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블야100명산 79번째로 찾은 광덕산!
오늘은 봄기운을 찾아 블랙야크 100명산 어게인 38번째로 찾았다.
산행코스 : 광덕사 주차장~부용묘~장군바위~광덕산~광덕사주차장
소요시간 : 약 3시간 20분
산행거리 : 7.16km
태화산 광덕사!
태화산은 마곡사가 있는 산이다.
광덕사는 마곡사의 말사이기 때문에
광덕산 광덕사로 하지 않고 태화산 광덕사라 한듯 하다.
일주문 좌측에 있는 광덕사의 연혁과
경내안내도를 보고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약 15분만에 만난
운초 김부용의 묘!
2년전에는 팔각정을 통해 광덕산 정상에서 장군바위를 경유하여
이곳으로 하산하였지만,
오늘은 반대로 걸어보기로 하였다.
걷다 나서 보니 초보자에게는 오히려 이 코스가 나은듯 하다.
조선 후기 여류시인이자 기녀였던 운초 김부용[金芙蓉]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린 김부용!!
김운초(金雲楚)[1820~1869]의 호는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이며,
황해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서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한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게 된 김부용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부용은 12세에 기적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한시(漢詩) 350여 수를 남겼다.
22세 때에 김부용은 평양 감사와 호조 판서를 지낸 김이양(金履陽)[1761~1852]의
부실로 들어갔으며 죽어서는 김이양의 묘 옆에 묻혔다.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 등이 있다.
이제부터 약간의 오르막이 형성이 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광덕쉼터가 있는 주차장이다.
따라서 광덕사 일주문 아래의 쉼터 주차장에 주차 후
산행을 해도 무리하지 않고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어느덧 지맥을 따라 올라오다 보니 이제 능선길이 나타난다.
이곳까지는 약 42분(1.7km)소요되었다.
같이 간 후배가 힘들어 한다.
코로나19때문에 모든 행사가 취소되어
방안에서 먹고 마시고 지냈던게 탓인듯 하다.
조금전의 쉼터에서 이 계단만 오르면 된다.
광덕산 까지는 그냥 능선길을 한적하게 즐기며 걸을 수 있다.
1시간 28분(3.1km)만에 도착한 장군바위!
이곳은 광덕사에서 바로 올라올수도 있는 곳이다.
장군바위에 대한 전설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아래 전설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 허약한 젊은이가 깊은 산속을 헤매이다
허기와 갈증으로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느 곳에서인지 물소리가 들려와 소리나는 곳을
향해 가보았더니 큰 바위밑에 물이 뚝뚝 떨어져 신기하게 여겨
손으로 물을 받아 먹었더니
그 물을 먹고 얼마되지 않아 몸이 마치 장군처럼
우람하게 변하였다" 하여
장군바위라 칭하였다고 한다^^
2시간(4.3km) 만에 도착한 광덕산!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송악면과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에 걸쳐 있는
광덕산은 깨끗하고 맑은 계곡과 부드럽고 유연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으며
차령산맥이 만들어 낸 명산으로 해발 699m로
전국에 잘 알려진 300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넉넉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 하였으며
또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산에는 광덕사, 잣나무 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의 볼거리가 많다.
광덕사에는 고려사경(보물 390)·광덕사 대웅전(충남문화재자료 246)·
광덕사 삼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20)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이밖에도 호도나무 전래비와 조선시대 기생이자 시인인 김부용의 묘가 있다.
광덕산의 등산코스는 송악면 강당골에서 시작하는 코스와
광덕사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코스가 있는데,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산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으며, 산악자전거를 탈 수 있는 코스도 있어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주요 코스이기도 하다.
산이 그리 높지않고 험하지 않아 가족단위, 연인, 친구끼리의
등산로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또한, 광덕산은 물이 맑고 울창한 숲과 노목들이 둘러싸여 있어
많은 산행객들이 찾아와서 심산유곡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차령산맥의 크고작은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겹겹이 펼쳐지고 발 아래로 광덕사가,
서북쪽으로는 송악저수지가 아스라이 보인다.
전에는 이곳 광덕산 정상 주변에 라면도 파는 매점이 있었는데
사라졌다.
주엄주엄 들은 이야기로는 음식물 쓰레기를 몰래 투기하여
파리떼가 들끓어 민원이 제기되어 중지시켰다고 한다.
바위킹출장뷔페 사장의 명산 인증!!
명산100어게인 38번째 인증..
이제 광덕사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초기의 하산길은 좀 험하다.
광덕산 등산로에는 유난히 돌이 많은데
돌의 각이 많아 걷기에는 조금 불편하다.
