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
파르메니데스는 통상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의 견해를 품었던 철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즉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의 측면을 강조한 데 반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를 인정하는 주장들은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모순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만약 변화의 개념이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라면 우리는 변화의 사실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 변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를 불변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게 될 때 이러한 결론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 때문에 생기는 가상(假象)에 불과하다. 따라서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속견(俗見)에 불과하다. 우리는 더 이상 속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첫째 ‘존재하는 것’은 오직 존재할 뿐이요, 그 외의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둘째, 변화 즉 생성-소멸은 없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즉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존재하게 되는 것(생성)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것인데, 우리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변화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생성)이 아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은 없으며 소멸도 없다.
셋째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분적(不可分的)이다. 만약 그것이 분할된다고 한다면 존재하는 것에 의해 분할되든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분할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에 의해 분할된다는 것은 분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는 것은 양자가 동질적으로 연속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결국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전혀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 분할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면 존재는 일자(一者)요, 유일자(唯一者)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의 의미에서의 변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운동의 의미에서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운동 또한 있는 것이 그것 아닌 것으로 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의미하는 것은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빈 공간은 존재가 아닌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실재의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영원하고 변화없는 정지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