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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2019년 여름호에 실린 『히스테리 미스터리』의 시집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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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한 ‘종(種)’의 토포필리아(TopoPhilia) - 이영숙의 시세계
이미나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어떤 장소(topos) 속에 있고
어떤 장(chōra)을 점하고 있어야 한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
이영숙의 시집 『히스테리 미스터리』는 “고대로부터 시작된”(「까마귀 네트워크」),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topos)’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개진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 여기 당도한 ‘종(種)’의 진솔한 토포필리아(TopoPhilia)의 서정성을 내재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제기된 ‘장소’에 대한 이 고대의 물음은 어딘가에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서 장소(place-as-source)’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요컨대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은 장소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장소는 마찬가지로 존재로 환원될 수 있다.1)
이영숙 시인의 시세계는 이러한 고대의 물음에서부터 출발하여 현상적이고 의미론적인 ‘장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장소의 안과 밖에서 스스로의 삶을 구성하며, 장소 자체의 ‘그곳(Da)’과 ‘저곳(Dort)’에서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있은 적이 있나/ 그곳이 있다는 걸 알기나 했나”(「목요일의 패러독스3」)고 묻는 시인의 물음은 “우리가 무어라고 나뉘기 전”(「벚나무는 장미목 장미과」) 모든 ‘종’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와 맞닿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히스테리 미스터리』에 나타난 ‘공통된 토포스’로서의 장소, 즉 ‘거기’와 ‘저기’, ‘그곳’과 ‘저곳’ 등은 모두 “이 세계가 갖는 명백한 연대성”(Whitehead)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인의 ‘장소’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그 고대의 물음 이후, 체험된 장소로서의 유기체적 의미로 확장되며, 그 먼 옛날과 현재를 연결 짓는 연속체로서의 “네트워크”(「까마귀 네트워크」) 세계로 이해되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 안에서 경험된 장소에 부여된 가치, 즉 신체의 감각과 걷는 행위(혹은 버스를 타는 행위)를 통해 형성된 친밀한 장소감(sense of place)이다. 또한 시인의 ‘장소’는 “고대의 시간”(「이력」)과 “선사시대”(「대문의 근황」), “어두워지는 중세”(「까마귀 네트워크」), “그 옛날”(「벚나무는 장미목 장미과」)부터 이어져 온 ‘역사성·시간성’을 내재하고 있다. 비로소 “가지런히 서있는 연대기”(「버스의 평균율」)를 지나 현재 당도한 시인의 낯선 ‘장소’는 이제 살아있는 인간 신체와 관계 맺으며 ‘구체적 장소(concrete place)’로서 실현된다. 이는 그녀의 여러 시편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고시원”, “폐가”, “흡연구역”, “공중화장실”, “공동묘지”, “포장마차”, “몽촌토성” 등의 구체적인 장소의 패러다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칸트가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나면
동네 사람들은
어, 벌써 세 시군
그랬다 한다
같은 길을 같은 시각에
꼬박꼬박 다져서 만든 산책길이
어깨부터 손목까지 이어진다
단정한 각도의 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뼈와 뼈가 연대하는
보이지 않던 곡절을
네게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이군
그러나 팔꿈치는 적응한다
시계를 보지도 않고 세 시에 미리 가 있다
4주에서 6주라는 통상의 세기 동안
왼쪽 시가 오른쪽 시보다 가늘어진다
중심을 잡느라고 좌뇌 쪽이 무거워진다
빵을 사면 한련화 씨앗 한 봉지씩 나눠주는 제과점을 차리자
콘크리트를 전동기로 동그마니 뚫고
먼저 제과점 앞 왼쪽 시에 씨를 심고 물을 주자
미풍에도 한들거리는 한련화제과점
-「깁스한 시 한 편」 전문
