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막
2,300년 예언과 회복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무엇이었는가? 역사학자들은 이 질문에 매우 다양한 관점을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1941년 12월 7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사건을 “치욕의 날” 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1942년 8월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러시아군에 의한 나치의 결정적인 패배였다고 지적한다.
이 지구의 마지막 영화의 장면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의 엔딩을 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소의 구원에 대한 기별이자 선과 악의 싸움에서 중대한 전환점인 청사진의 회복의 중심적 전환점이다.
선지자 다니엘에게 또 다른 계시가 주어졌는데, 이는 다니엘 8장에서 볼 수 있다. 이번은 예언이 1260년이나 연장된다. 그의 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메데-페르시아와 그리스를 상징하는 양과 숫염소를 보여주셨다. (바벨론은 이미 무너져 장면에서 빠졌기에 이 계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곤 다니엘은 이전의 계시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하며, 로마에서 일어날 권력을 상징하는 작은 뿔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이 이 작은 뿔이 하는 일을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주의는 갑자기 두 천사가 작은 뿔에 대해 하는 대화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쪽과 동쪽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이가 그 말하는 이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8:9-14).
본질적으로, 천사는 작은 뿔이 얼마나 오래 거짓 주장을 하며 번성할지, 특별히 하늘 성소에 대한 공격을 얼마나 오래 할지에 대해 물은 것이다. 대답은 예언적 2,300일, 즉 2,300년이었고, 성소는 그 후에 정결케 되고 회복될 것이었다. 다니엘은 다음 장인 (다니엘 9장)까지 2,300일이 시작되는 기산점을 받지 못했다. 그는 계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천사는 그에게 더 많은 빛을 주기 위해 돌아왔다.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다니엘 9:23-25)
이는 70주 예언과 2,300년 예언이 같은 시작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세 가지 시간 예언들 중, 2,300주야(년) 예언은 다니엘서에서 가장 긴 예언이다. 1260년 예언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한 예언에서 다른 구역들인 것이다:
각각의 예언은 구원의 계획의 다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490년 예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역과 문자적 이스라엘과 그 지상성소의 발전에 대한 사단의 선제공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1260년 예언은 그리스도의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과 그 지식을 왜곡시키려는 사단의 싸움에 초점을 맞추었다. 2,300년 예언은 그분의 재림 전 마지막 사역의 단계와 1260년 동안 작은 뿔에 의해 던져진 진리의 회복에 집중했다.
주전457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지으라는 칙령으로 시작된 2,300년 예언으로 시작된 2,300년 예언은 정확히 2,300년 후인 주후1844년에 만기될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1260년 동안 모든 작은 뿔이 한 일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참된 구원의 청사진인 하늘성소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온전히 회복된 이 복음은 모든 세상에 전해질 것이고, 그 후에 지구의 역사는 마감할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14).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한 번 더 청사진과 재 연결 될 것이었다. 그들은 이 마지막 기별을 전해주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킬 것이었다. 이 기별은 잘못된 구원의 길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반격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의 특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기반한 무신론의 잘못된 생각에도 대답을 할 것이다. 2,300년 예언이 끝날 무렵인 1844년에 찰스 다윈이 그의 자연적 선택 이론에 대한 첫 글들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260년 예언의 끝(538-1798)에서 많은 사람에 의해 진화론의 첫 번째 주창자로 여겨지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존 뱁티스트 라막에 의해 휘둘린 찰스 라이엘에 의해 다윈이 영향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단은 1844년이 중요한 년도인 걸 알고 있었다!
여전히 정결하게 되었고 회복된 성소의 기별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율법의 모든 반대에 대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진리들을 회복시키셨는가? 1844년이 되기까지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운동을 일으키셔서 작은 뿔에 의해 입은 손상들을 역전시키기 시작하셨다. 이 짓밟힌 성소의 일부들을 일으켜 세웠으나 자신들이 거룩한 패턴의 일부였다는 걸 알지 못했던 위대한 개혁자들 중 몇몇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300년대: 진설병 상이 회복됨
존 위클리프는 1320년에 태어났고 영국의 스콜라파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롤라드 교인으로 알려져 있었고 로마교회를 대항하여 항의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그 운동은 개혁의 길을 닦아놓았다. 이러한 이유로 위클리프는 “개혁의 새벽별”로도 잘 알려져 있다. 1382년에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사실상 그는 진설병 상을 회복한 것이고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교황권 체계에 의해 공표된 오류들이 드러날 길이 닦여지게 되었다. 그에 대한 결과로, 롤라드 교인들은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 받게 되었다.
