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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48. [역경의 열매] 이용만 (1-15) 실탄 2발이 급소 피한 건 전우의 기도 덕분
전쟁으로 가족 잃고 홀로 남으로…17세 때 국군 자원입대 총상 입어, 5공 때 아픔 있었지만 은혜로웠던 삶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85년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하나님 은혜의 강물이 흘러 오늘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국전쟁 때 만 17세로 국군에 자원입대해 어깨와 척추에 총상을 입었다. 어깨의 총알은 빼냈지만 척추의 탄환은 그대로 남아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의료진들이 지금도 놀란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씩 한다. “당신은 럭키 가이군요.”
단 몇㎜만 총알이 빗나갔어도 신경을 건드려 하반신이 마비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위험 때문에 제거 수술을 하지 못한다. 왼쪽 어깨에 박힌 총탄도 심장과 한 뼘 거리였다. 군대 막사에서 동료가 노획한 소련제 권총을 잘못 겨눠 귓불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간 적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구나. 당시 나는 미군 2사단 38연대 록 레인저 중대에 배치된 국군 수색대였다. 미군과 인민군 사이에서 적정을 수색하고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했다.
매일 밤 막사에서 잠을 청할 때 옆자리 이언상 전우는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본인과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가 찬송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르면, 옆에서 나는 “며칠 후, 며칠 후 검정 콩알 먹고 죽으리”라고 놀렸다. 그땐 예수를 몰랐다. 나중에 알았다. 실탄 2발이 급소를 피한 건 매일 밤 간절히 두 손을 모은 전우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것이라고.
내 이름은 본래 이승만(李承萬)이다. 용만(龍萬)이가 아니다. 해방 전까진 모두 나를 승만이라 불렀다. 1933년 8월 29일 38선 이북이었던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엔 이름이 괜찮았는데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부터 괴로움이 시작됐다. 연일 “이승만 김구 타도!”가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김구 타도! 스탈린 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가 공식 구호였다.
부친은 생각이 깊으셨다. 하루는 나를 불러 “승만아, 아무래도 이름을 잠깐 동안이라도 바꾸는 게 좋겠다. 승용이로 할래, 용만이로 할래?” 항렬자가 ‘승’자여서 되찾을 이름과 헛갈리지 않게 ‘용만’을 선택했는데, 남한에 넘어와서도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영영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가족들을 잃었다.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이 방공호에서 폭사했다. 1950년 10월 우리 집을 불과 300m 앞에 두고 인민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아 남한으로 향했다.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와 국군에 입대했고 총상으로 명예제대한 후 내 힘으로 대학에 갔다.
1962년 관료 생활을 시작해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차관까지 역임했는데 1980년 5공화국 권력층의 친인척에게 찍혀 옷을 벗었다. 너무도 분했다. 경기도 의정부 암시장에서 소총을 구입해 복수한 뒤 세상을 뜨자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주님이 만류하셨다. 젊었을 때는 무서운 것 모르고 나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게 아니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오늘까지 이르렀다. 은혜의 첫 단추는 부지런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용만 (1) 실탄 2발이 급소 피한 건 전우의 기도 덕분
* [역경의 열매] 이용만 (3) 공비 수색 나선 아들 붙잡고 찰떡 먹이던 어머니는…
* [역경의 열매] 이용만 (4) 총 맞고 위기일발… 한·미 전우 도움으로 목숨 건져
* [역경의 열매] 이용만 (5) 명예 제대 후 대학 합격했으나 돈 없어 등록 못해
* [역경의 열매] 이용만 (6) 겨울에는 백열전구에 손 녹이며 책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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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33년 강원도 평강군 출생, 51년 육군하사 명예제대, 59년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62년 내각수반 기획통제관실 계획관, 71년 재무부 이재국장, 77년 재무부 재정차관보, 80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차관), 85년 신한은행장, 88년 외환은행장, 90년 은행감독원장, 91년 재무부 장관, 2009년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역경의 열매] 이용만 (3) 공비 수색 나선 아들 붙잡고 찰떡 먹이던 어머니는…
1950년 김화군 학도대 지원 ‘다녀오겠다'는 말이 마지막 인사… 17세에 고향 떠나 혈혈단신 월남
1951년 군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이용만 장로. 남한에 내려와 처음 찍은 사진이다.
