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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만은 조선인인가?
1) 위만은 과연 조선사람인가?
이른바 한사군이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 한나라가 그 땅에 설치했다는 4개의 군을 말한다. 그 4군의 위치는 오늘날 한반도 북부 지역이라는 것이 종래의 주장이며 이 주장은 현재까지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원전의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의 정사 역사서를 중국 25사라고 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이다. 이 중 115번째가 바로 고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조선열전》이다. 이 《조선열전》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은 역대 단군(檀君)도 아니고 은나라 출신 현자라는 기자(箕子)도 아닌 위만(衛滿)이란 인물이다.
국사 교과서에선 위만이란 인물을 ‘조선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주장한 인물은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두계 이병도였다. 그러나 『사기』에는 서두에서부터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모반했을 때 조선으로 건너온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노관이란 인물은 한 고조 유방(劉邦)의 죽마고우였던 인물로 유방과 같은 날에 태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유방이 항우(項羽)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뒤 이성제후(異姓諸侯)로 봉해졌다. 그러나 유방은 이후 한신(韓信)을 비롯한 이성제후들에게 올가미를 씌워 하나씩 제거했는데 이른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이 때 노관 역시 신변에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했다. 유방은 그래도 친구라고 봐줬지만 기원전 195년에 유방이 급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버렸고 이 때 노관의 부장이었던 인물이 바로 위만으로 그는 주군과 달리 조선으로 건너갔다.
당시 기록을 보면 위만은 상투를 틀고(魋結) 만이복(蠻夷服)을 입은 채 천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적혀 있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上下障)에서 살며 차츰 ‘진번조선’에 복속했다가 이후 만이와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게 됐다고 적혀 있다.
위만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조선의 왕은 국사 교과서에 나온대로 준왕(準王)이란 인물이었는데 준왕은 그를 신임하여 국경 수비를 맡기고 상하장이란 곳에 부임시켰다. 그러나 위만은 중원에서 들인 버릇을 남 못 주고 준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가 기원전 194년으로 그가 왕이 된 이후의 조선을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부른다.
이병도 박사가 위만을 조선인이라 주장한 근거는 그가 ‘상투를 틀고 만이복을 착용한 점’, ‘준왕이 국경 수비를 맡길 정도로 신임한 점’, ‘왕이 된 이후에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한 점’, ‘토착민들을 널리 등용한 점’이었고 이는 국사 교과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이걸 가지고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볼 근거가 될까?
만이복은 옷고름이 왼쪽으로 있는 옷
만이복은 다른 말로 호복(胡服)이라고도 하는데 호복과 한복(漢服)을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옷고름’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인데 옷고름이 오른쪽에 있을 경우 칼을 쓰거나 활을 쏠 때 옷고름이 걸리적거려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족들은 복장을 착용하는데 있어 하(夏) - 은(殷) - 주(周) 이 3대부터 계승된 전통적인 예법을 준수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때문에 일상생활에 다소 불편하더라도 전통에 따라 오른쪽 옷고름을 고수했다. 지금도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복(漢服)엔 옷고름이 오른쪽에 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그림 속 남자들의 옷차림을 보면 지금 한복과는 달리 옷고름이 반대쪽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옷고름이 왼쪽에 있었던 이유는 칼과 활 등을 다루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그림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러나 동이족은 활 등의 무기를 자주 다루어야 해서 한족처럼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의를 위해 왼쪽 옷고름을 고수했다. 본래 우리의 한복(韓服)도 옷고름이 왼쪽에 있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등 벽화만 보더라도 당시 고구려인들의 복장을 보면 옷고름이 왼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신라가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당나라의 관복을 입기로 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오른쪽 옷고름으로 바뀌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오른쪽 옷고름으로 내려온 것이다. 어쨌든 기록에 나온 만이복이란 ‘옷고름이 왼쪽에 있는 옷’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만이복’이란 옷이 반드시 ‘한복(韓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추결이라는 풍속도 『사기』에는 남월(南越)의 왕으로 남만(南蠻) 문화에 동화된 위타(尉他)란 인물이 추결을 했다고 기록하기도 했으므로 확실하게 조선의 상투와 같은 것인지 불분명하다. 따라서 이병도 박사가 위만이 조선인이란 근거로 든 만이복과 추결은 그가 조선인이라고 볼 근거로 삼기엔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2) 위만이 혈통 상 조선계일지 몰라도 국적은 연나라
준왕이 위만에게 국경 수비대장이란 중책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도 그렇다.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면 연나라가 있던 곳은 한나라의 동북방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과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위만이 국경 지대의 지리에 매우 밝았을 가능성이 크다.
준왕 입장에서는 그가 국경 일대 지리에 밝으니 국경 수비 임무에 능통하리라 판단해서 임명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다른 중국인들에게도 “우리 조선은 능력만 있으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이렇게 요직에 등용한다.”는 점을 선전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준왕의 성품 자체가 남을 너무 곧이 믿어서 잘못된 판단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위만이 왕위에 오른 뒤 국호를 조선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토착민들을 중용했다는 사실도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증거로 삼기엔 매우 부족하다. 위만이란 인물은 일종의 굴러온 돌이었고 박힌 돌을 빼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니 토착민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회유책의 일환으로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쓰고 토착민들을 중용하며 달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시 위만이 조선 사람이란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그가 혈통적으로 조선인의 핏줄을 타고 났거나 혹은 어느 정도 조선의 말과 풍속에 대해 알고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일단 그는 사서에 연나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국적 상 연나라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계 미국인이 혈통적으로는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국적은 미국이니 그들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다. 한민족(韓民族)이라 할 순 있어도 한국인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위만도 마찬가지로 설령 그가 조선 사람의 핏줄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그는 본래 연나라에서 관직을 살았던 연나라 사람이었다.
3)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어디인가?
한사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지다. 그간 국사 교과서에는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주장했고 왕검성이 있었던 자리에 설치된 낙랑군 역시도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지금까지도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위만조선의 수도가 평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간의 학설에 대해선 재고가 필요하다.
사서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의 위치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아무 근거 없이 왕검성 위치를 북한의 평양으로 왜곡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사기』에는 삼가주석(三家注釋)이란 것이 있는데 첫 번째는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학자 배인(裴駰)이 쓴 《사기집해》이고 두 번째는 당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쓴 《사기색은》, 마지막 세 번째는 당나라 때 장수절(張守節)이 쓴
《사기정의》이다.
이 중 《사기집해》에선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기록했다. 《사기색은》에는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험독은 옛 도읍의 이름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지리지의 주(注)에서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 하였고,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험독현은 한나라 요동군의 속현이었는데 창려에 요동군 험독현이 있었고 이곳이 곧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는 것이다. 창려라는 지명은 지금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에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학계는 아직도 평양에 왕검성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제 어용학자들이 반도사관을 주입하기 위해 동쪽으로 1,200km나 이동시켜 조작한 것인데 아직도 신줏단지 받들 듯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이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었다면 그간 알려진 한사군의 위치도 필연적으로 재검토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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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조선의 영토
국사 교과서 속 고조선의 영토를 그린 역사부도.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가 처음엔 지금의 요서 지방이었으나 후기엔 북한 평양 일대로 옮겨갔다는 이른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 들어가 있다.(지도 출처 : 국사 교과서)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사기』 《조선열전》의 서두를 보면 위만이 조선으로 오기 전의 역사가 잠시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을 요약하면 이렇다. 연나라가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해서 복속하게 했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쌓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 밖을 국경으로 했는데 한나라가 일어선 이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나온 연나라가 전성기 때 조선을 침략했다는 말은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조선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풀려났던 장수 진개(秦開)가 조선을 침략해서 영토를 빼앗아간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른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변종 식민사관에 불과하다.
