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할 성격과 실패할 성격 - 유방과 항우
남회근 선생
인류 역사에서 성공한 인물과 실패한 인물의 성격을 연구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대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성격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즉시 거두고 남의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유방은 이런 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우(項羽)는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절대로 바꾸지 않았으며, 남의 의견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항우의 결정을 보도록 합시다. 항우가 함양(咸陽)까지 쳐들어갔을 때, -초한춘추(楚漢春秋)의 기록에서는 채생(蔡生)이고, 한서(漢書)의 기록에서는 한생(韓)生―이 그에게 “관중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막힌 험한 지형이며 땅 또한 비옥하니, 이 지방을 수도로 정하면 패자(覇者)가 될 수 있습니다.”(關中險阻, 山河四塞, 地肥饒, 可都以覇)라고 하면서 함양에 수도를 정하면 천하를 크게 평정할 수 있다고 권했습니다.
항우가 수도를 정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가 한 말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명언이기도 하지요. “부귀하게 되었을 때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같으니 누가 알아주겠는가?”(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 誰知之者). 이 말을 보더라도 항우와 유방의 도량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우의 포부는 부귀하게 된 후 고향에 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풍을 보여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멋진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누구에게 자랑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항우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일이 유방에게 일어났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천하를 평정한 후, 유방은 수도를 낙양에 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나라 사람인 누경(婁敬)이 찾아와서, 수도를 낙양에 정하는 것은 주나라와 견주려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유방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누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으로서 덕망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수도를 정하고 왕 노릇 하기가 쉽지만 덕망이 없는 사람은 공격받기가 쉽습니다. 주나라는 후직(后稷) 때부터 합(郃)에 봉해져서 문왕․무왕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동안 10여 세대의 공덕이 쌓여서 여기에 수도를 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게다가 전쟁 후의 폐해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만신창이니,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나라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수도를 관중에다 정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당연히 일리가 있는 말로서 장량(張良)도 동의하였기 때문에, 유방은 즉시 자신의 의견을 거두고 누경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5백 근의 황금과 벼슬자리를 주면서 유(劉)씨 성까지 하사하였습니다.
출처 : 남회근 선생 논어강의에서
■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 BC247 ~ BC195)
항우(項羽)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 출신이었으며, 유방(劉邦)은 미천한 농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6년 연합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후 항우는 서초의 패왕임을 선포하고 유방(劉邦)을 비롯한 장군들을 각지에 분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항우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항우가 북상한 사이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진의 옛 땅으로 들어가 항우와 대적하였다. 결국 항우는 기원전 202년 자살로 최후를 마쳤으며, 유방이 제위에 올라 장안(長安)에 수도를 세우고 한 왕조를 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항우본기>와 <고조본기>에서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항우와 유방의 일생을 대비시키고 있다. 항우는 유방보다 24살이나 어린 나이였고, 초나라의 명문귀족 출신으로 진시황의 명장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침략해 왔을 때, 초의 총사령관으로 초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맞서다가 패배한 항연의 손자이다. 키는 8척(당시 한척이 24cm이므로 192cm 정도)이 넘고 힘이 세서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다.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항우는 ‘저 놈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 고 했고, 유방은 ‘야아! 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했다는 것이다. 항우의 직선적이고 격렬한 성격을, 유방의 노련하고 유연한 성격에 대비하여 절묘하게 보여준다.
유방(劉邦)은 중국 한(漢)나라의 제1대 황제 (재위 BC 202∼BC 195)로서 자는 계(季)이고 묘호(廟號)는 고조(高祖)이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 기원전 202년 한(漢)나라의 유방이 재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대혼란을 맞이했다. 유방(劉邦)은 왕위에 오른 지 12년 후인 기원전 195년 유방은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