“배고프지? 잠시 기다려라. 떡을 구워줄 테니 먹고 가려무나.”
어머니는 콩고물을 버무린 찰떡 3개를 구워주셨다. 나는 부엌에 서서 얼른 먹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한 뒤 집을 떠났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나는 지금도 길을 걷다가 콩고물 떡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1950년 10월이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강원도 김화군에선 인민군이 패퇴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밀고 올라왔다. 국군의 북진이 워낙 빨라서 김화군과 강원도 일대 산악지대엔 주력 부대를 따라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아군을 불시에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인민군 징집을 피한 나는 국군이 북진한 뒤 동네 치안을 위해 학생들로 구성된 학도대에 들어갔다. 학도대원 30여명과 함께 김화 북쪽 금성 방면으로 공비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깐 집에 들렀다. 곧 돌아오겠다고 인사하는데 어머니가 굳이 붙잡고 떡을 먹고 가라 하셨다. 3개의 떡은 어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음식이었다.
금성에서 김화로 돌아오니 마을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시내를 지날 때 ‘드르륵’하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했나 싶어서 “학도대, 학도대”라고 외쳤는데 총을 더 강하게 쏴댔다. 하루 사이 인민군이 다시 김화 시내를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보낸 척후병 2명은 즉시 체포돼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부모님이 계신 집을 300m 앞에 두고 눈물을 흩뿌리며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학도대를 이끈 사람은 소위 출신이었는데 미리 서울로 월남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솔로 인민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산길을 통해 서울로 향했다. 경기도 포천에 이르러 치안대에 무기를 반납하고 포천 일동중학교 건물에 있던 피란민수용소에 들어갔다. 내 나이 만 17세에 고향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한 것이다.
학도대원 대부분은 가족과 재회했다. 김화 사람들 다수는 인민군 패잔병이 시내를 점령하기 전에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승만(당시 내 이름)이만 남겨두고 우리만 떠날 수 없다”고 반대하셨다. 나를 기다리다 가족이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난 후 미군 폭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1896년생이니 만 54세였다. 훗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앞집 옹기장사 아주머니가 전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폭탄이 한 번 떨어진 곳은 재차 폭격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폭격으로 불탄 큰아버지댁에 철도 침목용 목재를 구해와 튼튼한 방공호를 지었다. 하지만 융단 폭격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폭격으로 방공호가 무너지며 참변을 당했다. 아버지는 마침 인민군 노력동원에 끌려가 목숨은 구했지만 폭격 직후 돌아와 방공호의 흙을 손수 파내 시신을 수습했다고 들었다. 이후 부친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옛날 우리 집엔 양이 많았다. 어머니는 보드라운 양털을 물레에 돌려 두둠한 양털 스웨터를 만들어 주셨다. 그 옷으로 포천중 피난민수용소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구까지 행군을 해내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버텼다. 1950년 12월 30일 밤 12시쯤 대구로 와서 만 17세 나이로 국군 신병 훈련소에 입대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4) 총 맞고 위기일발… 한·미 전우 도움으로 목숨 건져
美 2사단 배치돼 국군 부대서 활동… 춘천 가리산에서 인민군 공격 받아 김창조 소대장·미군 4명이 은인
1951년 5월 11일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나의 생명을 구해준 김창조 소대장(왼쪽 세 번째).
어디든 살길은 있었고 무엇이든 자기 하기 나름이었다. 1951년 1월 대구 육군훈련소를 그런 생각으로 이겨냈다. 기상나팔이 울리기 30분 전에 일어나 취사반에서 장작을 한 아름 옮겨준 뒤 누룽지를 얻어왔다. 안주머니를 비롯해 쑤셔 넣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누룽지로 꽉꽉 채웠다.
보충대 훈련은 늘 배고픔이 함께했다. 전방에서 보충병을 뽑으러 오면 먼저 가겠다고 손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총에 맞는 두려움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GMC 트럭이 도착해 “중학교 이상 재학했거나 졸업한 사람 손들어”라고 외쳤다. 얼른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즉석에서 100여명이 모여 3개 소대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중대장 소대장 선임하사가 배치됐다. 경북 상주를 거쳐 최전방인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했다. 미 2사단 38연대 록 레인저 수색중대에 배치돼 적을 유인하는 국군 부대에서 활동했다. 횡성으로 가는 트럭 안에서 전우들과 누룽지를 아낌없이 나눠 먹었다.
