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1-91 영사詠史 이제夷齊 백이•숙제 3首
분분탕무후래다紛紛湯武後來多 분분하게 탕왕湯王ㆍ무왕武王 찾는 사람 후세에 많으나
상득이제선견하想得夷齊先見何 백이伯夷·숙제叔齊 선견先見이 어떤가 생각할 제
종구생민도탄리縱救生民塗炭裏 비록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할 수 있었어도
세론공과이상차細論功過已相差 자세하게 공과 죄 논한다면 서로 어긋남이 많다네.
탕무湯武를 찾는 소리 떠들썩해도
이제夷齊의 선견은 어떠했는가
백성이야 살릴 수 있겠지만
평가를 하는 데엔 차이가 있네
상주신민억만심商紂臣民億萬心 상商나라 주왕紂王 때 신민들은 억만億萬으로 마음 달라
여사일사정난심如斯一士政難尋 그 같고서 선비 하나 찾아내기 어려웠건만
기회서백중주오冀回西伯重註誤 서백西伯의 거듭 저지르는 잘못 돌이키기를 바라고서
고마위언의막금叩馬危言意莫禁 말 붙들고 곧은 말 하였으나 금하지 못하였도다.
백성들의 마음 한이 없으나
선비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문왕이 나서서 고쳐 보고자
고삐 잡고 말렸지만 허사였네
기양명봉요초휘岐陽鳴鳳耀初輝 기양岐陽에서 우는 봉황 아침 해에 빛나고
회고조가사이비回顧朝歌事已非 조가朝歌 땅 돌아보니 일은 이미 글렀어라.
식속이위참절의食粟已爲慚節義 그 곡식을 먹는다면 절의(節義)에 부끄러워
부방아사수산미不妨餓死首山薇 수양산 고사리를 먹다 죽어도 무방無妨한 일일세.
문왕의 고향엔 봉황이 나고
조가朝歌 땅에 왔으나 다 틀린 뒤라
곡식을 먹으면 도리가 아니기에
고사리로 죽은들 어떠랴 했네
►억만億萬
상商나라의 주왕紂王 때 신하와 백성들은 억만億萬이라도 제각기 딴 마음으로 단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백西伯 주周의 문왕. 주남소남보소周南召南譜疏에
“殷之州晋曰伯 文王爲雍州之伯 在西 故曰西伯”이라 하였다.
►기양명봉岐陽鳴鳳 기양에서 우는 봉황
무왕武王의 아버지인 문왕 때에 주나라 서울인 기양岐陽에서 봉황鳳凰이 울었다고 한다.
►조가朝歌 주紂가 있는 곳
●백이•숙제
백이열전伯夷列傳은 <사기>에 수록된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의 전기이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孤竹 국군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숙제를 세우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 하고는 달아나버렸다.
숙제 역시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갔다.
나라 사람들이 가운데 아들을 옹립하였다.
이 무렵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도착해보니 서백은 죽고 武王이 나무로 만든 신주를 싣고
文王으로 추존한 다음 동쪽으로 주紂나라를 토벌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말머리를 막아서서는
“아버지가 죽어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창칼을 들다니 효라 할 수 있겠소이까?
신하로사 군주를 죽이는 것을 仁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라고 했다.
좌우에서 이들을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의로운 분들이다.”라 하고는 한 쪽으로 모시게 했다.
무왕이 은나라의 난리를 평정하고 천하가 주나라를 받들었지만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首陽山에 숨어 고비(고사리)를 따서 먹었다.
주나라 백성 중 한 사람이 '어차피 이 수양산도 주나라의 땅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형제는 크게 상심하여 결국 고사리까지 캐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죽었다.
주나라의 곡식을 먹느니 굶어 죽는 걸 택하는
지조와 절개의 고사성어 ‘불식주속不食周粟’이 여기서 나왔다.
굶어 죽기에 앞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가사는 이랬다.
저 西山에 올라 그 고비를 뜯는다.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고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 우, 하는 이미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돌아 갈까나?
아,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간다.
가련한 운명이여!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렇게 볼 때 원망한 것인가, 아닌가?
노래를 지은 뒤 마침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자는 두 사람에 대해 "仁"을 얻었다고 칭찬하며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지난 원한을 기억하지 않았기에 원망의 기운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어짊을 구하면 어짊이 얻어지니 원망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사마천은 “내가 기산箕山에 올랐는데
그 위에 허유의 무덤이 있다고 들어 둘은 불쌍한 존재라고 여긴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
하지만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뛰어난 일흔 제자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창하였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도척盜跖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크게 드러난 예들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평소의 행실이 도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일생을 마치도토록 편안히 놀기만 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성내지 않고 줄곧 근면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앙과 화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하늘의 도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위키백과
►백이‧숙제에 대한 공맹의 차이
자왈子曰 공자가 말했다.
