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가장 비윤리적일 때가 있다. 종교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열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면서 다 신을 위한 충정이라고 치부한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해 이런 종교적 모순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파했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가야바였다(요 18:14). 그는 당시 대제사장으로서 종교적인 지도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젊은 랍비 예수님을 처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겁하고 옹졸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2천 년 전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아니다. 오늘날에도 자기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급박하고 비리를 감추는 일들은 끊임없이 저질러지고 있다. 어쩌면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런 뉴스가 터지면 저마다 입이 마르도록 욕하고,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같은 일이 닥치면 똑같은 죄를 저지른다. 이것은 죄인들의 도덕적인 모순이다.
최근 ‘민중미술가’로 알려진 임옥상(73)씨가 10년 전 성추행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 판결받았다.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하다가 녹취록이 나오자 인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임 씨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나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투쟁하고 종교인들은 가장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임씨처럼 자신이 반대하고 부정하는 반사회적인 활동으로 고발당한다. 모순이고 또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인권 변호사가 인권을 유린하고, 여성 인권을 강조하던 운동가들이 성폭력 혐의로 비난받는다. 임씨에게 폭행당했던 피해자는 10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공소시효 2달을 남겨두고 그를 고발하면서 “임씨가 성추행을 저지른 후에도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작품을 만드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인간은 참으로 자기모순이 있다. 칼 융의 이론처럼 우리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가득 담고 있다. 내 눈에 띄는 싫어하는 사람들의 속성이 어쩌면 내 안에도 가능성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그 면면들이 내 눈에 잘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손가락질하고 비난하지만, 그 손가락이 가리킬 방향은 남이 아닌 자신인 셈이다. 이것이 인간의 철저한 자기모순이요 자기 역설이다.
따라서 타인의 허물 가운데서 자신의 허물을 보고 남의 실수에서 자기의 부족을 읽어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고 지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본인을 더 죄인이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의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고 죄인은 스스로 의인인 척하지만, 하늘은 누가 진정한 의인인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