1)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
우선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은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마천은 무엇이 마음에 걸린 것인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얼토당토않게 《조선열전》이 아니라 《흉노열전》에다 싣고 있다. 그러면서도 진개가 공격한 대상에 대해 흉노가 아니라 ‘동호(東胡)’라는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 기록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연나라의 현장(賢將) 진개라는 인물이 동호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후에 연나라로 돌아와 동호를 침략했고 동호는 1,000여 리나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았으며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 5개 군을 두어 호(胡)를 방어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두고 『삼국지』는 현전하지 않는 사서인 『위략(魏略)』을 인용해 조선이 연나라가 칭왕을 하며 동쪽을 공략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칭왕을 해 연나라를 격파하려 하며 조선과 연나라가 대립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 변방을 침략해 2,000여 리 땅을 취하여 만반한(滿潘汗)이란 곳을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약해지게 됐다고 기록했다.
국사학계에서는 동호와 조선을 별개의 세력이라 주장하며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공격하고 뒤이어 조선도 공격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지리지》현도군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현도군은 무제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9년)에 설치했다.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라고 불렀는데,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
이에 대해 응소(應邵)는 “옛 진번인데 조선 호국이다.(故眞番朝鮮胡國)”는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진번과 고조선을 ‘호국(胡國)’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는 곧 과거 중국에서는 조선을 ‘胡’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앞의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을 다시 보면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군을 두어 호(胡)를 방어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 조선을 호라고 불렀다고도 했으니 연나라가 5개의 군을 설치해 방어하려 한 호는 바로 고조선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삼국지』《위서》동이전 ‘예’ 조에는 이런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 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는데 이 때 이후로 호(胡)와 한족이 차차 구별되었다.(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후로 호와 한족이 구별되었다는 기록인데 이 역시 조선을 ‘호’라고 불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을 중국에서는 ‘호’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동쪽에 있으니 ‘동호’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호와 조선을 구별해서 봐야 할까?
『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에 기록된 연나라의 세력을 표시하면 이렇다. 요동과 조선이 기존에 알려진 저 위치에 있었다면 연나라 영토가 굉장히 넓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광대한 영토를 지닌 나라가 춘추시대엔 왜 춘추5패에 들지 못했는지 의문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그 밖에 『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을 보면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으로 호타(唬沱)와 역수(易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나라 동쪽에 있었던 동호라는 세력과 조선이 과연 별개의 세력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에 대한 기록을 『사기』《진시황본기》를 통해 살펴보면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向戶)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거해 요새를 삼았고 음산(陰山)을 아우르고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즉, 연나라의 동쪽 접경국은 조선이었고 연나라가 멸망한 이후 진나라의 동쪽 접경국 역시 조선이었다. 따라서 동호란 세력은 조선과 별개의 세력이 아닌 조선을 가리키는 멸칭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 영토를 줄이고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사학계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사건을 종합해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란 자가 조선을 쳐서 만반한(滿潘汗)까지 영토를 빼앗아 갔고 연나라가 조선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양에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연나라∼진나라 때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었다는 ‘요동의 바깥 요새’는 결국 만반한이란 곳을 의미하고 그 후 한나라 때 패수로 양국의 국경이 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을 두고 한국과 중국 양국의 사학계들이 농간을 부리며 고조선의 영토를 줄이는데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바로 이 기록을 악용해서 나온 주장이다.
2) 처음부터 진개의 영토 확장 사실은 과장됐다
『사기』《흉노열전》에서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치고 1,000여 리의 땅을 얻었다고 했는데 『삼국지』는 『위략』의 기록을 인용해 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2,000여 리의 땅을 취했다고 한다. 이렇게 같은 사건을 두고 기록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결국 연나라가 조선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서로 과장하려 한데서 나온 것이란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에 기록된 연나라의 강역을 보면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으로 호타(唬沱)와 역수(易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면적은 사방 2,000여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개가 정확하게 언제 조선을 침공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위 열전 속 주인공인 소진은 진개와 동일하게 기원전 4세기 때 인물이다. 『사기』《소진열전》에는 연나라의 영토가 2,000여 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 진개가 소진이 죽은 기원전 317년 이후에 조선을 침공했고 『위략』의 기록대로 2,000여 리의 영토를 확보했다면 기존 연나라의 영토보다 2배로 늘린 셈이 된다.
『사기』《흉노열전》의 기록대로 1,000여 리의 영토를 확보했다고 해도 기존 연나라의 영토를 1.5배 늘린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업적을 남긴 정복자가 역사서에 중요하게 기록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사기』에 진개를 별도로 기록한 열전조차도 없다.
이것은 결국 진개가 확보한 지역이 그리 넓은 곳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진개가 조선을 침략해서 1,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갔다는 둥 혹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갔다는 둥 하는 것들은 모두 과장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이렇게 입론에서부터 무너진다.
진개가 빼앗은 지역이 그리 넓은 곳이 아니었다면 고조선이 굳이 수도를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측의 저 과장된 기록을 들먹이며 ‘중심지 이동설’을 떠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다.
3) 연나라 장성이 있었던 곳은 북경시 일대
연나라가 조선을 공격해서 땅을 넓힌 다음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축조했다면 그 장성이 있는 곳이 곧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되었을 것이다. 국사학계에서는 연 장성의 양평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하고 있고 조양은 북경 북쪽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북경 북쪽에서 동쪽으로 요령성 요양까지 장성을 쌓았으며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축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로 연 장성이 축조됐다면 요하 하구 쪽이 텅 비어서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다. 반면에 본지가 주장하는 대로 축조됐다면 연나라 동쪽에 있었던 조선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지도 출처 : 이일봉 저 『실증 한단고기』)
그러나 국사학계의 주장대로 연 장성이 저렇게 축조됐다면 요하 하구 쪽이 텅 비어 있기에 장성을 쌓은 의미 자체가 없다. 또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장수 몽념(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를 정벌하게 한 뒤에야 가능했는데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가 무슨 수로 북경 북쪽에서 요령성 요양시까지 장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거리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직선거리와 맞먹는다.
국사학계의 주장과 달리 『한서』 《지리지》 요동군 조의 기록을 보면 요동군의 속현엔 양평현도 있고 요양현도 있어 두 곳이 같은 곳이 될 수가 없다. 주석을 들여다보면 요양 근처를 흐르는 강은 대요수가 아니라 대량수(大梁水)라는 강이라는 사실도 덤으로 알 수 있다.