51년 5월 11일을 잊을 수 없다.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 때다.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데 인민군이 남긴 옷가지와 불붙은 담배꽁초가 보였다. 급하게 도망갔구나 생각할 무렵 산 위 쪽에서 기관총 공격이 시작됐다. 드르럭 드르럭 소리가 귓전을 진동하고 흙먼지가 일었다. 실탄 300발을 몸에 걸치고 있던 나는 총열이 과열돼 소총에서 연기가 날 때까지 사격하다가 총열을 식히느라 잠시 물러섰다. 그때 갑자기 왼쪽 어깨를 도끼 같은 것으로 내려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왼쪽으로 뒤틀려 몇 바퀴 구르다가 불타다 만 나무 등걸에 몸이 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래쪽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화강암 절벽 끝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뻔했다.
총에 맞았으니 바로 죽을 줄 알았다.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전우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서 피신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인민군 총알은 계속 내 옆으로 드르륵 먼지를 내며 땅을 때렸다. 그때 김창조 소대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어깨에 끼고 바위 뒤로 옮겼다. “임마, 남자가 총 한 발 맞고 뭘 그래. 나는 총알을 여덟 발이나 맞고도 살았어.”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엔 몰랐지만 척추에도 역시 총알을 맞았다. 정밀 수술이 불가능한 야전병원 환경 탓인지 이건 빼내지 못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다. 지금도 전신마비 우려 때문에 수술하지 못한다.
총에 맞았을 때 매일 밤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준 이언상 전우가 생각났다. 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달려온 김 소대장 역시 벌집이 되기 직전의 나를 구했다. 미군 4명은 가리산의 저 험한 계곡에서 들것으로 나를 후방까지 나르며 페니실린 주사를 놓고 물도 먹여 주었다. 이들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졌다.
김 소대장은 훗날 중령으로 전역한 뒤 주택은행에 다녔다. 내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있을 때 알게 돼 여러모로 도왔다. 위생병이 포함된 미군 4명은 끝까지 찾지 못했다. 재무부 장관 시절 미 8군 사령관을 통해 수소문했으나 이어진 중공군 기습 때 전사했을 것이란 답을 받았다. 나는 그들을 기억하며 2014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미 8군을 초청해 추수감사절 만찬을 함께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5) 명예 제대 후 대학 합격했으나 돈 없어 등록 못해
이용만 장로의 척추 좌측에 박힌 인민군 총알(점선 원내). 1951년 왼쪽 어깨 총상 당시엔 몰랐고 20년쯤 지나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 발견했다. 2014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이 명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51년 5월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나는 미군 수송기에 실려 부산 15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총상을 입은 왼쪽 어깨엔 깁스를 했다. 나중에 척추에도 인민군 총알이 박혀 있는 걸 발견했지만 이때는 몰랐다.
병원에는 쉴 새 없이 부상 장병이 몰려들었다. 깁스를 푼 직후 병원 마당에서 배구를 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지만 왼쪽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도 똑바로 서면 왼쪽 어깨가 더 낮다. ‘장애인이 됐구나’란 생각이 들어 낙담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재활 훈련을 했다.
사실 부상보다 앞으로 살 길이 더 막막했다. 부대가 내 집이었고 전우가 내 가족이었다. 51년 9월 명예 제대를 한 후에도 갈 곳이 없어 중대장의 허락을 받아 잠시 보급중대에서 군인들과 같이 군복무를 했다. 그러다 경기도 수원에서 우연히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나의 6촌 형님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북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하고 배움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혈혈단신으로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배워야 했다. 대전에서 만난 6촌 형님 이승선은 개성 송도고보 출신으로 당시 대전체신청 인사계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형님의 배려로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생활에 돌입했다.
