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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태완의 생애
2. 유년기 및 초임장교 시절
1931년 9월 13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신동(현 구미시 신동) 세월마을 520번지에서 아버지 장석현(張錫鉉, 1904. 9. 23 ~ 1980. 4. 18)과 어머니 성주 이씨(? ~ 1970. 2. 17)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전쟁 당시 장태완은 최전방에서 거의 총알받이 취급이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무수한 전투에 내던져진 육군종합학교 출신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교였다. 6.25 전쟁 당시 1951년 8월 향로봉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926고지를 탈환하는 데 기여한 전공을 세웠다.
군대의 존재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군인의 최대 명예는 전쟁에서 죽는 것입니다. 6·25때 소대장으로 수백 회에 걸쳐 돌격했으면서 당시 죽어간 전우들과 함께 산화하지 못했던 것을 늘 부끄럽게 느끼고 있읍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해 공적도 세우고 전쟁에서도 악전고투를 겪으며 살아남았지만, 장태완은 언제나 자기 옆에서 무수히 죽어나간 동료들을 생각하며 마음 속 한켠에 자신이 전우들과 함께 죽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한다. 후일 6.25 전쟁에서의 전공과 무훈을 크게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실전에서 몸으로 깨우친 경험들을 바탕으로 고위 장교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3. 고위급 장교 시절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1진으로 파월되었으며, 대령 시절엔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 보직에서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과 제5군단 참모장을 역임하던 중,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 이후의 근위부대 내 물갈이 덕에 비육사 출신임에도 핵심 보직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되어 2년 3개월간 근무하였다. 출처 이때 갑종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에 보냈다.
1973년 6월 어느 날,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지 2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발칸포 설치 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 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이 들자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 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 직위가 별을 단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하극상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 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김상구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장 장군.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 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사령관님,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양자택일 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11기 이후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4년제 정규 과정을 모두 밟고 학사 학위를 취득한 자신들이 진짜배기 육사 1기라는, 자존심만 센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나회가 이런 흐름이 강했다. 이들은 육군종합학교, 학군단, 육군사관학교 1~10기를 깔봤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회 기준에서 껄끄럽던 육군종합학교 출신 장군들은 1985년을 끝으로 모두 예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그 후 육본 교육참모차장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11월 16일부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수도경비사령관 직위로의 보직 이동을 명받았다.
4. 12.12 군사반란 진압 시도
10.26 사건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브리핑을 하던 김 대령이 브리핑을 받던 장 소장을 배신한다.
월간조선 1995년 9월호 부록으로 실린 육성테이프 녹음본. 10분 8초부터 장태완의 육성이 나온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국방부 명으로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 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쿠데타에 불법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전황은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하고 반란군인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전황을 어떻게든 뒤집으려 한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
본인 수기에 따르면, 이때 차를 타고 가는 와중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국가적 혼란기에 박정희 사조직들이 최규하 대통령이 아직 군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차제에 전군의 총 군령권자이고 계엄총사령관인 총장님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 자기와 차에 동승한 조홍 헌병단장에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떠봤더니,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북괴 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딴청을 부렸는데 항목에도 있지만 조홍은 이미 반란군 세력에 가담한 상태였다. 당일 장태완을 만취케 하여 지휘 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일단은 실패한 셈. 또 연희동을 나서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대뜸 "여보, 정 선배!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래요?" 하니 "이게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하자!" 하고 장태완 손을 꽉 잡아 쥐는데 순간적으로 육감을 통해 크게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 당시 수방사의 핵심 전력이자 전차중대가 존재한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수뇌부의 베이스이자 손발이 된 상태였고 원래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30경비단으로 가 있었기에 지휘권자 부재로 최고사령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로 운용이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 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반란군 수뇌부들을 공격해야 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던 9공수에게 "반란군 본거지인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군부는 당황했는데 1공수, 3공수 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교통요건이 더 좋고 서울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두면 반란에 참여한 공수부대가 오기 전에 30경비단과 보안사 본거지에 들이닥쳐 자신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는 너무 순진했는지 최대 실책을 저지른다.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은 '반란군부가 1, 3공수 회군시킬 테니 진압군도 9공수를 회군시키자'라는 일명 '신사 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어버린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응사했지만 반란군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 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경사만 남게 된다.
