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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산소
히7:20-28, 완전하고 영원하신 우리의 대제장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형으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살렘왕 멜게세덱에게 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20절에서 예수님은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레위계통의 제사장은 맹세 없이 된 것이기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맹세’로 번역된 ‘호르코모시아스’의 원형 ‘호르코모시아’는 ‘맹세로 단언함’‘선서’등을 의미합니다. 이 맹세는 시110:4, 나오는 맹세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맹세없이 하신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 졌다면 맹세를 하신 말씀은 두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맹세없이 된자와 맹세로 된자를 비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맹세없이 된 제사장보다(출28:1) 더 월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서 언급하고 있는것보다 더 좋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들을 보면 ‘더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7:22, ‘더 좋은 약속’8:6,‘더 좋은 제물’9:23, ‘더 좋은 소유’10:34, ‘더 좋은 부활’11:35, ‘더 좋은 피’12:24, 등입니다. 이는 율법에서 주시는 것들보다 훨씬 좋으니 이 좋은 것들을 굳게 붙잡으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같은 문제로 대두됩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지하고 또 쉽게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왜그렇습니까? 거기에는 마귀 사단의 세력이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영의 눈이 밝아야 영의 일을 분별합니다. 듣는 귀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것을 찾을 수 있고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 주시는 복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2절,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과 보증’을 살펴보면 ‘언약’‘디아데케스’의 원형‘디아데케’는 ‘유언장’이라는 의미로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어느누구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는 결정’이며 히브리어 ‘베리트’의역어로 나옵니다. ‘베리트’는 언약, 조약, 우호동맹의, 의미로 구약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주는 의미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면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고 피를 들고 제단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디아데케’는 예언약과 새언약을 다 아우르는 단어인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얻고 구원에 참예하게 되는 은총이며 동시에 언약이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보증’인데 엥귀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서약하다’‘계약하다’를 뜻하는 ‘엥귀아오’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보증’ 혹은‘보증’‘보증인’이란 명사로 쓰이는데 이 단어는 법정 의무의 이행에 대한 보증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건다는 데에까지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형법에서 말하는 보증인의 지위와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의사, 소방관, 경찰, 군인등입니다. 엥귀오스는 이런 의무를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왜 이 두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창15장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언약을 체결할 때 횃불과 고기사이로 지나는 편무언약을 보게 되는데 언약 파괴시 그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그의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과거에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디아데케’의 보증으로 인간이고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보증인의 지위에 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로, 대제사장으로, 왕으로서 우리의 보증이 되신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 인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제 하늘 아버지 우편에 서계셔서 또 자기에게 들어온 양떼를 위해 일일이 중보하고 계신다 하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 질때에 시23편을 우리는 노래 합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끝에가서 내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고백과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23절입니다.
레위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들은 왜 수가 많은가? 그것은 그들이 항상 살아 있지 못하고 죽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즉 그들은 죽음이라는 방해물 때문에 영원히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되시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으시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더 이상의 제사장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땅에 모든 육체에는 죽음이 왕노릇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는 그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영원한 분이라 말씀합니다.
24절에서 영원히 계시고 갈리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흙이므로 흙을 벗어 날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 존재가 하늘에 속한 자로서 영원히 존속한다 하십니다. 24절에서 갈리지 아니하나니 ‘아파라바톤 에케이’는 어떤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불변’‘범할 수 없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직은 절대로 변할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대신할 제사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는 예수님의 희생 제사는 다른 어떤것으로도 다시 드릴수없는 완전한 제사이며 유일한 제사이며 영원한 제사라 하십니다. 이 말씀만 완전히 깨달아 소화시킨다면 이 땅에 예수라고 하는 사람의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25절에 그리스도를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온전히’‘에이스 토 판텔레스’는 ‘모든’‘전체’를 뜻하는 형용사 ‘파스’와 ‘끝’‘마지막’을 뜻하는 ‘텔로스’의 합성어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하게 영원히 구원하실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의 길은 오직 한길이란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라 하셨습니다. 다른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 천하에 다른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행4:12),
요즘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는데 지방에서 서울오는 수단이 자동차도 있고 기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어떤것을 타도 서울가는 것은 같으니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이슬람도 있고 그 정점에서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이러면 큰일이 납니다. 절대로 다른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그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을 통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미혹되면 큰일이 납니다.