『후한서』《원소, 유표열전》에 딸린 주석을 보아도 현재 요령성 요양이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이 있던 곳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상당히 의문이 간다.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의 치소 양평에 대해 당나라 사람 이현(李賢)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양평현은 요동군에 속해 있으며 그 옛 성이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쪽에 있다.(襄平縣屬遼東郡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노룡현은 현재 하북성 난하 인근 지역에 있다. 결국, 늦어도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는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한나라의 요동군이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를 중심으로 있었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한나라 때 대요수라는 강은 지금의 진황도시 일대를 흐르는 난하나 혹은 그보다 더 서쪽의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진개가 조선의 영토를 빼앗은 후 연나라는 그곳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강단사학자들과 중국의 어용사학자들은 요서군과 요동군의 위치를 모두 지금의 요령성 요하의 동서에다 갖다 박아놓았는데 과연 그러한지는 살펴봐야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전국시대 당시 상곡군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부 지역에 해당한다고 적혀 있고 어양군은 현재 북경시 밀운구 일대로 나와 있다. 우북평군의 경우는 한나라 이전의 기록은 발견할 수 없는데 한나라 때 우북평군의 위치는 대략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와 당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해 땅을 빼앗은 후 설치한 5개의 군 중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의 위치는 모두 지금의 북경시 근처이다. 그런데 과연 요서군과 요동군만 요령성에 뚝뚝 떨어져 있었을까?(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어쨌든 모두 지금의 북경시 부근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서군과 요동군만 요령성 지역에 멀리 뚝뚝 떨어져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해 빼앗아간 지역은 지금의 북경시 일대를 말해주는 것이며 진개의 침략 이전까지 북경시 일대는 모두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성의 끝인 조양이란 곳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張家口)시 회래현(懷來縣)으로 오늘날 북경시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양평인데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양평이란 지명은 한나라 때 지명이므로 그보다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연나라 때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중국은 예부터 새로 영토를 얻으면 국경 지역의 지명들을 새로 얻은 지역에다 옮겨놓고 기존의 지명을 새로 바꿔버리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서』《지리지》 요동군 조의 기록을 다시 보면 양평의 주석에 “왕망이 창평으로 불렀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연 장성의 종점인 양평이 정말로 한나라 요동군 때 양평이었다면 연 장성에 대한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 연 장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것은 결국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과 연 장성의 종점인 양평이 서로 다른 곳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로 볼 때 실제 연 장성의 종점인 양평은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이 있었던 하북성 노룡 지역보다 더 서쪽에 있었고 후에 한나라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동쪽으로 이식시킨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특히 진개가 활동했던 시기와 같은 기원전 4세기 때 살았던 소진에 대해 기록한 『사기』《소진열전》에 의하면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이 있다고 했다.
만일 연 장성이 하북성 회래현 북쪽에서 노룡현 서남쪽까지 축조되었다면 장성은 동서로 축조되었으니 연나라 동쪽에 있는 조선을 방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과 연 장성의 종점인 양평이 다른 곳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연 장성의 다른 종점인 조양과 남북으로 있는 곳에 양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주석엔 왕망(王莽)이 요동군 양평현을 창평이라고 고쳤다고 했는데 창평이란 지명은 지금도 북경 서북쪽 지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를 보면 상곡군 조에도 상곡군의 속현에 창평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혹, 이것이 연나라 때 양평이었던 곳이 한나라 때 상곡군 창평현이 된 곳인데 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진 것을 숨기기 위해 엉뚱하게 왕망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단순히 두 곳의 이름이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연나라 때 양평은 한나라 때 상곡군에 편입된 북경 서북쪽의 창평현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연 장성이란 하북성 북부에서 요령성 요양까지 쌓은 장성이 아니라 북경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쌓은 장성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그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해 획득한 지역은 오늘날 북경시 일대이므로 고조선이 이 지역을 상실했다고 해서 대륙에서 한반도로 중심지를 이동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고조선이 한반도 뿐 아니라 대륙에도 영토를 두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자 기존의 한사군 재 한반도설이란 정설을 사수하면서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꼼수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을 낸 것으로 보인다.
3. 위만조선 위치
모든 사서의 기록을 종합했을 때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던 패수는 오늘날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조백하로 추정된다. 검정색 선은 당시의 해안선을 표시한 선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을 침략해서 영토를 빼앗았고 그 지역은 지금의 중국 북경시 일대라는 것을 앞선 기사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보면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 밖을 국경으로 했는데 한나라가 일어선 이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라는 것은 중국 특유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적은 핑계에 불과하고 실상은 ‘지킬 땅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늦어도 진·한 교체기 때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잃었던 옛 땅을 다시 회복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 허무맹랑한 주장이란 걸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중요한 것은 조선이 옛 땅을 회복한 후 새로이 국경이 된 패수는 어디인가이다.
1) 패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동쪽으로 들어가는 강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 된 패수에 대해 근세조선 때 한백겸(韓百謙)이나 정약용(丁若鏞) 등은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에다 비정했고 일제 강점기 시절 어용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했다. 현재 주류 강단사학계에선 패수를 압록강 혹은 청천강에다 비정하고 있는데 패수를 한반도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 견해의 특징은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인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과연 이러한 견해가 맞는 것일까? 패수의 위치를 알기 위해선 먼저 강물의 흐름에 대해 기록한 『수경(水經)』이란 책에 적힌 패수의 기록을 살펴봐야 한다.
이 책은 한나라 때 상흠(桑欽)이라는 학자가 강물의 흐름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현재 그가 쓴 원본은 전하지 않고 북위 때 역도원(酈道元)이 주석을 단 『수경주(水經注)』라는 책만 전하고 있다.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패수는 낙랑(樂浪)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즉, 패수의 발원지는 낙랑군의 누방현이란 곳이고 그곳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이란 곳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남쪽으로 흐른다는 것과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만일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과 전혀 들어맞지가 않는다. 대동강은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고 서쪽 바다로 들어가지 동남쪽으로 흐르고 동쪽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패수를 한반도 내 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들은 이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도와 그 후학들이다.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는 『수경』에 기록된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란 구절은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西入于海)’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우겼다. 이병도는 《사기집해》에 기록된 조선의 어원이 된 강인 열수(洌水)는 대동강이고 패수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평양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후학들인 노태돈과 송호정 등도 마찬가지다.
2)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이 패수로 본 강은 대동강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수경』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건 앞서 언급한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수경』이란 책은 전한 시대에 저술된 책이고 『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북위 때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 책은 500~600년의 시차가 있다.
이 정도 차이라면 얼마든지 지명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즉, 역도원이 고조선의 패수와 고구려의 패수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주석을 붙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선 역도원이 패수로 본 강이 어떤 강이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경주』에 적힌 기록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역도원은 기원전 109년에 한나라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고 패수에서 위만조선의 군대를 깨뜨리고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하며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도리가 없다”고 단정했다. 여기서부터 그가 고정관념을 가진 채 기록을 접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역도원은 현재 패수는 고구려 영토에 있다고 하며 본인이 북위를 방문한 고구려 사신을 만나 패수의 흐름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평양)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곧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인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는 답변을 들었다.
