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론>
양자역학으로 풀어낸 빛
-이유 『빛을 땋다』 문경출판사, 2023
이유(시인, 평론가)
1. 상상 과학 문학.
현대는 과학 문명 시대이다. 우리는 양자물리학, 양자역학이 일반상식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시인은 과학자보다 한발 앞선 시대를 살고 있다. 궤변으로 들리는 사람을 위해 나의 시론을 쓴다. 이미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한 독자는 나의 시론을 더 읽지 않아도 된다.
고대는 하나님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시대가 있었다. 인간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통해 선택권을 준다. 이성이라는 합리주의 인본주의 세상을 열어 마침내 분열하고 경쟁하며 살다가 죽든가, 이를 초월하여 종교, 시와 예술을 통해 영원히 평화롭게 살던가 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세계이고, 예술은 주관적인 세계이다. 객관적인 세계는 거시세계이고, 주관적인 세계는 미시세계이다. 현대는 과학 문명이 이끌어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오래전 시인의 상상력이 오늘날의 과학을 이끌어가고 있다. 현대는 상상 과학 문학의 후차적 과학 문명 시대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많다. 과거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오던 풍경이 현실이 되었다. 상상 문학은 항상 시대를 앞서갔다.
나의 제6 시집 『빛을 땋다』의 평 중에 부르주아, 귀족 시라고 평을 하는 이도 있다. 독자가 어떤 관점에서 시를 분석했느냐에 따라 그리 판단할 수 있다. 기쁘다. 지극히 서민인 나를 어여삐 보심이라 여기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 시집을 귀족 시집으로 일축하고 끝난다면 나의 詩世界는 한낱 있는 자의 신세타령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하여, ‘나의 시론’을 조심스럽게 발표 한다.
2. 빛을 땋다.
의심 전문가인 과학자들에게 직관은 덫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직관은 철학이다. 과학자가 직관을 논리로 풀어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면 시인은 직관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컴퓨터는 직관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직관으로부터 자유롭다. 그 때문에 프로바둑기사를 이길 수 있었다. 인간의 직관은 선형적 믿음의 일종이다. 인간의 의식 또한 선형적 물질의 일종이다. 당신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거슬러 올라가 우주가 탄생할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 DNA에 따라 우리는 움직이고, DNA의 배열에 이상이 생겨 다양한 직업의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다. 다음 시를 예로 들어보자.
청명한 파란 당신,
분노 가득한 붉은 당신,
언제나 차분한 초록의 당신,
갈래로 흩어져 있는 색을 하나로 모으니 빛의 파장이 일어 환해진다 셋이 여섯으로 여섯은 다시 하나로 둥실둥실 땋아져 서로 벗이다가 이웃이다가 울다가 웃다가….
생애가 파란만 있어도
생애가 분노만 있어도
생애가 외로움만 있어도
함께 어울려야 빛을 보는 인생
색색의 당신 끌어당겨 긴 세월 걸어와 따뜻한 N으로 남은 원색들의 조화로운 경이를 본다.
빛을 땋으며
오래 살아가야 할 당신,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보색은
창가의 아침 햇살.
「빛을 땋다」 전문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다. 삼원색을 기본으로 다양한 색을 창조한다. 현대는 개성이 다른 색색의 당신들이 모여 조화롭게 살고 있다. 고대시대보다 현대가 더 복잡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인의 역사나 세계의 역사는 스프링처럼 돌면서 발전한다. 돌던 힘이 어느 한 시점에 이르러 폭발하거나 튀어 올라 세분화 된다. 이러한 현대의 연속적인 미시세계를 양자역학으로 풀어내 보자.
우주가 결정론적 우주이며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강성론자’이고, 우주가 결정론적 우주이지만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양립론자’이다. 자유의지는 창조적인 실체로서 진화의 산물이다. 현대 사회 인식론은 과학기술학(STS, Space Transportation System. 우주수송시스템)의 학제 간 분야와 연관을 짓기도 하므로,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고 전파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측면에서 초점을 맞춘다면, 시인은 사회적 약자이다. 현시대의 사회 인식론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생산했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즉, 모든 학문의 총체적 시각으로 시인의 언어는 언어의 꼭짓점에 있다. 이를 양자역학으로 이해를 돕자면 시인이 시상에 빛을 쪼여 빛의 미립자가 문자로 형성됐다고 말할 수 있다. 감성이 둔한 사람은 새순을 보아도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시인은 작은 그 무엇에도 휘청인다. 예민할수록 감흥은 더 충격적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의 DNA와 자유의지가 영향을 미친다.
3. 고행과 순례.
컴퓨터시스템을 제어하다 보면 여러 장치를 연결한 병렬시스템에서 가끔 나타나는 오류(debug)가 있다. 시인이 무엇을 측정하는 행위는 결과에 영향을 준다. 시인의 과도한 시스템에 나타나는 오류는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당뇨가 있는 어머니의 식단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드시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드시는 어머니가 짠해 어지간한 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제어했어야 했다. 당뇨합병증 심장마비였다.
