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樂遊原(등낙유원).....李商隱(이상은, 晩唐)
向晩意不適(향만의불적)●●●●● 저녁 무렵 마음이 유쾌하지 않아
驅車登古原(구거등고원)○○○●◎ 수레�k 몰아 古原에 올랐다.
夕陽無限好(석양무한호)●○○●● 夕陽이 한없이 좋은데
只是近黃昏(지시근황혼)●●●○◎ 다만 黃昏이 가까워졌구나.
<語釋>
향만 |
向晩 |
向xiàng 晩wǎn |
●● |
1)저녁 무렵 2)저녁 때 |
의불적 |
意不適 |
意yì 不bù 適shì |
●●● |
1)마음이 불쾌하다. 2)마음이 편치 않다. |
고원 |
古原 |
古gǔ 原yuán |
●○ |
옛 언덕. <낙유원>을 가르킴. |
지시 |
只是 |
只zhǐ,zhī 是shì |
●● |
1)다만, 단지. 오직. 오로지 |
<樂遊原낙유원>
長安의 남쪽에 있는 언덕으로 장안에서 제일 높은 곳. 사방의 조망이 넓고 시원하여 매년 3월 삼진날, 3월 初九日이면 장안의 士女들이 이곳에 올라와 놀았다 함.
<李商隱이상은의 登樂遊原등낙유원>
등낙유원
시는 이상은이 낙유원에 올라 석양이 지는 것을 보고 감상한 바를 적은 시로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특히 끝 두 구는
驚句경구로, 含意함의가 넓기로 유명하다. 단순히 저물어가는 석양의 광경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자신이 늙어지고
신세가 나빠진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晩唐만당이 쇠미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으니, 이처럼 言外에
담긴 詩意시의가 무궁해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한문 교재>
<李商隱에 대하여>
이상은의 생애와 시의 배경.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인 이상은李商隱(813~858)은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던 천재시인이었다. 약관에 그는 당시 유력한
정파인 영호令狐씨 문파의 영수였던 영호초令狐楚에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막부의 巡官순관에 발탁되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젊은
나이에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상은은 돌연 영호초와는 정적관계에 있었던 왕무원王茂元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당시
치열하게 당쟁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일어난 이 돌발적인 사건에 대해 영호초 일파는 이상은의 행위를 배은망덕으로 규정하여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후의
정세는 이상은의 예측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왕무원의 정치적 지위는 얼마 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상은이 30대에 들어서면서
영호초의 아들인 영호도令狐綯가 권력을 장악하고 장기집권의 가도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상은은 채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보지도 못하고 몰락하게 되었다. 장안을 떠난 그는 이전에 친분이 있었던 지방의 고위관리나 유지들을 찾아가 막료 생활을
하면서 각지를 떠돌게 되었다. 이상은은 실의에 찬 유랑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며 끝내 의욕과 희망을 찾지 못하고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의 불행한 일생은 정치적 입신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었던 야망에 가득찬 한 유능한 젊은이가 당시
정계에서 겪었던 좌절과 허탈감등을 잘 보여 준다. 그의 시에는 파란만장한 짧은 생애 동안 혹은 불운에 의해 혹은 스스로 자초하여
직면하게 되었던 갖가지 사건들과 그로부터 비롯한 감회가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은의 시의 내용과 특성
이상은의
시는 그의 내면세계를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특색있고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게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이른바 무제시無題詩, 자기의 감회를 특정한 사물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영물시詠物詩, 자기의 생각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서술을 통해 표현한 詠史詩영사시이다.