도시나 거리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곳이자 삶의 터전으로 거주하는 곳이다. 위의 시에서 칸트는 “같은 길을 같은 시각에/ 꼬박꼬박” 산책하고, 이웃들은 그의 산보 행위에서 세 시라는 시간을 읽는다. 실제로 칸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한 철학자로, 항상 세 시 반에 산책을 나갔기 때문에 시민들은 모두 그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걷기 행위를 통해 장소가 체험된다는 것이다. 즉 도시 공간의 구성에 있어 중요한 것은 보행자의 걷기와 태도, 움직임이다. 이러한 신체의 감각, 운동성, 보행의 움직임은 체험된 장소, 요컨대 그 장소 속으로 들어가거나 가로지르는 과정을 통해 존재로 하여금 장소를 느끼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체험된 신체와 체험된 장소가 관계 맺는 유기적인 방식이다. 신체를 가지고 그 거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칸트와 장소를 연결 지으며, 이는 하나의 통일된 시·공간적 ‘전체(ensemble)’를 이루는 “단단한 각도의 생”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특정한 장소를 경험한다는 것은 나의 신체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인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존재는 신체를 수단으로 하여 공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걷기를 통해 ‘장소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발견할 수 있다. 「깁스한 시 한 편」에서 제시된 ‘세 시’라는 시간은 구조-인간 간의 관계에서 ‘공간화된 시간’이며, 그때의 장소는 ‘체험의 공간성’을 담지하게 된다. 이 시가 의미하는 바는 칸트의 ‘신체’가 “뼈와 뼈가 연대하는”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로서 깁스한 화자의 팔, ‘세 시에 미리 가있는 팔꿈치’와 만나면서 구체화된다. 이러한 신체적 감각과 매일 반복되는 세 시라는 시간은 칸트의 ‘그곳’과 화자의 ‘여기’를 연결 짓는 매개가 되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한련화 제과점”에서 나눠주는 “씨앗”에 있다. ‘씨앗’은 새로운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invention’의 의미를 지니며, 이는 신체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의 근원적 ‘장소’를 유비한다. 즉 칸트의 사유를 빌리자면 그것은 “나의 신체, 그 신체의 장소는 동시에 나의 장소”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시에서 화자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고속도로 휴게소나 지하철이나”(「장소의 불문율-공중화장실」) “보도블록 위에…퇴근길의 호프집”(「출근길」), “불 꺼진 한 주 전의 서대횟집 앞”(「간도 쓸개도 조문(弔問)도 없이」), “몽촌토성으로 잠실고수부지로”(「포장마차를 찾아서2」) ‘좀처럼 동행도 없는 길’(「편지2」)을, “지천으로 밟혀서 닳고 닳은 길”(「축 생일」)을 부단히 걸어 다닌다.
흥미로운 것은 화자가 걷는 “도처에 널린”(「알레고리」) 길이 ‘공간화(spatializing)’된 “버스”로 자리를 이동한다는 것이다. ‘공간(raum)’이라는 말은 “자리를 만들어낸다, 비워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다, 떠나다, 치우다” 등의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동사 ‘räumen’에서 파생된 것이다.(M.Schroer) 이러한 어원을 가진 공간은 장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 유동적 의미를 갖는다. 즉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움직임이 ‘공간적 이동(spatial mobility)’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적 활동을 통해 공간의 이동이 가능해짐에 따라 장소는 개별적인 장소를 넘어 정의된 지역으로 확장된다. 시간과 공간을 통한 개인의 움직임은 다양한 사람들의 길들과 서로 교차·평행하면서 이른바 장소의 “소슬한 별자리”(「개화 이틀 전」)를 만들어 간다. 이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는 사건이 일어나는 사회적 ‘공간-시간-장소’를 의미한다. 이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결과들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장소, 구체적으로는 집, 거리, 회사, 역, 술집, 휴양지 등의 중심지로 모여들어 일종의 사회적 회합의 장이자 무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 듯이 자신의 고유한 지리학을 만든다. 시인의 여러 시편들에서 보이는 이러한 인간의 지형도는 ‘버스를 휙휙 지나치는 가보지 않은 길들’(「내가 버스를 놓쳤다면」) 위에서 ‘번복되지 않는 태생’(「버스의 평균율」) “상처 하나 없이 아무는 생”(「못의 지대」)을 견디며 살아가는 삶의 여로라는 의미를 갖는다.
