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城主)와 아이들 (제1회 / 강기영)
아이들이, 아이들이
탈출한다. 돌쟁이 집 아이가 빠져 나온다. 무당집 아이가 눈을 비비며 뒷간을 가듯, 그러면서 감쪽같이 내뺀다. 예수쟁이 집 아이가 삼엄한 경계망을 뚫는다. 이번엔 총알에 목구멍이
뚫려 가래 끓는 소리가 걀걀 거리는, 그래서 언제나 그러고 있는 집 아이가 잽싸게 돌담을 끼고 돈다.
그래서 탈출에 성공한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논골로 집결한다. 북한산을 태우는 가을은 매일 조금씩이 아니라
어느 날 아침, 문득 다가와 있다. 밤새 미친 여자 치맛자락
발광하듯 폭풍이 울어댄 후 불 타는 단풍으로 턱 앞에 펼쳐진 산. 아이들은 가슴 울렁이며 장엄한 산의
경관을, 거대한 산의 숨소리를 듣는다. 산은 무작정 아이들을
부른다. 아이들은 자지 끝이 발딱거리며 오줌을 지려도 이불 속으로 파고만 들던 어제의 모습이 아니다.
아이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풍요의 산은 아흔 아홉 굽이, 아흔 아홉 골. 저 골엔 아람이 출렁이는 밤나무 바탕이 널려 있어. 저 굽이엔 잎을
정교히 드리운 산삼이 뿌리 박고 있을 지도 몰라. 안개 자욱한 절터 부근에선 흰 수염 흩날리는 산신령님이
은도끼, 금도끼 얘기를 들려 줄 지도 몰라. 그리고, 그리고, 하늘과 맞닿은 저 성터 어디쯤엔, …… 아무튼 뭔가가 있을 거야. - 출발!
아이들은 군인처럼 절도 있게 구령을 붙이고는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을 개시한다. 막대기를 힘차게 둘러 멘 아이들이 저 산을, 그리고 산 위에 얹힌 성을 정복하러 떠난다. 우여라, 우야 -
너 먹자고 농사 졌니, 나 먹자고 농사 졌지 - 우여라, 우야 - 아이들은 군데군데 펼쳐진 논길을 지나며 깡통을
매달아 놓은 딸랑이 줄들을 당긴다. 깡통소리가 떨렁이면 나락을 까먹던 참새 떼들이 놀라 푸르르 푸르르
난다. 참새 떼가 날아가는 비탈 쪽을 바라 보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한다.
- 개다! 붙었다! 빤히 올려다 뵈는 무덤가 잔디에 두 마리의
개가 꽁무닐 맞대고 붙은 게 보인다. 달려 가는 아이들 손에 손에 막대기가 허공을 긁어 내린다. - 패라, 패! 아이들의 막대기가 빗발친다. 개들은 꽁무니가 거꾸로 붙었기 때문에 헉헉대며 땅바닥만 긁는다. 그러다
용케 발걸음이 맞아 떨어지자 옆으로 내닫는다. 여덟 개의 발로 기는 게가 따로 없다. 한 해 자란 아카시아 잡목들이 그 사이에 끼어 휙휙 휘어진다. 마디마다
여문 가시가 상처를 낼 텐데도 붙은 꽁무니는 떨어지지 않는다. - 개새끼들, 아침부터
흘레 붙구 지랄이야, 재숩게. - 퉤. 퉤. 퉤. 아이들은 세 번씩 침을 뱉는다. 그러다 한 아이가 킥킥댄다. - 야, 사람두
흘레 붙냐? - 그럼 붙잖구.
- 야 임마, 사람이
개냐, 흘레 붙게. 아이들은 두 패로 갈린다. - 깜둥이가 붙는 거 봤다. - 그건 깜둥이니까 그렇지. - 하여튼 붙는다. - 어떻게? - 어떻겐 어떻게야, 개처럼 붙지. - 공갈이다. - 봤다. - 안 붙는다.
- 붙는다. 킬킬대던 아이들은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콩밭을
습격한다. 서로 두어 번 눈길을 주고 받더니 어느 새 콩밭을 기는 아이와 망을 보는 아이로 갈린다. 파수꾼 물오리가 되어 망을 보는 아이는 등성이에 올라 심심해 죽겠다는 투다.
벌렁 누워 기지개를 틀며 하품도 해 본다. 그러나 눈망울을 돌려 사방을 경계하는 품은 영악하다. 콩밭 주인이 나타나면 날카로운 눈초리가 그걸 놓칠 리 없고, 간단한
신호 하나로 복병들은 감쪽같이 철수하게 된다. 이내 까투리가 되어 콩밭을 기던 아이들이 빠져 나온다. 윗도리를 벗어 콩 뭉치를 감싸 든 아이들은 느릿느릿, 그러면서도
빠르게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넘을 때까지 아이들은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그게 삼촌네 콩밭이었건 누구네 거였건 걸리면 죽는다. 첩첩 한 푸른 산은 북한산 영맥
골골 마다 맑은 물은 천연의 수도 명승지 대공원의 터를 골라서 세우자 빛내자 조국의 청사(靑史) 위험지구를 벗어나 안전지대로 들어선다. 성공이다. 언덕을 넘어 계곡으로 내려가는 아이들은 목청껏 학교 교가를
합창한다. 행군하는 병사처럼 박자가 맞고, 박자에 발이 맞는다. 개울이 가까워 오자 한꺼번에 목들이 말라온다. 여러 개의 얼굴이
물 위에 엎드린다. 꿀꺽꿀꺽. 낙엽이 부식한 앙금 사이로
물벌레들이 투명하게 꼼틀거린다. 한 아이가 슬그머니 옆으로 손을 뻗어 올린다. 콱 누른다. - 아프! 야, 새꺄! 물 속에 얼굴이 박혔던 아이가 연거푸 재채기
질이다. 사래가 들어 코에서 물이 주르르 흐른다. 어느 새
위쪽 바위 틈새로 몸을 숨겼던 또 다른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킬킬거린다. 아이들이 기겁을 한다. - 우리들 저 새끼 오줌 깔긴 거 먹었잖아? - 산신령님 오줌이다. 달달 했냐? - 우리 고사 지낸다, 니 자지 오리 자지 되라구. 아이들은 한꺼번에 물을 토하느라 야단들이다. - 나무!