백이숙제伯夷叔齊 백이와 숙제는
불념구악不念舊惡 예전에 겪은 악행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기에
원시용희怨是用希 원망하는 일이 드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공자보다 500년 전의 전설적 은자隱者이다.
그런데도 ‘논어’에 4차례나 등장한다.
그만큼 공자의 의식세계에서 중요했다.
하지만 이들은 문제적 인물이었다.
공자가 ‘문무지도文武之道’라 하여 周 문왕과 더불어 성인의 반열에 올린
주무왕의 최대 공적 즉 은나라를 패망시키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이다.
주무왕을 칭송하면서 동시에 백이와 숙제를 칭송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왕조시대의 지식인들은 공자가 백이숙제를 높이 평가한 것을
군주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로 풀었다.
한번 임금은 영원한 임금인데 어찌 갈아치울 수 있느냐는 취지에서 존경했다는 것이다.
이는 백이에 대한 맹자의 발언으로 바로 반박 가능하다.
“임금답지 않으면 임금으로 섬기지 않았고 벗답지 않으면 벗하지 않았다.
惡人의 조정에 서지 않았고 악인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
공자가 백이‧숙제의 생각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18편 ‘미자’ 제8장을 보면 공자는 백이와 숙제를 필두로 7명의 일민逸民을 거론한 뒤
“나는 이들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백이‧숙제와 달리 周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백이‧숙제를 높이 평가한 것일까?
백이와 숙제는 스스로 왕을 선택하는 독립적 지식인의 자세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군자학은 혈통이 아니라 능력과 인품으로 지도자가 결정돼야 한다는 사상을 토대로 한다.
왕의 자식이 무조건 왕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런 군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이
왕이 돼야 하는지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다.
물론 그 선택의 기준이 ‘한번 인금은 영원한 임금’이라는
전통적 君臣觀에 입각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군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백이‧숙제는 완성형의 군자가 아니라 절반의 군자인 셈이다.
그렇기에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라며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전재하서도
감히 임금을 선택하려 한 그 자세를 높이 산 것이다.
공자는 두 사람과 달리 “아비가 누구든 상관없이 도를 터득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발언으로 자신이라면
부덕한 주왕보다 유덕한 무왕을 선택했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로서 공자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백이와 숙제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선택 자체는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100% 군자는 못 된다는 생각에
그들을 성인이나 현자가 아닌 일민으로 규정한 것이다.
맹자는 이런 공자의 회색빛 심모원려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왕을 가려 택한 그들의 행위가 자신의 혁명론에 공명한다는 생각에 열광했을 뿐이다.
그리곤 선악의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 선인을 넘어 단숨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만다.
맹자는 백이에 대해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인의 조정에 서고 악인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마치 예복과 예관을 갖추고 진흙탕과 숯구덩이에 앉아있는 것처럼 여겼다.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밀어붙여 동네사람과 같이 서있을 때
그의 모자가 반듯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그 동네를 떠났으니
그대로 있으면 자신이 더럽혀질지 모른다 생각해서였다.”
그에 따르면 백이는 자신의 눈높이 맞지 않으면 매섭게 돌아서는 깍쟁이에 가깝다.
만사에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맹자를 닮았다.
반면 공자가 그리는 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고 드는 좀생이가 아니라
뒤돌아서면 상대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도량 넓은 사람들이다.
그럼 왜 무왕을 용납하지 못해 끝내 굶어 죽은 것일까?
공자가 생각한 백이‧숙제는 자신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은 무왕이나 세상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타인에겐 너그럽되 자신들에겐 엄격한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자세를 견지했다고 본 것이니 공자 자신을 닮았다.
원문의 ‘원시용희怨是用希’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시용是用은 ‘이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고
여기서 원愿은 백이‧숙제가 원망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맞을 듯하다.
7편 ‘술이’ 제14장에서는 자공이 백이‧숙제에 대해 질문할 때도
愿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후회하다’라는 뜻으로 새겼다.
愿의 목적어가 자기 자신일 때는 후회하다는 뜻이 되고
타인일 때는 원망하다의 뜻이 된다고 생각해서이다.
따라서 술이 편의 내용과 공야장 편의 내용을 종합하면
공자가 생각한 백이‧숙제는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선택도 후회하지 않는 '불원不愿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