관절이 없어서 나는 기차가 되지 못했다
기적소리 대신 클랙슨
목을 쳐들어 울음을 멀리 보내는
늑대가 되지 못하고 개처럼
목전의 먹이 앞에서 컹컹 짖었다
레일이 없어서 기차가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귀를 대고 들으면 지구 저편에서
후드득 자기를 뜯어 안고 달려오는 심장
그의 귀는 코너를 돌 때마다
아스팔트처럼 납작하게 지져졌다
번개와 직접 교신하는 시간대를 견디며
우리는 무지개처럼 안이했다
휘발되는 속도로 소식이 지체되었다
나무들처럼 가지런히 서 있는 연대기
태생은 번복되지 않았다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쥐고
버스가 달린다
버스는 버스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우르르 몰리는 슬픔들을 재배치한 뒤
불면의 차고지에서 조용히 시동을 끄는 것 외엔
-「버스의 평균율」 전문
「버스의 평균율」에서 “버스”의 경로는 순환적인 시간 속의 표지들에 의해 연결된 중요한 장소가 된다. 하나의 경로로 연결된 장소들로 이루어진 “버스”의 세계는 “번개와 직접 교신하는 시간대…나무들처럼 가지런히 서 있는 연대기”를 견디며 지속되어 왔다. 화자는 “타야할 버스는 오지 않고…긴긴 버스를 기다”(「수목장」)리다 “버스를 놓쳤다면/ 다음 버스를 타고”(「내가 버스를 놓쳤다면」) 살아왔으나, 그것은 “버스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절이 없어서, 레일이 없어서 기차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버스에 몸을 실고 살아온 것이다. 이 지점에서 ‘버스’라는 공간은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하나의 용기(容器)’라는 틀로 이해된다. 이 틀은 세계, 대륙, 국가, 지역, 도시, 집, 방 등 사회적 공간으로의, 점점 작아지는 하나의 틀을 의미한다. 때문에 ‘버스’는 인간의 삶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근원적인 장소의 부분으로 귀속된다. 일정한 노선을 경유하는 버스의 일상은 가지런하고 안이하게 반복되는 화자의 삶 그 자체이다. ‘목전의 먹이 앞에’ 매달린 그 생은 번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는 불면의 차고지에서 조용히 시동을 끄는 버스처럼 슬픔을 재배치하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다. 이는 「수목장」에서 ‘지체된 시간’이 지나도 타야 할 버스가 오지 않는 현실, ‘아는 이들이 다 죽어야 탈 수 있는 버스’와 ‘주검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화자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삶의 여로를 의미하는 ‘버스’의 길은 「내가 버스를 놓쳤다면」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화자는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의 기네스 팰트로의 두 가지 가능성, 요컨대 “지하철”을 타거나 타지 않는 것으로 결정지어지는 생의 운명을 떠올린다. 영화는 영화지만, “도망칠 수 있는 인생은 없다는 듯”이 ‘냅다 달리고 달리는 버스’의 길은 마찬가지로 화자의 “현생과 포개진다”(「장소의 불문율-폐가」) 지하철을 탄 기네스 팰트로와 달리 ‘냅다 뛰어서 탄 버스’는 어떤 올가미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다. 무릎에 가방을 얹고 졸고 있는 학생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화자는 “다음 버스” 혹은 ‘놓친 버스’의 또 다른 삶을 상상해보지만, 기네스 팰트로가 이미 지하철을 탔듯이, 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들”로 휙휙 지나갈 뿐이다. 이처럼 ‘버스’는 생을 결정짓는 어떤 것의 공간이 된다. 결국 칸트의 산책길과 마찬가지로 버스의 노선은 이곳과 저곳을 연결 짓는 하나의 장(arena)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버스의 평균율”, “장소의 불문율”이라는 것은 어떤 경로의 삶이든 행복과 불행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균등을 이루는 인생의 평균치를 값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렇듯 이영숙 시인의 시에서 공간은 사람이 놓이는 장소에 다름 아니며, 때문에 개인의 공간체험은 각각의 “이력”(「이력」)들로 차별화되고, 그러한 한에서 『히스테리 미스터리』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지형학일 수 있다.
이러한 ‘장소’를 매개로 한 인간 존재에 대한 시인의 천착은 이윽고 경계를 초월하는 로컬의 문제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시인의 시 세계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생태 환경과 결부된 ‘장소’의 문제이다.