또 역도원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 조에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점을 들어 『수경』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역도원의 기록이 나오자 국사학계는 마치 자신들의 정설이 확고부동해졌다고 굳게 믿고 환호했다. 실제 노태돈, 송호정 등의 교수들은 저 역도원의 주장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수경』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몰아붙였고 패수를 한반도의 압록강 혹은 청천강이라 떠들었다.
비단 이런 주류 강단사학자들 외에도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동부 지역에 있었단 사실을 고증해 선구자적 연구 결과를 냈던 윤내현 교수나 이덕일 박사 등도 저 역도원의 『수경주』 속 기록에 대해선 그가 본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오류를 공통적으로 범했다. 이는 모두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가 지금 북한의 평양이란 고정관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본지는 어째서 이런 주장들이 나온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다시 역도원의 『수경주』 기록을 보면 패수는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대동강이든 청천강이든 압록강이든 그 강들은 모두 ‘서남쪽’으로 흐른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어떻게 ‘서북쪽’으로 흐른다는 패수와 같은 강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 결국 역도원이 말한 패수 역시 대동강이 될 수 없다는 걸 말해준다.
3) 고구려 평양성은 동경 요양부에 소재
그렇다면 역도원이 말한 패수는 어떤 강이었을까? 모두들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중국 25사 중 『요사』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요나라 동경 요양부가 과거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즉,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포하(蒲河), 청하(清河), 패수(浿水)가 있고 또 니하(泥河)라고 했으며 또 물에 한우초(蓒芋草)가 많아서 한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한다.(有蒲河清河浿水亦曰泥河又曰蓒芋濼水多蓒芋之草)”
동경 요양부 인근에도 패수라 불린 강이 있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이 한우락이란 강을 고조선의 패수로 보았는데 그 위치는 요령성 해성(海城)시 일대에 있다고 한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어니하(淤泥河)를 패수로 보았는데 역시 같은 강이다.
『수경주』의 저자인 북위 출신 역도원은 고구려의 패수를 위만조선의 패수와 동일한 강으로 봤는데 『요사』 《지리지》는 요나라 동경 요양부가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침 요양에는 태자하란 강이 있고 이 태자하는 『수경주』의 기록대로 '서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역도원이 말한 패수 또한 대동강이 아닌 이 태자하일 가능성이 더 높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로 볼 때 역도원이 말한 패수는 국내 학자들이나 중국인 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대동강이 아니라 『요사』에 기록된 요령성 해성시 일대의 한우락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역도원이 말한 서북 방향으로 흐르는 패수와 절대 같은 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패수가 한반도 내의 강이 될 수 없다는 증거는 『사기』《조선열전》만 제대로 훑어봐도 5가지는 찾아낼 수 있다. 그 5가지의 근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
① 한나라가 건국 당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고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② 《사기색은》엔 신찬의 말을 인용해 왕험성이 패수 동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③ 한나라 사신 섭하(涉河)가 패수에서 조선 장수를 살해한 뒤 평주(平州) 유림관(楡林關)을 거쳐 달아났다.
④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荀彘)가 패수 서쪽의 조선군과 맞붙었다가 패전했다.
⑤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가 패수 상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해군사령관 양복(楊僕)은 왕검성의 남쪽을 포위했다.
이 5가지 근거들은 이후 자세히 다 살펴볼 예정이지만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국경을 패수로 조정했다는 점을 볼 때 패수는 요동 인근 지역에 있어야 한다고 봐야 한다. 또 왕험성이 패수 동쪽에 있다면 패수는 남북으로 흘러 땅을 동서로 나누는 강이라고 봐야 하며 왕험성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라 했으니 그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또 평주 유림관이란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인데 섭하가 패수에서 조선 장수를 살해한 후 그곳으로 도주했다면 패수와 유림관이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이후 섭하는 요동동부도위로 임명되고 이후 우거왕(右渠王)이 보낸 조선군에게 붙잡혀 죽는데 요동동부도위의 치소는 요동군 무차현(武次縣)이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 패수였고 섭하가 있던 곳이 요동군 무차현이라면 두 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본지가 주장하는 패수, 왕검성의 위치와 주류 강단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패수, 왕검성 위치를 비교한 지도.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가?(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④와 ⑤는 서로 연계가 되는 내용인데 한나라의 육군을 이끌었던 순체는 먼저 패수 서쪽에 주둔했던 조선군과 맞붙었으나 패전했고 이후 패수 상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기록에 적혀 있다. 만약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고 패수가 한반도의 강이라면 말이 안 된다.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가야 나오는 강이므로 애초부터 들어맞지 않고 압록강이나 청천강은 서남쪽으로 흐르기에 두 강의 상류로 진군할 경우 평양의 동북쪽에 이르게 되지 서북쪽으로 갈 수가 없다. 한나라의 수군을 이끌었던 양복은 첫 전투에서 패전한 후 산 속에 열흘 동안 숨었다가 왕검성의 남쪽을 포위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왕검성의 남쪽에 바다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결국 패수라는 강은 왕검성을 기준으로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정리할 수 있다. 즉, 『수경』의 기록대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맞는 셈이다. 왕검성이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라 했으니 그 서쪽에 있는 강이 패수여야 한다. 본지에서는 조백하(潮白河)가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 근거는 이렇다.
첫 번째로 패수는 왕검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조백하는 북경시 일대를 흐르는 강으로 정확히 왕검성이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흐름의 방향 역시 『수경』에 기록된 대로 정확히 동남쪽이다.
두 번째로 한나라 좌장군 순체가 패수 서쪽에 주둔해 있던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다시 패수 상류의 조선군과 맞붙어 이긴 뒤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순체는 패수를 동쪽으로 건넜고 한나라 군대가 진군한 방향 역시 동쪽이란 말이 된다.
즉, 패수 상류에서 동쪽으로 가면 왕검성의 서북쪽에 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백하의 상류인 북경의 밀운수고(密雲水庫)에서 동쪽으로 진군하면 정확히 왕검성이 있었던 창려현의 서북쪽에 닿게 된다. 단국대학교의 윤내현 명예교수는 난하가 패수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 강 역시 위에서 말한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긴 하지만 순체가 이끄는 한나라 육군의 진로에 문제가 생긴다.
창려현은 난하 하류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패수가 난하라면 굳이 순체의 군대가 난하의 상류로 갈 이유가 없다. 난하의 상류는 연산산맥(燕山山脈)이라는 험준한 산맥과 몽골고원이 이어진 곳이라 진군하기에 별로 좋은 곳이 아니다. 그런데다 난하 상류에서 왕검성이 있었던 창려현까지는 또 수백 km를 남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 때문에 난하보다는 조백하가 더 적합해 보인다.