이때 신군부에 붙은 박종규 중령은 김오랑 소령과 가족끼리 모임도 가질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결국 자신의 명령으로 김오랑 소령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하나회가 숙청되면서 본인도 군복이 벗겨지고 반란군이 되면서 예비역 소장에게 주어지는 예우와 군인연금도 박탈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데, 김오랑을 사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었는지 말년에는 김오랑기업사념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몰락과 병고는 천벌'이라며 자책하고 죽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조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 명과 남은 전차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 최후로는 하나회 출신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여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간 뒤 자신의 부하이자 배신자인 신윤희에 의해 체포된다.
일각에선 이걸 가지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증언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으며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 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의 주축이었다. 사실 30, 33경비단은 수경사 배속이었으나 청와대 인근을 방위하였기에 대통령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이 오랜 기간 자신의 직속 라인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12.12 군사반란 시기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 주력 부대들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포병단과 방공포병단뿐이었다. 황동환 수경사 방공포병단장과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은 모두 비육사 출신이다. 역시 쿠데타군에 맞선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나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도 마찬가지. 실제 포병단에서는 하나회 장성들이 모여있던 수경사 30경비단으로 포를 조준한 채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발사할 준비 태세를 갖췄다고 한다. 다만 30경비단이 경복궁에 위치해 있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었으며 청와대, 총리공관 및 효자동 등 주택 밀집 지역 인근이라 실제 명령을 실행하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30경비단 내의 초급 장교, 부사관, 병 등 죄없는 직속 부하들의 피해도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나회는 자신들의 세력인 30, 33경비단을 통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잡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모르고 그 위에 국방장관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국군 통수권 대행자가 있는 곳에 포격을 시행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 인근에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 준비 명령은 받았으나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연대장 김도수는 쿠데타에 적극 가담해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트를 세워놓고 있었기에 출동했으면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으며 사단장 손길남이 출동 명령을 내리면 바로 사살하기 위해 사단장실 앞에 장교들이 권총에 장전하고 대기했다고 한다.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배정도가 제26기계화보병사단 담당 보안부대장 김현과 술 마시다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이 수경사에 배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수여단은 시가전 특화 부대들로 이들을 상대로 보병사단이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고 서울 도심에서 싸울 수는 없다. 이 부대들을 방어용으로 사용하고 반란군에 통제를 받지 않는 9공수를 통하여서 보안사나 30경비단을 터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도 반란군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오직 9공수의 서울 이동이었다.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로 출동하여 부천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은 전두환 측의 신사 협정 제안에 속은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 당했다.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은 갑종(35기) 출신으로 1980년 5월 전투교육사령관 겸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으로 전두환의 광주광역시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진압 요구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밀려난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
당시 상황에서 진압군의 거의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이들을 통하여서 보안사를 타격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반전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를 듣지 않는다면 무조건 반란군으로 즉결 처분 대상이다. 그 외 1, 3, 5공수여단은 쿠데타군의 주축이었고 제9보병사단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는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에 발맞춰 제9보병사단 29, 30연대에게 서울로 진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나회 소속인 참모장 구창회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는데 30연대를 맡고 있던 비하나회 김봉규 대령은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29연대장 이필섭은 군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결국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 병력이 휴전선을 버리고 쿠데타에 동원된다.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 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비하나회 사단장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키는 등 한마디로 사면초가였다. 서울을 방위하는 수경사 인근에 수도권 중 서북부(고양~파주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상비 사단만 3~4개(1, 9, 25, 30사단)를 가지고 있는 1군단의 군단장이 12.12 때 경복궁에 있던 황영시였고 서남부(인천 및 일대 도서 지역 포함)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장이 함께 있던 차규헌이었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 되자 사령부 행정병과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과 행정병을 합쳐도 100여 명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 전력의 전부였다. 즉, 현실적인 진압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 33경비단을 비전투 병력 100여 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건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경기도 서남부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 내에 부대들은 따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군단장이 경복궁에 가서 하나회 후배들 옆에 앉아 있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수도군단을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야포단을 동원하면 반란군 수뇌부가 몰려있던 30 경비단을 타격하는 일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그 30단이 있는 곳이 민간인들도 많은 경복궁 일대였다.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은 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 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태완 장군이 동원할 수 있던 화력이 전차 4대, 토우 중대, 3.5인치 로켓포, 106미리 무반동총인데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장애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사용할 경우 유도선이 끊어져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 있다며 토우 중대 투입을 반대했다. 박동원 대령은 대신 야포단을 동원해 쿠데타 수뇌부가 모인 경복궁을 타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야포병단장 구명회 대령은 "타격을 위해선 관측 사격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럼 시가지가 쑥대밭이 된다"며 반대하고 조명탄만 꺼내두었다. 그나마도 조명탄 추진체가 민가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꺼내놓기만 하고 장전을 못 했다.