성경을 모른다고 여기저기서 뿅가게 속 시원하게 가르쳐 준다해도 가지 마세요, 성경을 많이 몰라도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만 확실하게 믿으면 됩니다. 요즘 계시록의 말씀을 먹어야 종말에는 산다나 구원을 받는다나 이런것 받아 들이면 신천지로 넘어가게 됩니다. 창-계시록은 한 권의 책입니다. 시작과 끝입니다.예수님이 살아계실때도 말세라 했습니다. 지금도 말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 계십니다. 바울이 증언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사도요한도 증언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고 계십니다. 천주교회서처럼 마리아가 중재하는 것도 아니고 성인들이 중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26절입니다. ‘합당하니’‘에프레펜’의 원형 ‘프레포’는 ‘적당하다, 적격이다’‘어울리다’‘알맞다’라는 의미로 외부의 강압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기쁘신 뜻대로 결단하셨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되심의 합당한 이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악이없고 거룩하고 의 ‘호시호스’는 ‘신의 법으로나 자연법으로나 허용된’이런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에게는 적용이 되기 힘든 부분으로 신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호시호스’는 신적인 거룩함, 예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서의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도 아론도 천사도 가지지 못한 독점적으로 거룩하시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악이 없다고 하십니다. ‘악이 없고’‘아카코스’는 부정 불변사 ‘아’와 ‘악’을 의미하는 ‘카코스’의 합성어로 ‘죄 없는’‘악의가 없는’‘교활함이 없는’ 등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는 악에게 영향을 받을 수도 없고 줄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악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그릇되게 행하였던 것(fp10:1-7, 삼상2:12-17)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셋째로는 ‘더러움이’없고 ‘아미안토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더럽히다’‘흠을 내다’의 ‘미아이노’의 합성어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흠도 더러움도 없으신 분으로, 이 상태를 성도에게도 적용을 했는데 베드로사도가 권하는 말씀으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4), 성도의 기업을 얻는 상태를 말하고 히13장에서는 혼인관계에 요구되는 순결을 말할 때 이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야고보는 약1:27절에서 실천적인 종교성에 대해서도 적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갈 자격이 되지 않아 무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다고 했습니다. ‘떠나 계시고’‘케코리스메노스’는 ‘코리조’의 완료분사 수동태로 분리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었을 때에 육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양면적인 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죄이고 하나는 악에서 떠나계신다는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셨으나 죄속에 거하지 않으시고(눅15:1-2) 죄를 전혀 짓지 않으심,(히4:15), 그리고 지금은 하늘 보좌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섯째가 하늘보다 높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신이 인간의 몸속에 마리아에게 몸을 빌려 오셨습니다. 이 예수의 생명은 오늘 마리아가 아닌 나에게 오셔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흙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넣으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것처럼 그러면 마리아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주여,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되어지이다. 생명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생없이 복만 달라 합니다. 다고다고...그러나 주님은 나의 남은 고난을 네 몸에 채워라 바울은 그 고난과 환란을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예수의 흔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앞에서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나의 주앞에 전제와 같이 부어지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노라.(딤후4:6-8),
27절입니다.
레위계통의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처리하고 그리고 백성의 죄를 처리할수 있었지만 우리 주님은 완전 무흠하시므로 자신을 위한 속죄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하지 않으므로 폐하여진 것입니다.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7월10일에는 대 속죄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짐승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으며 날마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주님의 몸으로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앞에 나아가려면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다른 것을 의지 한다면 그들에게는 맹렬한 주의 진노만 있을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레위계통의 제사장들은 약점 투성이지만 율법후에 세우신 제사장은 영원히 온전하신 아들로서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약점’은 육체의 약함, 질병, 혹은 경제력의 무능, 즉 힘, 권능의 ‘뒤나미스’의 반대의 개념을 의미합니다.
온전케되신 아들,에서 ‘온전’은 ‘완성’‘수행’‘완전’하게하다, 이것은 식물이 다 자란상태, 성숙한 사람에게 사용하였는데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앞에 설수 있게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단어는 제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은 사역으로서 완전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단점, 약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과 하나됨, 사도들도 하나님의 본체라 하셨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아니고 사역에서 단회적인 제사로 완전하게 끝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 제사장으로서 죄 많은 인간을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하는데 장애물을 제거 하셨고 자신을 통하여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시고 죄의 사슬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정리하며 마치겠습니다.
율법을 폐하신 것은 무가치하거나 거룩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제사가 더 좋은 것이므로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달리게 하시면서 더 좋은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아무리해도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구약의 제사로는 하나님앞에 이르기에 약점이 많아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완성을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릴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다 할수 있습니다. 10-0년의 짧은 인생을 영원한 시간과 바꾸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무어라해도 이 귀한 믿음을 지키시고 바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