『수경』에 기록된 동북 지방의 강들. 모두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강들이다.(사진 출처 : 황순종 저,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 얼굴』)
세 번째로 패수가 한나라와 조선 양국의 국경이 된 계기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이 일시적으로 영토를 빼앗겼다가 다시 회복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나라 장수 진개가 빼앗아 간 지역은 지금의 북경시 부근이다. 그러나 난하는 북경보다 더 동쪽에 있어 조선이 영토를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상 3가지 근거로 본지는 패수를 지금의 조백하로 본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은 오직 패수 상류에서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중류와 하류 지방은 양국의 국경이 아니라 조선의 영토 안에 있었다. 그 증거는 한나라 군대가 도강하기 쉬운 중류 혹은 하류를 택하지 않고 패수 상류로 진군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패수 상류 지역에서 양국의 국경이 형성되어 있었고 중류, 하류 지역은 위만조선의 영토 깊숙한 곳에 있어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패수가 조백하라면 아마 위만조선과 한나라 양국의 경계는 대략 북경시의 밀운수고 일대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굿모닝충청(https://www.goodmorningcc.com)
4. 진국은?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역사부도 중 고조선 시대의 역사부도를 보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고조선’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고 한반도 남부엔 ‘진’이라는 정체불명의 국가가 표기되어 있다. 이 나라를 진국(辰國)이라 하는데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선 이 나라가 삼한(三韓)의 전신이라 하며 한나라와도 교역을 했던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진국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국사학계에선 여러 부족의 연맹체 국가라 했고 그 위치가 한반도 남부라고 했는데 이 역시 국사학계의 태두인 두계 이병도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맞는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진국의 위치는 위만조선의 동쪽
우선 국사 교과서에선 고조선이 있던 당시에 지금의 남한 지역엔 진(辰)이란 여러 부족의 연맹체로 이루어진 국가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 진이란 나라가 언급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략)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후략)”
즉, 이로 보아 고조선의 동쪽에 예라는 나라가 있었고 남쪽에 진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말하는 걸 알 수 있다. 국사 교과서는 진국이란 나라가 ‘고조선’의 남쪽에 있었고 한나라와 교역하던 나라라고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기록의 원전(原典)에 대해선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는 조건으로 한나라는 요새 밖 이민족들의 침략으로부터 위만조선을 보호하는 대신 위만조선 역시 한나라와 교류하는 이민족 국가들을 방해하지 말도록 서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한나라 측에선 병력과 자금을 위만조선에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만조선은 재물과 병력만 받아 챙겼을 뿐 한나라와의 조약 내용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나라로부터 지원받은 병력과 자금을 토대로 주변 소읍(小邑)들을 침략해 자신들의 세력을 넓혔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을 복속하니 수천 리나 되는 땅을 차지하게 됐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위만 사후 위만조선의 왕위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에게로 넘어갔는데 그가 바로 흔히 말하는 우거왕(右渠王)이다. 우거왕은 할아버지인 위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한나라에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한나라의 망명자들을 회유해 인구를 늘렸고 한나라에 입조(入朝)도 하지 않으며 신하가 되기로 한 조약 내용을 위반했다.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 같은 내용이 『한서』 《조선열전》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여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정말 위만조선이 지금의 북한과 만주 일대에 있었고 진이란 정체불명의 국가가 지금 남한 지역에 있었다면 왜 굳이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경유해서 진과 교역을 했을까? 위에 실린 국사 교과서 속 지도대로라면 그냥 산동반도 일대에서 배를 띄워 곧바로 가서 교역하면 될 것 아닌가?
길이 육로만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꼭 위만조선을 경유해야만 진이란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선 이런 점에서 과연 위만조선과 진국이 국사 교과서 속 지도대로 위치해 있었던 것이 맞는지 의문스럽다. 더 큰 문제는 진국의 위치에 대한 국사 교과서 속 설명은 사서의 기록과도 불일치한다는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 조를 보면 『위략』을 인용한 대목에 진이란 나라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일찍이 우거왕이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왕에게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000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조선, 진번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眞番不相往來)”
위 기록 속의 진번이 원문에는 ‘貢番’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히 오기(誤記)이기에 바로잡았다. 어쨌든 이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전 재상 역계경이란 인물이 우거왕에게 한나라와 맞서지 말 것을 간언했으나 거부당하자 자신이 거느린 2,000여 호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진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국의 위치가 국사 교과서 속 설명대로 위만조선의 ‘남쪽’이 아닌 ‘동쪽’이라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혼란이 발생한다. 위만조선이 국사 교과서 속 설명대로 지금의 북한 지역과 만주에 걸쳐 있었다면 진국은 그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일본 열도에 있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사서의 기록과 자신들의 지식이 다르다면 자신들 지식이 잘못될 가능성을 먼저 검토해야 하지만 국사학계는 그런 것이 없다시피 하다. 그럼 진국이 위만조선의 남쪽에 있다는 근거는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놀랍게도 이병도가 1948년에 쓴 『조선사대관』이었다. 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대개 이 때 한은 동방(東方, 예맥․조선․진번 등)의 경제적 이익을 과대평가하여 이에 마음을 동한지 오래였으므로 기회만 있으면 침략의 손을 대려 하였다. 그런데 우거왕의 한에 대한 태도는 위의 예군과는 정반대로 매우 날카로웠다. 그는 부조(父祖) 이래의 전통책에 의하여 한(漢, 특히 요동)의 유망인(流亡人)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고 남방의 진국이 한에 교통하려 함을 방해하였다.”
여기서 진국을 위만조선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을 그대로 베껴서 국사 교과서에다 실은 것이다. 그런데 이병도는 어째서 위만조선 동쪽에 있었던 진국이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후에 저술한 『한국고대사연구』에도 진국과 진왕(辰王)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서술했을 뿐 왜 진국의 위치가 위만조선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병도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서술한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실증사학을 표방하는 국사 교과서는 아직도 진국의 위치를 위만조선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적고 있다. 이건 정말 모순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국 결론을 따져보면 강단사학계의 비정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의 저자 문성재 씨가 지적했듯이 국사 교과서 속 지도에다 『위략』에 적힌 진국의 위치를 대입해 보면 진국이란 나라는 동해 어딘가에 있는 해상국가로 둔갑하게 된다. 또한 위만조선의 경우도 문제가 된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주변국가 사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사기색은》은 오늘날 하북성 창려현이 요동군 험독현이었으며 그곳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있다고 했다. 그곳으로 위만조선의 위치를 옮겨놓고 보면 위만조선의 동쪽에 진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 위치에 있게 되면 진국은 동해를 멀리 돌아가지 않는 한 좋든 싫든 위만조선의 영토와 영해를 거쳐야만 한나라에 갈 수 있게 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즉,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진국을 비롯한 주변국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진국 등 주변국가가 한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위만조선의 영토나 영해를 거쳐야 하며 그 외의 다른 길은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 속 지도대로라면 굳이 진국 등 주변 국가가 위만조선의 영토나 영해를 거칠 필요가 없다.