그의
시에는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애정,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과 포부에 대한 미련, 화려한 지난 날에
대한 회상과 희한 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일견 주제가 명료하지 않다. 이렇게 모호할 정도로 복합적이고 복밥한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 효과적이고 절묘한 표현방법과 기교가 그의 시에는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상의 시의 개성적 면모
이상은의 시는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복잡 난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미 자체가
모호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러한 난해성과 모호성 그 자체가 이상은 시의 특색이며 독특한 개성과 심미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의 시의 난해성과 모호성은 고의적으로 조성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시의 특색을 보다 구체적으로 항목화시켜 본다면
우선 상징과 은유의 구사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이다. 이상은의 시는 상징과 은유를 일 대 일로 대응시키거나 상투적으로 구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등장하는 상징과 은유가 신선함과 예리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는
전고 운용 방식이 능숙하고 치밀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은 전고를 단순한 의미 전달의 차원에서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가해지고 독특하게 해석되도록 배치하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식을 쓰고 있다. 또 글자
하나하나가 정련되고 압축되어 있으며 시상이 화려하고 진하며 압도적인 것도 특징적이다. 그의 시는 이 때문에 화려하고 감상적이면서
의외로 장중하고 유창하며 기세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은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
이상과
같은 특색은 칠언율시에서 가장 잘 발휘되고 있다. 칠언율시는 그 구성의 어려움 때문에 두보와 같은 탁월한 대시인이나 거칠고
장엄함을 집중적으로 추구했던 韓愈한유 등을 제외하면 성공적인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상은은 두보 이래 칠언시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두보를 넘어섰던 시인으로서 , 두보에 의해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당시의
大尾대미를 장식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더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응축되고 정련된 시의 형태를 이루어내는 등 여러 면에서
두보와 비견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두보의 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보가 중국의 고전시를
집대성했다면 이상은은 고전시가 이룰 수 있는 한 궁극적인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재 中國文學史에서)
이상은의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太和 3)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765~837)에게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768~824)·유종원(柳宗元: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騈儷文)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 온정균(溫庭筠:812경~780경)·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영호초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문학이 꽃을 피우고 관리로서 출발하게된 반면 그의 생애에 걸친 불운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무렵 당의 조정은 2개의 당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牛)·이(李)의 당쟁'으로,
귀족출신자로 이루어진 이덕유(李德裕) 일파와 진사출신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일파의 파벌투쟁이었다. 영호는
우승유파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급관료를 지향하는 한 그 당쟁에 개입되었으며, 이상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상은이
진사과에 합격한 것은 837년(開成 2)으로 26세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러 수도를 왕래했으나 번번히
낙제했는데,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綯)의 도움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 고개(高鍇)의 수하직에 간신히 합격했다. 그러나 곧 그의
은인인 영호초가 죽었다. 이듬해 그는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왕무원(王茂元)의 수하로 들어갔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꼈던
왕무원은 그를 막하로 불러들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윽고 왕무원의 추천으로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이 되었으며, 나아가
홍농위(弘農尉)에 올랐다. 그러나 왕무원이 이덕유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상은은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신당서 新唐書〉에는 "유·이의 당인은 이상은을 비웃고 비난했으며, 궤변이 많고 경박하며 도덕관이 결여된 자로서 두
파로부터 배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번째 비호자가 된 왕무원도 843년(會昌 3)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후 이상은은 더
곤궁해지고, 우·이 두 당 사이를 오갔다. 이덕유파의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다가 곧 좌천되어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도에게 애원하여 은혜를 잊은 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직책을 맡았다. 858년(大中
12)에 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저의 분석>
위의 시는 제1구(起句)의 제 2자가 측성이므로 측기식인 5언 절구이다.
압운은 <상평十三…元> 韻이다.
평측분석에 있어서는 측기식이므로 제 2자가 측성(●)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위 5언 절구의 기본 평측격식은
제1구<起句 : a식> ●●○○● 측측평평측
제2구<承句 : B식> ○○●●◎ 평평측측평
제3구<轉句 : b식> ○○○●● 평평평측측
제4구<結句 : A식> ●●●○◎ 측측측평평.................
을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위 시의
1) 제1구(起句)에서
- 절주점인 제4자<不>자가 입성인 측성으로 작시가 되었다.
5언근체시의
각 구의 제2자, 4자는 절주점으로서 5언절구의 기본 평측격식(24부동)의 평측보를 벗어나서는 아니되는데, 기본 평측격식원칙을
벗어나 측성으로 작시하였으므로, 즉 제2자가 측성이면 제4자는 평성이어야 한다는 24부동의 원칙을 어겼으므로 拗體요체로 볼
수밖에 없다.
- 제3자는 기본 평측격식이 평성(○)이지만, 평측제원칙의 하나인 <1, 3不論>을 적용하여 측성(의意)으로 바꾸었으므로 하자는 아니다.
2)따라서 <제1구 제3자>, <제2구 제3자>, <제3구 제1자> 모두 평측 제원칙인 <1,3자 불론>에 의거 평측이 바뀌었으므로 拗(잘못된 평측보)는 아니다.
3) 李商隱은 만당의 대시인이다. 두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의 한 사람이므로 근체시의 대가로서 평측의 문제를 대두시킬 시인은 더욱 아니다. 허나 제1구의 제4자가 요拗인다른 것은 필시 다른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013.12.12 孤松 筆>