1400-1500년대: 번제단이 회복됨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다. 그는 수도승, 사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신학자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의 진리를 발견한 후에,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 한 사람이 형벌로부터 용서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517년에 루터는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면죄부의 유효성을 반대했던 독일의 비텐베르그에 있는 올세인츠 교회의 문에 못 박았다. 이는 공식적으로 개신교 개혁의 시작점이 되었다. 루터는 실질적으로 번제단에 의해 가르쳐진 진리를 회복시켰다. 그의 추종자들은 루터교인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 때문에 이단으로 취급 받았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박해 받았다.
1500년대: 분향단이 회복됨
장 칼뱅은 1509년에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개신교 개혁의 지도자였다. 개신교와 장로교회는 그들 자신이 칼뱅의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영국국교회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36년에 칼뱅은 그의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고 그 책에서 그는 진중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특권이자, 또한 개인의 의무로써 기도의 개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분향단을 재강조한 것이며 성소가 온전히 회복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였다. 장로교인들 또한 이단으로 취급 받았다.
1600년대: 물두멍이 회복됨
암스테르담의 존 스미스 (1570-1612)와 미국의 로저 윌리엄스 (1603-1683)는 침례교회의 설립자로 간주된다. 둘은 유일하게 적법한 유형의 침례로서 물에 잠기는 침례와 침례 받는 개인의 온전한 동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침례 파에서 나오면서, 침례교회는 실질적으로 물에 잠기는 침례, 즉 물두멍의 진리를 회복했다. 그들은 가톨릭에 의해서 뿐 아니라 또한 루터교와 장로교에 의해 이단으로 여겨졌다.
1700년대: 촛대
존 웨슬리 (1703-1791)는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이자 감리교 운동을 창설한 신학자였다. 그는 노방 설교에 능했으며 일곱 가지 촛대에 의해 상징되었던 전도와 선교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영향을 통해 성소의 촛대는 실질적으로 회복되었다. 감리 교인들도 또한 그들 전에 있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박해 받았으며 이번에는 그 전에 존재했던 다른 개신교 교단들에 의해 이설을 설파하는 위험한 이단집단으로 취급 받았다.
1844년: 언약궤
이렇게 성소의 한 기물만이 회복되길 기다리게 되는데, 바로 언약궤였다. 바로 성소의 이 부분에서 교황권이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개(변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라.
하나님께서 어떤 운동을 그 장면에 일으키셔서 청사진을 완성하시고 회복시킬 것이었는가? 1820년에 시작하여 다양한 교단들 (침례교인, 감리교인, 장로교인, 성공회교도, 가톨릭교인, 루터교인)을 대표하여 학자들, 교사들, 신학자들, 그리고 사업가들과 다른 국가로부터의 사람들이 모두 신비롭게도 독립적으로 다니엘의 예언, 특히 2,300주야 예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의 만장일치로 그들은 뭔가 기념적인 사건이 1843년과 1844년 사이에 일어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소의 정결”이 예수님께서 지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을 일컫는다고 믿었다.
2,300년 예언에 대한 만연한 관심을 이야기하면서, 레로이 프룸은 그의 책 <우리 선조들의 예언적 믿음>에서 말하길:
“교황 비오 6세의 감금 이후 1798년에, 대서양의 양쪽의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적인 1260년의 마침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것은 다니엘 7장의 사건의 마침이 세상의 종말에서 엄청난 심판이 성취되기만을 남겨둘 뿐이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 7장에서 8장으로, 그리고 2300주야 예언으로의 즉각적인 관심과 연구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비단 영국과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심지어 인도에까지 걸쳐, 특히 이곳 미국-예언을 연구하는 수십 명의 학자들이 다양한 교파와, 언어와, 지역에서 일어났고 비록 그 후에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상이했지만, 2300년(주야) 예언이 약 1843년, 1844년 혹은 1847년에 끝날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리고 영국에서만 수천의 강단에서, 이 논쟁을 우리는 들었고, 또한 울려 퍼졌으며, 북미에서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주장을 외쳤다. 예언적 해석이 시작된 이후로 그러한 이구동성은 또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36년에, 북미의 수백 명의 다른 성직자들과 평신도 전도자들이 그 주장을 펼쳤고, 비록 대립되는 결과가 있었지만, 더욱 많은 배운 사람들과 존경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새로운 세상에 울려 퍼졌고 이는 모든 대중들의 주의를 끌었다.”49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지 않았을 때, 큰 실망이 있었다. 그러나 1844년에 있었던 2,300주야에 대한 재 연구는 성소 정결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드러냈다. 소수의 집단의 사람들의 주의가 성소를 새롭게 된 이해를 가지고 연구하는 데에 이끌렸다. 이 예언 연구자들은 성소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장소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변경사항이 있다는 것과, 작은 뿔의 정체, 그리고 회복된 완전한 성소의 기별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를 떠나 이 땅에서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영광으로 오시기 전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써의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은 집단의 사람들은 국제적이며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단인 제 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될 것이었다. 오늘날 사단은 이 교회를 부정적인 빛으로 칠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49 Leroy Froom,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 4, p.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