앞서 살폈듯이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었던 것을 보았다. 위만조선을 그곳으로 옮겨놓고 보면 보다 설명이 수월하게 된다. 진국은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오늘날 만주 지역에 있었던 나라로 볼 수 있다. 만주 지역에서 중원의 한나라로 가려면 북경시 일대에 있는 위만조선을 거쳐 가야하니 사서에 기록된 상황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진국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제 검증해볼 것은 과연 진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냐는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韓) 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삼한(三韓)의 전신이 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조 역시도 삼한의 전신을 진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는 이 진국이란 나라를 마치 고조선과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잘못되었다고 봐야 한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에 나누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의 6부에 대한 설명인데 이 진한 6부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눠 살면서 6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진한의 뿌리가 고조선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한을 포함한 삼한의 전신이란 진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신라 말 유명한 학자인 최치원(崔致遠)도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서 “마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 변한은 백제”라고 주장했다. 즉, 삼국의 전신이 삼한이라는 것이다. 또 고려 말 학자인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삼국의 뿌리를 단군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濊), 맥(貊), 응(膺)이 있는데 이들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세계(世系)는 역시 단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위 기록에 나온 시라와 고례는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말한다. 최치원과 이승휴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결국 삼국은 물론 옥저와 부여, 예, 맥 등의 열국들이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삼한의 뿌리라는 진국은 당연히 단군조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사군 전쟁 당시 진국은 단군조선의 후예인 북부여
아마도 과거 국사시간에 고조선은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변천됐다고 배웠을 것이다. 이런 도식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기자조선이 들어섰고 기자조선이 망한 후에 위만조선이 들어섰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도식이다.
우선 『삼국유사』 권 1 기이 1 고조선 조의 기록을 보면 주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고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서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아사달로 환도해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출신 현인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에서 나온 것이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그런데 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볼 때 기자조선이 완전히 단군조선을 대체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손 치더라도 단군조선의 영토 일부를 점거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영토는 여전히 단군조선의 통치 하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계속해서 『삼국유사』 권 1 기이 1 고구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연(一然)은 『단군기(檀君記)』란 책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엔 “해모수(解慕漱)가 하백의 딸 유화와 통정해 주몽을 낳았다”고 기록했다며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고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선사는 해모수 역시 단군이라고 본 셈이고 부여의 왕 해부루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역시 단군의 아들이라 한 셈이다. 이 해모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북부여의 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단군조선은 북부여로 계승되었으며 북부여의 임금 또한 단군이라고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고 기록했는데 조선시대 학자 서거정(徐居正)도 지적했듯이 단군이란 임금의 칭호일 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단군의 수명이라고 기록된 것은 단군조선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 기록대로 본다면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1,908년의 역사를 거친 후 멸망했고 북부여로 계승됐다고 봐야 한다.
연도를 계산해 볼 때 기원전 2세기 말 한사군 전쟁 당시에 기록된 진국이란 나라는 단군조선의 후신이자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만 『한서』의 기록을 볼 때 위만조선과 진국 즉, 북부여는 서로 적대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진위 여부를 의심받고 있는 『환단고기』의 《북부여기》를 보면 북부여와 위만조선 사이 전쟁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단군조선 서부 지역을 점거한 세력
그럼 이제 남은 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정체가 무엇이냐다. 이들이 단군조선을 대체한 세력이 아니라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고조선은 크게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것이 삼한(三韓)이며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다. 이후 이 삼한은 삼조선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삼조선으로 바뀐 후엔 진조선(眞朝鮮), 막조선(莫朝鮮), 번조선(番朝鮮)이 된다.
같은 내용이 진위 논쟁을 의심 받고 있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를 두고 강단사학계에선 두 사서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베낀 것이라 강변하지만 그 반대일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열어두지 않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어쨌든 이 삼한 중 진한은 역대 단군들이 직접 통치한 지역이고 마한과 번한은 각기 부왕(副王)을 두어 다스렸다. 그리고 이 삼한의 안에는 또 70여 개가 넘는 거수국(渠帥國)이란 제후국이 있었다. 때문에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 등은 고조선의 통치 체제를 중국 주나라와 마찬가지로 봉건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지역에 대해 진한은 지금의 만주 지역, 마한은 한반도, 번한은 만주 이서 지역이라 했다.
단재 신채호는 기자가 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뒤 단군이 천도했다는 기록을 부정하며 기자의 먼 후손이 삼조선의 일부 중 번조선을 차지하고 왕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기자의 마지막 후손이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箕準) 즉, 준왕(準王)이고 그 이후에 위만조선이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소위 기자조선이니 위만조선이니 하는 것들은 고조선 즉, 단군조선을 완전히 대체한 세력들이 아니며 단군조선의 서쪽 일부 지역을 점거한 채 ‘조선’이란 국호를 참칭한 세력들이라고 봐야 한다. 본지가 이 한사군 전쟁의 주체에 대해 ‘고조선’이란 명칭을 쓰지 않고 ‘위만조선’이란 명칭을 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고조선은 오로지 단군조선만을 지칭하는 말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 역사의 흐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도 ‘고조선’으로 인정할 경우 우리 역사의 흐름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단군조선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그와 구분해서 봐야 한다.
예의 위치는 중국 하북성 발해 연안
국사 교과서 속에 나온 ‘남방의 진’의 실체에 대해 풀었으니 이젠 ‘동방의 예’가 있던 곳에 대해서도 풀어볼 필요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라를 동예(東濊)라고 알고 있겠지만 실제 사서에는 그냥 예(濊)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즉, 동예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쓴 명칭이 아닌 셈이다.
이 예의 위치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지금의 원산만 일대에 표기해 놓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먼저 『후한서』 《동이열전》 예(濊) 조의 기록을 보면 이런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하며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으며 서쪽으로 낙랑군에 이른다.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예와 옥저, 고구려는 모두 본래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기록인데 그 위치는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 진한의 북쪽이며 낙랑군의 동쪽이라는 것이다. 얼핏 봐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본지는 앞서 고려 동북 9성의 위치를 밝힐 때 옥저의 위치가 익히 알려진대로 함경도 지역이 아닌 중국 요령성 해성시 인근이라 한 바 있다.
과거 남옥저 즉, 동옥저의 위치는 함경도 일대이고 옥저의 서쪽에 위치한 개마대산은 개마고원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 동옥저는 요령성 해성시 일대에 있었고 개마대산은 그 서쪽의 대흥안령산맥으로 보인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옥저의 위치가 그곳이라면 예의 위치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실린 예의 기록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에 대란이 일어나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사람들 중 예 땅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고 기원전 128년에 예의 군장인 남려(南閭)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 28만 명의 인구를 인솔해 요동에 이르러 내속하니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가 수년 후 폐지했다고 적혀 있다.
연나라는 중국 하북성 서부와 산서성 동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고 조나라는 중국 산서성, 제나라는 중국 산동성에 있었던 나라다.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멀리 원산만 일대까지 피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예가 원산만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이 지금 북한 평양이라면 남려는 어떻게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고 요동까지 갔을까?
