투스라기에는 너무 작다. 따라서 몇몇 고인류학들은 별개의 종이라고 보고 호모 조지쿠스(Homo georgicus)라는 학명을 붙였다.
그런데 2013년 ‘사이언스’에 드마니시인이 호모 에렉투스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보존상태가 좋은 두개골 다섯 점을 비교분석한 결과 비슷한 시기임에도 편차가 꽤 컸지만(뇌용량은 546~730㎤), 이들을 각자 다른 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를 이끈 스위스 취리히대 마르시아 폰체 드 레온 박사는 “드마시니 화석이 아프리카의 별개 지역에서 발견됐다면, 학자들은 각각 다른 학명을 붙여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드마니시인은 호모 에렉투스의 한 아종(학명 Homo erectus georgicus)으로 분류돼 있다. 그리고 한반도까지 진출했던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아프리카에 남은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해 약 10만 년 전 다시 아프리카를 벗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시나리오다.
‘사이언스’ 4월 9일자에는 이 시나리오의 근간을 흔드는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는 드마니시인의 후손이 아니라 약 1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호모 에렉투스의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드마니시인을 호모 에렉투스로 보는 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이번 연구를 이끈 사람 역시 마르시아 폰체 드 레온 박사다.
○ 유인원형 뇌 vs 현생인류형 뇌
▲ 대형 유인원의 뇌(왼쪽)와 사람(현생인류)의 뇌(오른쪽)는 크기뿐 아니라 형태(각 구조의 공간 관계)도 다르다. 특히 브로카영역(BC)의 차이가 두드러지고 아래쪽 중심앞고랑(pci)이 관상봉합(CO)을 교차했는가 여부도 다르다. 유인원에서 후두엽과 두정엽의 경계인 초승달고랑(L)도 사람에서는 안 보인다. / 사이언스 제공
침팬지와 고릴라 같은 대형 유인원과 사람(현생인류)은 단순히 뇌의 크기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구조도 꽤 달라 표면의 주름 형태도 뚜렷이 구분된다. 뇌 크기가 유인원과 비슷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구조도 사람보다는 유인원과 더 가깝다.
유인원의 뇌 형태와 현생인류 뇌 형태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곳은 좌반구 전두엽의 브로카 영역 부근이다. 유인원의 브로카 영역은 전두안와고랑이라고 불리는 깊은 홈이 하나 있지만, 사람은 고랑이 세로 방향으로 둘로 갈라졌다. 공간이 늘어나면서 구조가 바뀐 것이다. 이런 차이가 사람의 브로카 영역이 언어의 생성과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관상봉합과 중심앞고랑의 상대적인 위치도 바뀌었다. 관상봉합은 전두엽과 두정엽의 경계선으로 유인원에서는 중심앞고랑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중심앞고랑의 위쪽은 두정엽에, 아래쪽은 전두엽에 놓여 브로카 영역에 이른다. 반면 현생인류에서는 전두엽이 팽창하면서 중심앞고랑이 뒤로 밀려 전부 두정엽에 속하게 되면서 아래쪽도 브로카 영역 뒤에 자리한다. 한편 유인원에서 두정엽과 후두엽 사이에 초승달고랑이 있지만 현생인류에서는 두정엽 뒤쪽이 팽창하면서 사라졌다.
따라서 고인류학자들은 호모속 인류가 진화했을 때 뇌가 커졌을 뿐 아니라 이런 형태의 변화도 일어났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럼에도 초기 호모속 인류의 두개골 화석 대다수는 상태가 안 좋아 뇌의 표면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드마니시 화석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 이 가설을 확인하는 연구에 도전했다.
연구자들은 드마니시인 두개골 다섯 점을 포함해 호모속 인류 두개골 수십 점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의 두개골 한 점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찍어 얻은 안쪽 표면 데이터로 뇌의 표면을 재구성해 형태를 분석했다. 호두과자 주형(틀)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구우면 틀의 내부 공간에 해당하는 호두과자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 두개골 보존상태가 좋으면 안쪽 면의 굴곡에서 뇌의 표면 형태는 물론 혈관까지 볼 수 있다.
다만 두개골 화석 대다수는 조각나 있거나 화석화하는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손상됐기 때문에 디지털 복원기법을 동원해 원형을 재구성한 뒤 안에 담겨있었을 뇌의 형태를 추측했다. 그 결과 두개골에 따라 뇌 표면의 해상도가 제각각이다.