이쯤되면 설사 9공수가 중도에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어도 진압이 가능했을까 싶은 상황이다. 물론 9공수가 먼저 서울에 도착해 30단에 모여있던 반란군 수뇌부를 진압하거나 부대 감청 중인 보안사를 접수하고 납치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만 했다면 진압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잡고 있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하나회 편을 들어도 일단 계엄 상황에서 모든 부대는 계엄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 이를 방해할 보안사 본부가 타격을 받고 계엄사령관이 하나회가 아닌 부대들에 명령을 내린다면 사실상 겜은 끝나는 것으로, 반란군들 입장에선 진압군이 도착하기 전 시간 싸움만 남을 뿐인데 그러면 9공수와 서울 한복판 도심에서 유혈 사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수준까지 가면 계엄사령관이 명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당연하지만 군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장교들, 그리고 국방장관 노재현이다. 특히 이 인물은 한남동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인근의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로 빤쓰런 쳐버리던 걸 겨우 잡아서 육본 벙커로 끌고 왔더니만 부대 출동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면서 적반하장 격으로 윽박질렀던 양반이다.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단, 26사단, 9공수,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다면 이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에게 체포된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았다. 본인은 서빙고 분실에 들어서자 그 악명 높은 빙고 호텔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보안사 수사관이 입고 있던 육군 전투복을 벗고 수감자들에게 지급된 부착물 없는 육군 사병용 민무늬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서 갈아입은 뒤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옆방에 김재규와 정승화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나마 장태완은 감금 및 조사를 받았어도 옆방의 둘과는 달리 고문을 당하거나 반말을 듣진 않았다. 그래도 고된 심문 때문인지 조사가 끝날무렵 장태완의 체중은 70kg에서 58kg로 줄었다고 한다.
1980년 2월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전두환이 직접 찾아와서 만났다고 한다. 이때 전두환은 장 선배라는 호칭을 통해 겉으로는 깍듯이 예우하는 척하면서도 장태완이 12.12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식으로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장 선배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군단장에 영전시켰을 거라면서 이 모든 일은 장태완이 스스로 자초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고 한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에게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 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며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가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 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故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5. 전두환 정부 시절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 산천을 유랑했고 산꼭대기에선 분노를 고함으로 풀고 평화와 민주 발전을 염원했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장태완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참고로 장태완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싶어했지만 당시엔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지던 시대라 장태완은 굳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와서 보면 좀 후회도 된다고.
다만 신군부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장태완을 회유하려 했는지 어쨌는지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하기도 했다. 신군부 입장에선 자기들이 보기에도 하극상을 한 거기 때문에 자신들의 뒷날을 위해서라도 다시 포섭할 수 있는 인물들은 최대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또 여담으로 상기한 김상구 건으로 그전부터 사이가 서먹했던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12.12 이전까진 장태완과 큰 원한 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장태완이 해임되고 후임 수경사령관이 되자 장태완 휘하 참모진들을 굳이 대놓고 탄압하진 않았다는 말이 있다. 다만 이후 장태완이 회고하길 자신이 체포되고 조사받다 군복을 벗게 된 1980년 2월쯤 보안사를 떠나기 전 만난 전두환이 장 선배 덕분에 서울이 뒤집어질 뻔했니 어쩌니 나라 걱정을 하는데, 이 소리를 들으면서 순간 이 사람들은 군권 장악 정도가 목표가 아니라 청와대까지 넘보는구나 싶어 아차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 같은 경우 반란군들이 설치는 세상이 꼴보기 싫어 군복을 벗고 섬에서 양식업을 하며 두문불출했는데, 훗날 노태우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보직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속세와 연을 끊고 조용히 지냈고, 윤성민 육참차장같은 경우 회유에 넘어가 국방장관까지 지내긴 하는데, 정작 96년 전두환 재판 때는 증인으로 나서 군사반란 맞다고 증언해 뒤통수를 날린다. 참고로 한국증권전산(現 코스콤) 대표이사 사장 자리는 주식거래가 활성화된 지금이야 꽤 영향력 있는 자리지만 당시에는 증권시장이 막 태동하던 시기라서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크진 않았다.