영어는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수학은 입시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때마침 명예 제대한 상이군인에게는 학비를 면제해준다는 병무청 고시가 발표됐다. 북에서의 바람대로 이공계 진학을 위해 성균관대 화학과 시험을 보았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대학 등록을 위해 당시 부산에 있던 성대 대학본부로 향했다. 일반석 차표를 살 형편이 못돼 대전발 부산행 야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고향 친구 김해영을 만나 동대신동 성균관대에 가자고 했다. 친구와 함께 대학본부에 합격증을 내니 등록을 위해선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저는 돈이 없어요”라며 병무청 고시를 언급하자 “무료는 아니다. 50% 감면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극심한 재정난에 명예 제대 군인을 위한 학비 지원 제도가 부실하게 운영됐던 것이다. 50%는커녕 10%의 등록금도 낼 돈이 없던 나는 낙담했다. 마침 그날이 합격자 등록 마감 전날이라 대학본부 밖에는 돈을 싸들고 와서 미등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밤늦게 대전으로 올라오는 화물차에 가마니를 깔고 누웠다. 얼마나 서럽던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래도 배움의 꿈을 놓지 않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난 다음 6촌 형님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1년여간 홀로 대전에서 자취를 하다 다시 한 번 형님 댁에 신세를 졌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체신청 관사에 입주한 형님네 앞마당 연탄창고를 방으로 꾸며 기거했다. 우체국에 다니며 100% 야간 학과만 있던 한국대학(현 서경대학)에 합격했다. 역시 학비가 없어 등록은 않고 1년 가까이 청강만 했다. 이후 성균관대 법과대학을 1년 다녔고 다시 시험을 봐서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55학번으로 편입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6) 겨울에는 백열전구에 손 녹이며 책 읽어
고려대 들어가서도 일하면서 공부, 국제우체국 번역 일 돕다가 행운…美 우표 수집상과 거래 큰 돈 벌어
1957년 고려대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이용만 장로(왼쪽).
고려대에 들어간 후에도 일하며 공부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기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해야 했다. 똑같이 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부지런함을 물려받았다.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됐지만 항상 아버지의 바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보여준 교육열을 떠올리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대학에 가자고 결심했다. 추운 겨울 연탄창고를 개조한 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백열전구로 몸을 덥히며 책을 봤다.
중앙우체국에서 국제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한 번역 업무를 했다. 국제우체국은 주야 교대로 일을 해야 했는데 가족이 없는 나는 국제우체국 숙직실을 집으로 삼아 남의 숙직을 도맡아 했다. 다른 직원들은 숙직을 하지 않아 좋았고 나는 낮에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성채를 구축해 나갔다.
국제우체국에서 번역 일을 돕다가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우체국에는 미국의 우표 수집가들이 펜팔 상대를 찾기 위해 보낸 편지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표는 국제통화처럼 투자 대상으로 여겨졌다. 전쟁을 치른 한국의 희귀 우표를 구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우표수집가들이 눈과 귀가 쏠려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번역 업무를 맡다가 미국 우표 수집가들의 편지를 이것저것 읽어보게 됐다. 편지마다 간절하게 한국 우표 수집을 위해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들이 편지를 보내 놓고 답장이 없으니 얼마나 맘을 태울까.” 가족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임자 없는 편지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 영어로 답변을 보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편지를 보낸 곳 중에 미국 뉴욕의 전문 우표 수집상 ‘파툴라 앤 라자(Fatoullah and Lazar)’가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취미로 펜팔을 하자는 게 아니고 한국 우표를 지속적으로 보내주길 원했다. 그저 펜팔 상대나 되어 볼까 하는 맘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돈벌이 수단이 됐다.
고려대 2학년 때부터 우표 거래를 시작했다. 수집상은 발행이 제한된 기념 소형 시트를 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10센트를 달라고 하자 1달러를 보내줬다. 10배였다. 학교와 중앙우체국에 사서함을 만들어 놓고 시내의 우표상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구하는 것을 말해두면 사람들이 경쟁하듯 나에게 우표를 보내줬다. 가격을 정확하게 지불했고 약속 날짜도 정확하게 지켰다. 그리고 이걸 다시 미국 우표 수집상에게 수출했다. 성실함 근면함 치밀함으로 승부했다. 기념세트 1장 가격이 당시 돈으로 40원이었는데 1달러(당시 500원) 정도를 받고 보냈다. 상당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표를 취미로 수집할 때 나는 사업으로 나선 셈이다. 나는 지금도 한국 제일의 우표 수출업자였다고 자부한다. 이 우표 거래로 대학 등록금을 해결했고 서울에 집을 마련했으며 한때는 뉴욕 수집상의 재정 보증으로 미국 유학까지 꿈꿨다. 우표 수출은 내가 공직에 들어가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게 됐을 때 접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미국 유학 꿈 역시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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