또 『한서』 《식화지》를 살펴보면 팽오(彭吳)란 인물이 예맥(濊貊)과 조선을 뚫어서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서 소요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팽오가 설치했다는 창해군은 앞서 언급된 그 창해군을 말한다. 이 기록이 들어맞으려면 문제의 창해군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사서에 기록된 예의 위치를 종합하면 대략 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절대 원산만 지역이 아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창해(滄海)란 발해(渤海)를 가리키는 이칭(異稱)이라는 건 중국사의 상식이다. 후한 말 불세출의 영웅 조조(曹操)가 오환(烏桓)을 평정한 후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쓴 시의 제목이 〈관창해(觀滄海)〉인데 조조가 말한 그 창해 역시 지금의 발해를 가리키는 것이다. 창해군이란 명칭 역시 창해와 인접해 있으니 붙은 고을 이름이니 발해 연안에 있었던 곳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창해군이 있었던 곳이 바로 예가 있었던 곳이므로 예는 지금 중국의 하북성 발해 연안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곳은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해당하고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요동에 닿는다. 그리고 옥저가 있었던 지역의 남쪽에 해당하니 그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만큼 우리 고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엉터리 같은 반도사관으로 인해 고조선의 영토가 크게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출처 : 굿모닝충청(https://www.goodmorningcc.com)
5. 한나라와 위만조선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계속해서 선대부터 맺어진 조약을 위반한데다 한나라와의 대결 구도를 굽히지 않자 먼저 한 무제 유철(劉徹)은 사신을 보내 회유를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신으로 온 인물이 대형사고를 치면서 위만조선과 한나라 양국 간의 관계는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고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위만조선과 한나라 양국 간의 전쟁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 전쟁 기록을 통해 한사군의 정체에 대해서 유추해보도록 하자.
국경에서 살인사건을 일으킨 한나라 사신 섭하
한나라 황제 유철은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에 섭하(涉河)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보내 회유를 시도했다. 우거왕을 만난 섭하는 위만조선이 이전 한나라와 맺은 조약 내용을 위반하며 진번과 진국 등 한나라와 교류하는 국가들의 통교(通交)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며 조약을 준수할 것을 전했다. 그러나 우거왕은 한나라 측의 입장을 묵살했고 결국 섭하는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섭하가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고대엔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배웅을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사신이 아국의 허실을 염탐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사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 섭하의 배웅을 맡은 사람은 비왕(裨王) 장(長)이란 인물이었다.
그런데 섭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자신을 배웅하러 온 비왕 장을 칼로 찔러 죽이고 곧장 패수를 건너 요새로 들어가 황제 유철을 만나 자신이 “조선의 장수를 찔러 죽이고 왔습니다”라고 허풍을 떨었다. 여기서 유철이 위만조선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짓을 했는데 그는 도리어 섭하의 공(?)을 치하하며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에 임명하는 정신 나간 조치를 취했다.
사신을 배웅하러 온 사람을 찔러 죽인 것도 모자라 도리어 벼슬까지 내리니 위만조선의 우거왕 역시 크게 분노했고 결국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선제공격해 요동동부도위 섭하를 죽였다. 그러자 한나라 황제 유철은 죄수들을 모집해 군사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응수해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우거왕이 공격한 지역은 한나라 요동군 무차현
자신을 배웅하러 온 사람을 살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저지른 섭하는 패수를 건너 곧장 ‘요새’를 거쳐 장안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요새에 대해 《사기정의》는 평주(平州) 유림관(楡林關)이라고 적고 있다. 이 유림관이란 곳은 지금도 남아 있는 지명인데 중국 하북성 장가구(張家口)시 양원(陽原)현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섭하가 평주 유림관을 통해 한나라로 들어갔고 그곳이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양원현에 위치해 있다면 패수가 압록강이나 청천강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이나 대동강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정약용 등 일부 조선시대 사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섭하의 행적은 패수에서 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곧장 말을 달려 한나라의 요새로 들어가 달아났다고 봐야 한다. 즉, 패수와 ‘요새’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요새’가 평주 유림관이라면 패수 역시 그 인근으로 가야 한다.
앞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은 패수 상류이며 패수는 하북성의 조백하(潮白河)를 가리킨다고 했다. 섭하는 여기서 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서쪽으로 말을 달려 하북성 장가구시 양원현에 위치한 유림관을 거쳐 장안으로 이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섭하는 자신이 “조선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고 허풍을 떨었고 한나라 황제 유철은 그를 요동동부도위로 임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요동동부도위의 치소에 대해 《사기정의》는 요동군의 무차현(武次縣)이라고 기록했다. 이로 볼 때 우거왕이 공격한 지역은 한나라 요동군 무차현이라고 볼 수 있다.
위만조선 멸망 이전의 한나라 요동군 위치를 알 수 있을 만한 기록이 많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앞서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해 빼앗아 간 지역이 지금의 북경시 일대이며 연 장성 역시 북경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쌓은 장성이라 했다.
그리고 연나라는 당시 그 지역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 5개 군을 설치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요동군 무차현 역시 패수 상류 서쪽인 북경시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와 수군사령관 양복
우거왕이 요동군 무차현을 공격해 섭하를 죽이며 비왕 장의 원수를 갚자 한나라 황제 유철은 이를 위만조선 측의 도발로 받아들이고 즉각 응전에 나섰다. 유철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육군사령관으로 삼아 그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요동을 출발해 위만조선을 치게 했다. 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수군사령관으로 삼아 7,000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옛 제나라 땅을 거쳐 발해(渤海)를 건너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여기서 한나라의 두 장수 순체와 양복이 어떤 인물인지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순체란 인물은 『사기』 권 111 열전 5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에 따르면 태원군(太原郡) 광무현(廣武縣) 출신이라고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이곳을 오늘날 중국 산서성 흔주(忻州)시 대(代)현 일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황제의 수레를 잘 몰아 시중(侍中)이 되면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다. 한나라 때 시중이란 관직은 일종의 별정직이었는데 그 업무란 것도 황제가 사용하는 수레, 가마, 복식, 기물을 관리하는 것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황제 측근에서 시중을 들며 궁궐을 드나들고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까지 배석하다보니 나중엔 요직 중 하나로 간주됐다.
따라서 시중에는 주로 황제의 심복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순체는 교위(校尉)로서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 여러 차례 흉노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순체가 오른 좌장군이란 관직은 한나라 때엔 비상설 무관직으로 도성의 경비나 변방의 방위가 주된 업무였는데 지위는 상경(上卿) 다음으로 대신들만 누릴 수 있는 자주색 끈이 달린 황금 관인을 지닐 특권을 누릴 정도로 높았다.
양복의 관직인 누선장군보다 더 높은 관직인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순체는 별 다른 전공을 세운 적도 없는 인물인데 양복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임명된 것도 아마 그가 유철의 측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떻게 보면 ‘낙하산 인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누선장군 양복이란 인물은 『사기』 권 122 열전 62 《혹리열전(酷吏列傳)》에 기록돼 있는데 그는 의양(宜陽) 사람이며 그곳은 오늘날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 그대로 남아 있는 지명이다. 그는 천부(千夫)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는데 하남태수의 천거를 받아 어사로 승진해 관동 지방으로 파견되어 도적을 체포하는 걸 감독했던 인물이다.
이후 제후국의 왕과 그 자손들에 대한 작위 책봉 및 박탈을 관장하는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었고 기원전 112년 남월 정벌 때 누선장군이 되어 큰 공을 세워 장량후(將梁侯)가 되었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원정 직후 유철은 그의 5가지 과오를 들며 신중한 작전을 할 것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고 적혀 있다.