시화 마을로 시집온
감나무 한 그루.
봄이면
감꽃 목걸이 딸 목에 걸어주고
가을이면
곶감 만드느라
뼈가 숭숭 뚫리는 줄도 모르더니
어느 가을
얼음꽃 피우고 누우셨다.
여름에는
넘치는 햇살 막아
큰 그늘 속에 자식들 앉히고
겨울에는
떨군 잎으로 구들장 데웠는데
당신 속을 비워
손바닥 생명선 지우고
꽃자리 찾아 외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육 남매 키우느라 고생만 했으니
못다 한 여행이나 하면서 살자 했는데,
자식들 고생시키기 전에 가야 한다더니
기척도 없이 가신 어머니.
배꼽 속의 길을 걷고 있는지
외할머니 자궁으로 들었는지
자는 듯,
꿈꾸는 듯,
안으로 난 꽃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따라갈 수 없는 나는
두 손 깍지를 끼고
어머니 가슴 쾅쾅 내리찍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엄마까지 가면 어떡해!
어머니 그 소리 안 들리는지
더는 눈 마주치지 않고
힘없이 내 손 놓으셨다.
한 생애를 완성하고 가는
태산이 무너지는 소리
하늘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
안으로
안으로
솟구쳐 흐르며
안에서 겹이겹이 파도치는 소리.
어머니 그 소리 들리는지
애앵~ 애앵~ 애앵~
붉은 심장 펌프질하는 소리
「꽃자리 찾아드는 어머니」 전문
어머니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보아야 분명한 결과를 알 수 있다. 나는 어머니의 건강상태를 최상으로 제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유의지에 의해 드시고 싶은 걸 몰래 드셨다. 나는 정정한 어머니였기에 앞으로 최소 십 년은 더 짱짱하게 사실 것이라 믿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나를 자책하던 시간이 지나고 제정신이 들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먹고, 자고, 기도하고, 시를 쓰는 것이었다. 시를 쓰는 행위는 일종의 수행이기도 하고, 순례이기도 했다.
내가 알까마는 사람 혈관 길이는 지구 세 바퀴를 돈다고 한다
가족을 떠나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
내가 나를 영접했다
한여름 땡볕 사원에서 밥 대신 더위를 먹었다
다음날 몸이 한결 가벼웠다
한겨울 고산 설원에서 식사 대신 구토를 했다
다음날 정신이 한결 맑았다
사람이 없는 오래된 성당에서 기도했다
기도한 사람끼리 서로 죄를 사하였다
가벼운 몸과 마음은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 피를 빨고 엄마 품에서 엄마 젖을 빨다가 엄마의 영혼을 빨며 자란 나는 숨이 멎은 엄마에게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지친 엄마는 누운 몸 일으키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뒤통수가 먼저 깨닫고 나를 한 방 때렸다
오랜 시간 가족과 소식을 차단했다
환하게 웃던 봄꽃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슬픔에 업히어 그동안 봄을 실어나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즈음 그리움은 더 큰 그리움을 남겼다
「순례의 길」 전문
4.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양자역학은 미래의 오늘 날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주간 날씨는 예보할 수 있어도 내년의 오늘 날씨까지는 예보할 수 없다. 하고자 들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에 부는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계산해야 해서 너무 방대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동원해도 현재는 그 값을 계산하기 어렵다. 앞으로 나는 어떤 시를 쓸 것인지 막연하게 예측할 수는 있어도 나도 내가 쓴 다음 시집을 보려면 거기까지 가보아야 안다. 이것이 현재를 사는 매력이다. 미래라는 불확실한 시대를 위해 정진하게 하는 것, 희망과 소망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없다면 현재는 지극히 삭막한 삶이 될 것이다. 오늘,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며 십 년 후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 즐겁지 않은가?
나는 미시적 거시세계이다. 나는 지금 작은 방안에서 컴퓨터와 있다. 또한, 나는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쯤이면 독자들은 나의 詩世界를 간파했을 것이다. 내가 「아르볼 께 까미나」라는 것을.
끝으로 세계의 차세대 독자를 기다리며 나를 소개하고 마무리한다.
누군가가 보고 있어. 아니야, 아무도 보지 않아.
별이 빛나는 밤 구름의 동선을 그리며 정글 속을 걸어가는 나무
단어와 단어의 이랑을 걸으며 평생을 걸어도 정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무
스잔한 달빛과 대화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몸짓으로 정글에서 시를 쓰는 나무
하늘의 여백은 드높고 넓어서
지상의 거의 모든 것을 품고
새삼스러운 문장이 튀어나와도
생략,
생략,
누군가가 보고 있어. 아니야, 아무도 보지 않아.
「아르볼 께 까미나」 전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