▲ 드마니시인 두개골 다섯 점(D1~5)을 포함한 호모속 인류 두개골 수십 점의 내부 표면을 분석해 추측한 뇌 형태를 보면 170만 년 전 이전은 모두 유인원형(주황색. 아래쪽 중심앞고랑(pci)이 관상봉합(CO)을 교차해 전두엽에 존재)인 반면 170만 년 전 이후 과도기 형태(회색)와 현생인류형(파란색)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른쪽 아래 DH3는 약 30만 년 전 살았던 호모 날레디로, 뇌가 무척 작고 원시적임을 알 수 있다. 점선은 아이의 뇌이고 속이 빈 도형은 해상력이 떨어져 유형 확인에 실패한 시료다. 가로축은 시간(단위: 100만 년 전)이고 세로축은 뇌용량이다. / 사이언스 제공
○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 아냐
분석 결과 드마니시인 다섯 명의 뇌는 모두 유인원 유형으로 밝혀졌다.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에 살았던 초기 호모속 인류의 두개골 두 점 역시 유인원 유형이었다. 그리고 160만 년 전 아프리카 케냐에 살았던 호모속 인류(일명 투르카나 소년)의 두개골 역시 유인원 유형으로 밝혀졌다. 2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물론 유인원 유형이었다.
반면 역시 케냐에서 발견된 155만 년 전 호모속 인류(청소년)의 두개골은 현생인류 유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50만 년 이후에 살았던 호모속 인류는 과도기 형태인 일부를 빼면 모두 현생인류 유형이었다. 저자들은 “170만~1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뇌의 구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에 따르면 초기 호모속 인류의 이동 시나리오도 바뀌어야 한다. 이르면 210만 년 원시적 뇌 구조를 지닌 인류가 1차로 서아시아로 진출했다. 이들의 후손이 바로 드마니시인이다. 그리고 약 150만 년 전 현대인에 가까운 뇌 구조를 지닌 인류가 2차로 유라시아로 진출해 동쪽으로는 한반도까지 이르렀다.
○ 뇌 구조 변화와 석기 기술 발전 시기 겹쳐
▲ 180만 년 전 서아시아에 살았던 드마니시인은 동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 드마니시인이 아니라 170만~1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현대적인 뇌 형태를 지닌 호모 에렉투스가 유라시아로 진출해 동아시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드마니시인(왼쪽)과 동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오른쪽)의 뇌를 비교한 이미지다. / 취히리대 제공
유인원 뇌와 현생인류 뇌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브로카 영역은 언어뿐 아니라 인지력 전반과 관련돼 있다. 특히 도구를 만드는 능력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롭게도 화석이 발굴된 곳에서 나온 비슷한 시기의 석기가 뇌 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드마니시인 발굴지에는 올도완 문화의 석기가 나온다. 조약돌 한쪽을 깨뜨려 날을 만들고 반대쪽을 손잡이로 쓰는 찍개가 대표적인 올도완 석기다. 1930년대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에서 처음 발견해 이름을 붙였다. 올도완 석기는 26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만들어 썼을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호모 에렉투스 유적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 같은 석기는 이보다 훨씬 정교한 형태로 아슐리안 문화로 불린다. 흥미롭게도 케냐에서 발굴한 176만 년 전 석기에서 최초의 아슐리안 문화의 증거가 보이고 인근 에티오피아에서도 175만 년 전 아슐리안 석기가 나왔다. 현생인류형 뇌 구조를 지닌 호모속 인류가 등장한 지역과 시기가 겹침을 알 수 있다.
드마니시인이 호모 에렉투스라는 2013년 논문에서 드 레온 박사는 같은 논리에서 초기 호모속 인류인 호모 하빌리스나 호모 루돌펜시스도 독립 종이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의 변이형일 뿐이라고 주장해 몇몇 고인류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런데 이번 논문에서는 드마니시인조차 초기 호모속(early Homo)이라고만 부를 뿐 호모 에렉투스라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반면 동아시아 호모 에렉투스라는 표현은 나온다.
▲ 아프리카 케냐에서 발굴된 176만 년 석기에서 기술적으로 발달한 아슐리안 문화의 흔적이 처음 나타난다. 인근 에티오피아에서도 175만 년 전 아슐리안 석기가 발굴됐다(사진). 인지능력이 높아졌을 뇌의 형태 변화가 나타난 시점과 장소가 아슐리안 문화의 등장과 거의 일치한다. / PNA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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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문을 계기로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지는 호모 에렉투스의 정의가 ‘현대인에 가까운 골격을 지닌 인류’에서 ‘현대인에 가까운 골격과 뇌 형태를 지닌 인류’로 바뀌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