아들이 죽은 1982년 이후 어느 날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에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했다고 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장태완이 훗날 조국을 지킨 의리의 참군인 식으로만 묘사되는 것에 약간의 불편함을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우린 역사의 증인이니 서로 몸조심하잔 말을 듣던 장태완 입장을 고려하면 부친도 돌아가신 마당에 외아들마저 의문사를 당했는데 전두환이 기세등등할 무렵 어그로 끌려봐야 좋을 건 없기에 일단은 과하지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쿠데타의 부당성을 언론을 통해 주장하던 정병주 전 사령관은 1988년 행방불명되어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되는 의문사를 당한다. 심지어 정병주를 지키다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마저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법무법인 부산 소속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하나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가 1991년 의문사를 당한다.
장태완은 90년대 인터뷰에서 "12·12 쿠데타의 진상을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마치고 이승을 하직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확실한 건 장태완이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후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가,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 학대와 사기 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설 기업 르메이에르로 영전돼 한동안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르메이에르 관련 비리와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6. 민주화 이후
1993년에 <12.12 쿠데타와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본 관객들의 재출간 요청으로 30년 만에 재출간 되어 판매 중이다.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어 1994년 4월 26일부터 2000년 3월 15일까지 제27·28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을 지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며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이 일어나자 재판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서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1995년에는 부인 이병호 여사와 함께 아들 장성호의 묘를 방문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들을 그리며 통곡하는 이병호 여사를 서툴게나마 위로하면서도, 본인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묘를 매만지며 통곡하였다.
7. 정계 활동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장태완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에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현실 여건상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편이었고,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의 선제 작전으로 북한 해군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 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하였고 대선 당일 새천년민주당 당사에서 개표방송을 당직자들과 공개 시청하며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응원하였고 당선 확정 후 환호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분당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동참했으나 정작 표결은 미국 방문으로 불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다.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이 유행하자 드라마 내용이 본인 기준 전두환을 미화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한 것에 대해서는 12.12 군사반란의 원인이 되었다며 박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다.
8. 사망
2008년 폐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폐를 3분의 1이나 잘라냈지만 수술은 잘 되었고, 이후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12.12 당시 장태완을 배신한 전두환 최측근 장세동이 조문을 했다.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장세동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서, 장태완 장군의 직속 부하였다. 장태완 장군이 비록 수경사령관에 취임한 지 한 달여 밖에 안 되었다고는 하나,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에는 대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 한국군이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직속 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체포를 그토록 망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 두고 신군부 인사, 장태완 前의원에 '화해의 손길'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신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안 간 걸 생각하면 그나마 염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망하고 난 뒤에 문제점이 생겼는데 안장된 위치가 정도영 前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바로 옆에 묻혔기 때문이다. 묻힌 것도 웃긴데 장태완이 별세하기 바로 이틀 전에 사망해서 그 다음 순서로 장태완이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영은 육군사관학교 제14기로 하나회 회원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때 보안사령부 소속으로 반란에 직접 가담했으며 진압군 지휘관 간의 통화를 감청해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대표적으로 30사단 박희모 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1공수의 행주대교 통과를 묵인하도록 회유한 것과 정병주 사령관 몰래 특전사령부 보안부대를 통해 9공수 출동을 저지시켰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다.
사후 1년만인 2011년 또 신군부 관련 구설수가 생겼는데,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묻힌 것도 웃긴데 하필이면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묘가 장태완 장군의 묘와 가까이 있었던 것.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도 안현태와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으로 먼저 구속된 전두환을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 앞에서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다만 먼저 세상을 떠난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묘 옆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유학성 前 중앙정보부장의 묘가 있다. 물론 유학성이 1997년에 사망했고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사망했으니 국립현충원 측에서 정승화 장군의 묘 자리를 잘못 쓴 쪽에 가깝다. 그나마 장태완 장군처럼 신군부에게 맞섰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아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으니 장태완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는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 때문이다. 사면은 받았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법안이었는데 19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도 여기에 해당되었던 것. 그런데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법안 적용 방식이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