쉽게 말해 그는 지략이 뛰어난 지장(智將)이라기보다는 용력이 뛰어난 용장(勇將)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년 후 기원전 110년에도 그는 다시 누선장군이 되어 동월을 평정하는데 참전하고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순체보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복의 품계가 이렇다 내세울 전공이 없었던 순체보다 낮았던 것엔 그가 지모가 달리는 인물인데다 순체가 유철의 신임을 톡톡히 얻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그가 기록된 《혹리열전(酷吏列傳)》의 혹리란 ‘혹독한 관리’란 뜻인데 법령을 고지식하고 가혹하게 적용해 백성들을 억압했던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기록이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저 이름이 본명인지는 의심스럽다. 순체의 彘자는 ‘돼지’라는 뜻인데 아명이면 몰라도 성인 남성의 이름을 ‘돼지’라고 쓰는 건 너무 없어 보인다. 특히 한나라의 경우 ‘인간 돼지(人彘)’로 전락한 척부인의 사례로 인해 彘자 사용을 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이름으로 썼다.
양복의 僕은 순체보다 한 술 더 떠서 아예 ‘종놈’이란 뜻을 담고 있다. 명색이 장군의 이름치고는 너무 없어 보이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후의 행적으로 볼 때 순체와 양복 두 사람 모두 오늘날 알려진 이름이 강제 개명된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나라 수군의 진격로 분석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누선장군 양복이 이끈 한나라 수군의 진격로이다. 국사학계에선 한나라 수군이 옛 제나라 땅이었던 중국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바다를 건너 지금 북한의 평양 앞바다로 진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맞을까? 만약 그들 말대로라면 왜 한나라 수군은 황해가 아닌 발해를 건너갔을까?
고대 중국의 주력 전함이었던 누선. 이 누선은 서기 6세기 수나라 시절 형태인데 보시다시피 상부 구조가 지나치게 높고 바람을 받아줄 돛이 없다. 이런 바다로 황해를 건너올 수 있었을까?(사진 출처 : KBS 역사스페셜 갈무리/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누선장군이란 말 그대로 누선(樓船)이란 배를 통솔하는 장군이란 뜻이니 결국 당시 한나라 수군이 이끌던 전함은 누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누선이란 배는 다락처럼 여러 층을 겹쳐 쌓은 선체로 이루어진 배다. 배의 규모는 상당히 크지만 이 배는 구조적으로 큰 결함이 있다.
배가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풍랑을 맞아도 자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누선이란 배는 갑판을 여러 층으로 쌓았기 때문에 배의 무게중심이 선체 위쪽에 있다. 그래서 풍랑을 맞으면 배가 스스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전복하게 된다. 즉, 이 배는 해상항해에는 부적합한 배라는 뜻이다.
실제로 송나라 때인 서기 1044년에 저술된 중국의 『무경총요(武經總要)』라는 책을 보면 누선에 대해 "만약 폭풍을 만나면 곧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어 쓰는 것에 매우 편하지 않다.(若遇暴風則人力不能制不甚便於用)"고 적혀 있다. 양복이 이끄는 수군은 이런 배를 타고 조선에 쳐들어왔다고 한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누선은 돛이 없고 상부구조가 지나치게 높은 배이다. 이런 형태의 배는 강물 위나 연안을 항해하는 것은 적합할지 몰라도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그런데다 당시는 나침반이 발명되기도 전이었고 중국인들은 지금도 어부나 뱃사람이 아니면 바다에 대해 잘 모르며 평생동안 바다를 단 한 번도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
황하 하류의 물줄기 변천사를 표시한 지도. 이 전쟁은 기원전 109년에서 108년까지 이어진 것인데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원전 602년부터 서기 11년까지의 그림이다. 보시다시피 지금보다 북쪽으로 흘러 래주만이 아닌 천진 지역을 통해 빠져나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양복은 황하를 따라 천진 지역으로 나가서 창려의 왕검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 : 인터넷 커뮤니티)
이런 점을 볼 때 누선장군 양복이 중국 산동반도에서 평양까지 서해를 가로질러 왔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양복의 출정 기록인 “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에 대해 종래엔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제나라에서 출발해 발해를 떠서 가게 했다”고 해석했다. 기록 속에 나온 從을 ‘~로부터’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의 저자 문성재 박사는 그 해석이 잘못되었으며 ‘~를 따라’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본다면 제나라는 출발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문성재 박사는 기록에 나온 浮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역시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물 위에 떠서 물의 흐름대로 움직일 때 쓰는 글자란 것이다.
한사군 전쟁 당시 한나라의 수륙 양군은 위 지도에 표기된 경로로 진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정색 점선은 당시의 해안선을 표시한 지도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러한 점을 볼 때 양복의 수군이 출발한 지역은 산동반도가 아닌 그보다 더 서쪽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들은 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라 강물이나 연안해류를 따라 왕검성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를 토대로 본지에서 내린 한나라 수군의 진격로는 이렇다.
이들은 한나라 수도 장안에서 황하를 따라 옛 제나라 영토를 거쳐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의 왕검성으로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황하의 하류는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물길이 바뀌었는데 기원전 602년∼서기 11년까지 황하는 지금보다 더 북쪽으로 흘러서 산동반도 쪽이 아니라 천진 일대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 천진에서 발해 연안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왕검성이 있는 창려가 나온다.
황하의 하류 변천사는 위의 지도와 같고 양복의 수군이 진격한 경로는 아래의 지도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육군을 통솔한 좌장군 순체는 지도에 첨부된 대로 산서성의 상건하를 따라 북경 북쪽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에 처참하게 패전한 한나라 수륙 양군
이렇게 한나라가 수륙군 5만 7,000여 명을 거느리고 공격해 왔을 때 우거왕은 이미 그들을 격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먼저 육군의 경우 순체는 졸정(卒正) 벼슬의 다(多)라는 인물을 선봉장으로 삼아 출전하게 했다. 그러나 졸정 다가 이끄는 한나라 육군 선봉부대는 위만조선의 군대에 처참하게 패전해 퇴각했다. 그러자 순체는 졸정 다를 군법에 따라 참수했다.
수군 역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양복은 제나라 지역 군사 7,000여 명을 이끌고 왕검성에 먼저 도착했으나 우거왕은 성을 굳게 지키면서 몰래 정탐을 보내 수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파악했고 곧바로 성을 나와 기습공격을 감행해 물리쳤다. 이에 양복이 이끄는 수군도 처참하게 박살이 났고 양복 본인은 산 속에 열흘 동안이나 숨어 지내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첫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순체가 다시 패수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던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또 다시 패배를 당하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 기록 역시 중요한 부분인데 이 말은 곧 패수란 강은 땅을 동서로 나누는 강이란 뜻이다. 그러나 국사학계가 패수라고 주장하는 압록강, 청천강이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패수라고 주장했던 대동강은 모두 땅을 남북으로 가르는 강이다. 이 점을 통해서도 패수가 한반도의 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몇 해 전 남월(南越)을 공격할 때 이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는데 이번 위만조선 침공에선 초장부터 어그러진 셈이 됐다.
출처 : 굿모닝충청(https://www.goodmorningc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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