- 성냥! 아이들은 이내 가라앉아 수선을 피우며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나무를 긁어 오는 아이와 불을 지피는 아이들의 손발이 척척 맞는다. 마른 삭정이와 솔가리는 잘도 타오른다. 일렁이는 불길에 콩 다발들을
올려 놓는다. - 빨리 익어라 콩 콩, 꼬투리. - 빨리 먹어라 콩 콩, 알맹이. 아이들은 후후 불길을 잡으며 눈물을 질질 흘린다. 눈썹이 그슬리면 까르르 댄다. 잘 익은 콩 꼬투리가 탁탁 소리를
내며 가지에서 떨어져 불티에 섞인다. 동그마니 불 터를 둘러 앉은 아이들이 다람쥐가 되어 새까만 꼬투리를
호호 불며 까먹는다. 넘나드는 손이, 입이, 앗 뜨거를 연발한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콩 서리를 끝낸 아이들이 불 터를 둘러 선다. 오줌을 갈긴다. - 깔겨라 치익칙. - 우리는 소방대다 치익칙. 꺼져가는 모닥불에서 칙칙 거리며 흰 김이 피어
오른다. 불기운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개울로 뛰어 든다. 팔다리를
척척 걷어 올리면서 물 가부터 더듬질을 시작한다. 가재를 잡는다. - 가재는 말야,
아무 데나 있는 게 아니고 말야, 굴 파낸 모래가 앞에 소복이 쌓여 있는 돌 밑에 있는
거야. 아이들은 모래 무더기가 소복한 가재 굴을 잘도
찾아 낸다. -참, 가재와
굼벵인 상극이라던가? 첨엔 굼벵이에 눈이 있고 가재엔 없었다지. 그런데
꾀 많은 가재가 굼벵일 꼬였대. 굼벵아, 너는 참 좋겠다. 눈이 있으니 산천경개 맘껏 구경하고, 햇살에 눈이 부셔도 보고. 나도 눈 한 번만 달아 봤으면 좋겠다, 밝은 세상에 너의 잘 생긴
얼굴 바라도 보고. 아, 너는 정말 얼마나 잘 생겼을까? 그러자 너의 잘 생긴 얼굴이라는 말에 우쭐한 굼벵이가 슬그머니 눈을 빼 가재에게 빌려 줬다지, 한 번만 달아 보라고…… 얼씨구나.
눈을 바꿔 단 가재가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내빼버렸대. 눈을 뺏긴 꿈벵인 그래서 느림보가
됐다지. 가잰 그래서 만날 뒷걸음질을 치고.
- 알배기다, 알배기!
더듬질이 한참이던 한 아이가 고함을 지른다. 시선이 한꺼번에 소리 쪽으로 쏠린다. 알배기? 가을에? 하지만 정말로 아이의 손에서 두툼한 꼬리 밑에 새가만 알들이
다닥다닥 붙은 알배기가 파딱이고 있다. 입을 헤 벌린 채 아이들은 꿀꺽 꿀꺽 침들을 삼킨다. 가재는 봄철에 알을 배지만 봄철이라고 널린 게 아니다. 알을 밴
가재는 봄철에도 가슴 뛰게 만드는 놈이다. 그런 알배기가 가을에 올라 오다니. 오죽하면 가을 알배기는 공주님 속곳보다 귀하다는 옛말도 있다. 씹으면
오도독 오도독 터지는 가을 알배기는 맛도 유난히 고소하다. 한꺼번에 기가 죽은 아이들은 짓궂은 장난질도
잊은 채 정신 없이 개울을 더듬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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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지도 못했던 제 소설이 올라와 있군요.
졸작 <城主와 아이들>은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세태와 낯설게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필자가 이민을 떠나기 직전인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500여 편의 응모작 중 열 몇 편의 최종심에 올랐던 작품입니다. 이민을 떠나며 습작품들을 모두 폐기하다 하나 남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초기작품이라 작품성보다는 역사성에 의미를 두고 활자화 시킨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작품성보다 군사정권의 검열이 우위였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강기영 선생님, 접근방식이 선생님의 여타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군요. 전 아주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김채형 선생님, 그 동안에도 별일 없으셨지요?
저 자신도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과연 동일인물인지 가물거리기만 합니다.
잘 지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글도 변하게 되겠지요. 저도 요즘은 다르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강 선생님, 작품 소개 고맙습니다.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으셨다는 김 선생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작품 덕분에 강 선생님과 오랜만에 통화했는데, 지금 사이트에 들어와 보니, 김 선생님 댓글이 있어 반갑게 읽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조만간 뵙기 바라며, 감사합니다.
도마 선생님. 대략 45년 전쯤에 썼던 이름 없는 작가의 작품까지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카페에도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