태평양 환류지대에 남한 땅덩이의 일곱 배 되는 섬이 떠있다
성긴 뿔처럼 질긴 입처럼 플라스틱들은 잘게 부서져 걸쭉해졌다
플라스틱 수프를 플랑크톤이 먹는다
플랑크톤을 작은 물고기가 먹는다
작은 물고기를 큰 물고기가 먹는다
갖은 양념을 더해 큰 물고기를 사람이 먹는다
안 돼,를 목소리 더 큰 안 돼,가 제압한다
이래도저래도 안 돼,는 안 된다
-「플라스틱 수프」 부분
단숨에 움켜잡아 숨통부터 끊고 깃털 하나하나 부리로 뽑아내던
수리매는 동물적이다 거위들은 산 채로 털이 뜯겼다
생애 열 번은 그렇게 울부짖어야 한다
어떻게든 인간을
동물적으로 감싸주기 위해
맨살을 빨갛게 드러낸 채 열 번은 그렇게
몇 날 며칠 만에
비둘기 알은 곯고
낙엽에 엉겨 붙은 깃털 몇 개
척추였을 뼈마디가 보이지 않는다
현장은 훼손되었다
내가 구스다운 이불을 덮고 잠든 밤들 사이 그 어디쯤에서
-「인간적 패턴」 부분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초기에 정중함(civility)의 의미를 내재한 도시(city)의 공손한 사람들의 거주지와 주변부의 도시화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거주할 장소의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다니며 문명사회를 이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근대 과학, 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봉착하게 된 가장 큰 문제는 문명의 횡포로 인한 자연생태계 파괴에 있었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인류의 태도는 생태계의 교란, 환경오염 등의 피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야기된 혹독한 보복은 도시나 마을, 영토에 유입된 유해물질, 원자력 발전소에 의한 방사능 오염 등으로 나타났다. 즉 인간이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살아갈 고유 환경인 물리적이고 생태적인 기반 자체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은 「플라스틱 수프」, 「인간적 패턴」, 「알레고리」 등의 시편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문명화의 지나침은 인간존재의 기반이 되는 ‘장소’의 상실을 초래했다. 「플라스틱 수프」는 “태평양 환류지대에 남한 땅덩이의 일곱 배 되는 섬”에 “상승하고 증식하고” 있는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된통 망가진 태평양’의 유해물질은 플라스틱 수프를 먹은 플랑크톤, 그 플랑크톤을 먹은 작은 물고기, 그것을 먹은 큰 물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연쇄적으로 당도한다.
또한 「인간적 패턴」에서는 동물을 학대하는 잔인한 인간의 행태를 그리고 있다. ‘산 채로 털이 뜯겨져 나가는 거위들’, “맨살을 빨갛게 드러낸” 새들은 ‘어떻게든 인간을 감싸주기 위해’ 희생되었다. 자신의 따뜻한 안위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심은 비둘기 앓을 곯게 만들고, 울부짖는 새들의 뼈마디를 훼손시킨다. 때문에 군인에게 겁간 당한 전쟁소설의 공포스러운 한 장면처럼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현실은 황량하기만 하다. 인간이 서있는 곳은 “도처에 널린 게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삶의 기반이 되는 자연에는 “죽어서도 산 것들을 잠식하는”(「알레고리」) 오염물질들만이 쌓여 간다.
이러한 장소성의 상실은 인간이 뿌리내리고 거주할 ‘존재하기’의 장소를 잃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인간 삶터에서의 생태성, 즉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거주하기’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장소’를 찾기 위해 시인은 삶의 터전에 대한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에 대한 깊은 애착을 드러낸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장소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히스테리 미스터리』는 외부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영역, 즉 경계를 넘나드는 ‘장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1)이푸 투안은 삶의 터전에 대한 사람의 정과 사랑을 뜻하는 개념으로 ‘토포필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토포필리아’는 정서에 장소를 결합한 용어로, 사람과 장소 또는 배경의 정서적 유대이자 ‘참된 장소애(場所愛)’를 의미한다. Yi-Fu Tuan, 이옥진 역, 『토포필리아』, 에코리브르, 201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