2시간 45분(5.8km)만에 도착한 팔각정 쉼터.
이곳 쉼터는 광덕사에서 올라올때는 정말 요긴한 쉼터이다.
산악인 선서
- 노산 이은상-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맞는 말이다. 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팔각정 쉼터에서 광덕사까지의 568개의 계단!
역시나 올라올때보다는 내려가는 길이 더욱 편하다.
계단을 내려오다 만난 딱따구리!
초소 6~7m의 속도로 날며 1초에 10~20번정도 나무를 쫀다고 한다.
나무에 망치질을 하는 횟수는 하루에
1만 2,000회라고 한다.
광덕사 보호수인 느티나무!
약 53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고 있으며
높이 22m, 나무둘레 5.5m로 광덕사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느티나무로 본줄기 모양이 기이하여
보호수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광덕사!!
652년(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金銀字)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恩重經)》 각 2부 등을
승려 진산(珍山)에게 주어 새 도량(道場)을 연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곳에 거동하였을 때 한계희(韓繼禧)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써 내렸는데, 위전(位田)를 바치고
각종 요역(徭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28방(房)에 부속암자가 약 89개, 9개의금당(金堂),
80칸의 만장각(萬藏閣), 3층으로 된 천불전(千佛殿)은
불교도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번창하여,
경기 ·충청 일대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는 대찰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려,
가까스로 대웅전 ·천불전만 중건되어 큰 절의 명맥만을 유지하였고,
1981년 대웅전 ·천불전 등을 신 ·증축하였다.
광덕사 고려사경(高麗寫經)인 보물 제390호 《금은자 법화경》(6책)과,
천불전의 대형 후불탱화 3점, 《금자사적기(金字事蹟記)》
《세조어첩(世祖御帖)》 등 문화재가 있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안명로(安命老)가 쓴 이 《사적기》는,
이 절의 개창을 신라 흥덕왕 7년(832)으로 적고 있는데,
자장을 흥덕왕 때 사람으로 착각한 듯하다.
또 《태종실록》(28권)에 따르면, 1414년(태종 14) 가을에 왕명으로
《대반야경(大般若經)》(전부)을 일본의 승려 규도(奎籌)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제252호인 석사자는
광덕사 대웅전(大雄殿:충남문화재자료 246)을
올라가는 계단 입구 양측에 세워져 있는 2기의 사자상으로 앉아 있는 형태이다.
얼굴이 거의 하늘을 보는 수평으로 되어 있으며 사람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입은 약간 벌렸으며 이빨이 조각되어 있으나 도식적인 표현으로 사실감이 없다.
사자의 머리털도 도식화되어 운문(雲紋)처럼 표현되었고 몸통부분은
조각이 생략되어 있다. 앞다리는 직립하였고 꼬리는 짧게 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뒷발은 돌을 새김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받침돌과 사자의 뒷다리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돌 밑 부분에서
조금 올라온 부분에 사자의 뒷다리를 표현하였지만 현재는 돌의 풍화가
심하여 사자의 모습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다.
높이는 각각 85cm이다.
도굴꾼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불법 반출된 것을 다시 회수하였다고 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광덕사 3층 석탑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3층석탑은 총 높이 약 260㎝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기단부는 상·하 2층이며, 3층의 탑신과
옥개석[지붕처럼 덮는 돌]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으로 된 기단 가운데 하층 기단 면석에는 안상(眼象)이 둘러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돌 위에 올려놓는 납작한 돌]은 약간 경사진 모습이다.
상층 기단은 1매석으로 만들었는데 탱주(撐柱)와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대 갑석(上臺甲石)의 한쪽 귀퉁이가 결실되었다.
탑신부는 3층의 균형을 이룬 형식으로 옥개나 옥신은 1매석으로 결합하거나
혹은 별도로 만들었다. 옥개석에는 층급 받침이 있으며
처마의 반전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 모양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급한 경사를 주었으며, 네 귀퉁이는 위로 치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머리 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 놓은 그릇 모양]이 남아 있는데
그 위의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
석사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되자
새롭게 조형물을 설치한 듯 하다.
천연기념물 제398호인 광덕사 호도나무
호도나무는 대략 20m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이 호도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2m이며, 지상 60㎝의 높이에서 두 개 줄기로 갈라져
가슴높이의 둘레가 각각 2.62m, 2.50m이며,
호도나무 3m 앞에는 이 나무의 전설과 관련된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도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나무가 그 때 심은 것인지의 정확한 근거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마을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도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도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 호도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도 클린산행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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